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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3장, 조문객 없는 장례식

LNCK 2022. 11. 10. 20:58

◈나3장, 조문객 없는 장례식 2012.02.19.출처, 정리

 

3: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19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서론

 

사람이 일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의 장례식을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 기르는 일에 수고하고 덕을 세우며 산 사람들은

장례식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습니다.

상주도 여러 명이고 조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생을 사람과 교제하는 것도 싫어하고 자녀도 낳지 않으며

외롭게 산 사람들의 장례식에 가보면 상주도 없고

조문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또 일생에 악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산 사람은

장례식에 위문을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죽었다고 손뼉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3장은 앗수르 왕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의 장례식에서 부르는 장송곡입니다.

일반적으로 장송곡은 고인의 덕을 치하하고 죽음을 슬퍼하며

유가족을 위로하는 노래입니다. (나훔은 시어체입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멸망을 노래하는 장송곡은 일반적인 장송곡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 앗수르 장송곡의 세 가지 특징

 

▲첫째, 니느웨의 장례식에는 조문객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장례식에 와서 울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3:7

 

슬픔이 너무 커서 사람들이 와서 위로해도 위로받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마 2:18).

 

너무 슬퍼서 위로하러 와도 위로를 거절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의 경우는 위로할 자, 애곡할 자를 아무리 찾아봐도

올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주도 없고 조문하는 사람도 없는 황무한 장례식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앗수르 왕과 니느웨의 멸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박수치며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나 3:19).

 

앗수르의 악행에 늘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들이 앗수르가 멸망하니까

기뻐하고 손뼉을 친다는 것입니다.

 

잘 죽었다며 자기가 행한 대로 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잠 11:10).

 

▲셋째, 하나님께서도 앗수르의 죽음을 위로하지 않으시고 조롱하십니다.

이것을 거룩한 야유(Holy sarcasm)라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 2:4).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잠 1:26).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3:34).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조롱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하늘에서 비웃으십니다.

 

 

◑나훔 2장 후반부터 3장까지 일곱 가지 조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멸망을 철저하게 조롱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나훔 2장 후반에 나오는 사자 조롱입니다.

니느웨 군사들은 사자 같고 니느웨는 사자의 굴과 같아서 먹을 것이 가득하더니

이제 그 사자들은 모두 칼에 죽었고

사자의 굴에는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자들과 사자의 굴에 있던 먹이는 모두 어디 갔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2:11~13

 

둘째, 3장 1~3절에 나오는 잔인성의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지나치게 잔인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바벨론에게

니느웨가 그 잔인함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3장 4~7절에 나오는 기생에 비유한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기생처럼 열국을 미혹하더니 이제는 능욕 거리가 되었고

구경 거리가 되었다고 조롱합니다.

 

넷째, 3장 8~11절에 나오는 노아몬에 빗댄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애굽의 수도인 노아몬(테베)을 멸망시키더니

이제는 너희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3장 12~14절 ‘쓸모 없는 방비’에 대한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바벨론을 향해 온갖 방비를 다 하더니

그 방비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성을 세웠지만 그 산성이 무너지는 것이

잘 익어 떨어지는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떨어지고

힘을 자랑하던 장정들은 연약한 여인처럼 된 것입니다.

 

여섯째, 3장 15~17절에 나오는 메뚜기 조롱입니다.

니느웨에 장군들이 많다고 자랑하더니

모두 메뚜기 같이 날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나훔 3장 18절~19절에 나오는 장례식 조롱입니다.

너희 목자들이 잠들었는 줄 알았더니.. 죽었고

귀족들이 누워서 쉬고 있는 줄 알았더니..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손뼉 치고 기뻐하는 이상한 장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조롱’입니다. Holy sarcasm

 

 

◑3. 조문객이 없는 네 가지 이유

 

앗수르 왕과 니느웨가 멸망해도 왜 조문객이 없고

사람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의 조롱을 받습니까?

앗수르 왕과 니느웨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앗수르 왕과 니느웨는 네 가지 죄가 있었습니다.

 

▲첫째, 앗수르는 극도로 이기적인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였습니다.

 

피정복 국가의 문화, 행복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배려가 없습니다.

일단 나라를 정복하면 그 백성을 다 죽이고 일부는 살려줘서 *‘파견자’ 2:13

온 세계에 앗수르가 자기 나라 백성을 다 죽였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습니다.

 

피정복 국가에도 인권이 있으니 선처를 호소하면

그 눈을 뽑아버리고 머리를 잘라 버렸습니다.

 

앗수르 왕 이외에 권리를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기적인 나라나 사람이 멸망하면.. 아무도 그 죽음을 조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덕을 끼치지 않고

아무에게도 선을 베풀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도 위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기심은 결국 고독을 초래하고 고독은 멸망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이 행복하고 위로받는 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자타에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기적인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앗수르는 극도로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 3:1).

 

궤휼은 거짓말을 뜻합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속임수를 쓰고 폭력을 행하여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과 군대장관 랍사게는 열왕기하 18, 19장에서

히스기야 왕을 공격할 때도 백성을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항복하기만 하면 곡식과 포도주가 있고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으로

옮겨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곡식과 포도주가 없습니까?

앗수르 군대가 포위하고 괴롭히니까 못 먹는 것이지

없어서 못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 산헤립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대변을 먹으려 하며

너희 소변을 마시려 하느냐?”며

항복하면 좋은 땅으로 옮겨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만약 이때 예루살렘 백성이 이 말에 속아서 항복했다면

앗수르 왕은 줄을 세워 칼로 목을 쳤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처럼 거짓말을 잘하는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앗수르 왕이 죽고 귀족이 죽었는데도

사람들이 손뼉 치고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나 3:19).

 

악행이라는 말은 잔인함을 뜻합니다.

앗수르 왕은 어쩌다 한번 잔인한 것이 아니고 항상 잔인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잔인한 사람은 죽어도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 12:10).

 

악인들은 잔인하여 육축의 생명도 멸시하고 사람의 생명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죽어도 조문객이 없습니다.

 

오늘날 짐승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고속도로에 갔다 버립니다.

또 동물들을 학대하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면서 즐기는 잔인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잔인한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셋째, 앗수르는 교만한 나라였습니다.

인간을 향해 교만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교만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5절에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왕하 18:35).

 

하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왕하 19:28).

 

교만한 마음으로 손을 들어 하나님을 치는 자, 입을 열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갈고리’입니다.

 

갈고리로 코를 꿰어 아프다고 소리 지르니까

재갈을 먹여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그렇게 자기 나라에 끌려가서

자기 아들들에게 죽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앗수르는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넷째, 앗수르는 음행과 마술을 가지고 열국을 미혹하는 나라였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주위에 위치한

매우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앗수르는 미의 여신 비너스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니느웨 성에는 법이 있었는데 모든 앗수르의 여인들은 비너스 신전에서

평생 한 번 이상 모르는 낯선 남자와 음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여인들은 모르는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악령의 힘을 빌리는 마술이나 마법을 이용하고 갖가지 몸에 향수를 뿌렸습니다.

 

그렇게 길거리를 다니면서 남자들을 유혹해 비너스 신전에서 음행한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렇게 영적으로 악령을 숭배하고

육신적으로는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앗수르가 열국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미혹하는 수단이었습니다.

 

 

◑4. 하나님이 위로하지 않는 사람들

 

이기심, 잔인함, 거짓말, 교만, 음행, 미혹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특징짓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이런 나라가 멸망하니까 손뼉을 치며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문하지 않고 손뼉 치는 것은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조롱하시고 위로하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중대한 일입니다.

 

우리가 망하거나 죽어도 조문객이 없다면 비참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앗수르의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훔이 예언하던 시대나 요나가 예언하던 시대나 앗수르의 죄는 동일합니다.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요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나훔 시대에는 앗수르 백성을 심판하시고 위로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요나 시대에는 회개하고 믿으라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왕과 모든 백성이 다 금식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고

 

나훔 시대에는 앗수르 사람들이 회개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이것이 성경의 대명제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다섯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죽어도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주1)

 

 

결론

 

제가 한 가지 예언하겠습니다. 이 예언은 100%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데 장례식에

많은 조문객이 올 수 있는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장례식에 많이 안 올 것 같으면

지금부터라도 사람들을 돌보며, 기도해주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장례식에 많이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온 국민이 다 와도 하나님께서 조문하지 않으시면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위로하십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116:15

 

요나서와 나훔서의 차이는 하나님의 축복(weal)을 받느냐 *요나서

아니면 하나님의 재앙(woe)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나훔서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위로받는 여러분이 되시고

우리 가족들 가운데에서도 재앙을 당하는 가족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생각해 볼 내용

 

▲1. 우상숭배와 마술의 대가는 수치입니다.

 

4절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즉, 니느웨가 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음행과 마술이었는데, 이는 앞에서 ‘벨리알’아리고 말할 것처럼 *1:11 ‘사악한’

이방신과 우상숭배, 거기에서 나오는 마술적 힘으로

여러 족속들을 (니느웨 자기와 함께) 미혹하여 패망시킨데 있습니다.

 

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4절에서는 매춘부의 모습에 빗대어 앗수르의 멸망이 불가피했던 사실을 언급했고,

이제는 그에 상응하는 수치를 언급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시므로 *2:13

그들이 자행했던 더럽고 추한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응분의 결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우리 말에도 ‘치부가 드러나다’는 말이 있는데,

본문 5절에 ‘앗수르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중에 한 가지가 ‘치부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 죄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롬6:23

그렇지만 그 중에 치부가 드러나는 사람이 있고, - 본문의 앗수르죠.

하나님이 그 치부를 가려주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 시32편입니다.

 

시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평소에 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수시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서

치부가 드러나는 자가 아니라,

허물과 죄가 가려지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0년 전에 나라에서는 중대 사건이 터져서 누가 위기에 몰리면

또 다른 중대 사건이 터져서, 국민들의 시선이 돌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후진국에 가면, 필요한 시기에

일부러 중대 사건을 조작해서 터트려 국민들의 시건이 분산되기를 원했고,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무슨 일만 있으면

‘연예인 마약 사건, 연예인 분륜 사건’ 등을 터트려, 중요 현안을 덮곤 했죠.

 

그것은 인간적인 수단이고, 온전한 대처법이 되지 못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대처법은, 당사자가 철저히 회개하는 길이고,

주변인들이나, 교인들이 주님 앞에 겸비하며 회개하는 길입니다.

 

특별히 성직자들은 ‘대신 회개하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의가 없어서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의만을 바라봅니다.

 

이런 자들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의 죄와 수치를 알기에

스스로 위장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다 누더기와 같기에 자기 옷을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 피로 만드신 의의 세마포 옷으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이 망하는 세상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롬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2. 니느웨는 애곡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파멸됩니다.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 애곡할 사람, 위로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죠.

 

이는 남은 자가 하나도 없이 완전히 진멸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니느웨는 완전히 사라졌고, 결코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케임브리지 고대사'에서 언급된 대로, '역사상 앗수르만큼 완벽하게

약탈과 노략을 당했던 나라는 없을 것이다'고 했죠.

 

한국 연속극 같은데 보면 ‘제사 지낼 사람’이 나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꼭 준비해 놓아야 될 사람이 ‘자기를 제사 지내 줄 자’죠.

 

보통은 직계 후손이 그 제사를 지내주겠습니다만

민약 자기를 제사 지내줄 사람이 없다면... 대단한 비극으로 봅니다.

 

지금 그런 민속 전통이 중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고요, 예를 든 것입니다.

이걸 본문 식으로 말하면 ‘애곡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니느웨의 파멸과 멸망을 보고서, 울어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니느웨 사람들이 깡그리 다 죽는다는 뜻도 되겠고,

-평소에 니느웨 사람들이 그 정도로 민심을 얻지 못했다는 뜻도 되겠죠.

 

이 내용은, 위 설교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하십시오.

 

 

▲3. 하나님의 심판 때, 인간의 방어수단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그들의 '교만'때문이었는데요.

 

그들이 교만했던 이유는, 니느웨가 위치한 곳이

난공불락의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3:8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노아몬'은 나일강 근처에 있는 이집트의 성읍이었어요.

이 성읍은 강들이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였어요.

 

이 노아몬이 니느웨와 비슷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고 있는데,

바로 강물에 의해 둘러 쌓여서, 방어하기가 좋다는 것이었죠.

 

나훔 선지자는 이 노아몬을 예로 들면서 3:8

노아몬이 멸망당한 것처럼, 너희 니느웨도 멸망당할 것이다.. 라고 선포했죠.

 

이렇게 오래된 역사와 전통과 위용을 자랑했던 노아몬도

앗수르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노아몬의 운명이

앗수르 자신의 운명이 될 것임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면,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인간의 방어벽, 인간의 마지노선, 철벽 방어... 이런 것이 모두 무용지물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는 국가의 최고 수반도, 안타깝게도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인간의 철벽 같던 방어수단도,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의 증거 중 한 가지는

자기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두고 말할 때

‘저 사람, 어디 믿는 데가 있나 봐!’

‘저 친구는, 어디 믿는 구석이 있나 봐!’ 하는,

이런 평가를 종종 듣게 됩니다.

 

성도는

너무 편안하므로, 너무 무덤덤하므로,

자기들처럼 막 불안, 초조, 염려하지 않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가 무슨 대단한 빽이라도 가진 줄 알지만,

그래서 ‘믿는 데가 있나 봐’라고 말하지만..,

 

그렇다. 사실 믿는 데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불안, 초조, 염려하지 않고,

세상이 막 요동친다 해도...

자기는 그저 무덤덤하게 사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늘 '믿는 데가 있나 봐!' 라는 주변의 소리를 들으시는가요?

그러면 진정한 크리스천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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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하나님께서 죽어도 위로하지 않으실 사람들

 

①첫째,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 내일로 미루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내일로 미루다가 영원히 믿지 않는 것입니다. (행 24:25).

 

②둘째, 천국 가는 길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천국 가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의 죗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도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은 넓은 길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왜 내가 이 길을 가도록 놔뒀냐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길이 아니라고 수백 번 더 이야기했음에도

계속 가지 않았냐?’고 하시며

네가 가는 길을 나는 위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③셋째, 가족들의 눈물 어린 전도를 받고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④넷째, 죄의 결과가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의 단물을 빨아 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죄의 결과가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⑤다섯째,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사람은 나무 깎아 페인트칠 해놓은 것을 신으로 모십니다.

 

 

 

◑주석 ................................................................................

 

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본 단락은 군사들이 신속한 동작으로 돌격하면서도 내는 굉음,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전투 모습을 연상시키고,

곧바로 그로 인한 참혹한 광경을 숨가쁘게 연결시킵니다.

 

이로써 2:3~5의 전쟁 장면을 되풀이한다.

 

특히 3절에서, 니느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는지

길을 가다가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질 정도가 될 것을 예언합니다.

 

4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즉, 니느웨가 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음행과 마술이었는데, 이는 앞에서 ‘벨리알’아리고 말할 것처럼 *1:11 ‘사악한’

이방신과 우상숭배, 거기에서 나오는 마술적 힘으로

여러 족속들을 (니느웨 자기와 함께) 미혹하여 패망시킨데 있습니다.

 

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4절에서는 매춘부의 모습에 빗대어 앗수르의 멸망이 불가피했던 사실을 언급했고,

이제는 그에 상응하는 수치를 언급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시므로 *2:13

그들이 자행했던 더럽고 추한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응분의 결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1절에서도 니느웨 성이 멸망하게 될 모습을 보고 애곡하였으나,

여기서는 멸망의 모습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 애곡할 사람, 위로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죠.

 

이는 남은 자가 하나도 없이 완전히 진멸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니느웨는 완전히 사라졌고, 결코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케임브리지 고대사'에서 언급된 대로, '역사상 앗수르만큼 완벽하게

약탈과 노략을 당했던 나라는 없을 것이다'고 했죠.

 

8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노아몬'은 문자적으로 '아몬의 도시'라는 의미죠.

이 도시는 원래 '아몬의 신전이 있는 곳'을 가리켰고,

'더베'(테베)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렘46:25, 겔30:14-16).

 

그 위치는 오늘날의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650Km 떨어진 나일 강 상류였고

고대 애굽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신전, 오벧리스크, 스핑크스, 궁전 등이

모여 있는 이 도시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위대한 고대 유적 도시'입니다.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성벽이 되었으며'

'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얌'은 바다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나일 강의 웅장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고,

히브리어로는 비교적 물이 많은 곳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죠.

 

노아몬은 이런 지리적인 호조건으로

외적의 침입을 결코 받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죠.

 

 

9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구스와 애굽이 그 힘이 되어 한이 없었고'

노아몬은 애굽의 중왕국시대(B.C.2160-1580) 이후로 애굽의 수도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신왕국 때의 18-21대 왕조에 전성기였지만,

그후 한동안 평이한 시기를 보내다가 에디오피아 왕조를 가리키는

'구스'(쿠쉬)와 애굽이 동맹을 모색하여 과거에 누렸던 명망을 회복하게 되었죠.

 

10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계속해서 앗수르의 공격으로 인해 노아몬 백성들이 당할 수모를 열거한다.

 

'포로'나 '길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는 모습은 앞에서 했던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경고를 반복하는 것이고(2:4,7),

앗수르가 피정복 민족들의 '존귀한 자들'을 취급한 역사적인 사실은

니느웨의 부요했던 자들이 처하게 될 운명(3절, 2:9)과 비교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다른 역사적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앗수르와 애굽의 전쟁을 다룬 구약 성경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죠(왕하 17:4).

 

11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앞에서 언급한 노아몬의 경우처럼 앗수르가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을 받아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는 것이죠. 이를 강도하기 위해 각 문장앞에는

'너도 역시'(you also)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접두사 '감-아테'가 있습니다.

 

니느웨는 그 방어 태세(8절)에 있어서나 몰락에 있어서 노아몬과 비슷합니다.

이는 1:2-15에서 언급된 사실과 일치합니다.

 

니느웨는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대로 '술취한 자'처럼 될 것이며(1:10),

그들이 우상을 의뢰했기 때문에(1:7)

'피난처'를 찾으려는 노력도 헛될 것입니다.

 

12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니느웨의 견고한 산성이 하나님의 위임을 받고 쳐들어오는

바벨론과 메대의 군대에게는 결코 장벽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13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결정적인 순간에 앗수르가 나약한 국력을 갖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사들은 여인처럼 연약하여

외적을 막아내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게 되고,

니느웨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적의 침입 앞에 힘없이 열려질 것입니다(2:6).

 

14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나훔 선지자가 물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전쟁을 준비하라는 충고라기보다는

니느웨 성이 적들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야 말리라는 사실을 강하게 표현하는 거죠.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석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진흙이 주요한 건축 자재죠.

이처럼 진흙을 이겨 만든 벽돌로 쌓았던 니느웨의 성벽은 엄청나게 견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권고를 하는 것은 니느웨가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여

성을 아무리 견고하게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죠(2:1).

 

15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본절은 앞 절(14절)과 마찬가지로 외적의 침입과 앗수르의 멸망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느치와 메뚜기'를 소재로 사용한다.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습성에 근거해서

곧 닥치게 될 외적의 침입을 언급하고,

한편으로는 그것들의 강한 변신력에 근거해서

많은 인구로 세력을 확장하라고 권면한다.

 

이런 표현은 앞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니느웨 사람들이 아무리 늣과 메뚜기같이

많아져도 멸망당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풍자적으로 나타냅니다.

 

 

16 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계속해서 니느웨를 메뚜기에 비유하여 그들이 아무리 번창하더라도

마치 메뚜기가 허물을 벗고 날아가버리듯이

그들의 번성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말합니다.

 

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목자‘는 왕의 임명으로 세움 받은 정치 관리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고...누워 쉬었다'는 것은 모두 전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죠.

 

게다가 백성이 흩어지고, 더욱 처절하게도 그들을 규합할 만한 지도자가

없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결국, 니느웨의 멸망 상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자에 비유됩니다.

더욱이 니느웨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동정을 받거나 협조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변 국가들이 모두 니느웨의 침략을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죠.

니느웨의 멸망은 이웃 나라 백성들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