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매년 5월과 7월에 금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거죠. :5 그것은 공의로운 재판과 :9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9 고아, 과부, 나그네, 빈자를 돌보는 것이며 :10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3
즉 신앙의 겉형식보다, 속본질에 더 치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공통 주제는 단연 ‘성전 건축’입니다. 귀환민들이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6장 끝절의 말씀이 이루어져서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너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6:15
그런데 반대로, 너희가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지 않으면, 아무리 금식을 종교행사처럼 잘 지키고, 절기를 잘 지키더라도 7장 끝절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거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7:14
이렇게 스가랴는 6장 끝절과, 7장 끝절에 상반된 예언을 했습니다. 너희가 본질적 신앙에 충실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먼데 있는 사람이 와서 성전 건축을 도와줄 것이나’ -6장 끝절
반대로 너희가 형식적 신앙만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 ‘너희를 열국에 다시 흩어버리겠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7장 끝절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가랴의 양면적 예언을, 귀환민들은 어느 쪽으로 받아들였을까요? 불행하게도, 비록 5백 여년 후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은 AD70년에 다시 성전을 잃고, 땅의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죠.
비극적 사건이 5백년 만에 재차 반복된 것입니다. 그들이 본질적/내면적 신앙을 발로 차버리고, 겉모습적/외면적 신앙에 치중한 결과입니다.
▲오늘도 유럽에 크고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여행의 주요 관광 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이 빛바래 졌기 때문에’ 건물은 남아있으나, 교회의 본질인 성도들은.. 마치 유대인들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죠.
‘신앙의/기독교의 본질과의 싸움’ - 이것은 정말 매시대마다 큰 도전이었죠. 마르틴 루터가 16세기에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것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의 회복에, 그 방점이 있었습니다.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중심으로 목회자들의 회개운동이 있었고, 유럽에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서, 본질적 신앙회복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청교도 신앙운동”이 일어나 <천로역정>등 많은 서적들을 저술하며, 1세기 전에 촉발되었던 종교개혁이 시들어갈 무렵, 다시 본질을 부르짖었죠!
18세기에, 다시 잠들어가던 교회를 깨우고 일어선 이들은 영국에서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감리교 운동, 회심 운동, 미국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있었습니다.
다시 1백년 지난 즈음에, 복음과 기독교는 본질에서 빗나가 힘을 잃어갈 때 19세기에 기독교 본질을 부르짖은 이들은 영국의 찰스 스펄전과 미국의 찰스 피니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학생들이 기독교의 불을 지폈는데, 바로 학생자발운동 SVM을 통해서, 개신교 선교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먼 극동의 조선 땅에까지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은 19세기 말에 미국 대학가에서 일어난 학생자발운동의 선교헌신자들이었죠.
20세기 초에는, 미국 LA에서 성령운동이 시작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죠. 1904년 에반 로버츠 중심의 웨일즈 부흥운동, 1907년 한국의 평양 대부흥운동 등이 일어났으며, 20세기 중엽에는 빌리 그레이엄 이라는 걸출한 부흥사가 일어났고, 비슷한 시기에 CCC등 대학생 전도운동도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말에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가 일어나서 미국과 온 세계에, 회개를 부르짖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최근에는 폴워셔 목사가 일어나서 (1961년생) 미국과 세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가 부르짖는 것은 ‘지적 동의는 참 믿음이 아니고, 회개를 통한 삶에 변화된 증거가 반드시 동반되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를 강조합니다.
꼭 유명하고 걸출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구 곳곳에 하나님이 기름 부르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언제나 쉬지 않고, 늘 있어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개신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에도 쉼 없이 있어 왔죠. 가톨릭은 1965년경 제2차 바티칸 공회를 통해, 완전히 환골탈태했습니다. 완전히 개혁에 성공해서, 이제 (좋은 의미로) 개신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도,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가톨릭 개혁파’들이 *교단이 독립 개신교회와 비슷하게 말씀운동, 성령운동, 제자양육, 선교운동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벗어난 교회는.. 결국 건물만 남게 되고,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는.. 환경에 관계없이 늘 부흥하는 것입니다.
30년 전에 ‘하나님의 열심’이란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은 늘 신앙본질 회복운동을 매시대마다 끊임없이 해 오셨고,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실 것입니다.
▲탈진한 성도들이 늘어가는 세상 신앙의 본질(다른 말로 내공)을 쌓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외면을 버린다는 뜻은 아님)
그러므로 아무리 큰 일을 치르고 나더라도.. 탈진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평소에 ‘자기를 부인(자기 죽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중증 탈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신앙의 지향점이 잘못 되었고, 내면보다 외형적인 면을 더 치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때는 본질적 신앙으로 회귀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체질 개선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안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탈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집에서 노는 사람도 다 탈진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전방위 압박을 가하잖아요...
혹시 내가 요즘 탈진하고 있다면... 내면적 신앙으로 급선회 해야합니다. 탈진은.. 외형적 신앙을 추구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역자의 본질
요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찾아가시는데
1) 고기잡이는 목회/선교사명을 암시합니다. 요21장을 눅5:1~11과 유사점을 보면, 어부들이 밤새껏 한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 점이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15:5)는 말씀처럼, 밤새 헛수고한 고기잡이는, 주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영혼구원 사역도 헛수고임을 강력히 시사하죠.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실 때는.. 상황이 바뀝니다. 예수님이 임하시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가득히 채운, 즉 많은 사람을 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죠.
주님의 임재, 주님의 말씀만이 목회/선교활동의 결실을 이룹니다.
요21장의 고기잡이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없이 하는 공동체의 노력(헛수고)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노력(풍성한 결실)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사도요한이 고기잡는 사건을 선별해서 요한복음서에 기록했던 거죠.
선교/목회는, 오직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을 따를 때에만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요21장의 갈릴리 바닷가처럼,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임재(현존)’하시는가요?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21:6 이처럼 ‘현존’(임재)하시는 주님이, 오늘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나요?
2) 사역자의 자세는 오직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세 번이나 배반을 했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라기보다는), 목회/선교는 오직 주님을 사랑함이 그 근본바탕이 되어야 함을 말해주죠.
영어 문법에 비교법, 최상급이 있듯이 가끔 성경에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말은 최상급의 강조를 뜻합니다.
종종 그 사랑은, 주님이 본을 보이셨듯이, 사랑하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대가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18절)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19절).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그 대가를 명심하고 나를 따르라는 초청입니다.
오늘날 목회/선교사역의 초대에 응하는 사역자들은, 주님의 초청이 그 어떤 초청인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역자들은, 예수님도 높이고, 자기도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목회/선교는 사역자가 절대로 ‘성공’하력ㅗ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에 “나를 따르라”(요21:19) 하신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역자의 보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