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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7장, 신앙의 본질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LNCK 2022. 11. 28. 22:16

◈슥7장, 신앙의 본질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여러 설교 정리

슥1~6장에서는 8가지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이 당면한 고난으로 인해 
낙심된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며 세상의 모든 죄악을 청산하고 
종국에 하나님 나라가 승리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7장에서는 내용이 전환되어 벧엘에서 온 자들이 제기한 금식 문제에 대한 
답변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곧 외적인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임을 밝히죠. 

내용구조는 금식에 대한 질문 (1-3절), 
형식적인 금식에 대한 책망 (4-7절), 
금식에 대한 참된 의의 (8-14절)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 해석

▲7:1~7절,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냐 
스가랴의 전반부인 1~8장에는 8개의 환상과 금식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금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2 ‘다리오 왕 제 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이들 이름이 바벨론 식 이름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이름을
가졌던 것처럼요. 그러니 이들을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임한 후(1:1) 2년 뒤 
다리오 왕 제 사년(주전 518년)에 벧엘 사람이 한 무리를 이끌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학자들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로서 벧엘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죠. 
이들은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며 질문을 합니다.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벧엘에서 온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한 질문은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행해 온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입니다. 

오월 중에 행하던 금식은 주전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사건을 상기하기 위한 것입니다(왕하 25:8-9). 

질문의 요지는 무너졌던 성전이 다시 완공되어 가는 상황에서 
계속 금식을 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4~5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금식에 대한 질문은 벧엘에서 온 사람들이 했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그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70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다섯째 달의 금식은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사건을 상기하는 것이고, 

일곱째 달의 금식은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임명된 
유다 총독 그달랴와 백성들의 죽음을 상기하기 위함입니다(왕하 25:25).
(*이 당시 금식은, 해뜰 때부터 해지기까지의 ‘낮 금식’을 뜻하는 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금식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칠십 년 동안 했던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이스라엘은 칠십 년 동안 매 년 금식을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금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버린 사건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죄악을 고백하며 회개해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의미는 흐려지고, 그저 종교행사로 변해버린 것이죠.

금식이 종교 행위로 변하게 되면,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금식으로 변질됩니다. 

오늘날 이슬람권과 유대인들은 금식을 자주하며 
금식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공로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할 때 금식, 작정기도에 대한 공로의식, 
보상의식이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했던 금식의 잘못된 부분을 이렇개 설명해 주시죠.

:6~7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7:8~14절, 이스라엘이 심판 받는 이유

:9~11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이스라엘에는 많은 죄악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진실한 재판을 하지 않았고, 
인애와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였으며, 
사회적 약자(과부, 고아)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삶에서 공의와 인애와 긍휼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등을 돌리며 귀를 막았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를 
12-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2~13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까? 
금식을 하지 않아서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속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반대로 이스라엘이 부르짖어 외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듣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심판의 모습을 말씀하시며 막을 내립니다.

:14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러 나라에 흩겠다고 하시며 
아름다웠던 나라가 황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단락 출처-


◑적용 : 하나님은 겉 형식보다, 신앙의 본질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한 것을 들었으나
형제에 대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치셨죠. 마5:22

이렇게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비로소 구약의 겉 형식적 신앙을 타파하고
신앙의 속 본질을 처음으로 가르치신 것처럼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미 ‘신앙의 속본질’이 강조되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새언약’에 대해서 예언할 때도 그랬고, 

더 앞서는 다윗이 시51:19에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더 앞서는 사무엘이 삼상15:22에서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렇게 ‘내면적 신앙, 겉 형식적 신앙이 아닌 속본질의 신앙’은
매시대마다 강조되어 왔었습니다. 

본문은 70년만에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 스가랴 선지자는 ‘속 본질적 신앙’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매년 5월과 7월에 금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거죠. :5
그것은 공의로운 재판과 :9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9
고아, 과부, 나그네, 빈자를 돌보는 것이며 :10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3

즉 신앙의 겉형식보다, 속본질에 더 치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공통 주제는 단연 ‘성전 건축’입니다.
귀환민들이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6장 끝절의 말씀이 이루어져서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너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6:15

그런데 반대로, 너희가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지 않으면, 
아무리 금식을 종교행사처럼 잘 지키고, 절기를 잘 지키더라도
7장 끝절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거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7:14

이렇게 스가랴는 6장 끝절과, 7장 끝절에 상반된 예언을 했습니다.
너희가 본질적 신앙에 충실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먼데 있는 사람이 와서 성전 건축을 도와줄 것이나’ -6장 끝절

반대로 너희가 형식적 신앙만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
‘너희를 열국에 다시 흩어버리겠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7장 끝절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가랴의 양면적 예언을, 귀환민들은 어느 쪽으로 받아들였을까요?
 
불행하게도, 비록 5백 여년 후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은 AD70년에 다시 성전을 잃고, 땅의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죠.

비극적 사건이 5백년 만에 재차 반복된 것입니다. 
그들이 본질적/내면적 신앙을 발로 차버리고,
겉모습적/외면적 신앙에 치중한 결과입니다. 

▲오늘도 유럽에 크고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여행의 주요 관광 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이 빛바래 졌기 때문에’
건물은 남아있으나, 
교회의 본질인 성도들은.. 마치 유대인들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죠.

‘신앙의/기독교의 본질과의 싸움’ - 이것은 정말 매시대마다 큰 도전이었죠.
마르틴 루터가 16세기에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것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의 회복에, 그 방점이 있었습니다.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중심으로 목회자들의 회개운동이 있었고,
유럽에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서, 본질적 신앙회복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청교도 신앙운동”이 일어나 <천로역정>등 많은 서적들을 저술하며, 
1세기 전에 촉발되었던 종교개혁이 시들어갈 무렵, 다시 본질을 부르짖었죠!

18세기에, 다시 잠들어가던 교회를 깨우고 일어선 이들은
영국에서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감리교 운동, 회심 운동,
미국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있었습니다.

다시 1백년 지난 즈음에, 복음과 기독교는 본질에서 빗나가 힘을 잃어갈 때
19세기에 기독교 본질을 부르짖은 이들은 영국의 찰스 스펄전과 
미국의 찰스 피니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학생들이 기독교의 불을 지폈는데,
바로 학생자발운동 SVM을 통해서, 개신교 선교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먼 극동의 조선 땅에까지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은
19세기 말에 미국 대학가에서 일어난 학생자발운동의 선교헌신자들이었죠.

20세기 초에는, 미국 LA에서 성령운동이 시작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죠.
1904년 에반 로버츠 중심의 웨일즈 부흥운동,
1907년 한국의 평양 대부흥운동 등이 일어났으며, 
 
20세기 중엽에는 빌리 그레이엄 이라는 걸출한 부흥사가 일어났고, 
비슷한 시기에 CCC등 대학생 전도운동도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말에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가 일어나서
미국과 온 세계에, 회개를 부르짖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최근에는 폴워셔 목사가 일어나서 (1961년생)
미국과 세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가 부르짖는 것은 ‘지적 동의는 참 믿음이 아니고, 회개를 통한 
삶에 변화된 증거가 반드시 동반되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를 강조합니다.

꼭 유명하고 걸출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구 곳곳에 하나님이 기름 부르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언제나 쉬지 않고, 늘 있어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개신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에도 쉼 없이 있어 왔죠.
가톨릭은 1965년경 제2차 바티칸 공회를 통해, 완전히 환골탈태했습니다.
완전히 개혁에 성공해서, 이제 (좋은 의미로) 개신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도,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가톨릭 개혁파’들이  *교단이 독립 
개신교회와 비슷하게 말씀운동, 성령운동, 제자양육, 선교운동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벗어난 교회는.. 결국 건물만 남게 되고,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는.. 환경에 관계없이 늘 부흥하는 것입니다.

30년 전에 ‘하나님의 열심’이란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은 늘 신앙본질 회복운동을
매시대마다 끊임없이 해 오셨고,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실 것입니다.

▲탈진한 성도들이 늘어가는 세상 
신앙의 본질(다른 말로 내공)을 쌓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외면을 버린다는 뜻은 아님) 

그러므로 아무리 큰 일을 치르고 나더라도.. 탈진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평소에 ‘자기를 부인(자기 죽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중증 탈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신앙의 지향점이 잘못 되었고, 
 내면보다 외형적인 면을 더 치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때는 본질적 신앙으로 회귀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체질 개선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안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탈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집에서 노는 사람도 다 탈진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전방위 압박을 가하잖아요...   

혹시 내가 요즘 탈진하고 있다면... 내면적 신앙으로 급선회 해야합니다.
탈진은.. 외형적 신앙을 추구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역자의 본질

요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찾아가시는데

1) 고기잡이는 목회/선교사명을 암시합니다.
요21장을 눅5:1~11과 유사점을 보면, 
어부들이 밤새껏 한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 점이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15:5)는 말씀처럼,
밤새 헛수고한 고기잡이는,
주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영혼구원 사역도 헛수고임을 강력히 시사하죠.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실 때는.. 상황이 바뀝니다.
예수님이 임하시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가득히 채운, 즉 많은 사람을 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죠.

주님의 임재, 주님의 말씀만이 목회/선교활동의 결실을 이룹니다.

요21장의 고기잡이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없이 하는 공동체의 노력(헛수고)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노력(풍성한 결실)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사도요한이 고기잡는 사건을 선별해서 요한복음서에 기록했던 거죠.

선교/목회는, 오직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을 따를 때에만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요21장의 갈릴리 바닷가처럼,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임재(현존)’하시는가요?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21:6
   이처럼 ‘현존’(임재)하시는 주님이, 오늘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나요?

2) 사역자의 자세는 오직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세 번이나 배반을 했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라기보다는),
목회/선교는 오직 주님을 사랑함이 그 근본바탕이 되어야 함을 말해주죠.

  영어 문법에 비교법, 최상급이 있듯이
  가끔 성경에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말은 최상급의 강조를 뜻합니다.

종종 그 사랑은,
주님이 본을 보이셨듯이,
사랑하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대가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18절)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19절).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그 대가를 명심하고 나를 따르라는 초청입니다.

   오늘날 목회/선교사역의 초대에 응하는 사역자들은,
   주님의 초청이 그 어떤 초청인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역자들은, 예수님도 높이고, 자기도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목회/선교는 사역자가 절대로  ‘성공’하력ㅗ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에 “나를 따르라”(요21:19) 하신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역자의 보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