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슥3:1-10절 스크랩, 정리
스가랴 3장은 스가랴 1-6장까지 기록된 스가랴에게 임한 8가지의 환상 가운데
4번째 환상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이전 3가지의 환상은 예루살렘으로의 회복에 그 초점이 모아져 있다면,
본문에서 제시된 네번째 환상은 새로운 시대에 다가올
영적, 정치적인 지도자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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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사’하면 보통 ‘병 고치는 사람’이라는 개념이 먼저 떠오릅니다.
물론 의사에게 있어서 치료하는 능력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진단의 능력입니다.
우선 환자의 병이 어떤 것인지,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진단해 낼 수 있어야만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준다든지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끔 듣기도 하는 일이지만, 초기 진단이 잘못되어
전혀 엉뚱한 약을 쓰고 불필요한 치료를 됨으로써
오히려 병이 더 도지게 되는 환자들이 실제로 꽤 많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해방을 얻어 유다로 돌아와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고 있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에게 주신 4번째 계시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국 재건은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새로운 문제들만 계속 산적해 가는 마당이어서 도대체 어떤 것부터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해 주시면서
동시에 아예 처방과 치료 방법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꼭 바로 알고 있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진단이 무엇이며
또한 그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처방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이 문제에 대하여
유일한 정답을 오늘도 들려주고 계십니다.
◑1.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죄인’일 뿐입니다. 슥3:1~3절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두고 내려 주시는
가장 정확한 진단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4번째 환상을 통하여 실로 뜻밖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3:1
이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서 성자 하나님을 가리킬 때 쓰이는
대표적인 명칭입니다.
사단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는 고발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을 뜻합니다.
‘사단’이란 이름 자체가 원래 ‘고발자’라는 어원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
이 장면에서는 더욱 잘 들어맞고 있는 셈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당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중에
초대 대제사장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서 있는 어떤 장소를 생각한다면,
성전이라든지 제단 앞이라든지 해야 어울리는 법인데,
지금 여호수아는 천상의 법정에서 사단의 고발을 받으며
재판장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아주 이상한 장면이었습니다.
더구나 3절에 보면 그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대제사장이 보통 때에 입고 있는 아름답고 깨끗한 세마포
예복이 아니라 때가 새까맣게 뭍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백성의 대표인 그가 그 법정에서는 실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인의 신분으로 서 있음을 상징합니다. 온 백성들이 죄인이란 뜻이죠.
대제사장하면 두말 할 것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는
그 직분상 가장 거룩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성전이나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늘 거룩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선한 인상만 주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여호수아가 이처럼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그것도 사단의 고발을 받으며 서 있다는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며 수치스러운 모습이며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광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여호수아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눈에 비치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 모습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게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제 아무리 이 땅에서 남보다 좀 더 거룩하게 보이고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직 죄인이라는 피고의 입장만으로 설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나는 착한 사람이다,’라든지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들 말하는 것은 오직 우리 사람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하면서 하는 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일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도토리 중에서는 제일 크다고 해도
밤알 한 톨에는 비교의 상대도 되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사람이 제 아무리 남보다 좀 더 착하고 의롭다고 해도
저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무슨 양심적인 사람이니
성자니 하면서 자기는 죄인이라는 소리 듣기 싫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무슨 양심선언이 아니라 지독한 교만의 망언일 뿐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선한 사람이라 해도 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적으로 무력한 죄인이 될 뿐입니다.
아무리 양심적인 사람이라 해도 죄라고는 한 점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 누구나 다 예외가 없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고,
목사나 장로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사람 중에서는 더 이상 거룩하고 선할 수 없는 어떤 최고의 의인을 골라
그 자리에 세운다 하더라도, 그는 사단 따위의 악한 존재로부터도
오히려 고발을 받으면서도 말 한 마디 변명할 수 없는
실로 비참한 위치에 있는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죄와 아무 상관없이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해 주고 계십니다.
자신의 이 고질병을 모르면
아무도 자기 인생의 진짜 문제를 해결 받을 길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사람들의 눈에 설사 대제사장처럼 거룩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꼭 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 꼭 같은
죄인에 불과한 존재인 것을 먼저 겸손하게 깨닫고 인정함으로써,
그 병에 대한 바른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 어떤 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죄 용서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3:4~7절
4~5절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여호수아가 비록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그처럼 자기 죄에 대한 변호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있을 때,
실로 놀라운 일이 그 법정에서 벌어집니다. 그것은 재판장 되신 하나님께서
무조건 피고의 편을 들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우선 아까 2절을 다시 보시면, 여호와께서는 오히려 사단을 “책망”하셨습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심판대에 세워 놓고 신이 나서 침이 마르도록
그를 고발하고 있는 사단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고 두 번씩이나 호통을 치고 계십니다. :2
재판장이 죄인을 책망하는 대신, 검사를 향하여 대갈일성 야단치는
실로 신기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재판장은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2
그 재판장 되신 하나님은 이미 그 피고 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사랑하고 계시는, 아주 ‘편파적’인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은, 바로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난 중에서
건져 내어 주셔서 살아남게 만드신 백성이란 뜻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인들은 이처럼
이미 당신의 특별하신 사랑을 입고 있는 자들인데,
그런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감히 고발하느냐고,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발하는 사단을 향하여
오히려 크게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피고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재판장이 아예 처음부터
완전히 자기편이 되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고발하는 검사가 자기의 죄를 나열하고 구형하기는커녕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재판장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있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느 법정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의 그 어느 피고도 기대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일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함을 입은 백성을 아무도 정죄하지 못하도록
아예 그 고발자의 말문을 막아 버리시는 신기한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죄인이었던 피고에게는 실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은혜를 두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라고
감격에 겨워 외쳤던 것입니다.
그 재판장은 검사를 책망할 뿐 아니라
피고에게 최고의 선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의 “더러운 옷”을 당장 벗겨 버리게 하고
그 대신 “아름다운 옷”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갈아입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그것이 바로 “네 죄과를 제하여 버린” 표식이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따지고 선고 내린 후에 감형해 주신 분이 아니라,
아예 재판 첫 순간에 ‘무조건 무죄’라고 선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정결한 관”을 그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 주셨습니다. :5
대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관입니다.
정결한 관은 대제사장의 복장 중 하나로,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 모자로 여겨집니다. 출28:36
스가랴는 여호와의 환상 가운데 끼어들어, 하나님께 청원하기를
여호수아에게 대제사장의 관까지 씌워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통해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지위가
대제사장으로서 확실하게 회복되었음을 확증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신기한 재판 과정을 통하여,
처음에는 여호수아의 “앞”(1절)에 서 계시던 여호와의 사자는
이제 여호수아의 “곁”(5절)에 서 주시게 됩니다.
즉 그 재판은 죄인을 심판하시던 위치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아예 죄인과 나란히 서 주시는 희한한 장면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7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이어서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그처럼 죄 용서함을 선언 받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와 율례”를 준행하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들이
5절 이전에 기록된 죄 사함의 선언 이후에 따라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전 아님)
여호수아가 말씀 잘 순종하고 성전을 잘 섬김으로써
그 대가로 그의 죄과가 제하여 버림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 사함 받은 것을 무조건으로 먼저 선언해 주신 후에
이런 일련의 생활 지침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죄 용서함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에게 따라오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살 때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라는 축복이 이어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분의 성전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영적인 권위를 갖고 세계를 위한 제사장적인 사명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뜰을 지킨다’는 것은
성전이 우상숭배와 죄악들로 인해 더럽혀질 것을 미리 막는 사명을
다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은
제사장의 특권, 즉 1년에 한번 지성소를 들어갈 수 있었던
대제사장의 특권과 성소를 왕래했던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게 됨을 의미하죠.
곧 이 세가지의 결과는 모두 이스라엘이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된다는 언급과도 같습니다.
▲실로 우리는 얼마나 은혜로운 재판정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남으로부터 고발당하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못난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 나쁜 놈이라고 욕을 듣는 것,
죄인이라고 정죄당하는 것은 그 어떤 사람에게나 괴로운 일입니다.
비록 자신은 그런 고발을 당해도 싼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꼭 같이 죄인인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니 죄악 세계의 임금인 사단으로부터
그런 고발을 당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무력한 피고 입장에 있던 우리 죄인들을
뜻밖에도 오히려 감싸 주시고 전적으로 무죄 선언을 내려 주시는
실로 신기한 재판장이십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져야 마땅할 그 무서운 ‘백보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히려 빛나는 세마포를 입히시고 영광의 면류관으로 씌우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그 영화로운 천성으로,
그 하나님 바로 곁에 서게 되는 양자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씻고 찾아다녀 보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종교에서,
이처럼 은혜로운 죄 용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고 있습니까?
마땅히 죄를 심판하고 벌주실 그 재판장께서
오히려 철두철미하게 죄인의 편이 되어 주시는
이 황송스럽기 짝이 없는 은혜, 오직 인애와 자비가 한량없으신
하나님만이 내려주시는 이 놀라운 ‘오직 은혜’의 사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폴 틸리히는 인간에게 세 가지 불안이 있다고 합니다.
①첫째는 존재의 불안입니다.
삶 자체가 불안하고 우리 미래가 불안하고, 죽음 때문에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②둘째는 도덕적인 불안입니다. 죄책감에서부터 오는 불안입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평안이 없습니다.
③셋째는 영적인 불안입니다.
영적 공허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세 개가 다 한 줄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이 가지는 공통된 불안입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의 절반 정도는
‘자기가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퇴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임상보고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감정도, 그리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가 죄가 됩니다.
이런 죄책감과 억울함과 분노와 원망과 원한은 갖가지 질병을 초래합니다.
분노의 감정이 계속되면 인체는 서서히 산성화되어서
효소의 활성도를 떨어뜨리고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감소되어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사회도 죄용서의 선언들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는 갈등들이 계속될 뿐입니다.
교회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죄용서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용서의 사회, 화합의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거기(죄용서 받음)에 사람의 행복과,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런 무조건적인 사죄의 은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집니다. 3:8~10절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혜로운 죄 용서함을 시술해 주시는
유일한 의사 한 분을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8 *이들 : 복수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동료 제사장)들은 예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이 예표한 것은,
그들은 백성들의 대표인데,
하나님의 무조건적 자비로운 용서받음을 예표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보기도 하는데,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볼 때
이들은 백성들을 대표한다고 봅니다)
8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언하고 있는 바가 그것입니다.
‘돌’과 ‘순’에 의해서, 즉 메시아에 의해서
용서받을 사람들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순 branch’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렘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여기서 ‘가지’는 ‘순’인데,
하나님은 다윗 집에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며
그는 정의로 다스리며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죠.
‘돌’ 또한 또 다른 메시야의 상징이었습니다.
메시야는 그를 대적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었고,
버림받은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피난처가 되셨고,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셨으며,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이 돌에는 ‘일곱 눈’이 있었습니다. :9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하고,
결국 이 돌은 무한하고 전지전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한하고 전지전능하신 메시아의 사역은
이 땅의 죄악을 하루만에 제거하겠다는 약속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은 :9
일차적으로 지금 공사 중인 성전 기초석을 의미하지만,
미래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어질 성전의 기초석을 의미합니다.
미래에 오실 메시아께서
장차 “한 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기초가 되실
메시아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 돌에 “새길 것을 새기며”라고 했습니다.
우리 개역번역에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 원문의 뜻은 바로 그 돌에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는 글자가
새겨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9
즉 메시아의 영원히 효력 있는 사역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루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바로 그 날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 땅의 죄악” 전체를
다 순식간에 제하여 버릴 그 한 날이란 어느 날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한 날입니다.
▲어느 유대인 랍비가 바로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나는 모르지만 미래의 어느 한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모두 제함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9절
그때 예수를 믿는 한 소년이
“그 날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의 죄만 사해지는 날이 되겠습니까?
‘이 땅의 죄악’이라고 했으니 온 세상 사람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랍비가 대꾸할 말을 잃은 것을 물론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라면 비록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 예언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토록 명백한 것입니다.
죄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놀라운 사죄의 은혜는
오직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었던 까닭에 가능하게 된 것
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서부터 곳곳에 증거해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의사라고 다 같은 의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병명을 알고 처방전과 치료법까지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시술하는 의사가 가짜이거나 돌팔이이면
치료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러한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해 평화와
번영을 누려지게 될 것임을 또한 약속합니다. :10
▲여러분, 10절 말씀에 결론적으로 기록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체험하게 된 날이야말로
죄인에게는 실로 인생 최대의 기쁜 날이 됩니다.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는” 날,
즉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만이 교회를 중심으로
기쁨과 행복 가운데서 교통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죄 용서함 받는 것이야말로 죄인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며
그런 같은 은혜를 공유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야말로
지상 최대의 잔치가 연일 벌어지는 이 땅의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기쁨과 축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아무리 인간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꼭 같은 죄인이다.’라는 가장 중요하고 정확한 진단을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과 이 확실한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
더 급한 것이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 1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교만하는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어집니다.
하지만 그 진단을 겸손히 받고 자기 병을 인식할 때,
그 때는 이 의원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하고도 고마운 분인지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는 선언을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9
성취해 놓으신 주님께서는 바로 오늘 우리 각자 한 사람을 향하여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라고 또한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4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의사도, 그 어떤 다른 철학자나 과학자나 정치가도
내려 주지 못한 이 인생의 진단과 이 구원의 처방을 받고,
금세에서 죄 용서함의 은총을 입고 내세에서 영생의 축복을 함께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