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부르심에 응답만 하다 죽는 인생' .. 약간 뉘앙스가 '응답만 하다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생이다' 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부르시고 있기 때문에, 응답만 하다가 죽기에도 바쁜 인생이 최고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긴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1:6
하나님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항상 부르시기 때문에, 응답도 항상 해야 되잖아요. 그러느라고 실제로는 내 간구나 내 소원을 말할 틈도 사실 없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가 기도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선수 치고 계십니다. 이미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 간구를 말씀드리려면 이렇게 항상 먼저 부르고 계심을, 먼저 묵살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진정한 기도는, 내 간구를 드릴 틈이 없습니다. (이런 면이 있다는 거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부르고 계세요. 그래서 내 간구, 내 소원을 말씀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나를 부르고 계심'을 내가 묵살하거나 임의로 중단시켜야 합니다. 아니면 무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간구를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지금 나를 향해서 계속 하나님은 부르고 계시기 때문에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하느라고 평생 나는 내 소원을 한번 제대로 간구해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는 게 교인의 팔자라면 팔자인 거에요.
내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내가 먼저 응답하라' 이것이 바로 기도의 참 내용입니다.
간구가 아니라 응답하세요. 그게 진정한 기도 입니다.
기도를 대화라고 한다면, 이미 대화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부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나의 '응답'입니다. 응답!
▲자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 <갈라디아서>는 에베소에 사도 바울이 체류하다가, 고린도교회와 서신을 주고받고 마음 아픈 방문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케도니아로 와서 고린도후서를 기록합니다. 주1) 배경
사도바울은 본 서신서를 통해 말씀을 전개해 나가시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1:6
정말 이상하다 라는 겁니다. 이상하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 이시죠. 하나님 우리 아버지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근데 어떻게 부르시느냐?
그냥 '얘야!', 구약성경에 나오듯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렇게 부르시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내 의식이 잊어버리잖아요. 내가 의식하지 못하잖아요...
그럼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계신데, 내가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그 부르심을 외면하고 묵살한다는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는 하나님이 지금 나를 향해서 '얘야, 얘야!' 하고 부르고 계시는데 그 부르심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그리고 신학자들이 이 갈라디아서를 거짓 교사들, 그리스도인 임을 표방하고 있는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과 사도바울의 교리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근데 사도바울이 싸우는 것은 실제로 그게 아닙니다. 잘못된 교리로 인해, 갈라디아 교인들의 실제 삶이 망가졌다는 거에요.
단순히 교리싸움을 하는 게 아니에요. 교리논쟁을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이 망가져버린 것을.. 바울은 주목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삶을 다시 재건하려고 하는 거에요. 그 삶을 재건하려고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론이 아니라는 거에요. 지금 이 삶의 현장에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겁니다.
근데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해버리는 상태가 벌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식에서 놔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고린도후서 해서 살펴본 대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한시도 내 몸이 살아있는 한, 내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 라는 의미이고
그럼으로써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내 자의식 속에 받아들여서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나를 향한 부르심,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이 항상 우리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은 뭘 뜻하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항상 '하늘 천국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오라' 고 요구하신다는 뜻입니다.
'네 마음이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느냐? 나를 향해 와야 된다. 너의 마음의 흐름이 나를 향해서 지속돼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흐름을 계속해서 기대하고 계시는 것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에요.
잠시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가는 것이 중단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항상 부르시고, 쉬지 않고 부르시고, 범사에 부르십니다. 즉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흘러가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를 향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우리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 소원을 아뢰는 기도,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바라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간구 위주로 기도를 할려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지금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심을 내가 무시하고 끊어버려야 됩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로 통화할 때 그런 분이 간혹 있잖아요. 자기 얘기만 계속 하느라고, 내가 얘기할 틈이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그런 느낌을 받으시는 겁니다. 우리 할 말만 계속 일방적으로 아뢰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부르는 부름에 응답하라는 겁니다. 자꾸 네 얘기, 딴소리를 하지 말고.. 응답하라는 거에요.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어요. 아주 급한 돈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돈 문제를 마음에 담습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벌써,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겁니다.
돈 문제가 발생하면, 돈 문제가 발생하기 전부터 돈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계속 나를 부르고 계세요.
그 부르심의 내용은 '네 마음은 내게로 와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얼른 깨달아야 돼요. '아, 내 마음을 당신에게로 보내라고 하는 그 부르심을 외면하고 살고 있었구나!'
그래서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내가 죽어서 세상으로 흘러가려는 마음이 막히고 오직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야만 되는 내 마음이.. 딴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라는 걸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라는 겁니다.
누가 너보고 돈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셨냐는 거에요. 누가 너보고 너의 건강 문제에 네 마음을 쓰라고 하셨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주어질 것을, 우리보다 먼저 아셨고 그 해결도 이 세상 어떤 전문가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미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문제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문제시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면 되는 겁니다. 그 응답이 뭐예요? 십자가로 부르시는 거예요.
내가 연합 하여야 할 그리스도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이 십자가 말고 사도바울은 '다른 복음이 없다'고 합니다.
왜 복음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당신께로 부르시는거에요. 십자가로 부르셔야 되는 이유는 내 마음이 세상 것을 향해 있고, 세상 것을 담고 있었기에 더러워졌습니까
깨끗하게 보혈로 씻어야 되고 그리고 마음이 보혈로 씻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떠나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완전히 빠져나와서 아버지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은,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항상 우리를 향하여 오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게 하는 게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라는 내용을 전하면서 그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서 죽으라는 말을 뺀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다른 복음'인데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표방하면서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자에게 저주가 임할 것임을 사도 바울 말씀하고 계십니다.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를 들어, 제가 공부한 독일은, 정말 '신학 이론의 왕국'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계는 예리한 칼날같은 이론으로 서로가 서로를 치면서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학계를 평정한 대가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독일의 신학계, 그 전쟁터와 같은 독일의 신학계를 평정한 대가가 한 시간 강연을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십자가 생활화를 누락시킨 강연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멋진 이론이라서, 모든 사람이 기립 박수를 칩니다. 그 기립 박수를 받은 독일 신학계를 평정한 대 석학은 저주를 받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황이나 개신교의 유수한 전통적 교단의 총회장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예수를 짊어지고 다녀야 된다'는 십자가 생활화 이야기를 빼놓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갈라디아 교회를 망치는 그리스도인 임을 표방하고 있는 유대주의적 거짓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갈1:8 이렇게 사도바울이 강경하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교회 뿐만 아니에요. 지금 세계 교회가, 십자가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몰라요.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닌다'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이 생활화를 얘기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여간 제가 알고 있는 한 없다는 거에요. 어디에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에서든지 그런 분들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왜 이 다른 복음,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십자가 생활화 이외에 다른 복음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말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까?
실제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흐름을 타고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말고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말고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하나님을 너희가 그렇게 쉽게 갈 떠날 수가 있느냐? 라는 얘기는 1:6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핸드폰과 같은 것입니다. 핸드폰이 없으면 통화가 안 되는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를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에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부르심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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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보좌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OO야' 하고 부르십니다.
그러면 그 'OO야'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을 때 내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근데 예수를 믿되, 율법주의적으로 믿고, 행동주의적으로 믿으면, 이 행동주의의 문제점이 뭐냐면 사람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이 세상 것을 보이는대로, 들리는 대로 닮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율법주의는, 우리 마음이 이렇게 세상 것을 닮고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상태를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추깁니다.
이제 그렇게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실제로 손에 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게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거 아닙니까. 근데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느냐 하면, 행동을 잘하라는 거에요. 행동을 잘 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에 들면 네가 마음에 담고 있는 세상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율법주의와 행동주의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돈이 많음으로써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내가 돈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예배당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뭡니까? 이 세상 것을 많이 갖고, 세상적으로 형통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거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당안에서 가난하고 실패하고 좌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명함을 못 내놓는 거에요. 축복받는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좌절하고 형통하지 못하여 실패자가 되는데 교회 안에서도 좌절하고 실패한 자가 되어, 두 번 실패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번만 세상에서 실패하면 되는데 예배당을 다니는 사람들은, 예배당에서 두 번 실패하는 거에요. 두 번 실패자로 낙인이 찍히는 겁니다. 이게 율법주의적 특성이에요. 행동주의적 특성이고요. 율법주의와 행동주의는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있는 상태,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절대로 문제시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 것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라, 봉사충성하고, 희생하고, 뭐 헌금하고, 이래라...
그러나 봉사, 충성, 헌금은 은혜를 받고 이미 하나님 자신을 복으로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인데 이런 열매를 자꾸 율법으로 제시합니다.
이제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바울은 정말 치열하게 이들의 거짓됨을 향하여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오늘 들은 말씀대로 저주를 서슴지 않고 선언을 하십니다.
여러분 제발 우리도, 사도 바울의 기준을 좀 가지면 좋겠어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닌다, 질머진다는 건 항상 십자가가 몸에 붙어 있다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생활화 하라는 얘기인데 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으면 '항상 네 마음이 하늘에 있는 내개로 올라오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게 되어 버립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도록 하지 않는 모든 가르침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우리도 우리 삶에서 적용하기를 바래요.
그래서 오늘 유튜브를 쭉 돌아다니시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가/ 안하는가?' 라는 관점하나만 가지고 설교를 한번 들어보세요.
그래서 십자가생활화를 얘기하지 않고 항상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걸 말하지 않고 '간구하자, 기도하자' 하면서 율법주의나 행동주의를 얘기하면 모두가 저주에 합당한 분들인 것입니다.
한번 이렇게 다른 복음과 참 복음을 구분하는 기준을 한번 연습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이 훨씬 단순하며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실제 복된 삶을 훨씬 더 강하게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1) 근데 이 <갈라디아서>는 고린도후서를 주후 56년 경에 기록한 뒤에, 57년에 로마서를 기록합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다가 고린도로 가서, 고린도에서 머무는 동안에 로마서를 기록하는데 그게 주후 57년 이에요.
그 56년 고린도후서 를 기록한 시점과 57년 고린도에서 로마서 를 기록한 시점 그 사이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근데 이 갈라디아 교회들은, 갈라디아라고 하는 넓은 지역이 있는데 지금의 그 터키죠.
그 터키 남쪽에 갈라디아 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 갈라디아 에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교회)들이 속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갈라디아의 교회를 1 차 전도여행 때 세우고 2 차 전도여행 때도 방문하셔서, 참 사역에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서 갈라디아 여러 지역에 교회들이 생겨나고 잘 진행이 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그리스도 인임을 표방하는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도착합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거짓 사도'들이 문제였어요. 거짓 사도라는 것은, 예루살렘의 공식 사도들의 집단이 아닌 유대주의를 추종하는 집단들에서 발행된 사도 증명서가 있었습니다.
사도 증명서를 갖고 왔기 때문에, '거짓 사도' 라고 말을 하는데 본문에서는 거짓 교사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 가지고 이들 거짓교사들이 한 얘기가 뭐냐면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하는 얘기는, 사도 바울이 무지하고 몰라서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왜냐하면 이들이 그리스도인 임을 표방하고 나섰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이들이 얘기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라고 가르쳤고
그리고 바울이 사도가 아닌 것은, 고린도후서에서는 증명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인간 세상의 기관에서 발행한 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사도가 아니라고 얘기하는데 여기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이 예수님의 12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사도가 아니다 라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의 내용은, 강력하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됨의 신적 기원, 즉 자기가 공생애 때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자기도 열두 제자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그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위탁을 받았다.. 라는 것을 강변하고
그리고 오직 구원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이루어 진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