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모두 8개의 환상을 보았는데 이 환상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16년 동안 중지했던 성전을 짓도록 격려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의 환상은 “성전 재건과 관련해서” 볼 때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환상은 화석류 사이에 붉은 말 탄 사람이 있었습니다. 붉은 말 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님께서 골짜기에 있는 화석류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통해서 성전을 재건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 재건의 주역은 유다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두 번째 환상은 네 뿔의 환상인데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그 뿔이 높고 정치적으로 힘이 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상 1장
3) 세 번째 환상은 손에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의 장과 광을 척량하는데 성전을 지을 장소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장
4) 네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짓도록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택하시고 더러운 옷을 벗기시며 깨끗한 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할 사람이 여호수아라는 말씀입니다. *3장
5) 다섯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지을 주체로써 여호수아와 함께 당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인 슥4장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슥 4:6) 다섯 번째 환상의 첫 번째 목적은 스룹바벨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19번째 왕이었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여호야긴은 고니야 혹은 여고냐라고도 하는데 이 왕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죽지 않고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에윌므로닥이 바벨론 왕이 되자 감옥에서 풀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주어서 말년을 아주 평안하게 살면서 자식을 낳았죠.
여호야긴은 전반적으로 악한 사람이었는데 말년에 자식을 낳은 것이 (대를 끊지 않은 것이) 그가 한 가장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야긴의 아들이 스알디엘이고, 스알디엘의 아들이 스룹바벨입니다. *마1장 스룹바벨이 왜 중요한 인물이냐면 스룹바벨에서 10대를 내려가면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요셉이 나옵니다. 그리고 11대 자손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스룹바벨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스룹바벨을 격려하여 일차적으로는 성전 재건을 완성하도록 하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1. 다섯 번째 환상의 내용은 무엇인가?
스가랴에게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가 스가랴를 깨우고는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러자 스가랴가 눈에 보이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순금 등대가 보입니다.” :2
그런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주발 옆에 보니까 좌우로 감람나무가 두 그루가 있고 두 개의 관이 연결되어서 주발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발에는 일곱 개의 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일곱 개의 등잔으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렇게 24시간 동안 기름이 공급되어 등잔에 불이 켜지는 것이 스가랴가 본 순금 등대의 환상입니다.
▲원래 순금 등대는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규례입니다. 모세의 규례는 출25장, 37장 그리고 레위기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순금 등대는 금 한 덩어리로 연결해서 만든 것입니다. 가운데 한 개의 등잔이 있고 양쪽으로 세 개씩 있어서 도합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 등대, 여기에 사용하는 기름은 반드시 순수한 올리브 기름이어야 합니다.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서 100% 순수한 기름으로 불을 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 순금 등대가 성소 안에 놓여 있는데 제사장이 저녁에 들어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며 아침에 들어가 불을 끄죠.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순금 등대와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무엇이 다릅니까? 두 가지가 다릅니다.
첫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제사장이 올리브 기름을 부어야 됩니다. 손으로 직접 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와 주발로부터 관이 연결되어 있어 자동적으로 올리브기름이 공급됩니다.
둘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지만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24시간 불을 켠다는 점이 다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의미를 몰라서 천사에게 물어봅니다.
◑2. 다섯 번째 환상의 일차적인 의미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기름입니다. 순금 등대에 기름이 자동적으로 공급되는데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금 등대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빛을 비추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면 성령의 지속적인 부으심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스룹바벨은 성전을 꼭 지어야 되느냐? 그 이유는 바로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실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입니다. 인간의 지도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빛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칸트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인간들에게 빛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어둠에 처한 세상에 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위해 성전이 꼭 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성전을 완공하는 일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공급되는 기름이 있어야 성전 재건이라는 사명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힘 might’이라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가진 집합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파워, 군사적인 힘, 경제력 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능력이 많아도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죠.
또 ‘능 power’은 지도자의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 지도력 등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는 성전 재건을 성공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부은 바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산 같은 방해세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모함했고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려 성전 짓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죠.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이런 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어도 평지처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슥 4:7).
둘째, 시작한 일을 완성하게 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4:9
공부하는 학생이 학위를 위해서 공부하려면 논문을 끝까지 써야 하듯이 성전을 짓기로 시작했으면 끝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끝내는 것은 끊임없이 공급되는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두 감람나무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고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게 하셔서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3. 다섯 번째 환상의 궁극적인 의미
이 예언은 성전의 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신약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순금 등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다 동의합니다. 계1장에서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일곱 금 촛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환상은 신약의 교회에 대해서 3가지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금 등대가 끊임없이 기름을 받아서 빛을 비추듯이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빛 비추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5:14).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비추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교회를 향해 명하신 첫 번째 사명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정치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좌파를 물리치려면 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우파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야지 교회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구제도 해야 하지만 구제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아닙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태어나 왜 살고 죽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둠에 처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승리는 어디에 달려 있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승리는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 네 가지 중요한 일을 행하십니다. 1) 그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2)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3)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배, 말과 생각, 행동까지도 지배하십니다. 4)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 좋은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중생이나 내주’는 기도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지만 ‘성령의 충만과 능력’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일과 우리 성도들의 성공은, 모두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나 받으면 되지 내가 그런 것까지 받아야 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도 필요하지만 여러분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똑같이 국밥장사를 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끓이는 국밥은 왠지 맛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작곡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 전도사님 아들이 작곡하는 노래가 한국에서 1, 2등 합니다.
그 많은 작곡가가 있어도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 작곡하는 노래는 유행가라도 1등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위 논문을 쓸 때 박사학위 논문이 잘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머리에 안 들어오고 우리말로 쓰는 것도 어려운데 영어로 써야 하니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성령의 능력을 주시더니 하루에 15장씩 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일 만에 다 써버렸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노래하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정치하는 사람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격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행하는 작은 일이라도 격려하고 기뻐하십니다.
스룹바벨은 손에 다림줄을 잡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스룹바벨이 손에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하지만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슥4:10
우리가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기뻐하십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넣어도 주님께서 다 아시고 기뻐하시는 거죠.
저는 성전을 짓는데, 한 사람이 돈을 크게 내서 짓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300억을 다 내서 성전을 지었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제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1만원이라도 내가 내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여 드린다는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1만원으로 성전이 지어지겠냐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1만원이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순종해서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일곱 눈으로 보시고 기뻐하시며 능력을 부어 성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구약시대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이 다릅니까?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지도자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모세, 다윗, 여호수아, 솔로몬,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옛날 구약시대 같으면 어림도 없었는데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시다가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나귀의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명도 죽이고 했는데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불순종하자 성령께서 떠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못하고 두 눈이 뽑혀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울도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 친구가 어떤 사람이 한 예언을 따라가다가 가정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하니까 가정이 화목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좇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한 장 더 읽으십시오. 사울 왕이 예언도 하고 별짓을 다 하다가 불순종하자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왔다가도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났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도들 안에 성령께서 일단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6)
신약시대 내내 계신다는 뜻이죠. (물론 개인적으로 성령이 근심하실 수도 있고, 식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불신자와 성도는 무엇이 다릅니까? 성도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불신자 안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청년들은 절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사람과 악령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이 함께 살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싸우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성령을 모신 사람들과 결혼해서 살아야 합니다.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다섯 번째 환상은 결국 성도의 인생과 교회의 모든 사역의 성공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능력을 부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성령의 기름부어주심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