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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3:10~14 스스로 행동하면 저주받아 미친 상태

LNCK 2022. 11. 16. 12:55

(S) 스스로 행동하면 저주받아 미친 상태 - YouTube

※내용이 다소 사변적(사상적)입니다. 
사변적인 내용은, 받아들이기에 쉽게 내키지 않을 때가 많지만, 
<갈라디아서> 1~4장 같은 내용은, 사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편.


◈스스로 행동하면 저주받아 미친 상태       갈3:10~14       2022.11.13.

위 제목을 다시 말하면 
'저주받아 미쳤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행동한다' 라는 뜻입니다. 

율법과 믿음, 
그리고 '율법의 행위' 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 이신칭의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평생의 과제였다' 
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평생의 과제가 아니라) 좀 뭐라고 그럴까? 좀 식상해요. 
그냥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성경은 자꾸 얘기를 합니다. 

근데 이게 정말로 우리의 체질을 생각하고 
우리가 삶의 현장을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이신칭의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가 않아요. 

▲자 오늘 본문을 봅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갈3:10

이 말씀.. 우리가 다 아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게 잘 몰라요. 
질문을 해봅니다. 

그러면 '율법행위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모든 자연인은 이미 예외 없이 저주아래 있는 거 아닌가?' 

'뭐 때문에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율법과 상관없이 다 저주아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란 말이에요.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상황 인식이 중요합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서 인류는 지금 살고 있느냐 하면, 

이 지구에 77억 명이 살고 있는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보이거늘' 이라는 말씀처럼    3:1
언제나 지금의 사건으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두 영역으로 나뉘는 거에요. 
-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안> 이라는 영역과 
- <그리스도 바깥> .. 이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세상>이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역과 
<그리스도 밖, 세상>이 지금 함께 공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밖>에는 저주가 지배하고 있는 거에요. 
저주가 내려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듯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저주를 호흡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거에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만 '저주'라는 것이 끝나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아래 있다'는 얘기는 
<그리스도 바깥>인 저주가 임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면 
'율법행위에 속한다'는 겁니다.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이라는 말을 좀 확대해서 얘기하자면, '행위 원칙' 입니다.
모세가 준 율법과, 유대인이 준수하던 613가지의 조상의 전통이 아니더라도 
('율법'을 보다 광범위하게 생각하자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이 아닌 
<예수님 바깥, 세상>의 저주가 임하고 있는 상태에서 

저주를 흡입하며, 저주의 기운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나타나는 특징이 
자꾸 어떤 행동의 원칙을 찾으며, 스스로 (율법적으로) 행동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어떤 원칙을 따라서 스스로 행동하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예수님 바깥에 있는 세상>에 내리고 있는 저주의 기운에 취해서 
그 저주에 취한 증거로서 
'스스로 율법적으로 행동한다'는 겁니다.          *성령의 인도X
   
근데 '내 스스로 (원칙을 따라, 율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저주의 기운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도덕윤리 학자나 철학자나 사상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도 몰라요. 

▲도덕군자, 윤리학자, 사상가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은 다 '자기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동해야 된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법도 역시 '네가 행위하는 주체로서 책임을 져라, 
네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라'고 하는 기본 근거에서 출발합니다.

근데 이게 지금 '예수님 밖'에서,
즉 공중의 권세잡은 자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현실이라면.. 

참 진리를 따라서 생각을 하면 
스스로 율법적으로,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하려고 한다면 
그건 저주의 기운에 씌었기 때문에, 내가 미친 상태라는 겁니다. 

왜 제가 '미쳤다' 라는 강한 표현을 쓰느냐?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저주의 기운에 씌인 것이고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미쳤다'라고 하는 강한 표현을 써서, 사람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거죠. 


▲그러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 이 말씀은    *3:10
내가 스스로 행동하려는 주체가 되어서, 행동 원칙을 따르려는 상황은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저주 아래에 있는 특징이 바로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말씀을 정확하게 비교해서 보기 위해서는 
앞에서 2, 3, 5절에 연속으로 나왔던 '성령'을 염두에 둬야 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았다' 라는 얘기를 하시고 
3절에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육체로 마친다'는 얘기는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가 되어서, 율법이라는 행동 원칙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5절에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 
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냐? 

저주의 영역이 아니고, 저주가 끊어진 <예수님 안>의 영역에 들어와 있으면 
사람은 성령을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는 겁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성령의 행위,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했는데, 
그와 반대로 '성령의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절대 정상이 아니고, 본래 그랬던 게 아닙니다. 

사람은 원래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자기가 스스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 이전에는 
자기가 스스로 행동하는 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서 행동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그리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2천 년 동안 지금까지 모든 사상가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전부 '인간은 스스로 행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게 "미친 생각" 이라는 거에요. 

'미쳤다'는 얘기는, 
너무나도 '내가 주체적으로 행동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미쳤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건 미친 거에요. 
집안일이 생겼을 때 '내가 뭔가 행동을 취해야 된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이건 미치광이의 몸부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 바깥> 쪽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거에요. 
저주 기운에 씌었기 때문에, 그 저주 기운에 취해서, 
미쳐버린 상태에서 나타나는 게 

'내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책임감있게) 행동해야지' 라는 생각,
그런 책임감과, 그런 의무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거에요.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구절을 좋아하죠.

많은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를 얘기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이 단서를 빼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 잘못된 거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 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큰일 나는 거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 이라는.. 저주가 끝난 상태에서만..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을 직면하여 항상 하나님과 친밀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이 세상에서 내 몸과 관련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보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는 뭡니까? 
-항상 하나님 자신으로 기뻐하는 대신에 
항상 인간 세상의 기쁨거리를 향하여 좇아가고 있는 상태가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또 '그리스도 안'과 다르게, '그리스도 바깥'에서 저주받은 상태는 
쉬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과 친해지는 기도를 드리는 대신에 

쉬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한 자기 소원, 자기 바램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상태입니다. 
쉬지 않고 '이 세상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다' 라고 하는 바램에 의해서 끌려갑니다. 
사람이 거기에 짓눌려버립니다. 

뭔가 바램을 갖는다는 게, 말이 좋아 희망이지 
여전히 '나는 지금 부족하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주받은 사람의 특징은 '범사에 감사'하는 대신에 
범사에서 부족과 결핍을 느끼면서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과, 아니면 분노와 짜증과 질투를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저주받은 상태'의 구체적인 특징이라는 거에요. 

이렇게 저주아래에서, 저주를 쐬면서, 저주를 호흡하면서, 저주에 젖어서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스스로 행동하며 지옥의 예고편을 살다가 
몸이 죽으면 영원한 저주인 지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저주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하면 
'내가 뭔가를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 라고 느끼고 있는 상태인거에요. 
'내가 뭔가를 (주체적으로, 책임감 있게) 해야 된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위는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1) 본문에 나오는 율법행위 입니다. 

모든 행동은 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하는 것이에요. 
근데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그 행위가
자기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야 되는 거에요. 

본문에는 '율법행위'로 나오는데,
인간의 도덕과 윤리가 다 여기에 속하는 거에요. 

2) 두 번째 행위는, 충동행위 입니다. 
이건 반도덕적, 반윤리적인 행위인 것이에요. 

합리적으로 내게 유익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원칙을 따르지 않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행위를 하게 됩니다. 

분노라든지, 질투라든지, 두려움 등등의 감정이 강하게 나를 몰아감으로써 
어떤 합리적인.. 즉 유익을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하게 되는 행위가 있어요. 이게 '충동행위'입니다. 

이 원칙행위(=율법행위) 와 충동행위는
모두가 다 '예수님 바깥'인 저주가 임하고 있는 상태에서 
저주에 쐬었을 때 미치광이의 몸부림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인간에게 나타나는 수 있는 마지막 행위는 <성령행위> 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내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즉 성령께서 주체가 되셔서 
나타나는 행위가 되는 거에요. 

원래 성도는, 자기 몸을 움직여 행위를 할 때면 
반드시 성령행위로만 나타나야 되는 거에요. 

그것이 일상적이고 루틴한 모든 행동에서 
성령 행위로 나타나야 되는데, 

근데 아담의 후손, 타락한 인간은 
저주를 받아가지고, 저주의 기운에 취한 상태에서 
자기가 스스로 행동하게 되면서, 미친 자의 몸부림만 나오게 되는데 

그 미친 상태를, 미쳤다고 보지를 못하고 
정상으로 보고 있다는 거에요. 

△심지어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 조차도 
'실천이상비판' 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인간 행위의 자기 도덕적 책임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일부 신학도 그 칸트를 따라서 
윤리적 경향을 띠는 신학의 체계가 세워집니다. 
그게 (인간의 이성이 원래) 미쳤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굉장한 철학가도, 자기가 미쳤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자기가 선하고, 의롭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론인 거죠)

이것은, 시골의 농사짓는 할머니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이렇게 이성적 소양이 완벽하다고 느낄 정도의 사상가, 철학가들도 모르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행동해야 되는 책임감을 느낀다'는 게 
저주의 기운에 씌었기 때문에, 미쳐서 하는 생각이고, 
미쳤기 때문에 갖는 마음의 부담이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본문을 읽을 때 주의를 기울일 점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다'
라고 말할 때   3:10

'율법책에 기록된 규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아래 놓인' 것처럼 
우리가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거에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외적 행위를 뜻함
이미 그리스도 바깥의 저주 상태로 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말씀드립니다. 
율법을 행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말하면, 구약성경을 보면, 
'너희가 율법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가 임한다'라는 그런 구절이 많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저주가 임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율법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임했기 때문에, 율법을 행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저주안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으키신 사건이 십자가예요. 

근데 왜 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왜 우리를 구원하는데 '나무에 달린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는가요?' 
 
저주에 속해 있는 특징이, 저주의 기운에 쐬면 
스스로 행동해야 하는 미치광이의 몸부림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행위로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미치광이처럼 몸부림치며 
'내가 행동해야 된다'라는 책임감과 의무감에 쩔어서 
내가 움직이려고 하는 이 상태를 중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십자가에 손과 발, 사지를 못 박아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움직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미치광이의 몸짓이 몸부림이 끝이 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저주의 기운을 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미쳐서, 자기가 행동해야 된다 라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거에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본래 사람의 모습대로 사셨습니다. 그 모습이 뭐에요?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와 비교해서 능력과 선함과 모든 면에서 탁월하신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모습을 띠고 있는 한, '나는 스스로 행동할 수 없다'라는 
본래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신 거에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다' 라고 해서 

분명히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뜻의 복사판이신 성령... 이라는 것을 천명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보면서 

이게 원래 저주받았음이, 사람에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저주받은 상태를,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이제 우리 눈에 보이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것은, 
내 머리가 미쳐서 내가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을 생각하던 것이, 
이제는 내 머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내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거죠.
왜냐면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까요!'

손과, 발에 못 박히신 것, 배가 창에 찔리신 것도 다 마찬가지죠.

내 스스로 손과 발로 움직이면 안 되는 거예요. 
손과발로 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미친 것입니다. 
저주의 기운에 취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야 저렇게 가시면류관을 쓰고, 창으로 배에 찔리고 
살이 다 찢기신 모습을 묵상하면서 
'내 손과 발이 못박혀야만, 내 미치광이상태가 끝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안으로 들어갈 때, 
그 안에서 비로소 저주가 끝이 나는 거예요. 
그 안에만 저주가 임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을 직면하며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며 
그 하나님의 주권자임을 믿기 의 모든 범사를 감사할 수 있게 되는 
저주가 극복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힐 뿐만 아니라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는 거죠. 3:14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이제부터 내 몸이 움직이는 행위의 주체는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 싸움이 만만치 않은 거예요. 
왜냐하면 저주의 기운이 온 세상을 덮고 있어서 
바늘 끝만큼도 비어있는 구석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저주가 끝나는 거에요. 
근데 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눈앞에 밝히 보는' 일을 쉬지 않고 해야 되는데   3:1

내가 자꾸 잊어버려요.
자꾸 잊어버리면 잠깐 사이에 저주의 영역으로 튕겨져 나오게 됩니다. 
그럼 본성적으로 '내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야 된다' 하게 되는 거죠.
드디어 미친 사람의 본색이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문제는 이 십자가를 놓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씀하지 않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혀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서 그 십자가를 자꾸 못 보게 하느냐?'  3:1

'늘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