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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11

LNCK 2022. 12. 1. 16:16

[Ep 11.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 좋습네다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11          요14:21                 <지난 글 모음> 

◑제4장  두만강은 홍해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에 있나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 

권능선생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장만식 아바이 사역장 전원이 공안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경, 서안
(*나이가 당시 58세여서 '아바이'로 호칭)

이웃 주민의 신고로 공안이 달려왔을 때 
장아바이 사역장은 열심히 통독하는 시간이었다. 

공안들은, 이들이 신분증도 없고 중국말도 하지 못하자 수상이 여겨 
전원 공안국으로 연행해 갔다. 
그 당시는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에 대해, 북한정부에서 엄중히 처벌하던 때였다. 

우선 중국에서 한국사람을 만난 북한 주민들은, 그 동기와 이유, 상황을 불문하고 
무조건 정치범으로 분류하여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우리나라도 북한사람과 접촉하면, 간첩으로 몰리던 시절이 있었음)

그 다음으로 교회에 가서 성경공부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자백할지라도, 최소한 5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장아바이와 그 학생들은, 북한 정부의 관점에서 제일 엄중한 두 가지 죄를 
다 범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인을 만났을 뿐 아니라, 성경공부까지 했으니 
이들에게 가해질 형의 무게가 어떨지 생각조차 끔찍했다. 

다음 날 권능선생으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장아바이를 제외한 학생들 전원이, 무사히 공안국을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그들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들었다. 

공안국으로 연행된 장아바이 일행은, 조선족 여자공안이 통역하는 가운데 
심문을 받았다. 심문을 통해 공안들은, 

이들이 북한에서 넘어와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 임을 알고, 

사역장을 후원하는 나에 대해 캐내려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학생들이 모른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고, 
공안들은 계속 몽둥이로 모질게 때렸다. 

하지만 학생들은 정말 나에 대해 전혀 몰랐고, 
서안 Xian에 다른 사역장이 있는지도 몰랐다. (보안상 안 가르쳐줌)

공안들은 학생들에게서 책임자가 장만식 아바이라는 사실만 알아내자 
장아바이만 심하게 때리면서 심문을 계속했다. 
60세가 다 된 노인이 얼마나 아팠으랴... 하지만 그는 모질게 얻어맞으면서도 
나와 우리 사역장에 대해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공안들은, 이들을 공안국 앞마당 담장에 한 줄로 세워놓고 
공안 두 명을 보초로 남겨놓고, 모두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때 몹시 얻어 맞아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장아바이가 형제들에게 제안했다. 
'내가 저쪽 담장 쪽으로 도망치면서, 여기 있는 공안 애들을 유인할테니 
너희들은 그 사이에 저 반대쪽 낮은 담장쪽으로 가서, 넘어 도망들 가야 한다!' 

잠시 후 감시가 조금 소홀해진 틈을 타서, 장아바이는 높은 담장쪽으로 냅다 달려가 
담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보초를 서던 공안들이 장아바위 쪽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 다른 형제들은, 일시에 낮은 담장쪽으로 달려가, 담을 넘어 도망을 갔다. 
결국 다시 잡힌 사람은 장아바이 뿐이었고, 
다른 형제들은 모두 무사히 공안국 담장을 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담장을 넘은 학생이 목격한 것은, 두 공안이 장아바이를 붙잡아 
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나와 모든 선생들은 울었다. 

 

▲권능선생 사역장에서 장아바이와 함께 공부한 동기(2기)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형제들에게 밥도 해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조용조용 타이르며, 손잡고 기도해주었다. 

또한 겸손하기 이를데 없어, 아들 뻘되는 권능선생에게 
깍듯이 '선생'이라고 존칭을 썼고, 1기 다른 선생들에게도 
마치 스승을 대하는 학생의 태도로 공손하게 대했다.  *자기는 2기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많은 할아버지였으며,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무나 쉽게 다가가 투정 부릴 수 있는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장아바이는 이미 북한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북한의 한 농촌에서 당비서를 하던 사람으로 
당비서로 있으면서 체제의 문제점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체제의 모순에 대해 알고 있어도 후환이 두려워 
감히 입 밖에 내지 않는데, 천성적으로 남을 잘 믿는 그는 
술자리에서 자기의 불편한 심기를 다 털어 놓고 말았다. 

그리고 고발당해, 그날로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생활고에 허덕이다 못해, 결국 중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중국으로 나오게 된 장아바이는, (북한에 가져갈) 식량도 구하지 못한 채 
나오던 그날로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다행히 보위부에서는 그가 중국으로 넘어간 지 며칠도 못되어 잡혀온 점을 고려해 
몇 달 동안 강제노동을 시킨 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 후부터, 그의 주변에는 감시원이 따라 붙게 되었다. 
하루는 배고파 굶고 있는 그에게, 그 감시원이 빵 몇 개를 주며 
짐짓 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척 하며, 그의 속내를 떠 보았다. 

그러자 순진한 장아바이는, 그에게 중국에서 느낀 것들을 솔직히 다 말해버렸고 
결국에는 재판도 없이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정치범수용소로 호송되었다. 

악명 높은 북한 정치범수용소는 
건장한 청장년들도 3년 이상 버텨내기 어려운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 곳에 60세가 가까운 노인이 종신형을 받고 들어간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였다. 그래서 그는, 어차피 죽을 바에야 수용소에서 죽느니 
차라리 이것이 더 낫겠다 생각하고, 수용소로 끌려가는 길에 대못을 삼켜버렸다. 

그는 곧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그의 옆에는 그를 호송해가던 보위부원들이 그의 수족을 침대에 묶은 채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다. 하루는 보위부원들이 술을 먹고 취해서 골아떨어지자 
주운 머리핀으로 가만히 수갑을 풀었다. 

그리고 보위부원들의 옷을 벗겨 바꿔 입고, 권총까지 훔쳐서 
아물지도 않은 배를 끌어쥐고 다시 중국으로 도망쳐 왔다. 

이런 그가 북한으로 잡혀 나가면, 사형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 목숨, 자기가 맡았던 학생들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장만식 아바이는 선생으로 세워진 후, 두 번이나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너무 고맙수다. 
나 같은 놈도 살려주려고, 이렇게 먼 중국에까지 고생고생 오게 했으니 말이오. 

그래서 나는 맨날 혼자 있을 때면, 하나님 생각하면서 운다우. 
아 글쎄 내 같은 놈이 뭐이라고.. 글쎄 자기 아들 Jesus 을 그 고생시키고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끔찍하게 죽여버린다오?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고맙수다! 

선교사님, 나 이제 더 바라는 거 없수다. 
내가 이만큼 산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구원까지 해주셨으니 
나 이젠 죽을 때까지 북한 선교만 할 거외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 
이 말씀처럼, 그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학생들을 살렸다. 

그리고 곧장 북한으로 호송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금식하면서, 

온성 보위부집결소에서 죽었다고 한다. *함경북도 최북단

주님은 이 죽음을 순교로 이름 하시며, 그가 흘린 피로 인해 
북한 땅에 주의 날이 속히 이르게 하시리라... 

▲이 무렵 나는 또 하나의 아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1기 사역초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주광호 선생의 체포 소식이었다. 

그가 청도 옆 일조(도시)에서 사역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을 때
특별 호송요원들이 북한에서 파견되어 그를 압송해 갔다고 한다. 
탈북자 호송에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광호선생보다 앞서, 광호선생의 부인 서자매가 
북경 천안문 기도회 때, 천안문 광장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새벽녘에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는데 
그녀는 북한 감옥에 들어가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감옥에서도 하루 종일 기도하는 그녀를 향해, 보위부 사람들이 
'당신, 예수 안 믿겠다는 말만 해라. 그러면 당신 가족들의 위치와 체면을 봐서 
풀어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단호히 거부했다. 

오히려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지금까지 나를 한번도 부인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선생님도 예수님을 믿어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믿어보면 알 수 있어요!' 
라고 목숨을 내걸고 보위부 사람들을 전도하며 
사형을 앞두고도 조금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식은 상해 북한자매 사역장에서 공부하던 최 자매가 
온성 보위부 집결소에서 서자매와 같은 방을 쓰다가 
재탈북하여 나에게 알려주었다. 

또 2002년에는, 우리 사역장에 3기생 출신인 이양원 선생의 아내
나이모가 온성 보위부 집결소에서 서자매와 한 달 동안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서자매가 보위부 사람들에게까지 담대히 복음 전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이라면 다 자기 목숨이 아깝고, 죽는 것이 두려울 텐데 
어찌 저렇게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저럴 수 있을까? 
나도 석방되어 중국에 가면, 하나님을 믿어야겠다고 거기서 결심했었다'는 
이야기를 울면서 내게 들려주었다. 

광호선생과 그의 부인 서자매도 순교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두 사람의 순교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그냥 살려둘 북한 정부가 아니었다. 

주광호선생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리웠다. 


♣떠나버린 권능선생, 돌아온 성근 선생 

'선교사님 저 연변으로 가렵니다!'
하루 종일 말이 없던 권능선생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뭔 소리예요?'

사역장에 수가 많아지다 보니, 관리하기 힘들어 푸념하는 소리인 줄만 알았다. 
(그때 권능 선생이 서안에서, 여러 개의 사역장 총괄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온화하던 모습과는 달리, 권능선생은 아주 강경하게 나왔다. 
'저 이제 더 이상 이 사역 못 하겠습니다. 그만 연변으로 돌아갈까 봄다.' 

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는 유일하게 남은 1기생 선생으로, 나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전체 사역을 이끌어 왔다. 

'권능선생, 왜 그러세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도 함께 참아냈잖아요. 
한창 사역이 커지고 있는데 왜 떠난다는 거예요?'

'저는 선생님이 하시는 이런 사역 방식이 납득이 안 돼요. 
왜 자꾸 사람을 돌려보네요?
그 사람들이 연변으로 가면 집이 있습니까, 친척이 있습니까? 
그들이 어디 가라는 겁니까?' 

그동안 광수 윤수형제를 비롯해  *3기생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학생을 몇 차례 돌려 보냈고 
연변 쪽에서 보내주는 학생 중에서도, 신원을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면

처음부터 받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 모집을 나갔던 선생들이, 간혹 대상 파악을 잘 못하고 
글을 모르는 학생들을 데리고 오면, 선생들에게 
가능하면 기역 니은부터 가르쳐서라도 사역장에 계속 남아있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믿음은 들으면서 난다'고 
정 안되면 듣기라도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좋지만 
정작 당사자들이 견뎌내지 못했다. 

한글을 잘 읽는 사람들도 하루에도 몇 번씩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사역장인데 
글을 모르는 이들로서는 오죽답답하겠는가! 

내가 일부러 등떠밀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돌려보내는 것이다. 

나는 몇 시간째 권능선생에게 이런 사정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같은 탈북자 입장에서 못마땅하게만 생각하던 그는 
다음 날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일률적 통제 사회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북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바로 배척해 버리는 것 같았다. 

권능선생이 떠난 후, 나는 정말 말 그대로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버린 것 같어서, 너무 힘이 들었다. 

그는 이 사역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여태껏 많은 선교사들이 북한선교를 해왔지만 
그처럼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깨닫고 있을 뿐 아니라 
또 풍부한 사역경험을 쌓은 북한선교 일꾼은, 아직 나온 적이 없었다. 

그는 또한 8명의 1기생들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하나의 열매였다.   주1)
그는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한 사람이었다. 

그 한 사람이, 이제 더 자라고 자라, 앞으로 얼마나 놀랍게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게 될지... 나도 다 모를 일이었다. 

아픈 마음으로 그를 보내면서, 너무도 귀하게 준비된 권능선생이 
어디를 가든 주님이 꼭 붙드셔서 
지금보다 더 크고 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키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권능선생은 이곳을 떠나, 그 후로 다른 한국 선교사를 도와서
탈북자들을 한국에 보내는 사역을 했다https://rfcdrfcd.tistory.com/m/15980494


▲권능선생을 잃은 상실감으로, 나는 모든 것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여러 사역장에서 훈련받고 있는 형제들 속에서도 
그와 같은 큰 열매가 반드시 나온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권능선생이 떠나간 후 권희선생 사역장을 파송시키기로 작정하고  
권희선생 사역장으로 갔다.  *2기생을 몇 차례로 나누어 파송

'매번 파송되어 갈 때마다, 공안에 체포되는 선생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가는 선생들은 철저하게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체포되지 마세요. 
제발 체포되지 마세요!' 

'선교사님 일 없습니다. (no problem이란 뜻)
그렇지 않아도 우린 그 문제 때문에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했습니다. 
저희는 한 사람도 체포되지 않고, 꼭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마음 놓으십시오!' 
라고 권희선생이 말했다. 

다른 선생들(파송받은 자들)도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마디씩 했다. 
'선교사님 일 없습니다. 맘 놓으쇼. 
한국 사람들은 이럴 때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파이팅 파이팅! 
선교사님 파이팅, 그리고 우리도 파이팅!' 

익두선생 사역장에서 온 홍만식 선생도 한마디 거들었다. 
'선교사님 주님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한테 기도만 하면 다 됨다. 마음 놓으쇼!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일인데,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린 꼭 돌아옵니다, 선교사님!' 

권희선생 사역장 선생들도 긴장과 흥분을 안고 파송되었다. 

홍만식, 김누가, 강규홍 세 선생을, 권희 선생에게 책임지워 떠나보냈다. 
권희선생을 연변으로 보내면서, 익두 선생을 만나면 서안으로 보내라고 부탁했다. 

 

익두선생(1기)이 내려오면, 그에게도 몇 개의 사역장을 맡겨
그도 권능선생 못지 않은 큰 사역자로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서안으로 돌아오지도 않았고, 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 곁에서 사라지는 선생들로 인해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 고통은 천천히.. 그렇지만 계속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나를 아프게 했다. 

▲권희선생 사역장 선생 들을 파송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서안
사역장에 여러 일을 처리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갑자기 무언가 불에 타는 냄새가 났다. 

깜짝 놀라서 휴지통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불을 사용하지 않는 화장실에서 타는 냄새가 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 시선은 변기 속에 고정되었다. 

지금 막 내 몸속에서 나온 대변이, 불에 탄 것처럼 새까맣고 
코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로 탄 냄새가 심했다. 

'스승이 싼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까만 숯덩이처럼 타서 나온 대변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권능선생이 떠나고, 사역장을 돌보는 많은 일들을 혼자 감당하자니 
나는 24시간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사역장마다. 열 명에 여덟 아홉은 병자여서, 그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거나 
약을 사주거나, 같이 기도해주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여러 사역장을 다니며 사역비와 옷가지들을 공급하는 일, 
술 담배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 학생들끼리의 싸움, 
학생들이 사역장을 뛰쳐나가거나, 공안이 덮치거나 하는 여러 사건들의 뒷수습, 
사역장을 떠나는 학생을 잘 다독거려 돌려보내는 일, 

학생들을 보충하는 일, 새로운 학생들을 역에서 맞이해서 
사역장에 들어갈 때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있는 일, 
성경책을 비롯해 필요한 여러 서적과 
부서지고 고장난 여러 물품을 공급하는 일 등등 

해도해도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갔다. 

내 몸은 이때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등과 목, 머리에 심각한 마비가 왔다. 
손톱과 발톱은 푹푹 꺼지면서, 가운데가 갈라져 웅덩이가 생기고 
어떤 땐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침이 주르르 흘러내리기도 했다. 

사역비 때문에 간간히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한의원에 들러 진찰을 받으면 
의사 선생님이 내 뒷목에 침을 수백 개는 놓았다. 

그러나 그 많은 침이 어깨에 깊숙이 들어가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을 맞은 후 부항을 뜨고, 10~15분 쯤 피를 뽑아내면 
약 5 밀리리터 정도의 피가 두부처럼 엉겨서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엉긴 피를 뜯어내면서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합니다. 
침몰직전입니다. 숨은 쉬고 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라는 말을 했다. 
내 몸은 망가졌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몸 상태로도 
사역을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바울이 수많은 고난을 당한 후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한 말씀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을 
새겨보았다. 

내가 이렇게 힘들고 지치고 아파도 
구원의 하나님께서, 내가 겪는 이 고통을 통해 
북한 사람들을 지금 구원의 자리로 인도에 가신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길거리에서 중풍병자를 보게하심으로 
'내가 지금 그래도 저사람 보다는 낫지 않은가?' 생각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셨다. 

설령 내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는다 해도 좋았다. 
빨리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할렐루야!' 하며 감사할 일이니까! 

▲이런 중에 말없이 어디론가 떠났던 성근선생이 돌아왔다. 
(성근선생은 사역장을 맡아서 인도하다가, 힘든 관계로 무단으로 이탈했었음)

힘들던 나날 속에 돌아온 성근선생 때문인지, 조금이나마 마음이 개운해졌다.

(하나님은 권능선생이 떠난 이후에, 성근선생을 다시 보내주신 셈이다)

결국 선교사는 사람 때문에 울고, 또 사람 때문에 웃는다. 
성근선생은 나를 만나자마자 웃으면서 말했다. 

'선교사님, 그냥 공부만 하게 해주십시오. 저 같은 놈은 사역같은 거 못함다.' 
그는 완전히 각설이 행색이었다. 

그를 정선생 사역장에 학생으로 보내며 
은혜를 회복하고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랬다. 


♣하나님, 술 좀 마시게 해주세요. 

오랜만에 나는 순교선생 사역장에 들렀다. 
형제들도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와 선교사님 오셨다. 선교사님 안녕하십니까? 보고 싶었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몸이 졸아 들었습니까?' 

'선교사님 잘 오셨습니다. 오신 김에 맛있는 것 좀 사주시오. 
깍쟁이 순교선생은 사역비가 아깝다고 잘 안 사줌다. 
근데 왜 몸이 이렇게 말린 시래기처럼 됐습니까?' 

학생들은 밝은 모습으로 떠들어대며 나를 반겼다. 
사람들마다 인사하는 방식은 달라도 
하나같이 몸이 많이 축난 나를 걱정해주었다. 

'선교사님, 그 선교사님 속태우는 새끼들 우리한테 좀 알려주쇼. 
우리가 가서 몽땅 허리때기를 끊어놓겠습니다. 
어떤 새끼들이 선교사님을 이렇게 힘들게 함까? 말만 하쇼.
우리가 당장 가서 그저...' 

소광형제가 주먹을 쳐들며 떠들어대는 것을, 다른 형제들이 이어받았다. 
'예, 옳소, 소광형제 말이 옳소! 선교사님, 말만 하시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던 이 사람들이 
이제는 사랑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식사합시다. 별로 좋은 건 준비 못했지만 그래도 같이 합시다!' 

조용히 앉아 주님께 기도하는 나를, 학생들이 식당으로 이끌었다. 
식당에 가보니 상에 차려진 건 밥과 국 뿐이었다. 

그런데 국이, 국물을 우린지 일주일도 더 되었는지 
뿌연 색은 사라지고, 냄새만 간신히 나는 소뼈 국물이었다. 

순교선생(2기)은 역시 권능선생(1기)의 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능선생은 사역장에 돈이 떨어지면 
소뼈를 며칠씩 우려서 밥과 함께 먹곤 했었는데 

순교선생이 그것을 그대로 배워서 다시 써먹고 있었다. 

학생이 늘어나자 사역장마다 매달 공급할 수 있는 생활비는 
언제나 최저생계비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사역비 관리를 잘못하거나, 다른 지출이 생기면  *약값, 집세 등 
다음 사역비가 공급되기 전까지 이렇게 소뼈 우려낸 국물만 먹어야 했다. 

그래도 형제들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감사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식사기도 당번인 철남 형제가 대표기도를 하였다. 
그 사람의 기도 내용에, 그의 영적 상태가 투영되기에 
내가 사역장을 돌아볼 때, 언제나 학생들의 기도 내용에, 나는 관심이 많았다. 

철남형제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사역장에 일과가 너무 힘듭니다. 어떻게 좀 쉽게 쉽게 하면 안 됩니까? 
제일 힘든 건 술도 못 마시게 하고, 담배도 못 피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건 몽땅 나빠하십니까? 
우리한테 술 좀 먹게 하면, 하나님이 죽어버립니까? 

공부 잘 하고, 선생님 말 잘 들을테니, 술 좀 먹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담배도 조금씩만 피우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부탁입니다!'

사역장에 온 지 두 달 된 그의 기도였다. 
그 기도에 오랜만에 나는 배꼽을 잡고 웃어보았다. 

'철남 형제, 아직도 술이 마시고 싶어요?'
식사기도한 철남 형제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다른 형제들이 했다. 
'선교사님, 저거 철남형제의 주기도문 입니다!'

'그럼 아직도 이 사역장에서는 술을 마셔요?'
나는 일부러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선교사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보입니까? 
우리 인제 술 안 마십니다. 정말 입니다. 
선교사님, 우리 이제 술 마시면 사람이 아님다!' 
봉희형제가 펄펄 뛰며 내 말에 대꾸했다. 

그 말을 들으며 오랜만에 전체 사역장에 특식을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한 사역장에 개 한 마리씩 나눠줄게요. 모두 개고기 좋아하지요?'  

순간 '우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그 중에서도 순교선생이 제일 기뻐하며 펄쩍 펄쩍 뛰었다. 

학생들을 잘 먹이고 싶은 마음은 사역자 책임자인 선생이 누구보다 컸다. 
'우와 선교사님 진짜입니까? 그럼 잘 됐습니다. 
우리 저 철남형제가 바로 개잡는 선수 아닙니까? 
철남형제는 여기 오기 전에, 심양 조선족 식당에서 개만 잡다가 왔지 않슴까?'

그날 중으로 순교선생 사역장 형제들을 시켜 개 10마리를 사오게 했다. 
개 10마리에 중국 돈 3천위안, 우리 돈으로 하면 50만 원 가량이었다.

(사역장이 약 10곳이라는 얘기)

순교선생 사역장을 떠나며, 나는 철남형제에게 물었다. 
'형제, 이 개고기 먹었으면, 이제 술 안 마셔도 되죠?'

 

'아 예, 선교사님, 이 개고기라면, 술 안 마셔도 됨다. 잘 먹겠습니다.' 
그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나는 이런 북한 사람들이 좋다. 

 

▲파송된지 2주가 지나자, 권희선생 사역장 선생들이 연변에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권희 선생은 돌아오면서, 앞서 파송되었던 김혜진 선생과 함께 왔다.
북한에 체포되어 갔던 예진 선생이 다시 돌아 온다고 하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99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요15:4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99마리 보다
그 한 마리로 인해 더 기뻐하리라'고 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 수 있었다. 

권희선생 팀은, 올라갈 때 장담한 말처럼, 
한 선생도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예진선생이 돌아온 것도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권희선생 팀이 학생들을 모집해서 무사히 돌아오니 너무 너무 기뻤다. 
파송해서 이번처럼 한 사람도 체포되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홍만식 선생은 김철수형제, 이선장 형제 등 7명의 형제들을 모집해서 
서안에 사역장을 세우고, (3기) 사역에 들어갔다. 

강기홍 선생은 각각 김광호 형제 등 8명, 
김누가 선생도 박광일, 조선족 김순종 형제 등 10명의 형제들을 모집해서 
서안에 사역장을 세웠다.

그리고 권희선생이 모집해 온 장용국 형제, 조선족 최대중 아바이 등 
7명을 예진선생에게 인계해 줘, 예진선생이 사역을 시작하게 했다. 

이 중에서 최대중 아바이는 

권능선생 밑에서 훈련받은 빌립선생의 아버지이자 
1~2기에 많은 북한 형제들을 우리 사역장으로 안내한 
연변 삼도구 아주마이의 조카였다. 

그는 아들 빌립선생이 학생으로 갔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해박한 성경지식과 늠름해진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뻐서 말했다. 

'야 야, 나도 거기 가서 공부하면 안 되겠니?' 
'아버지 같은 알코올중독자는 안 받아 줌다. 생각 마쇼!' 

빌립 선생이 대꾸하자 최아바이가 발끈했다. 
'야 임마야, 누가 니하고 술 먹자니? 
마, 난 술 먹어도 니 선생하고 먹지, 니카는 안 먹는다. 
네 선생하고 가끔 한 잔씩 하는 그것도 못 먹게 하겠니?' 

최아바이는 건희선생에게 졸라 가까스로 따라왔다. 

▶권희선생이 돌아온 후, 나는 전체 사역장의 관리 구도를 다시 잡아나갔다. 
권능선생이 떠난 후 
내가 관리해오던 순교선생, 정선생, 석환선생, 용섭선생, 빌립선생 사역장은 
계속 내가 관리하고 

나머지 새롭게 세워지는 만식선생, 기홍선생, 누가선생, 예진선생 사역장은 
권희선생이 맡아 관리하게 했다. 

전체 사역장 인원이 가정사역 장까지 포함하여 
이제는 130여명 가량되는 어마어마한 식솔이었다. 

'2년 전 사역을 시작하면서, 1기생 8명만 북한선교사로 세워주신다면   *1998
나를 천국으로 오라 하셔도 좋습니다' 라고 고백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2기생이 선생으로 세워져, 다시 3기생 130명이라니...   *2000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중도에 포기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50명은 선생으로 세워질 것이고 

한 선생 당 10명씩 학생들을 모집할 경우 
다음 기수에는 500명의 학생이 모집될 것이다. 

이대로 3~4년만 계속 간다면, 북한 땅이 열렸을 때 세워질 수많은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는 일꾼들을 5천 명은 양육해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들을 북한선교사들로 세우는 일에 
다시 제 생명을 쏟아붓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가능하다고 확신하며
북한출신 북한선교사 5천명을 양육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새롭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고된 훈련들 

사역장의 훈련은 참으로 고되었다. 
하루 8시간을 시시각각 몰려드는 졸음과 싸워가며 
한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성경을 읽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통독을 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것이 중노동 중에 중노동이라고 한다. 
처음엔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맞춰, 글 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도 힘들지만 
차츰 습관이 되면, 그 빠른 속도에도, 구절들의 의미를 충분히 새겨보며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통독 속에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힘이 있었다. 
이 통독의 힘을 발견한 것은, 1기생들을 공부시키고 나서였다. 

처음 1기생 북한 형제들을 맡았을 때 
성경과 하나님의 대해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는 그들을
어떻게 단기간에 예수를 믿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제자로 양육시킬 수 있을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여러 방법이 있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방법 
-성경의 중요 부분부터 설명해 가며,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가르치는 방법 
-이해하기 힘든 성경 말씀보다, 성경을 쉽게 풀어 놓은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공부 시키는 방법 등등... 

하지만 이런 방법들로는, 성경 전체 내용을 파악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또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렸다. 

이들은 또 다른 북한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사역자가 될 사람들이므로 
반드시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성경통독 이었다. 
처음에는 많은 분들이 이 방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나도 처음에는 이것이 최고라는 확신이 없었고 
언제든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기도하며 이들과 함께 성경을 통독해 나가는 가운데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며 
북한 사람에게는 이 방법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고집스럽게 (신약) 100독까지 이끌어 보니 
이들을 사로잡았던 주체사상이 빠져나가며 
하나님이 참 신이신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임을 확고하게 믿어 갔다. 
성경 100독, 말씀 200~500 절까지 암송한 북한 형제들의 모습은 
비록 신앙 연수가 짧아, 신앙을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면은 미숙했지만 
성경지식 면에서는 한국에 어느 신학대학 학생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주석책이 없이도 관주를 찾아가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하였고 
또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전할 줄 알았다.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대략 1년의 시간이 걸렸다. 기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적이었고, 성령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생과 학생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쉴 틈도 없이 하루 8시간 통독과
아침, 오후 또는 아침 저녁 두 번의 (1시간) 기도 
그리고 말씀 암송과 과제 수행을 1년간 꼬박해야만 했다. 

▲용섭선생 사역장에 갔을 때였다. 
아침 점심 시간이라 용섭선생과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윤철형제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 저 큰일났습니다.' 
'왜 그러세요?'

'어제부터 오줌을 싸는데 오줌색이 빨갛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오줌 싸다 졸아서 잘못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 다음날도 또 오줌 색깔이 새빨개서 
찬찬히 보니까 피가 섞여 나오지 않습니까?' 

그의 말을 듣던 용섭선생과 나는 껄껄 웃었다. 
학생 때 누구나 한 두 번씩 겪는 일이었다. 

'이제 한 두 달 정도 더 피오줌 싸면, 윤철형제는 훌륭한 선교사가 될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용섭선생도 한마디 보탰다. 

'그거 다 선교사가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걱정 마라!' 
윤철형제는, 우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놀란 눈으로 용섭선생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다시 설명해 주었다. 
'윤철형제, 요즘 많이 힘들죠?' 

'아이구 선교사님, 그거 말이라고 합니까? 
이거 진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릴 데려다 놓고 
살리자고 하는 건지, 피를 짜서 죽이자고 하는 짓인지 
어떤 때는 진짜 헷갈려 죽겠습니다.' 

'좀 힘들어서 그러는 거니까 걱정 마세요. 
선생들 보고 물어 보세요. 
여기 있는 선생들도 학생 때, 다 한두 번씩 피오줌을 싸보고 선생이 된 거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자 옆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신수재 형제가 말했다. 
'나는 아직 피오줌이 안 나오는데 그것도 걱정이네! 
내 몸이 튼튼한 건지, 공부를 잘 안 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야' 

▲또한 형제들 대부분 처음 사역장에 와서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다. 

홍만식선생 사역장에서 이런 일 때문에 대소동이 일어나 
하마터면 사역장 전원이 체포될 뻔했다. 

오전 통독시간이었다. 
심양에서 온 이상수 형제가 슬그머니 일어나 통독실을 빠져나갔다. 

만식선생은 그가 화장실에 간 거니 생각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들어 오지 않자, 이상해서 화장실에 가보았다. 

하지만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문은 자물쇠로 항상 잠궈 놓고 
열쇠는 선생인 자신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침실로 가봐도 역시 없고, 사역장 구석구석 돌아보아도 
상수형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든 만식 선생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상수 형제 어디 있소?' 

이때였다. 갑자기 부엌 베란다 쪽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일인가 싶어 부엌으로 가서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 보다가 
그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베란다 밖으로 가느다란 빨랫줄이 늘어져있고 
그 빨래줄에 상수 형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4층 쯤에 매달려 있는 상수 형제를 가리키며, 
길에서 동네 사람들이 꽥꽥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중국사람들은, 상수 형제를 
물건을 훔쳐서 내려오는 도둑으로 본 것이다. 
누가 봐도 도둑놈이 도망 치는 걸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만식선생 얼굴이 베란다에 나타나자 
그도 같은 도둑놈으로 생각하고 '도둑놈 잡아라, 도둑놈 잡아라!' 하고 
동네 사람들이 고함치기 시작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경찰, 경찰!' 하고 소리 지르며 공안을 찾자 
형제들은 놀라서 상수형제를 끌어올리려고, 빨랫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느다란 빨랫줄을 무리하게 잡아당겼다가는 
상수형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질 것이 뻔했다. 

사태는 급박해 지기 시작했다. 만식 선생은 다급히 소리쳤다. 
'모두 바깥으로 나가 도망쳐라! 빨리!' 

모두 와르르 뛰어나가서, 뿔뿔이 흩어졌다. 
공중에 매달려있던 상수 형제는, 올라갈 수도 없고, 힘이 다 빠져서 
더 이상 매달려 수도 없었다. 

그래서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빨랫줄을 주르르 타고 내려가 
바닥에 쿵하고 떨어져 버렸다. 

그는 자기를 에워싸고 마구때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쳤다. 

결국 만식선생과 학생들은, 이 사건을 겪고 그 사역장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공안들이 와서 사역장을 수색하고는, 사역장 안에 있던 성경책들을 발견하고는  
이들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만식선생 사역장은, 상수형제 문제로 5개월 치 선납한 집세를 날리고 
각자의 소지품과 살림 도구들을 몽땅 잃어버리고, 졸지에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내가 급히 찾아가자, 상수형제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나 때문에 사역장이 글쎄 몽땅 잃어버리고, 쫓겨나고..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무슨 생각에 빨래줄을 탔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형제들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 피우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닙니까.  
밖에 나가 담배꽁초는 주워야 겠는데, 문은 잠겼으니 그런 겁니다. 선교사님!' 

'에이 저거 나이나 어리면 콱 두들겨 패기라도 하지.. 
에이, 선교사님 저거 콱 돌려 보내슈!'

그러나 나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만식선생에게는 사역비를 줘서 
다시 집을 구해서 사역장을 이끌어 나가게 했다. 

만식선생은 상수형제 일 이후에도, 학생들이 끊임없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지쳐 중도에 사역을 포기했다. 

'선교사님, 저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해도 사역장에는 맨날 일만 터지고 
학생들은 변화를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 없습니다.' 

나는 그를 예진선생 사역장으로 보내, 다시 훈련하면서 준비하게 했다. 


♣하나님, 우리 하나님! 

가끔 우리 사역장에 한국에서 목사님들이 오셔서 
형제들과 한 달, 혹은 몇 달씩 함께 지내며 성경을 통독하다 돌아가는 일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결같이 놀라워하는 점이 있는데 
사역장을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선생들에 대해서였다. 

선생들의 학력은, 몇몇 전문대를 나온 선생과, 대학을 졸업한 선생을 제외하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중학교 졸업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선생들이, 성경을 공부한 지 1년 쯤 되면 
성경 말씀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무나 잘 전했다. 

비록 이들의 설교가, 정식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훈련받은 사람들처럼 세련되지는 
못 했지만, 그 속에는 살아 꿈틀거리는 말씀의 생명력이 있었다. 

▲성근선생 사역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성근선생은 홍만식 선생이 포기한 사역장을 맡아 사역하고 있었다. 

그가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준비를 막 끝내고 기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학생들의 방에서 무엇이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란 그가 급히 학생들 방으로 가니, 학생들이 두 패로 갈라져 
서로 마구 주먹질을 해대며 싸우고 있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예요?' 소리는 질렀지만 
워낙 격렬해진 싸움이라, 웬만해선 멈추기 힘들 것 같았다. 

그가 들어오자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와르르 쏟아져 나갔다. 
이제 30분 후면 수요저녁예배 시간인데, 성근선생은 속이 타들어갔다. 

'주님 당장 예배시간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지금 밖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 

그날따라 그가 준비한 본문은 마8:23~27절 까지의 말씀이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고생하다가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니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꾸짖는...' 

그는 이 내용을 생각하며 다시 기도했다. 
'주님,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 저들을 달래 주십시오. 당장 예배를 드려야 함다. 주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뛰쳐나갔던 학생들이, 예배시작 5분을 앞두고 우르르 사역장으로 
몰려들어 왔다. 하나같이 표정들이 엉망진창이었다. 

얻어맞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때린 사람들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표정이 험악하기 그지 없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성근선생이 조용 조용 얘기를 시작했다. 
'여기 있는 북한사람들 중에 상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같이 북한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굶겨죽이고, 자식을 굶겨죽이고, 
아내를 잃고, 먹을 것을 찾아 중국 땅으로 도망쳐들 왔습니다. 
나라를 잘못 만난 탓에 억울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중국 땅에 와서 우리 북한 사람들은, 다시 배고픔과 함께 체포되어야할 
위험속에서, 쫓기고, 얻어맞고, 팔려다니고 하는 위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학생들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우리 북한 사람들은 도망을 치다가, 
여기 중국의 깊은 곳(서안)까지 내려왔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상처가 많고 
슬픔이 많다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상처와 아픔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큰 아픔과 슬픔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슬펐는지 상상이 안 갑니다.' 

성근선생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났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계속했다. 

'성경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예수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우리처럼 늘 배가 고팠고, 늘 잘 곳이 없었고, 
거처할 곳이 없어 고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늘 쫓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그 사람들에게 붙잡혀, 벌거벗겨 지고, 
십자가에 짐승처럼 못 박혀졌고 매달려 졌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저주를 받았고,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학생들이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슬프고 억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는지를 알고나서부터 
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사람은 충분히 이 모든 것에서 피해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한테 생명을 주고 싶어서 
자진해서 그렇게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잠시 말을 끊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게 누굽니까? 바로 이 예수라는 사람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솔직히 연변 땅에서 헤매고 다닐 때보다 더 편합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더 고통스럽습니까. 
모두가 자기 몸처럼 좋아하던 술도 담배도 갑자기 끊어야 하고 
훈련은 고되고.. 
솔직히 연변 땅에서 머슴으로 살아갈 때가 편하면 더 편했지, 여기가 더 편합니까?

근데 우리가 왜 여기서 고생하면서 공부하고 훈련받고 하는 겁니까? 
생각들 좀 해 보시오! 
근데 서로 좀 화가 났다고, 치고박고 미워하고... 
차라리 이럴 거면 공부해서 뭐 합니까? 

다들 집에 돌아가든지.. 아니면 돈 많은 집에 찾아가서 머슴 질이나 하든지.. 
왜 이 고생들을 합니까? 여기가 연변보다 더 안전합니까? 
여기가 연변 보다 더 편안합니까?' 

모두들 침울한 얼굴로 자기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성근선생도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사역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윽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용서해 봅시다. 용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그 분을 위해서, 서로 용서해 봅시다. 

우리가 맨날 눈만 뜨면 배우는 게 그 분인데 
이런 용서 하나 못 하면, 우리가 이런 공부해서 뭐 합니까? 

용서하기 힘들면, 그분한테 한번 기도해 봅시다.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서로 미워하게 하는 이 악한 영에게서 놓임 받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거이 분명 그분의 뜻이라면 힘을 주실 겁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양 옆에 있는 형제들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을 잡힌 사람도, 다시 자기 옆에 있는 형제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모두가 서로의 손을 잡고, 큰 원을 이루어 
나지막한 소리로 다 같이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주님.. 하나님, 하나님..' 
성근선생이 찬송 185장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내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성근선생 부터 부르기 시작한 찬송은, 이어 형제들의 떼창이 되어 갔다. 
찬송을 부르던 그는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서로 미워하며 때려 죽이고 싶어 했던 형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찬송이 끝나고 기도가 끝나자, 서로서로 악수를 청하며 용서를 구했다. 
'어이 송용형제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아니 됐소. 내가 더 미안하오. 내가 더 잘못했소!' 

'바울형제, 잘못했소' 
'용권 형제 내가 미안하오, 잘못했소' 
서로 용서를 구하고 서로 용서해 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순간 성근형제는 또 하나의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존재가 분명히 느껴지는 
너무나 강력한 하나의 기운이었다. 

방금 전까지 사역장에 가득했던 서로 미워하던 악한 기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사역장 안에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 기운은,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로 돌아다니며 
마음을 감동시켜 서로 용서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아! 주님이시다. 그 분이시다. 바로 그 분이시다. (임재를 느낌)
성경에서 이야기해주는 바로 십자가에 매달렸다던 그 분이시다! 주님, 주님!' 

성경은 그분을 영이시라고, 그래서 우리 같은 형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그 분은 우리가 분명히 의식할 수 있는 분이시다. 

또 성경은 말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분을 사랑하여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그 분도 그를 사랑하여, 그분 자신을 보여 주시겠다고... 그분이 오셨다. 

'주님이 지금 우리 사역장에 오셨다. 할렐루야!' 
하나님, 우리 하나님!' 

성근 선생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웃으면서 방으로 돌아가는 형제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분이 계시는 이 사역장 공간이, 바로 그 분의 나라, 천국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속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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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기생 8명의 행방

진칼빈, 박요한 그리고 민선주는 순교 
무디는 북경고아원 사역자 자리로 이동
기풍은 캐나다선교사 조력자로 이동 
바울은 사역장을 이끌다가 술을 도저히 못 끊어 자퇴,
익두는 서안에서 사역장 꾸린 후 연변으로 돌아가서 연락 끊음(잠수 탐)
그래서 권능만 남았으나, 결국 권능도 떠나서 다른 선교사를 만나서 '탈북자 한국입국' 사역을 돕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