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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 이신 하나님의 권한

LNCK 2022. 11. 18. 11:13

[이상준 목사] 토기장이와 진흙 (로마서 9:19-33)│2022.11.06 - YouTube

◈토기장이 이신 하나님의 권한            롬9:19~27     2022.11.06.


◑ 도대체 왜 하나님은?

▲9:19 그러면 그대는 내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여전히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개역개정)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하나님은 왜 여전히 책망하시는가?' 거기에 밑줄을 보시겠어요. 

지난주 내용은, '긍휼의 대상도, 진노의 대상도 하나님이 예정하신다. 
그렇다면 진노의 대상은, 자기가 원해서 진노를 받겠는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심판을 받는 것인데 
왜 책망하시는가?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진노의 대상 입장에서는 '이건 내 책임이 아니라 
그렇게 예정하신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물론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것이지만, 
인간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때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죄악때문입니다. 

인간은 좀 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정직할 필요가 있어요. 

만약에 국가가 도로의 자동차 속도 제한 규정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규정이 있기 때문에 속도위반 벌금통지서가 내게 날아왔어요. 

그때 이렇게 얘기할 수 있나요? 왜 그 따위 규정을 만들어가지고..'
아니죠. 내가 속도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벌금통지서가 날아온 것이죠.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셔서, 선과 악의 법적인 기준을 만드셨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한 것이지, 비난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 법, 그 기준이 없었다면, 세상은 벌써 무법천지, 소돔 고모라가 되었을 것임)

그것이 세상 법이든, 하나님의 법이든 
'이거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선택해서 세운 법이 아니냐? 
그러므로 내 책임이 아니다. 이건 당국의 책임이고, 전적으로 하나님 책임이다.'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진노와 긍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자 인간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자유의지입니다.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선택 이었어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는 이렇게 결부되어 있고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은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나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 책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를, 우리는 지키고 싶어해요. 
어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 힘이 센 사람이 
내 자유를 빼앗아 가려고 하면, 우리는 굉장히 불편합니다. 

가장 강력한 국가 권력이 내 자유를 제한하려고 해도, 마음이 어려워지죠.
인간에게도 이렇게 지키고 싶은 자유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그분이 지키고 싶은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자유였어요.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선악과 였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도대체 왜 선악과는 만들어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라고 얘기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악을 계획하고, 악을 조장하고 
악을 피해갈 수 없도록 강요하는 분이신것처럼 얘기하는 거예요. 

하지만 명확한 것은,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악을 권장하거나 강요하실 수 없는 분이세요. 

△다만 여기서 한가지 인정할 것은,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신다는 거예요. 
왜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셔야 되느냐?
이게 또 용납이 안 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두 가지를 허용하셨는데 
선도 허용하셨지만, 악도 허용하셨어요. 

왜냐하면 '참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지 않는한, 
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정반대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요. 그 사람도 나만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납치해서, 강제로 자기 집에 데려와서 묶어놓고 
'너는 나만 사랑해야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죠. 그것은 공포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분이세요. 
(그래서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우를 많이 범합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자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녀의 자유를 빼앗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비인격적으로 몰아가며 
그 아이의 영혼을 깨뜨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self-love
즉 '자기 애'에 빠져있는 부모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것은 선이 아닙니다. 선을 가장한 악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악을 허용하시는 거예요. *자유의지, 선악과

여러분이 표면적으로는 모순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자녀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기 주도적 결정권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여러분이 다 결정해 버리면... 아이는 망가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허용하는 거예요. *자유의지, 선악과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허용하는 거예요. 

△하나님께는 끝까지 지키고 싶은 그분의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권리를 지키고 싶잖아요. (하물며 하나님은 더하시겠죠)

하나님이 지키고 싶은 권리는 무엇이냐면 
참사랑을 갈망하고, 참사랑을 요청하고, 참사랑을 이루어 가는 선택을 하시는
그분의 자유! 이게 하나님의 권리에요. 

하나님은 그래서 엄청난 위험부담을 끌어안으셨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 입니다. 

하나님의 그 리스크, 우리에게도 선악과는 굉장한 리스크잖아요. 
왜 그거를 만들셔가지고.. 그것만 안 만들었으면 
우리에게 이런 폭탄이 터지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떤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가 없었다면, 우리만 좋았던 게 아니라, 하나님도 좋으셨을 거예요. 

왜요? 선악과가 없었다면,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줄 일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사랑을 선택하신 거에요. 
참 사랑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신 거예요. 

그분의 존재를 걸고,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할 수도 있는 그 선악과라는 선택을 
주신 거예요. 

내 자녀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원한다면 
그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줘야 되는 거잖아요. 
강요해서.. 어떻게 사랑과 존경을 받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석처럼 아름다운 온 세상을 만들어서 인간에게 주시면서 
무릎을 꿇고 프로포즈를 하셨는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소중한 반지를 집어 던지고 
그 사랑을 배신했던 거죠. 

여러분,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전부 하나님 책임이라고 인간은 외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전혀 책임이 없으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망가진 것은, 오롯이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은 정직해야 돼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마치 자신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으신 것처럼 
모든 책임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이렇게 망가진.. 비참한 초라한 인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의 선택을 받기 원하시는 인격적이신 하나님,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었을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망가진 인간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의 절절함과 진실함을 보이셔서 
우리에게 사랑의 선택을 받기 원하시는, 인격적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9: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대들 수 있겠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에 밑줄을 그어 보세요.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하겠느냐?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왜 날 이렇게 만들었느냐 항변할 수 있느냐?' 

하나님과 인간은, 마치 엇갈린 사랑 같습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을 좇아다니며 사랑고백을 하고 계신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격하고 따지는 거죠. 

△제가 청소년, 청년 집회를 하면서 많이 하는 얘기는 
'이제 부모님을 더 이상 원망하지 마라. 
아직도 부모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내 인생이 미숙하다는 의미밖에 안 된다. 
그리고 원망할 수 있는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을 인해서, 감사할 줄 알아라. 
그 부모님이 떠나시고 나면, 어디에다 그렇게 자기 힘든 얘기를 다 쏟아 놓겠느냐?'

여러분, 우리 자녀들의 인생이 힘들때 
왜 그렇게 부모에게 힘든 소리를 많이 할까요? 

왜냐면 자기가 세상에 외치고 싶어도, 세상의 장벽은 너무나 높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감히 외치지 못하는 거고, 

또 인간관계가 힘들어도 
자기 또래집단 친구들에게 소외받는 것처럼 두려운 게 없잖아요. 
거기에다가도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인생의 쓰디쓴 그 어려움들을 다 받아주는 
내 부모한테 짜증내고, 원망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욥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인생이 힘들면 그냥 '아~ 힘들다' 얘기하시면 돼요. 거기까지는 정직한 고백이에요. 

세상이 너무 암울해 보이면 '세상이 암울하다' 거기까지만 얘기하세요. 
그게 정직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꼭 1절로 끝나지 않고, 2절로 넘어가서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세상에 만들어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의도가 도대체 뭐냐?' 

이렇게 2절까지 노래를 부르면, 이거는 선한 게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고,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나는 그런 부모는 없는 셈 치고 인생을 살겠다'

이건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이야기죠. 

△부모가 자식을 왜 낳았나요? 사랑의 결실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는가?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의 결실이에요. 
사랑을 부어주고 싶으셨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내가 왜 사랑하는가?' 
다른 아무런 이유가 없고, 그냥 그냥 너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자식이 부모를 하도 원망하면 
부모의 마음에 아픔이 있고, 탄식이 있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 죄밖에 없지 않냐? 내가 부모가 된 죄밖에 없지 않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물론 하나님 아버지는 그러신데,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부모가 된 죄, 사랑한 죄 외에도 다른 죄를 짓기는 해요. 

그래서 그런 건 여러분이 회개하셔야 됩니다.
자녀한테 '내가 미안하다'고 얘기하셔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잘못도, 책임도 없으신데 
너무나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으시고 비난을 당하시는 거예요. 

저는 하나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니까,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마치 하나님은 당신의 책임인 것처럼, 다 떠안고 십자가까지 지셨잖아요. 
왜 그렇게 하셔야 될까요? 보니까 이유가 명확해요. 

인생에 고통과 역사의 어두움이 
전부 다 인간의 책임인 것은 맞는데 
인간이 이걸 책임질 수 있는,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사춘기 자녀가 자기 인생이 힘들다고 
'왜 나를 낳아서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하고 부모를 원망해도 
부모가 아무 말을 안 하는 이유가 뭘까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할 말은 어마어마하게 많죠. 
'내가 너를 지금까지 어떻게 키웠는데...' 라며 할 말이 많지만 
여러분,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 어린 것이 힘들어서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자기 인생을 건져낼 힘이 없다는 것을 
부모가 알기 때문이에요. 

그냥 내가 그 자녀를 끌어안아 주고, 어떻게든 품어서 
내 가슴에 피눈물이 흘러도, 이 자녀를 격려해줄 수 있고, 위로해줄 수 있다면, 
살려낼 수만 있다면... 그 마음 때문에... 
'그래, 이게 다 내(부모)책임이다!' 

자녀가 삿대질을 하며 달려드는 데도, 부모는 그냥 품어주는 거예요. 
그렇게 사랑해주고, 격려해주고, 자녀가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외에 다른 답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원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감사하세요. 

우리의 모든 힘든 얘기를 다 받아 주시잖아요. 
그러나 신앙의 세월이 많이 가는데도, 계속 하나님을 의심하시면 안됩니다. 
성장하고 성숙하셔야죠. 


◑2. 토기장이 하나님과 나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막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9:22 만일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리시고자 
멸망받도록 예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해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습니까?

21절에 '토기장이와 진흙'을 얘기했고 
22절에는 '진노의 그릇'
23절에는 '긍휼의 그릇'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건 뭐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어떤 그릇을 만들든 
그건 토기장이의 자유이고 권한이잖아요. 

그거를 토기장이의 권한이 아니라고 얘기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도 첫번째,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에도, 오래 참아주시고 관용하십니다. 

성경에 그런 케이스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첫번째로 가인, 여러분 가인은 살인을 한 첫번째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표를 주셔서, 그가 해함을 당하지 않도록 
가는 곳마다 그를 지켜주셨던 거잖아요. 하나님의 관용이죠. 

또한 바로가 출애굽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엄청나게 막았죠. 
'열 번이나 때리지 마시고, 그냥 열 번째 재앙, 가장 강력한 것을 한번에 치셨으면 
바로도, 이집트 사람들도 덜 고생하지 않느냐? 하나님 너무 잔인하다'
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러나 잘 생각해보세요. 열 번의 재앙은 
그에게 큰 데미지가 됐을 수도 있지만 
열 번이나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 거죠. 
우리는 너무 인간 입장에서만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 많이 배려해 주신 거예요. 

△어떤 분들은 가룟유다를 보면서, 
아니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겨 줬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고, 구원이 완성된 것 아니냐? 
그러니까 유다는 하나님이 짜놓은 각본에 걸려들어서 악역을 했을 뿐이다... 
정말 그런가요?

악역을 시킨 하나님의 책임인가요? 
그런데 이걸 잘 생각하셔야되는 것은, 유다가 선인인데 악역을 한 것인가요?
악인이어서 악역을 한 것인가요? 
악인이어서 악역을 한 것이에요. 
선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약한 역할을 시키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꾸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 하는데 
정직하게 생각하면, 가룟유다는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악인이었어요. 
악한 자가 악을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을 뿐입니다. 

자 여기서 '허용'
왜 도대체 선한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가? 
이런걸 사람들은 계속 궁금해 하는데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동전의 양면,
'악을 허용하셨다'는 표현은 
말은 안 했지만 '선도 허용하신' 거예요. 

선과 악을 (자유롭게) 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다가 악을 선택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걸 선택한 게 아니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전적인 유다의 잘못입니다. 

또한 유다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야 너!' 길가던 사람 갑자기 불러다가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 다 끝날 때쯤 유다를 불러서 
'너 악역좀 해줘야겠다..' 이렇게 시키신 게 아니잖아요. 

지난 3년 반 동안, 가장 소중한 12 명의 제자를 선택할 때 유다를 선택하셨죠. 
그러니까 지난 3년 반은, 예수님께 진정성있게 반응할 수 있는, 
그의 인생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의 시간이었던 거에요. 

△젊은이들은 역사를 보면서,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악이 가득한가?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 그런 질문들을 합니다. 

악한 세상이 여전히 너무나 평안하게 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악하시다'는 증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붙잡고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 세상은 지금처럼 유지가 될 수 없어요. 
악의 끝장으로 달려갔으면, 벌써 세상은 끝났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악인들도, 심판을 받아 마땅한 악인들도 참고 기다려주시기 때문에, 
관용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계시기 때문에 

22절 말씀처럼 '오래 참으심으로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도 관용하시기 때문에' 
지금의 역사가 가능한 거예요. 

△두번째 그러면 '긍휼의 그릇은 어떠한가요?' 

23절에,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셨다'
'그럼 이 사람들은 다 좋은 것만 받은 것 아닙니까?' 얘기할 수 있죠. 

물론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셨다' 라는 것은 

영광을 깨닫고 본인들만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을 알리라는 사명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서, 성경 독자들이 성향에 따라서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보여요. 
정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아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방인들을 다 진멸했어야 되는데, 제대로 진멸하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쉽다. 
좀 더 확실하게 끝냈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긍휼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이 선택한 자녀들에게 땅 주시겠다고 
그 현지인들을 그렇게 인종 학살을 할 수가 있느냐? 
나는 그런 잔인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이건 완전히 다른 반응이죠. 

여러분은 어떤가요? 먼저 하나님이 가나안 민족들을 처벌하신 것은 
그들의 우상숭배가 심각한 지경에 떨어졌기 때문이었어요. 

인신제사,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서 우상에 바치는 것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관습이 되어 버렸던 겁니다. 

성적인 타락, 도덕적인 타락이 회복 불능의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었어요. 

게다가 신명기를 보면, 이 죄많은 가난한 족속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심판하실지라도 

그 심판자 역할을 했던 이스라엘도 타락하면 
너희도 이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과 똑같이) 진멸될 것이다'라고 경고하셨어요. 

하나님은 fair 하신 분이세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특혜를 주신 것 같지만, 그것은 특명이었고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말씀하셨어요. 
언제나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도 동일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공짜로 주신 땅이 아닙니다. 
죄악이 가득한 땅에 들어가서, 거룩한 민족이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되는 사명을 감당했어야 되는 거에요. 


▲9:24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이 그릇으로 부르셨으니, 
곧 유대 사람 가운데서뿐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9:25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선민이 됐다'
그 하나로 만사형통,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선택해주신 이스라엘이, 이제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며 
거룩한 나라를 세워져가기 위해서 
매 순간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선택이 남아 있는 거에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나의 선택이 함께 가는 것이죠. 
인간 마음대로 모든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이 예정하고 하나님이 결정했으니까 
모든 게 하나님 책임입니다.. 이렇게 나눠서 얘기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가 또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하나님과 나의) 동행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축복합니다. 

△호세아서 에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데도 
'백성' 이라고 불러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이 사람들이 나중에 자꾸 종교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그런 착각을 했는데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러주신 것이고 
이방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격이 충분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자녀 라고 불러 주신다는 거죠.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키울 때, 항상 사랑스러운 때만, 
사랑스럽기 때문에만 사랑을 해주는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사랑해주는 것이죠. 
자녀가 사랑스러운 때는 괜찮았는데,
애가 좀 크고 나면, '잠잘 때만 사랑스럽다' 그건 아니잖아요.

자녀가 사춘기에 계속 사고 치고, 힘들게 하고, 고집부리고... 
이렇게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사랑해주고 
심지어 더 심하게 원수같이 굴 때에도.. '내 자녀' 라고 인정해주는 거죠. 
포기할 수 없는 내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날 사랑하시는가? 
왜 갈보리의 그 십자가까지 지셔야 했는가? 
내가 나를 봐도 사랑스럽지 않은데, 이런 나를 도대체 왜 사랑하시는가?' 
이 고백이 정직한 고백이죠. 

'도대체 왜 나를 만들어서, 왜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가?'
이렇게 빠지지 마시고, 

그냥 '내 인생이 너무 힘듭니다. 세상이 너무 어렵습니다.' 
딱 여기까지만 하소연하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붙드실 줄로 믿습니다. 


▲9:27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르짖기를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알 같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많아도, 소수의 남은 자들만 구원받는다.. 는 것입니다. 

지금 롬9~11장에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되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를 말씀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혈통상의 약속을 넘어서서 
믿음으로 주어지는 약속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혈통적인 유대인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된 사람들 
그래서 그 중에 소수의 정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거죠.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온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아야 되고 
동시에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명인지를 알아야돼요.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이 소수의 믿는 자들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위축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직장 다니는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회사에서 식사할 때 식기도를 못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 다닌다는 걸 차마 얘기를 못했습니다. 
성경책도, 생명의 삶도, 아침에 직장에 가서 하고 싶지만 
그러나 제 사무실 책상에 꽂아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사할 때 식사기도 안 하고, 먼 산한번 바라보고 밥 먹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왜 여러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소수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 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세상을 구원할 소망의 존재로 남겨두신 거잖아요.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세상에 소금과 빛' 이잖아요. 

소금과 빛은 항상 소수입니다. 
여러분이 음식 만들때 다른 식재료만큼 소금을 넣나요?
소금은 굉장히 극소량을 넣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밋밋한 음식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되잖아요. 

방을 밝히려고 할 때, 방의 빛을 가득 채워놓는 게 아니에요. 
아주 작은 불빛 하나로, 어두운 방 전체를 살려내는 거에요. 

세상에 창의적 소수 creative minority 가 되는 것은 뿌듯해하면서 
왜 여러분은 구원받은 영적인 소수가 되는 것은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나요? 

이 시대에 거룩한 소수holy minority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다수 일지라도, 어둠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셔야 돼요. 

교회 다니는 거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끄러하지 마세요. 

'아 내가 이런 거를 이 조직에서 밝히면, 굉장히 많이 피곤해지는데.. 
신경 써야 되는데.. 내가 희생해야 되는데..' 
근데 그 희생하시라고 밝히는 거예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비난을 당하고, 
직장 동료가 '요즘 교회는 문제가 많은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제가 교회를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