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 P2

LNCK 2022. 11. 25. 14:37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이규현 목사) part.2 - YouTube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  P2          왕상17:1~16        2014.11.05.   
   *부제 : 광야 학교에서 믿음을 입증하라

여러분 우리가 이런 특별집회를 통해서, 영적인 도약을 한번 하자 이런 것입니다. 
비행기는 자동차의 신호등을 볼 필요가 없잖아요. 
비상했기 때문에, 하늘을 날랐기 때문에 
그런 장애물들의 걸려서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도약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여러분, 영적인 도약도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냥 되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훈련을 해야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사람인데, 그 사람을 훈련시키세요. 
절대 그냥 안 쓰십니다.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실 엘리아도, 앞서 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왔지만 
그를 부르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어디에선가 그를 훈련시키고 계셨어요. 

갑자기 어느날 엘리야에게 '너 이게 해!'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다양한 사건과 문제를 통해 훈련 시키시고 
어느 날 부르셨는데 

부르셨다고 끝난 게 아니었고, 또 계속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일들을 하세요. 
그래서 영적으로 우리가 다 이제 자라가도록.. 도약하도록.. 훈련하시는 거죠.

여러분 '훈련'이라고 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 하는 훈련 프로그램에서 하는 
훈련이 아니고, 그것도 포함되겠지만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훈련을 시키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앙은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는다는 거죠. 
엘리아의 훈련 장소가 처음에는 그릿 시냇가에서 시작이 됐는데 

이제 사르밧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장소는 사르밧으로 필드가 바뀌었습니다. 


은혜를 받는다고 신앙의 경주가 끝난 게 아닙니다. 
너무 은혜를 받고 간증하고 있는 동안에 또 다른 시험이 와요. 

그래서 은혜받고, 거기에 상응하는 시험이 이제 오는 거죠. 
은혜받고 그래서 시험 치고, 또 은혜받고 시험 치고... 이건 세상과 같아요. 

 

학생들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시험 치고, 또 공부하고 또 시험 치고...

그렇게 계속 하잖아요.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면서 이제 자라가는 거죠. 조금씩 조금씩! 

여러분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뭡니까? 시험이 있다는 거고요. 
시험이 있다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이 나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거죠. 

늘 우리가 시험을 받아들일 때 
'아이고, 왜 시험이 나한테 자꾸 오냐?' 그러지 마세요. 
그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에요. 

시험이 없으면, 이제 천국에 가셔야 돼요. 할 일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험이 있어야 돼요. 
그게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고, 나를 하나님이 훈련 시키시고 
나를 통해 하실 계획이 있는거에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자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시험, 힘든 훈련 일수록,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숨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폴 트루니에가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책도 썼는데,
우리의 삶에 모든 고통, 모든 시험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기를 넘나드는 훈련을 해야 되는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도 고난이 많았잖아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면요. 
정말 눈물겨워서 말도 못해요. 
역사의 굴곡에 우리의 민족처럼 시련과 고통이 많았던 민족도 드물어요.
지금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분단된 유일한 국가입니다.

이 굴곡의 역사, 고난의 역사, 시련의 역사! 
그런데 여러분 이런 고난에 뜻이 있었고, 그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또 이런 축복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죠. 

그리고 이 안에 하나의 뭔가 비밀이 있는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통일이, 하나님이 이 민족 가운데 큰 비밀 뚜껑이에요. 
이게 열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게 시련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게 (분단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왜 나의 삶에 어려움들이 계속 될까요? 
오묘하신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 거죠. 

너무 오묘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잘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한꺼번에 다 알려주시지 않아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다 알려주셔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다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다 알려주셔도 우리에게 유익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시험이 올 때에 
이런 하나님의 어떤 훈련들을 통해서 
왜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왜 이런 일을 제게 주십니까?' 이렇게 자꾸 why 를 질문하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 훈련들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디자인하십니다. 
훈련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게 뭐냐면 
내가 편안하게 살겠다는 걸 좀 내려놓아야 돼요. 편안하게 살겠다... 

자꾸 세상 사람들은 '편안하게, 안정되게' 요게 세상의 목표 잖아요. 
여러분 편안하면.. 편안한 것으로 끝나요. 

인생이 편안한 게 목적이에요?
편안하게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냐고요? 
그런 편안한 것으로, 그 인생이 끝나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어요. 

여러분, 편안한 삶을 추구하지 말고 
우리의 삶을.. 좀 힘들지만, 하나님의 훈련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실 때 
기꺼이 거기로 들어가면, 

좀 힘들고 어렵지만 그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디자인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서 영광스럽게 쓰인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본몬 왕상17장은, 사르밧 마을에서 훈련이 좀 더 강도가 높아지죠.  *17:9
엘리야에겐 이게 두번째 훈련이죠.  *첫번째는 그릿 시냇가 왕상17:3

그릿 시냇가에서 약 120키로 떨어진 시돈의 사르밧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하셨는가 하면,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시고, 그 과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받게 하셨습니다. 

자 여러분 기근 중에 과부였다... 
또 이 시대의 과부가 아닙니다. 아주 찢어지게 어려운 시대에요. 
그러니까 과거 엘리야 시대에, 도저히 과부가 살 수가 없는 힘든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그 과부가,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남은 조금의 기름으로 
이제 마지막 한 끼를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하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굶어죽기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세요. 
그리고 그 과부에게 가서 '엘리야야, 네가 먹을 것을 공급받으라'는 거에요. 
이게 기가 막힌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갔는데, 완전히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직면한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처한 어려운 현실과 환경이 변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동안 그릿 시냇가에서, 겨우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거 먹고 근근이 살아냈는데 
하나님이 새롭게 인도하시는가 보다 해서 '이제 조금 형편이 풀릴 만한가?' 했는데 

 

이제는 또 굶어죽기 직전에 있는 과부를 만나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양식을 먹고 죽으려고 하는 과부에게
그걸 얻어먹으라는 거예요. 

명색이 선지자인데,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고 
이렇게 멋있게 좀 쓰시지 않고, 이게 지금 자꾸 이렇게 하시는 것이
이게 얼마나 궁색한 일입니까. 빌붙을 데에 붙어야죠...

하나님이 지금 과부의 남은 것까지 빼앗아 먹게 하시는 것, 
이것은 파렴치한이나 하는 짓이에요.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의 훈련이 잔인해 보일 때가 있어요. 
'하나님, 정말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나보다 더 힘든 사람 만나서 어쩌라는 거예요?'

(목회에 이런 사람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흔들리면 잡아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더 흔드는 것 같아요. 
그럴 때가 있어요.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나이스 하게 진행되지 않아요. 
우리는 이럴 때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나 원망은 문제를 푸는 길이 아니에요. 

 

그런데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철저하게 이수한 학습이 뭐죠? 
엘리아가 이 그릿 시냇가에서 무엇을 학습했습니까?
내 환경보다 더 크신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나 상황보다 더 크신 분이고 
어떤 환경보다 더 크신.. 그 환경을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분.. 이것을 체험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어느 정도 환경에 밀리지 않는... 
지금 얼마나 극한 상황입니까. 

말라가는 그 그릿 시냇가에서 그 까마귀를 통해서 먹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이제 영적인 어떤 배짱이 생긴 거죠. 엘리야가 성숙된 겁니다.

여러분, 열악하고 어렵다고 그 환경을 거부해 버리면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져버립니다. 

환경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또 그걸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 환경 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우리가 순종을 배우도록 하세요. 
우선은 답답하고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영적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르밧'이라는 이름은 '도가니, 용광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훈련을 시키시는가를 약간 예고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은 용광로 같은 곳으로 밀어 넣으셔서, 우리를 훈련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시는 
아주 혹독한 훈련을 하나님이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도자기는 높은 온도의 불에 오래 구워야되죠. 
어려움이 지속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가 막힌 작품으로 만드시는 과정이에요. 
그냥 작품이 아니라, 탁월한 작품으로 다듬는 하나님의 손길이죠. 

여러분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요. 
계속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되죠?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참 신기하고 의아하죠.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데, 괴로워 힘든데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야고보는 시험을 당해서 기쁘게 여겨야할 이유를 약1:3~4절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런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여러분, 믿음의 삶은 시련이에요. 
믿음의 삶이 승승장구가 아니라, 믿음의 시련!

그 믿음의 시련,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그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갈 때 찾아오는 어려움을 제거해주시지 않아요. 
하나님이 당장 제거해 주시지 않아요. 대신에 인내하게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우리가 더 인내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거죠.
그래서 인내가 만들어져야, 시험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너희로 조금도 부족함이 하려 함이라' 

여러분, 미완의 인생을 
완성품으로 만드는 놀라운 축복은 
믿음의 시련속에서, 인내를 통하여 만들어낸다는 거죠. 

여러분, 시련속에서 우리는 힘들어요. 힘든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때 힘든 것을 거부하면 안 된다는 거죠. 힘든 것을 견디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진.. 
작가의, 장인의 손에 잡혀져 있는 시간이에요. 

고난 없이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 적이 없어요.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는 분명한 메시지죠. 

자, 아무것도 없다는 여인의 형편을 들은 엘리아의 반응이 뭐에요. 
'아 미안합니다!'가 아니었죠. 

여러분, 이제 떡은 없고, 한 웅큼 밀가루가 있고, 기름 약간 있는데 
'이것으로 떡을 만들어서, 나하고 애하고 먹고 같이 죽을 겁니다' 이러면 

엘리야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그리고 딴 곳으로 가야죠. 
그런데 막무가내에요. 

'나를 위하여 떡 하나를 만들어 주고, 그 후에 당신 아들에게 먹여라'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엘리야는 지금 남의 것을 얻어먹는 거지가 아니에요. 

자기 혼자 살기 위해 남을 착취하는, 그런 잔인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거에요. 

13절에 보면,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절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게 여러분, 엘리야의 확신이예요. 
지금 과부에게 남은 것 얻어먹으면서도 굉장히 당당해요. 당당한 이유가 뭐에요? 
내가 지금 얻어먹고자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내가 말씀에 순종함으로, 네게 축복이 임하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엘리야는 여기서 목양을 하고 있는 거예요.
기근을 당한 과부의 가정에, 죽을 수밖에 없는 한 가정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흘러가도록, 지금 목양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모습이 어떻게 나올수가 있습니까? 
그릿 시냇가에서 받은 훈련을 통해 다듬어진 결과이에요. 

믿음이 생긴 거죠. 
까마귀를 통해서 공급을 경험한 엘리야는 
과부의 빈 그릇도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과거의 영적 경험은, 낡은 추억의 앨범이 아니라 
오늘의 승리로 연결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 경험들이 쌓여져 가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이런 과부의 집에, 비가 지면에 내릴 때까지 
너의 통에 그 밀가루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공급을 선포할 수 있는 이 믿음의 담력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릿 시냇가에서 입니다.

여러분, 영적 경험들이 과거로부터 작곡차고 쌓여져서 
이게 점점 쌓여져 갈 때, 어느 날 우리의 입술해서 
믿음의 선포들이 흘러가게 되는 거죠

그냥 세월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런 영적 경험들이 쌓여져 가야하죠. 
그래서 엘리야는 영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확신이에요.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게 있었어요. 여러분, 신자에게 이게 있어야 됩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영적 배짱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까? 
이스라엘 역사 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성경 속의 하나님이 오늘도 내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벽장 속에 숨겨진 석고상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냉동처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의 역사는 오늘도 일어날 수 있고,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걸 우리가 믿는 거죠. 


▲시돈 땅 사르밧에서의 훈련은, 그릿 시냇가의 훈련보다 한 단계 높은 거에요. 
그릿 시냇가에서는 비교적 간단했어요. 

좀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가만히 혼자 앉아서 묵상하고 
까마귀의 배달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면 됐어요.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을, 그냥 보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앉아서 받아먹는 단계가 아니라 
자기만 아니라 남까지 먹여살릴 역사를 경험하는 단계였어요. 

기적은, 자신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경험하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기적의 전이현상입니다

기적이 나로부터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거죠. 
나만 기적을 보고 좋아라 하는 게 아니라, 이 기적의 전염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죠.

엘리야가 경험했던 이 기적이, 오늘 한 과부의 집에도 일어나게 되는거죠. 

신자는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배까지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기적을 구경만 하는 단계가 아니라, 기적 간증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끝내는 게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은 오늘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를 경험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나의 하나님의 얘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보면, 간증집회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신자들이 있었어요.
저는 간증집회를 별로 안 좋아해요. 

그분은 똑같은 간증 한 개 가지고, 온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간증하는데...
그러다 보면 약간 또 부풀리기도 하고요.
남의 간증 듣는 거 좋아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간증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간증을 통하여, 정말 내 주변 사람이 복을 받는 역사,
엘리아가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을 먹는 단계에서, 나누는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사는 때도 있어요. 
그러나 자신의 삶을 통해, 기적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의 수혜자가 아니라, 기적의 수여자가 되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베드로가 그랬죠.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나면서 못 걷게된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을 베풀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기적을 구경만 하던 사람이에요. 
그는 예수님의 곁에서 기적의 참관자였어요. 

근데 이제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기적을 
실제적으로 그의 입술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체험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제는 남의 간증에 겨우 기대어서 
내 신앙에 불을 붙이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직접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며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권세가 나타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여러분, 선포하셔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에게 임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오늘 내 삶에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혜를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불을 붙이는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잖아요. 
이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이런 말만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그냥 애들에게, 주위 연약한 사람들에게
'내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이래야죠. 

이제 여러분들이 심방하셔야 되죠. 
'집사님, 요즘 영권이 좀 떨어진 것 같은데, 내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이래야죠. 


여러분 엘리야는 시험을 통과했어요. 과부에게 요구했던 것은 구걸이 아닙니다. 
구걸하는 인생이란,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에 구걸하지 않아요.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아요. 사람이 나를 먹이지 않아요. 

기업의 오너가 나를 먹이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기업의 오너가 먹고 사는 거예요. 이런 자신감이 필요해요. 

'이 사람을 그냥 내쳤더니 우리 가게가 안 된다. 다시 불러야 되겠다' 이래야 되죠. 
'내가 직원할 테니, 네가 사장해라!'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돼요. 할렐루야! 

쫄아가지고 '나를 쫓아내려 하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되나?' 
눈치나 보면서 슬슬 꽁무니빼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거에요. 

여러분, 회사를 다니면 그 회사를 위하여 생명걸고, 기도 하셔야죠. 
'이 회사를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이 회사가 나 때문에, 내 기도 때문에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걸 안 해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요. 
우리의 공급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내 모든 생명 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어디 내놔도 우리는 살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살리신단 말이에요. 
그러니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엘리야가 지금 당당한 거예요. 
'내가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야.' 
지금 엘리야는 얻어먹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그 가정에 흘러보내는 마음이 있는거죠. 


여러분 과부에게 이제 초점을 맞춰 봅시다. 
16절이 우리의 눈에 확 들어오는 은혜로운 구절입니다.

15절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순종입니다..  과부의 순종이 어떤 순종입니까?
목숨 건 순종이에요. 절박한 순간이에요.

어미가 어찌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어요?
이 자식에게 남을 떡을 먹이고 이제 죽을 거에요. 그 동안 굶었어요. 
이제 죽기 직전이에요. 그래서 이 한 끼 식사라도 주고 싶어요. 생명과 같은 거에요. 
여러분 지금 이 과부는 쉽지 않은 순종이에요. 
'아니 지금 안 그래도 힘들고 어려워죽겠는데 
지금 내 자식 먹이고 죽을 만큼 이렇게 절박한 순간에...'

정말 그걸 내놓으라니 날강도 같은 엘리야죠.
여러분 쉽지 않은 순종, 생명을 건 순종이에요. 

여러분 곡식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 축복이,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에요. 
이것이 비밀입니다. 뭐 우리가 잘 아는 비밀이에요. 
그래도 이 비밀을 아는 사람만 알아요. 

머리로만 아는 사람은 많지요. 
과부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줄 마지막 유일한 한 움큼 음식을 선지자에게 줬어요. 
생명을 준 것과 마찬가지죠.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과부는 마지막 남아있는 것을 움켜쥐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빈통을 채우는 방법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빈통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내가 굶을지라도 
다른 사람의 필요, 선지자의 필요를 채우고자 할 때 역사가 일어났어요. 

절대적 진리는 이거예요. 사는 길은 죽는 것입니다. 
채우는 길은, 비우는 것에서 시작이 되는 거죠. 비워야 채워집니다. 
포기를 통하여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이 뭡니까? 
우리 기독교의 기본 중의 기본이 뭐냐면 
언제나 돌아가야 할 절대적 진리가 뭐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십자가는 뭐에요? 죽는 거에요. 죽어야 부활이 일어나요. 
부활은 하나님의 편에서 하는거에요. 우리 편에서 할 것은 뭐냐? 죽는 거에요. 

우리 편에서 죽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에서 부활을 일으키세요. 
오늘 이 사건이 그거에요. 십자가와 부활이죠.

지금 이 여인은 죽는 거에요. 이 순종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자기 절대적 포기이에요. 

여러분 죽고자 하면 살아요. 안 죽으려고 하면 죽어요. 
하나님의 축복을 베푸는 법칙입니다. 비울줄 모르면 채워지지 않습니다. 
포기를 모르면 풍성은 없습니다. 

만약 과부가 엘리야의 요청을 거절했다면, 그냥 떡 한 조각 먹고 죽었겠죠. 
여러분 내 것을 붙들고, 나만 먹고 살겠다고 고집하면 불행해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삽니까. 

또 힘들면 마음이 자꾸 좁아지죠. 
여러분 그때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사람이 진면목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사르밧 과부에게서 한 순종의 모델을 보게 됩니다. 
흉년의 때, 과부의 입장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할 만하죠. 
'선지자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나는 나눌 것이 전혀 없다'고 말을 해도 괜찮은 상황이에요. 

그러나 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선지자에게 주지 않아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이 없어요. 
진짜 가진 것은 먹고 죽을 한 끼였거든요. 

가난해도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과부는 자기가 나눌 것이 있다고 여겼어요. 
'내게는 아무 것도 없어요!'가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의 형편은 어때요?
막다른 길에 갇혀 있는 느낌, 
'나는 아무것도 없다. 나이도 늘고 벌어놓은 돈도 없고 
내 삶은 날마다 궁색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바닥나면.. 이제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사람들이 그렇게 되면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서 마음이 완전히 닫혀져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순간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에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기적을 일으킬 만한 밑천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있어요. 없는 게 아니에요. 

없으면 하나님이 달라고 하지 않아요. 뭔가 있어요. 
순종할 밑천이 남아 있어요.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수 있어요. 
문제는 우리의 태도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의 마음을 보고 싶어 하시는 거죠.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나요?
한 소년이 자기의 도시락을 포기하고,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죠.

여러분 남아있는 한조각의 떡에 집착하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순종으로 내어놓을 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죠. 


우리가 과부의 모습속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순종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을 우리는 헌금생활, 때로는 십일조,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이런 나눔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순종의 훈련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물질에 애착과 집착에 사로잡힐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며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각오로 
절대적 순종을 할 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까지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요. 
그러나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체험하게 돼 있어요. 

순종이 없으면 체험도 없어요.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으로 믿음을 입증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뭐에요? 믿음은 순종이 없으면 추상적인 것입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믿음은 결국 순종을 통하여 입증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설교제목의 주제로 정한 것이
"광야학교에서 믿음을 입증하라"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신앙이 오늘 이렇게 가벼워졌습니까? 
답은 딱 하나예요. 순종이 없기 때문이에요. 

말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이에요. 
신앙은, 지성의 작업이 아니라, 몸의 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화두이고 
저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규현 목사(설교자)가 입만 살아가지고... 
그런 목사가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말 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여러분 순종없는 신앙은 공염불과 같아요. 공염불!


한 여인의 믿음과 순종의 결단으로 일어난 기적 사건은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전조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가득찬 시대 속에 
한 평범한 여인을 통하여, 순종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어요. 

그리고 그 한 여인의 순종을 통하여 
그 가정의  가난이 끝나고,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진 것처럼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기근이 왔는데 *엘리야 당시 3년 반 기근 있었음
순종만 한다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한 여인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거죠.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