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슥8장,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

LNCK 2022. 11. 29. 20:32

◈슥8장,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 


◑본문 해석

▲1~17절,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 

7장과 8장의 배경이 되는 때는 페르시아 다리오왕 제4년입니다.  B.C. 518년
B.C. 520-516년까지 4년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주어진 때는 성전건축이 한창일 때입니다. 
1-17절은 포로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주시는 회복의 약속과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1~2,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질투’는 ‘열심’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질투하신다고 하는 것은 ‘관계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좋은 예는 ‘부부’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만약 내 배우자가 나 외에 여러 사람도 나와 동일하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행동할 때, 질투심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배우자에게 열정이 없는 거죠. 

하나님께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엉뚱한 삶을 살 때,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유다 백성들이 죄를 범함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중요한 두 동사가 있는데, ‘돌아오다’와 ‘거하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미 먼저 돌아와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하다(사칸)’은 ‘임시적으로 체류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랫동안 거주하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끝까지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도시를 
‘진리의 성읍’으로, 
여호와의 산(시온산)은 ‘성산, 거룩한 산’이라고 부르시겠다고 하십니다. 

‘진리와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또렷한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속적 가치관이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여 구별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4~5,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예루살렘이 망하고 난 후에는, 길에 늙은자들과 소년·소녀들이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수십 년이 지나면서 나이가 든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젊은 사람들은 다 끌려갔기 때문에 아이들이 태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이제는 자녀도 낳게 되고, 
나이가 들어서 지팡이를 잡을 때까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인데, 
문자 그대로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참 이런 도시, 이런 나라가 좋은 도시, 좋은 나라입니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시 예루살렘은 참 황량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하고서 
70여 년이 지난 후, 느헤미야가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때도 예루살렘에 살 사람이 없어서, 자원자들과 백성 중에서 
10분의 1을 제비를 뽑아서 거주하게 했습니다. 
정비가 된 것도 없었고, 외적이 침입하면, 공격대상 1순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에 나이가 든 남녀가 살게 될 것이고 
소년·소녀들이 뛰놀게 될 것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이 보기에 신묘막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이 두 구절에 동일하게 나오는 말이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입니다. 
이것은 학개 선지자가 성전을 짓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는 말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에 비하면,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짓는 성전은 
외형적으로는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첫 성전을 보았던 나이가 많은 자들은 
그 지대가 놓이는 것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하셨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복이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12,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포도나무가 포도를 맺고, 땅이 곡식을 결실하며, 하늘에서 이슬이 내려서, 
백성들이 이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끊어지는 일이 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조상들이 과거에는 어떠했었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14~15,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과거에는 조상들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다’라고 하십니다. 
도끼로 장작을 내리치면, 장작은 쩍쩍 갈라집니다. 그렇게 날카로운 
도끼날로 장작을 내리시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 ‘격노하다’입니다. 

조상들이 지키지 않은 결정적인 두 가지 죄는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께서는 나라가 망하고, 먼 이방까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허락하시는 징계를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은혜를 베풀기를 작정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16~17,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진리, 진실, 공평, 화평과 
같은 것들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8~23절, 금식에 대한 답변

18~23절은 7장에서 질문했던 금식에 대한 실제적인 답변입니다.

7:2~3절에 보면, 벧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가 지난 여러 해 동안에 해 온
그대로, 다섯째 달에 애곡하면서 금식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었습니다.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넷째 달의 금식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인 B.C. 586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왕에게 공격을 받아서,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기 시작한 날을 기억하는 금식입니다.

다섯째 달의 금식은 4월 금식에서 약 한 달 후인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이 완전히 파괴되고 불타버린 날을 기억하는 금식입니다.

일곱째 달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임시 총독으로 세워진 그달리야가
이스마엘에 의해서 암살된 것을 기억하는 금식입니다.

열째 달의 금식은 다섯째 달의 금식의 약 2년 전입니다.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2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완전히 무너졌는데,
그 포위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금식입니다.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금식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야 나라를 되찾을 소망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픈 금식의 날들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회복은 내가 하게 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쁨’, ‘즐거움’, ‘희락’ 등 3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의 표현으로 하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입니다. 사43:18~19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금식일을 축제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이어서는 세계 여러 나라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23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그 날에는 유다 백성들과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함께 서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에서 ‘10’은 ‘많은 수, 충만한 수’를 뜻하죠. 
수많은, 충분한 숫자의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세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가랴에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이 모두 52번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 8장에만 17번이나 쓰였습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지금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니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회복이 확실하다는 뜻이죠!      -이 단락 출처-


◑적용

▲1. 신앙에 질문은 좋은 것입니다.
스가랴 7장과 8장은 하나의 연결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7:2~3 

그러나 이제는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금식하는 절기를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당시 금식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도 라마단에 무슬림들은 40일 동안 그렇게 금식하죠.)

백성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질문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이것은 참된 부흥의 징조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행해온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의 전통이 성경에 맞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해볼 필요가 있죠. 
하나님께서도 이런 질문은 기뻐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와 
1536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존 칼빈과 같은 분들도 동일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하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질문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읽으시다가 영적인 질문을 많이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성경적인가?’ 
이런 질문을 우리는 종종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대단히 중요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스가랴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들에게만 하지 않으시고 유다 백성 전체에게 하십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질문해서, 대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덕봤다는 뜻이죠.

△우리가 가끔 겪는 일인데,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는 구절이 나오죠.
그럼 그 구절을 갖고서,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그렇게 며칠~ 몇 달이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질문이 풀리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깨닫게 해 주신 거죠.
대체로 그 때는, 그 구절과 그 깨달음이, 내게 오래도록 남는
귀한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어쨌든 ‘질문’은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질문이나 마구 던져서는 당연히 안 되고요.
하나님께 질문을 할 때도, 먼저 ‘마음의 안정’이 중요합니다.

(안셀름 그륀의 글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탁월한 영성가이신 한 수도원장께서 
하루는 수도원 문을 나서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수도원 담 안으로부터, 크게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죠.
그는 놀라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담 벽에 귀를 기울여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늘 옥신각신하던 두 형제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아침부터 크게 다투고 있는 두 형제를 보자
수도원장은 덩달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순간 당장 달려가서 이렇게 혼냈을 것입니다.
“너희들, 그 작은 것 하나 양보 못하면서, 도대체 뭣 하러 수도원 왔어?
그러려면 당장 짐을 싸라!”

그러나 원장은 다시 발걸음을 계속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길고도 긴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계속 걸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담을 세 바퀴나 돌고 난 후에야, 수도원 안으로 들어간 수도원장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두 형제를 불러서 타일렀다고 합니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의 문제에 개입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분노나 화로부터 자유롭게 했습니다.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돌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습니다.

그가 담을 따라 돌던 시간은
어쩌면 다투고 있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다투고 있던 형제들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감정의 영향을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최소화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조금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급하게 질문하며,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천천히 걸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걷는 것이 낫습니다)
자신의 질문을 먼저 스스로 정리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 안 지나서 곧 깨달음을 주실 것입니다.


▲2. 노인들과 아이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8: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길거리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니까, 노인들이 지팡이를 잡고 
앉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년 소녀 아이들이 뛰노는 것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
죽지 않고, 결혼해서 출산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5절,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이 말씀은, 세계 저출산율 1위인 한국 나라에 사는, 
교인들이 특별히 암송하며 기도해야될 제목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교회에 노인들이 많아집니다. 
왜냐면 노인들이 열심히 사회, 교회, 가정을 위해 기도하러 모이기 때문이죠.

부흥이 일어날 때, 교회에 아이들이 많아집니다. 
왜냐면 부모들이, 열심히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기 때문입니다.
학교 캠프나 다른 행사에 보내기보다, 교회에 우선해서 보내기 때문이죠.

저는 우리 교회에 노인들도 많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들, 청소년 청년들도 많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이한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아이가 많아지는 일이 도무지 벌어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하나님께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야, 참 신기하네, 어떻게 저렇게 아이들이 많아질 수 있어?’ 
라고 기이한 역사가 일어난 것으로 감탄하나 
하나님께는 그 정도 일은, 기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되어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3.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의 근원이 됩니다

23절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슥8장의 주제는 ‘회복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는데, 
마지막 23절은 ‘이방 사람 10명이 유다사람 1명의 옷자락을 잡고 따라가는’
일이 발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신 창12:2절이 생각나게 합니다.

위 23절은, 선교학계에서 잘 알려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말세에는, ‘언어가 다른 10명 (10은 만수滿數를 뜻함)이 
하나님의 백성의 옷자락을 잡고 따라오게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예전에 책에서 읽은 일화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북대서양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라스팔마스에는
한국의 어업전진기지가 있었는데, 원양어선들이 거기서 출어를 했죠.

그 라스팔마스에는 많지는 않지만, 선원 가정 중심의 교민들이 있었고,
어김없이 한인교회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장 한 분이 은혜를 받아서 예수를 똑바로 믿게 되고
교회에 거액의 헌금을 했습니다. (은혜받고 응답받아 드리는 헌금은 괜찮죠)

그러자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잘난 체 한다, 집안 망한다, 제 정신이 아니다’ 등의 비난이 쏟아졌죠.

그런데 그 후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 선장 집사님이 나가서 그물을 내리면, 거기에 참치 같은 물고기 떼가 가득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항하자마자 며칠이 안 되어 곧 배는 만선으로 귀항했고, 
만선일 경우, 그 수익은 몇 천만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다들 우연이겠지... 하고 구경하며 쳐다보았답니다. 

그런데 이 선장 집사님의 배가 조업을 나가자마자
또 만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연속으로 만선을 기록한 것입니다.

한 번 만선이 되면 ‘우연’이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기적’이 되지요.
그런 기적이 연속해서 계속 일어나자..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그 선장을 비난했던 다른 선장과 선원들이  *한국인들
이제 그 선장의 배를 뒤따라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 선장의 배를 뒤따라가면 만선을 이룬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선장들까지.. 다 그 선장 집사님의 배를 뒤좇아갔다는
간증을 책에서 읽은 적이 기억납니다. (*책 제목 <알타비스타의 십자가> 품절)

이 실제 일화의 주제는 ‘예수 믿는 사람 뒤따라가면 부자 된다’가 아니라
성도가 예수님을 똑바로 믿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며
그가 속한 직장, 사회, 공동체에서도 많은 유익을 끼치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까지, 그를 따르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본문의 23절 말씀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