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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능 목사 간증 P1 <북한 선교 글 모음 > *진행 : 김북한 목사 (괄호, 검은색 글자)
*출연 : 김권능 목사 (괄호 없음, 파란색 글자, 현재 인천 한나라은혜교회 담임)
(오늘은 인천 한나라은혜교회 김권능 목사님을 자리에 모셨습니다. 목사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북한에서 온 가족이 다 나왔다고 들었어요. 그 사연부터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 번에 다 탈북한 건 아니고 제일 처음에 저하고 동생이 북한에서 탈북해서 나왔는데, 그 때가 1997년도 였죠. 그때는 진짜 '오직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라고 하는 게 지금은 상상이 안 돼요. 그러나 그때는 정말 그랬어요. 정말 절박했었죠. 당시 북한에서 제게 꿈이 있었다면 '20대에 입당한다!' 그게 꿈이었죠. (그렇죠! 북한 사람들에게는, 공산당에 입당하는 게 최고의 꿈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히지요. 그때는 몰라서 그런 꿈을 꾸었지요... 좋게 보면 그때는 참 순진했지요. 그랬다가 이제 조금 더 식량난이 어려워지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당원이 되는 꿈은 접고, '운전기사가 되자' 뭐 이런 꿈도 꿨다가 그것마저도 진짜 길이 다 막히더라고요. 제가 북한에서 할 수 있는 거는 다 해 봤어요. 뭐 장사도 해 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안 되겠다. 중국으로 넘어가자!' 해서 탈북하게 되었지요. 그래 가지고 국경까지 오는 과정에서 진짜 힘들었던게 역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기차에서 죽은 사람들 시신을 그냥 내던지는데... 그것을 제가 직접 목격했던 게 엄청나게 큰 아픈 기억이었고요... 1997년 2월 17일에 결국 제가 탈북을 성공했어요. 처음에는 동생과 제가, 중국에서 몇 달만 일해서 돈을 벌어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나왔는데, 그 돈이란게 쉽게 안 벌리잖아요. 낮에는 농사 일을 많이 해주고, 저녁에는 또 중국말을 공부하고.. 그러면서 1년을 살았는데, 그 사이에 우리 아버지가 또 넘어오셨던 거예요. 98년도에는 온 가족을 다 데리고, 중국으로 넘어오신 거죠. (※권능 선생의 아버지는 중국령 깊은 산속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산 아래 그 지역 조선족 교회와, 한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거기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탈북민들을 도우는 일을 했다. 특히 최광 선교사의 '탈북민 성경통독학교'에 학생들을 모집해서 보내주는 일종의 중간기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나중에 권능 선생은 최광 선교사의 성경통독학교에 1기생으로 수료하고, 권능의 동생들인 김영윤, 김사무엘 형제도 통독학교 2기생으로 자원하게 된다.)
저는 가족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는걸 처음엔 원치 않았어요. 왜냐면 우리 신분 자체가 불안하잖아요. 혹시 중국에서 일이 잘못되면, 도망치려면 제 혼자서는 어디든지 도망칠 수 있는데 가족이 다 같이 있으면.. 도망도 쉽게 못 치고 위험한 거예요. (저는 그때 보니까 권능선생이 부러웠어요. 온 가족이 다 중국에 넘어왔으니까. 여기 한국에 와서도 사람들이 제게 '혼자 왔어요?' 이 질문을 받을 때 제 가슴이 아파요. 마치 혼자 살려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거든요. 사실은 가족을 살리려고 제 혼자 탈북한 거거든요. 돈 벌어서 부치려고요.) 그렇죠. 한국에 처음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무리 남자라도 하나원(국정원 운영 탈북민 교육원)에서 처음 나와 가지고 배정 받은 집에 들어가 보게 되면, 전깃불도 켜기 싫다잖아요. (집에 아무도 없어서) 그리고 짐가방을 베고 그냥 누워서 천정 쳐다보고 있으면 눈물이 주루룩 나온데요... 아무리 남자라도! (제가 궁금한 게요. 당시 북한에서 교육 받고 자란 우리 때는 예수 믿는다는 거는 정말 미친 짓처럼 생각될 때 였거든요. 근데 권능선생이, 그때 진짜 일찍이 성경공부하고 예수를 믿게 된 과정을, 제가 자세히 알고 싶어요.)
제가 탈북해서 중국인 돌공장에서 일했는데, 주변에서 하는 말이 '저 주인은 임금을 안 줄 거예요..' 막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래도 나는 무슨 생각을 했냐면 '차라리 돈이 있는 나쁜 사장님한테 가기 보다, 돈이 없는 좋은 사장님 밑에 가서,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주면, 저 사장이 나 한테 임금을 주겠지!'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일했어요. 마른 돌가루 일을 하다 보니까 손이 다 텄어요.
삽질을 계속 하니까 손이 군데군데 찢어지고... 손이 잘 펴지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통증으로 막 밤에 깨기도 하고 그랬는데 어떤 분들이 돌공장에 찾아와 가지고, 나보고 '공부하러 가라'고 그러더라고요. 학교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곳이 있다고 얘기를 전해 준 거죠) 제가 갈등이 엄청 많이 됐어요. (그게 나는 알고 싶은 거예요. 그때 탈북한 우리들은, 다들 돈 벌기에 급급해 했는데, 공부하러 가면 좋긴 한데, 돈 벌지는 못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결심하게 됐죠? 제가 처음에 사역장에 2기생 학생으로 있었을 때, 권능선생이 1기를 수료하고, 사역장 책임자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에 늘 질문이 있었어요. '돈도 못 버는 이런 일을, 저 사람은 왜 하나?') 네, 제가 (성경공부 사역장에) 가게 된 것은,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직 예수 믿기 전 내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계산이 있어서 였어요. 그게 뭐냐면 '야, 내가 여기 돌공장에서 1년을 일한다고 했을 때 진짜 임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그건 미지수였어요. 중국인이 밥만 먹여주고 나중에 내쫓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신고하면 끝이죠. 근데 내가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첫째로는 중국어는 배우겠다.. 두 번째, 북한에도 학교에 가면 학생증을 주는데, 내가 여기서 학교에 가면, 내 신분 문제가 해결되겠다... 그런 계산을 한 거죠. 세 번째, 제가 알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두만)강을 사이에 하나 두고, 한쪽에서는 굶어 죽어가고 있어요. '중국은 같은 공산주의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돼서 잘 살게 되었느냐? 남한은 또 어떻게 저렇게 잘 사느냐?' 이걸 내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학교에 가면 다 알겠지...' 하고 갔는데, 첫날 저녁에, 제 꿈이 산산조각 다 깨졌죠. 가서 보니까 '이게 학교가 아니구나! 이게 학교라는 말에 내가 속았구나!' 가보니까 아파트가 컴컴한데, 거기 6층에 올라갔어요.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것도 정상이 아니에요. (무슨 신호가 있어요) 안에서도 한참 '턱, 따락' 하더니 .. 문을 살짝 열어줘요. 그래서 딱 들어가니까, 그때 제가 최광 목사님을 처음 뵌 거에요. 남조선 사람이 나와가지고 '아, 반갑습니다!' 이렇게 악수를 청하더니 '기도합시다. 다같이 손 잡으세요!' 그래서 둥그렇게 손잡고 서서 기도하는데 '하나님, 저희 민족을 살려주시고..' 하는데 딱 그때 제 가슴에 그 기도가 와 닿았어요. '민족을 살려달라'는 그 기도가, 참 제게 첫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기독교는,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기독교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북한에서 배운 기독교는,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아편이고 그리고 미제 침략의 앞잡이고... (심한 경우 애들 장기도 꺼내간다는 헛소문도 돌았죠) 내가 중국에 와서 봐도, 교회는 할머니들이 주축으로 모이는 것을 볼 때, '할머니들이 심심하니까 교회에 나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교회에서도, 뭐 '잘 살아라고, 선한 사람 되라고 가르치는 곳이구나' 교회를 그렇게만 (경로당쯤으로) 생각했었지, 뭐 교회가 민족을 위하고, 이런 곳임을 전혀 예전에 생각을 못했었던 거죠. 그러니까 제가 딱 드는 생각이 '이 분은 남조선 안기부구나!' 이렇게 생각한 거죠. 벌써 '민족'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안기부니까 '민족을 살려주시고' 이런 기도를 하나보다... 하고 제가 생각한 거죠. 하하하하.. 그때는 우리가 다 그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목사님을 보니까, 배가 이렇게 나온 모습이 보통 일반 사람은 아니겠구나... (잘 먹어서) 돈이 많겠구나.. 라고 생각을 한 거죠. 이런 생각을 하고 들어갔었는데, 가보니까 과거에 같은 돌공장에서 일하던 예수 믿었던 친구가 있었어요. 진칼빈 이라고! 얘는 새벽에 일어나서, 돌공장에서부터 기도하고, 찬송하던 친구였거든요.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요. '여기.. 학교는 어디야?' 나는 거기가 기숙사인줄 알았거든요. 진칼빈이 '무슨 학교?' 제가 '나는 여기가 학교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여기가 학교야!' '그럼 여기서 뭘 가르쳐 주는데?' '성경!' 그때 딱 드는 생각이 '아, 속았구나!' 였죠. 일단 밤이니까 자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친구(진칼빈)에게 '(우리) 갈까?' 하니까 자기는 더 있어 보겠대요. 그래서 저는, 친구도 먼저 와서 거기 있었고, '그래, 저 사람들 안기부 같으니까 (돈은 많겠지) 한 번 좀 있어보자!' 하고 그렇게 해서 '걸려든' 거죠. 하하하하 그렇게 성경통독 사역장에 들어가서, 성경책을 읽으면서 또 최광 선교사님이 소탈하게 삶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니까, 그러니까 조금씩 제 마음문이 열리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건가?' 그리고 그곳 환경이 (성경읽기, 기도를) 안 하면 안 되는 환경이잖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새벽기도부터 시작해서 성경읽고, 저녁에도 기도로 끝내고... (권능 목사는 첫 해 1기생으로 들어갔고 *1998 저 -성근 목사-는 다음 해에 2기생으로 들어갔잖아요. *1999 첫해에는 진짜 맨날 금식하고, 정말 빡세게 해서 어려웠다고 들었어요. 정말 그랬었나요?) 저는 금식을 잘 못하는 사람이에요. 삼일, 최고 많이 한게 칠일이에요. 열흘을 계획했다가 7일만에 공안들이 찾아와서 '야 빨리 사역장을 비우고 튀어야 되겠다, 튈려면 먹어야 겠다'하고 금식을 깼죠. 7일만에 끝냈어요. 최광 목사님도 그때 당시에는 누구 후원자도 없었어요. 그냥 (얼떨결에 한국에서 중국으로) 와서, 우리를 만난 것이죠. 그리고 우리 신변이 노출 될까봐, '한국에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겠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다. 나도 당신들과 같이 순교하겠다!'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와 같이 사역장에서 생활을 하신 거죠. 그러니까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저도 그 학교에서 2기생으로 성경통독을 했잖아요. 근데 나는 죽어도 안믿기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1기생들은 너무 잘 믿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그게 참 신기했어요) 그때 사역장 분위기가 진짜 좋았어요. 그때 우리 주광호 선생도 그렇고... (처음에 1기 사역장의 조교 역할을 했다) 나는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 꽤 오래 의심했어요. 보면 남조선 사람 (안기부) 같은데, 남조선 말을 잘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중국에 저쪽 흑룡강성 사람인가? 했는데, 중국말은 또 나보다 더 못하더라고요.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나름 의심하며 ... 시간이 지나갔어요. 어느 날 아침에 최광 목사님이 '다 모이세요!' 해서 갔는데 주광호 선생이 '나도 북한에서 왔습니다!' 라면서 설교를 하는데, 제 가슴에 '와, 이 사람도 북한 사람이구나, 진짜 거기서 내 마음이 활짝 열려진 것 같아요! (안기부가 아니라서) 근데 주광호 선생이, 북한에서 특공대 출신이잖아요. 그리고 말하자면 특수부대가 가다가 앞에 강에 살얼음이 있어요. 그러면 깨질까 말까 주저주저하는데, 거기서 먼저 튀어나가는 사람이 있죠. 이 분이 그런 스타일이에요. 설교할 때도 그 스타일이 나오더라고요. '여러분, 우리 동족들이 북한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막 이렇게 하는데 거기서 '우리가 동족을 살려야 되겠다' 는 결심이 드는 거죠. 나는 안기부에서 제게 총을 줄줄 알았는데, 총이 아니라 성경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그때 당시에 뭐가 제일 제 마음에 와 닿았냐면 순교자 전기가 이렇게 많이 있었는데, 그 책들을 읽으면서 '그렇구나! 역사라는 건 약자들이 묻히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약자처럼 죽어간 사람들이 있기에 그 위에서 세상은 바뀌는 거구나! ' 하는 그게 제 눈에 보여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북한을 위해서 순교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거기서 다같이 했던 거예요. (그 <순교자 전기>를 읽으면서 '약자들이 결국 죽지만, 그들에 의해서 역사가 바뀌는게 보였다고요?' 그러면 그때 그거 대단한 것을 보셨네요!) *믿은지 1년 밖에 안 됐으니까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성령님이 나한테 그렇게 역사하셨겠지요. 책에 보니까, 박관준 장로님이 일본 의회에 가서 '당신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유황불이 떨어질 것이다!' 이분은 한국에 돌아와서 감옥에서 순교했지만, 결국은 그 예언대로 됐잖아요. 역사를 바라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이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죽어간 사람들이 헛되어 죽지 않았구나!' 그때 내가 깨달았던게 뭐냐면... 그 (깨달음) 이전까지 나는 늘 '충성하겠습니다!' 했던 만큼 증오심 속에서 살았어요. '진짜 죽이고 싶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잖아요. 내 친구들이 군대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도 많았고, 다 불쌍한 거예요. '지금도 북한에서 저렇게 사나?' 그러면 정말 우리가 가서, 그 (자살)폭탄이 돼서라도 북한 정권을 망하게 하고 싶다.. 는 증오심이 있었죠. 그러다가 예수 믿고 나서, 이게 바뀐 거지요. '아, 순교자들이 죽어도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때 고백한 거예요. '내래 죽어도 좋습니다!' 라는 고백이 그때 한 거고 그래서 1기생들은 좀 뜨거웠던 것 같아요. *1998 여름~1999 봄 (네, 제가 보니까 1기생들은 정말 뜨거웠어요. 저는 2기생이잖아요. 2기생들이 1기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무슨 전설을 듣는 것 같았어요..)
▲특별히 1기생 중에 칼빈 선생, 그리고 요한 선생, 민선주 선생 그분들이 다 순교했는데... 그 분들이 좀 뜨거운 분들이었죠. (그렇게 뜨거웠으니까 순교자들이 나온 거죠) ♥순교자 진칼빈 선생, 박요한 선생 (위 동영상 11분25초경~) 성경통독반 1기생을 수료 후 중국 연변지역에서 탈북민 통독반 신입생들을 모집하던 중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가 순교의 길을 갔다. *1999년 6월경 후에, 다른 성경통독반 학생들이 잡혀서 북한 감옥으로 끌려갔을 때 북한 감옥의 벽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 칼빈- 이라고 쓴 글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순교자 민선주 선생 (위 동영상 13분15초경~) 성경통독반 1기생으로 중국에서 사역하다가 한국으로 오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하지만 동족의 아픔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래서 북한의 구원을 위해서 순교하자는.. 그런 분위기였고 그래서 나도 어디 (감옥) 다닐 때마다, 수시로 고백했던 게 있어요. '이제 나는 진짜 죽어도(순교해도) 괜찮다' 진짜 죽음을 많이 목격한 사람들은 사실은 '나도 저렇게 죽을까봐' 엄청 많이 두렵거든요.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다'라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때, 그 용기는 대단한 거예요.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성경통독반 '학교'에 들어가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신 거군요.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 북한으로 잡혀가게 되셨나요?) 제가 1999년도에 통독반 1기를 수료하고, 1999~2001년까지 이제 약 2년 동안 통독반을 새로 만들어서 이끌어 갔었어요. 그 와중에 같은 1기 동기생이었던 진칼빈과 박요한은 연변에서 새로운 신입생 모집하다가 북한 보위부에 잡혀서, 북송되어 순교 당했다고 앞서 말씀드렸죠.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내가 '몇 명의 생명(2기, 3기 교육생)을 책임지고 있다'라는 그런 부담감... 우리는 중국 공안이 아파트 계단으로 올라와서, 문을 두드리면 그걸로 끝장이죠! 우리가 신분증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냥 믿음 하나 가지고, 거기 통독반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늘 그거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다보니까 그 긴장감, 트라우마로 인해서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서안에서) 사역장이 여러 개로 늘어났어요. 여러 개 되자마자 장만식 선생이 (2기 수료 후) 꾸린 사역장이, 공안이 거기 덮쳐서 다 잡아가고, 또 장만식 선생은 순교당했어요. ♥순교자 장만식 선생 *당시 58세 (위 동영상 16분3초~ ) 탈북민 성경통독반을 2기생으로 수료하고, 3기생 통독반 사역을 이끌다가 *2000년 학생들과 함께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학생들을 도망하게 하였고, 본인은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한에서 탈북할 때부터 정치범이었던 신분이라, 중국 감옥에서부터 금식을 시작하였고, 북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니까 언제 또 어느 사역장에서 일이 터질지 몰랐어요. 그리고 내가 사람들을 연변에서 데리고 왔어요. '성경공부 합시다' 하고 데려왔죠. 그런데 그 학생들이 잡혀가면... 그 부모님들이 저를 보면서 '저 권능선생은 혹시 보위부 아냐?' 뭐 또 이렇게 의심을 하기도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부담감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겠는 거예요.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2000년 12월에, 제가 사역장에서 스스로 뛰쳐나간 거예요. 제가 사역장을 나가서 이렇게 있으니까 2000년 12월부터 탈북민을 한국으로 보내주는 선교사님을 만나게 된 거죠. 그때부터 제가 이제는 탈북민들을 한국으로 보내주는 일을 하게 된 거죠. 그때 한국에 가야할 사람을 세어보니까, 한 30명이 되는 거예요. 그때 그 선교사님이 나를 잘 본 것 같아요. '너 나하고 좀 같이 일 하자!' 하시더라고요. (그럼 자기는, 탈북민들 한국에 보내는 일을 하면서 본인은 한국에 갈 생각이 없었어요?) 아니, 이 사람들 먼저 보내고, 나도 뒤따라갈 생각을 했었죠. ('나부터 좀 한국에 가자!'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나는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살기보다 육체의 고통을 겪는게 나아요..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삽니다.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내가 중국에서, 복음을 위해서 살아갑시다. 예수 믿으면서 살아갑시다!' 이렇게 사역하고 전도하며 살았는데, '기회가 되었다고 해서, 내가 먼저 (전도의 땅을 버리고) 한국으로 와 버리면, 내가 거기서 전도의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에 만약 먼저 가겠다고 할 때는.. 나는 예수 믿지 말아야 돼죠. (기독교의 정신이 그거 아닙니까, 남에게 희생하고, 양보하고, 십자가 지고...) 그래서 나는 그때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자' 이런 마음으로 탈북민들을 한국에 보내는 사역을 했고, 한국에 가는 분들이, 떠나는 당일까지 저보고 '우리와 같이 갑시다,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좀 먼저 보내고, 제가 뒤따라가려고 했었는데.. 이 사람만 보내면 이제 끝일 줄 알았는데,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또 생기는 거죠. 그 사람을 한국에 보내면.. 또 다른 사람이 생기고... 그래서 '이왕 이럴 바에야, 나는 마지막에 가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죠. (*2001년 김하중 대사가 주중대사로 부임할 즈음, 탈북민이 한국대사관에 진입만 하면 보호받았다) 또 그때 중국에서 탈북민 아내를 만났는데,
그 즈음에 임신 7개월이 된 거예요. (그럼 그때 한국 선교사님을 도와서, 탈북민들을 한국에 보내는 일을 하셨는데 몇 명이나 한국으로 보냈어요?) 그때 한 30명을 보낸 것 같아요. 우리같이 이렇게 막 떠도는 사람들은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어요. '우리 아이들만큼은 좀 우리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떠도는, 나그네 생활하는 중국에서 신분도 없이..
또한 그런 신분도 없는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죠. 그래서 우리 부부가 (태어날 애를 생각해서) '한국으로 출발해야겠다!' 결심한 거죠. 그런데 가다가 7월에 잡힌 거죠. *2001년 경, 27세 그런데 저는 자신감이 좀 있었어요. '나는 외모가 선하게 생겨서, 길에서 공안들이 불심검문 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어디를 가도 많은 사람들이 다 검문을 당하는데, 나는 검문하지 않더라고요. 그때는 하나님이 특별히 저를 보호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으로 탈출하려고 (몽골로 가는 길에) 중국의 어느 도시에 도착해서 호텔에 들어가서 묶게 되었어요. 그때 호텔 분위기는 '조선족 신분증 가지고 호텔에 온 사람은 무조건 신고해라!' 이런 지침이 있었는데, 우리는 낯선 도시에 그 호텔에 모르고 (브로커 따라) 들어간 거죠. 그래서 호텔로비 직원들이, 우리 일행을 공안에 신고했고, 공안이 출동해서 우리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조선족 가짜 신분증'을 보여주었죠. 공안은 그 신분증을 보더니, 우리를 '조선족 브로커'로 의심하는 겁니다. 그렇게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이 집 주소가 맞냐?' 자기가 전화해 보겠대요. 그 지역 관청에 전화해 보면, 그 신분증이 가짜라는 게 금방 들통 나죠. 그런데 우리를 뒤따라 오는 다른 팀도 있었어요. 핸드폰에 계속 그들의 연락이 오는 거예요. '우리는 싸이안까지 왔다' 그러니까 공안들이 볼 때 '야, 너네 브로커 맞네!' 다른 팀은 저녁 5시 반 기차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부부, 우리 일행이 함께 붙잡혀서 공안국으로 가는데, 내가 잡힌 것은 괜찮았어요. 근데 그 공안 트럭에, 우리 사람들이 타고 쫙 들어오는 거를 제가 보게 될까봐, 그게 제일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막 기도를 하면서 '살려달라고, 이 사람들 제발 좀 살려달라고..' 저녁 5시반 기차로 탈북민들이 들어오는데... 나중에 저녁 7시에 공안 트럭이 빈 차로 공안국에 들어오더라고요. 안 잡힌 거예요. 알고 보니까, 공안 트럭이 역으로 가는 길에 오토바이랑 살짝 부딪혔나봐요. 그 오토바이가 도망가니까, 그거 잡으러 간다고... 역에 못 나간 거예요. 그래서 저희 부부는 공안국에서 '주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중국 공안들도 '야, 너희들 일단 이 신분증이 다 가짜야! 그리고 너희들도 연변 쪽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까, 너희를 연변으로 보낼 거고, 오늘은 구치소에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제가 '연변으로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우리가 조선족이 아니고, 북한에서 온 거 맞다!' 라고 실토 했죠. 그러니까 그때는 또 놀라더라고요. '너희가 진짜 북한 사람이야?' 이틀 동안 조사받으면서, 계속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근데 왜 그때 '북한사람' 임을 자백했나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연변으로 가면, 그때 대체적으로 나를 아는 사람들,
붙잡혀서 북송될 사람들이 많이 연변에 나가 있었어요. 즉 온성 보위부에 있었어요. (아, 맞아요. 거기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신분을 못 감추죠.
그렇게 판단하셨네요..) *기독교인이 아니라, 단순 생계형 탈북자로 보이고 싶어함 그래서 결국 사이안에서 북송이 됐는데, 중국 단동을 거쳐서 (연변을 거치지 않고) 북한으로 추방된 거예요. 단동을 건너면 바로 북한 신의주죠. ▲그때 저와 동행했던 다섯 명은 무사히 풀려서 나갔어요. 이 친구들이 몽골 사막까지는 갔는데, 그 사막에서 길을 잃어버려가지고, 거기서 8살 아이가 죽은 거예요. *半사막 영화 "크로싱"이 그 죽은 아이가 모티브가 됐죠. 그 아이가 그 영화의 실제 인물이었죠. (그 팀이었군요!) 그 영화에서는 아이가 혼자 방황하다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어른 5명이 있었어요. 그 팀에서 아이만 못 버티고 죽은 거죠. 그때 그 팀에 2살짜리 아기도 있었는데, 그 아이는 등에 엎혀서 살았는데, 여덟살짜리는 어른들도 힘드니까, 등에 업기가 힘들었죠. 이 아이가 닷새 동안 꼬박 사막에서 떠돌다보니까 기진맥진해서 죽은 거죠. ▲나는 북한으로 추방되기에 앞서, 중국 단동 감옥 6층에 조선족들이 북한에 밀입국하다가 잡혀서 들어온 사람들이 가득있었거든요. 거기 6층에 가끔씩 우리 같은 탈북민들도 들어가는 거죠. 제가 한 방에 들어갔는데, 한 명이 그 방에 있었는데 발에 족쇄를 차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들어가니까, 그 사람 족쇄에 나도 같이 채웠어요. 한 사람이 한 발씩 채워진 거죠. 과거에 쇠창살 뜯고 6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려서, 어떤 사람은 다리 부러지고, 또 어떤 사람은 도망치고 했대요. 그래서 그 후로 족쇄를 채웠다 하더라고요. 근데 이게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가야 되는 거예요. 북한에 넘겨지는 날도, 우리를 쫙 세워놓고, 두 사람에 수갑 하나씩 채우더라고요. 그래서 신의주 보위부로 들어가는데, 중국에서 한 5년 살다보니까, 1997~2001 북한에서의 감각을 잃은 거예요. 신의주가 낯설고 신기해서 '이게 이렇게 낡았었나?' 하고 둘러봤다니까요. 보위부 철장문이 쫙 열리더니, 소좌(소령) 계급장 박은 사람들 몇 명이 쭉 오더니 '야! 이 새끼들, 남조선 가려했던 새끼들이야?' 그때 어떤 모르는 삼형제가 같이 있었거든요. 그들이 '아닙니다' 하니까 '이 새끼야, 너희들 (조사)문건 미리 왔어, 얘네들은 따로 분류해!' 근데 나도 지금 한국 가려고 했다가 잡혀 온 거잖아요. 근데, 나에 대해선 아직 모르는 거예요, 그냥 단순 탈북자로 알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한국에 보내던 사람들도 많았고, 또 같이 성경공부 하던 사람들도 다 체포되고 했었는데, 그들을 거기 감옥에서 만나면.. 제 신분이 전부 탄로날 게 아닙니까! (저는, 권능선생이 성경공부 팀원 학생과 같은 감옥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보위부에서 신체검사 다 하고, 감방에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거기에 세 명이 먼저 와 있었는데, 보니까 다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하하하하 지금은 웃지만... 그때는 아주 난감하고 난처했죠... 내가 (서안 사역장 총책임자 하면서) 장만식 선생 사역장에 18살짜리 아이 광수를 보냈는데, 그 팀이 다 공안에 잡혀서 북송됐잖아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옆에 앉아 있었고, 세 명 다 아는 사람이었어요. '아... 여기서는 못 살 것 같다!' 왜냐면 그 광수 아버지라는 분이 내가 사역장에 데리고 왔을 때, 사람들이 보위부라고 의심했던 인물이었죠. 그래서 연변 산속에 살던 우리 부모들하고, 그쪽 부모들하고 서로 싸우고 난리쳤던 적도 있었더랬어요. 그러니까 두 집안에 서로 쌓인게 많았었는데... 벌써 그 광수 아버지는, 보위부에서 조사 받으면서 나에 대해서 다 말했다고 그러다라고요. (권능 선생을 만났고... 통독장에 갔고...) 그러니 거기서 '나는 이제 마음을 내려놔야 되겠다..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거죠. 이미 내 신분이 다 탄로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여기서는 살려고 노력하면 안 되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먹기 위해서는 소리를 질러요. '선생님, 몇 호, 누구, 물을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화장실 가고 싶어도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 허락을 받죠. 조금 있다가 나를 불러서 나갔더니 전화로 위쪽에 보고하고 있더라고요. "얘네가 지금 임신해서 들어왔습니다. 지금 8개월 됐답니다!" "이번에 여기 남조선 가려던 애들도 들어왔는데, 얘네는 아닙니다" 내가 거기서 '아, 보위부가 우리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구나!' 하고 깨달은 거죠.
*'단순 탈북자구나' 그러더니 "야, 그럼 너희들 여기서 원래 처녀 총각으로 중국 들어가서 만난거야? 아니면 여기서 가정이 있었던 사람인거야?" 그래서 "처녀, 총각으로 나가서, 중국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제가 '아, 우리 아이도 살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요. 왜냐면 우린 둘 다 북한 사람이니까... 다음 주 P2에서 계속
사도행전 강해,
사무엘하 장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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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냉수 한 그릇,
마가복음 강해,
예레미야 강해,
창세기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