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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0:1~4 바스훌이 마골밋사빕 되다

LNCK 2022. 11. 11. 10:12

◈바스훌이 마골밋사빕 되다               렘20:1~4              10.11.11.설교녹취 


▲주제 요약 
본문에 제사장 바스훌이 등장한다. 렘20:1 

'바스훌'이란 뜻은 ‘자유'이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이다.  

어쨋든 바스훌은, 하나님의 명을 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은 맞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이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렸다고 했는데,  :2
아마 성전경비병들을 시켜서, 그런 짓을 했을 것으로 본다.

이 이름이,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마골밋사빕’으로 바뀌는데, 
그 뜻은 ‘사방의 두려움 terror on every side’이란 뜻이다. 렘20:3~4 

사람이 자기 자유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 
즉 ‘바스훌’처럼 살면, 

정말 자유가 더 많아지고,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방의 두려움’(마골밋사빕)이 찾아온다는 내용의 설교. 


◑영화 <킹콩> 

2005년도 피터 잭슨 감독이 <킹콩>이란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감독이 어려서부터 꿈이, ‘킹콩’이란 영화를 제대로 만들어보는 것이었는데, 
2005년도에 비로소 그 꿈을 이루어 <킹콩>이란 영화를 발표했다. 
(이 감독은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도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내용을 설명드리면, 
아주 야망있는 영화감독이 좀 획기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의 원시림을 찾아들어간다. 

그랬다가 거기서 킹콩을 만나게 된다. 
원래 원주민들은 그 고릴라를 ‘콩’이라 부르는데, 
(영화 속의) 영화감독은, 그 큰 고릴라를 ‘킹콩’이라 명명한다. 

그런 와중에, (영화 속의) 여배우 앤 대로우가      *나오미 왓츠 분 
원주민에게 잡혀서 죽을 고비에 있었는데, 
마침 킹콩이 그 위기에 처한 여배우를 살려주게 된다. 

영화에 보면, 그 여배우가 킹콩에게는, 마치 사람 손에 쥔 볼펜 크기에 불과하다. 
그 정도 크기의 이 여인에게, 킹콩이 애정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 

결국 무시무시한 공룡까지도, 그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킹콩은 자기 목숨을 걸고 혈투를 벌여서, 결국 무찌른다. 

그런데 이 킹콩이, 여자에 대한 사랑의 마음 때문에, 
이 감독 일행에게 붙잡혀서, 뉴욕으로 끌려오게 된다. 

그래서 영화감독은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알함브라 극장에서 
고릴라 쑈를 기획해서 보여주게 된다. 시대는 약 1940년대쯤 되어 보인다. 

킹콩은 크롬이 들어간 강력한 쇠사슬에 묶여서 극장에 등장한다. 
그래서 극장에서 갖은 쑈를 다 펼쳐 보인다.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추어 원시인의 춤을 춰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거기에 바로 이전에 정글에서 여배우가 원주민들에게 붙잡혔던 모습 그대로 
(쑈를 위해) 한 여배우를 그 무대 위에서 잡아맨다. 

그것을 무대 위에서 이 킹콩이 볼 때, 
어떤 분노의 충동을 느끼고 자극을 받아서, 
그 온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난동을 부린다. 

몰려왔던 관중들은 다 경악하며 도망가는 와중에 
삽시간에 극장 안은 쑥대밭이 된다. 

그리고 킹콩은 뉴욕시내 한 복판으로 뛰쳐나간다.  
쇠사슬로 묶여있던 정말 태고의 원시림 속에 살고 있던 야수의 본성이 
뉴욕 한복판에서 자유를 얻게 되면서, 마음껏 거침없이 드러나게 된다. 

그 알함브라 극장 무대위에서, 강력한 크롬 재질의 쇠사슬에 묶여 있던 상태, 
그러던 킹콩이 괴력을 발휘하면서 자유를 확장하고 자유를 획득한다. 

그리고 뉴욕 시내 한 복판에 등장한다. 
그러면서 온 뉴욕 시내는 일순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동차를 집어던지고, 고가도로를 파괴하고, 
그러다가 출동한 전투기로부터 집중 사격을 당하면서, 
무수한 총탄을 맞고 결국 죽게 되는데...

바로 이 장면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해 주고 있다고 본다. 

 
◑본문 설명 및 적용

▲성전에서 총무제사장 노릇을 하며, 성전의 모든 질서를 관장했던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성전총무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붙잡아 박해한다. 

그러다가 예레미야가 풀려날 때, 예언한 말이다. 
"네 이름이 '자유'(바스훌)인데, 
이제부터 네 이름은, 그 자유의 결과, 
사방의 두려움(마골밋사빕)이 찾아오게 될 것이고, 
너와 네 주변 사람들이, 네 자유로 인해서 두려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다." 

"나 여호와는 너(바스훌)와 가까운 사람이 모두 무서운 꼴을 당하게 하리라. 
너와 가까운 사람들이 칼에 맞아 죽는 것을 너의 눈으로 볼 것이다. 

나God는 또 온 유다 백성을 바빌론 왕의 손에 넘겨주어,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가거나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렘20:4 

바스훌의 그 자유, 자기 맘대로 행한 삶의 결과가 
킹콩이 자유를 확장한 결과와 마찬가지로, 
(온 뉴욕시가 공포에 사로잡히듯이) 
예루살렘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바스훌은 킹콩이 아닌데, 
무슨 그런 대단한 두려움을 자아낼 수 있는 일들을 한 적이 있느냐, 
바스훌이 사람을 죽이고 난동을 부렸는가? .. 물론 아니다. 

킹콩이 뉴욕에서 건물, 자동차, 고가도로를 부쉬는 것처럼 난장판이 이루어지는데, 
바스훌은 그것도 아닌데, 
<바스훌과 킹콩은 좀 심한 매치가 아닌가?> .. 하고 질문하실 것이다. 

▲본문 6절에 
“너에게서 <거짓 예언>을 들으며, 너를 좋아하던 모든 사람과 함께 
너는 거기에 묻힐 것이다.” 

여러분 거짓말이 바로 자유이다.   *바스훌=자유=거짓말=거짓 예언  
왜 거짓말이 자유인가? 거짓말은 사실로부터 자유이다. 
그러면 거짓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예언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매어있어야 된다. 
하나님께 붙잡혀 있어야 되고, 
하나님께 속박당하고 있는 예언자에게만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이 가능하다. 바로 예레미야의 모습이다. 

9절에 진짜 예언자의 상태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하나님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 

‘멸망할 것이다. 너희가 이대로 살다가는 끝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바람에, 
날마다 박해, 비아냥, 조롱을 당하는 것이 힘들어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을 그만두려고 해도, 
예레미야가 말씀에 매여서 꼼짝 못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올바른 예언자요, 올바른 대언자의 모습이다. 


▲반면에 제사장 바스훌은 거짓 예언을 한다. 
자기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자기 생각,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한다. 

오늘날 우리가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한다. 
내 생각, 내 사상, 내 견해를 갖고서 무한 자유롭게 .. 설교(예언)하다가는 

바스훌 꼴 난다. 
사방의 두려움이 생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매여서, 단 한마디도 자기 마음대로 말 못한다. 
대언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정리하면, 바스훌에게서 나타나는 킹콩의 면모는 무엇일까? 
킹콩이 태고 이래로 인간 사회나 문명과는 단절되어진 
정말 인도네시아의 정글 속에서 살고 있었던 야수이다. 

바스훌에게서 이런 야수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있다. 

바스훌의 마음이다. 

왜 그 마음이 킹콩인가? 왜 우리의 마음이 킹콩인가? 

태초이래,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우리의 마음이 킹콩이 되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자유를 얻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판단을 따라 살지 않아도 될 자유, 
지금 내 가정에 일어난 일이 좋다/나쁘다를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킹콩이 되어버렸다. 그 킹콩 속에 있는 본성, 
내가 생각한다.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내 사업에 대해 자유롭게 미래를 예측한다. 내 인생에 대해 자유롭게 걱정한다. 

내 자식 문제에 대해 내가 자유롭게 판단하고, 걱정하고, 
내 진로에 대해 자유롭게 비전을 갖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물어서, 받지 않는다. 

예레미야처럼 하지 않고, 바스훌처럼 한다.

이 자유로운 생각, 소원, 걱정.. 
이게 다 뉴욕 시내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자동차를 마구 짓밟고 집어던지던 킹콩의 몸짓이다. 

우리 마음의 생각과, 우리 마음의 소원과 
우리 마음의 추측, 상상, 우리 마음의 걱정, 

이 모든 것이 마음의 몸짓인데 
이게 바로 킹콩의 몸짓이고, 뉴욕 시내를 산산히 부서뜨린다. 

▲내 마음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동안에 무엇을 부서뜨린다는 말인가? 
내게는 부서뜨릴 뉴욕시내도 없는데.., 

우리의 하루,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계획 없는 하루가 없다. 
하나님의 은총적인 계획이 없는 하루가 없다. 

하나님은 날마다 에덴을 주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죄악으로 장악되면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자유로운 소원과 자유로운 판단과 근심을 통하여 

킹콩이 뉴욕 도시를 부수듯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우리 삶의 에덴의 도시를 다 부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있는 것이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 마음이 킹콩이고, 우리 마음의 생각과 
자유로운 소원과 자유로운 꿈과 상상과 걱정, 근심조차 
이런 자유로운 우리 마음의 활동들이 다 킹콩의 몸짓이 된다. 

하나님의 뜻, 계획, 섭리를 다 뭉개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바스훌이 여골밋사빕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 ‘사방의 두려움’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예레미야가 고백했듯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우리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불 붙혀 주시는 말씀만 전하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이런 예레미야에게도 두려움이 있었다. 20:9 
그러나 그런 두려움에는, 하나님의 보호/임재/위로/영광이 함께 함으로써 

능히 이길 수 있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강하게 만드는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바스훌이 가졌던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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