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은 우리 인간을 공격하는 여러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쓴 무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죄악을 지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속임수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사단은 여호와의 전이 예루살렘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너희를 심판할 수가 있겠느냐며 바벨론에게 너희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된 확신을 주었습니다.
둘째, 죄를 짓고 나면 정죄합니다. 바벨론에서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지으려고 하자 사단은 죄 많은 너희들이 무슨 성전을 짓는다고 하느냐며 정죄하고 낙심시키는 것입니다.
사단은 죄를 짓기 전에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다가 죄를 짓고 나면 이제 큰일 났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는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나면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단의 전략과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아버지는 여호사닥입니다. 여호사닥은 B.C. 587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때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B.C. 538년 고레스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포로로 올 때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대제사장이었고 아들도 대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여호수아는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올 때 총독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백성들을 지도했던 사람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여호수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기 이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구약 표현이죠.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예수님의 인준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대적을 합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어찌 이런 사람이 성전을 지을 수 있겠으며 대제사장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사단이 송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28:2절을 보면 제사장은 거룩한 옷을 지어서 입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꾸짖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성전을 완공하도록 격려하십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슥 3:8).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들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로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사단은 여호수아를 정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변호하신다
사단은 우리를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사단이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했습니다. 사단이라는 말 자체가 대적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도 보면 남을 송사하고 고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단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라는 사명을 수행하려고, 예수님의 인준을 받으려는데 사단이 나서서 여호수아는 더러운 존재이므로 성전도 지을 수 없고, 대제사장의 업무도 수행할 수 없다고 송사하는 거죠.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기 전에는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사 64:6).
우리가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고 해도 모두 더러운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전적으로 인간은 타락된 존재입니다. 이런 사단의 송사를 부인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갈아입을 옷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에게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첫째, 사단을 책망하시고 둘째, 여호수아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부르셔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죗값을 갚으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분들은 ‘내가 교회를 나가고 싶다. 내가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찬송을 부르면 마음이 움직인다. 나는 이상하게 성경을 읽으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어서 자꾸 전도했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불러 믿음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여 천국에서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리인 이신득의의 원리입니다.
마틴 루터는 교회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예배당이 크고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이 폼나게 옷을 입고 있어도 이신득의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내가 노력해서 착해지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다 거짓된 것입니다. 또 내가 믿어서만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위를 해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도 거짓입니다.
이신득의는 모든 종교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고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옷을 갈아입고 머리에 관을 쓴 여호수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슥 3:6~7)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 도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함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함부로 살면 하나님께 징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높은 지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우리는 다시 되물어 봐야 합니다. “법률적인 의를 말합니까? 실질적인 의를 말합니까?”
우리는 법률적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의인이라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죄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법률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죄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실질적으로도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 3장은 이신득의의 위대한 교리를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단이 와서 네가 무슨 의인이냐고 물어보면 하나님께서 날 택하셨고 예수님께서 내 죄과를 제하셨으니 사단아 물러가라고 대답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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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불에 그을린 나무 존 웨슬리"
존 웨슬리는 1753년 11월에 심한 병에 걸려서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다시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웨슬리는 사람들이 ‘분에 넘치는 찬사’를 자신의 비문에 새길 것을 염려해서 스스로 비문을 작성했다.
그가 작성한 비문의 첫 문장은 ‘여기에 불에서 꺼낸 그을린 나무, 존 웨슬리의 육신이 누워있다’ 라고 시작되었다.
웨슬리의 아버지는 영국 성공회의 목사였다. 따라서 웨슬리는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는 엡워드 교회 목사관에서 자랐다.
1709년 2월9일 웨슬리가 아직 여섯 살이 채 안되었을 때 목사관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목재로 지어진 목사관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고 웨슬리의 가족은 허겁지겁 불길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어린 존 웨슬리는 목사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창 밖으로 구원을 요청했다. 동네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다리를 이용, 웨슬리를 구해냈다.
웨슬리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는 동네사람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웃들이여, 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는 나의 여덟 자녀를 모두 구원해주셨습니다. 집은 타게 버려둡시다. 나는 만족합니다.”
어릴 때의 이 사건은 웨슬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인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줬다. 한 연구가는 이렇게 말했다. “불타는 집은 멸망하는 세상을 상징한다. 타락한 인간의 영혼은 불에 둘러싸인 어린애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길에 에워싸여 있다.
한밤중에 불타는 집에서 구출된 웨슬리는 더 무서운 영원한 불길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영원한 멸망에 대한 기억은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즉 웨슬리는 이 화재사건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깨닫고 인류 구원의 사명을 느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