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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4:12~20 교회가 생기는 조건, 없어지는 조건

LNCK 2022. 12. 2. 15:58

(S) 교회가 생기는 조건, 없어지는 조건 - YouTube

◈교회가 생기는 조건, 없어지는 조건          갈4:12~20       2022.11.20.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없어졌다'고 생각을 하십니다.
(왜냐면 복음의 참 진리를 떠나, 율법주의로 흘렀기 때문이죠)
 
그래서 갈라디아교회를, 다시 이 세상에 있게끔 하려 하신다는 의지를 
이렇게 밝힙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분명히 갈라디아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여전히 존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한다'  :19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갈라디아 교회가, 의미적으로는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내가 교회를 다시 세우겠다' 라는 뜻이 됩니다. 


▲'교회가 생기는 조건, 없어지는 조건' 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속에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장로교 어느 교단에서는, 총회 차원에서 
교회에 교인들의 수가 자꾸 줄어드는 문제를 논의하고 연구했던 모양이에요.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당장은 방법이 없다'며 손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근데 과연 대책이나 방도가 없는 것일까요?

교회가 생기는 조건으로, 아주 중요한 부분이 1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4:12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되었고,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얘기는,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며, 유대인 중에서도 특출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구분 짓게 해 주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율법, 할례, 성전, 절기 준수 등입니다.

거기에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바리새인이라든지,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든지 
사울왕을 배출한 왕족으로서, 베냐민 지파는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었단 말이죠.

그리고 또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유대 사상 뿐만 아니라 
당시에 헬라 사회를 지배하던 철학에 대해서도
굉장한 식견이 있었던 바울이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다른 모든 여타의 사람들과, 자기를 구별해 줄 수 있는 모든 특장점을 
바울은 스스로 다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특장점을 버렸으니, 
이제는 거꾸로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는 겁니다.  :12
왜냐면 복음이란, 그런 세상 것들을 십자가에 다 못박는 것이니까요.

 

그럼 어떤 점에서 '나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내용이 뭡니까?

'내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불철주야 바라보면서 사는 이 모습을 
너희도 배워서 너희도 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앞서 갈3:26~28절 까지를 공부하면서, 교회에 대한 얘기를 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건 교인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연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  갈3:27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나의 몸을 입고 있던 내 마음이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입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어요. 이게 교인이라는 말이에요. 


그렇게 교인이 되면, 이제 특별한 사회성을 띠게 됩니다. 
특별하게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라는 거죠. 3:28

복음 안에서 모든 겉사람 차원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생기는 조건이 되고, 교회를 다니는 모습이 되는 거예요. 
이 태도로 우리는 교회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 사람이 이러한 사회성을 가지고 
누구나 육체에 관련된 겉껍데기, 혹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다 벗겨 내고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다 라는 가능성으로 사람을 대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거죠.

이렇게 할 때 신약교회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겉껍데기, 겉사람을 벗겨버리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되고 

그래서 변화된 갈라디아 교인들의 속사람이
'나와 똑같이 되기를 바라는' 이런 마음을 바울은 가졌던 겁니다. 

이럴 때 교회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안다.  4:13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런데 그러던 너희 모습이, 지금은 다 어디갔냐?'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4:15 '너희의 복(복음의 감격)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때는)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과거에 그때는 복음의 감격과 기쁨이 넘쳤다는 거죠. 
 
무슨 얘기냐면, 사도 바울이 지병인 간질이 있지 않았습니까. 
근데 1차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자기 지병인 간질로 인해서 졸도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하는

그런 바울의 모습을 
갈라디아 사람들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그들이 사도 바울의 겉사람을 보지 않고 
그 사도바울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며,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속사람을 봤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사도바울 대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로 찾아갈 때, 갈라디아 사람들과 똑같이 되었습니다. 
자기 유대인으로서 갖고 있는 모든 특징들을 다 버리고 
갈라디아 사람들과 똑같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똑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더니 
정말 놀랍게도 갈라디아 사람들도, 사도 바울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그 병에 걸려서 간질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고 쓰러지던 바울...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이 그런 병을 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잖아요? 

근데 그런 바울이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사도바울이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그 사도 바울의 속사람을 마주 대하여 보면서, 
바울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듯이, 그렇게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자기들이 눈까지 빼어 줄 정도로 기뻐했다는.. 
참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렇게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게 웬 말입니까? 

이제는 갈라디아에 이런 교회의 모습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가 여전히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 교회 안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냐면 
율법주의, 행위 원칙에 종속되고, 종노릇하는 율법주의가 번지게 된 겁니다.

교회라고 하는데도.. 사실은 교회가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죠.

그래서 마치 자기들 눈까지 빼어 줄 정도로 
사도 바울을 기쁨으로 영접 했던 그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제는 사도바울과 무슨 불구대천 원수가 되어버린 듯한 관계로 변해버렸어요. 

그 이유가 뭐냐면, 거짓교사들이 끼어들어서 이간질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간질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이간질을,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이간질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건, 

복음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이간질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3:1절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 구절을 저는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설교자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날마다 보도록 하게 하지 않는 설교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날마다 바라보라고 요청하고, 권면하고, 설득하는 설교가 아니라면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나왔는데,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그런데 감동이 넘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은혜를 받았다면, 
그렇게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은혜를 받은 그 상태는 
'이간질을 당한 상태'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너희에게 예수 이름을 얘기하면서, 하나님 이름을 얘기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중지하도록 만들었느냐?'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간질' 이란 것은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말씀처럼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만든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에겐 이유가 없습니다. 

바라보고 있는 나 때문에 이유가 있는 거에요.
'아~ 나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내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들이 '날마다 주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고 
날마다 주님의 죽음을 바라보도록..'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도록 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천국을 얘기하고, 구원을 얘기하고, 믿음을 얘기해도 
결국은 교회를 이 땅에서 말살시켜 버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립하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음으로써 
십자가의 칼로, 나 자신에게서 육체 관련성을 껍질 벗기듯이 벗겨 내고 

그런 내 속사람의 상태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똑같이 그 사람에게도, 육체 관련성 껍데기를 벗겨낸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대통령이든 / 그 사람이 노숙자든 상관없이 
그 대통령이라는 껍데기, 노숙자 라는 사회성을 벗겨내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알맹이 마음만 바라보고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았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보는 것이 

이것이 교회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중지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곧바로 겉사람의 상태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그 마음이 
자기 육체를 옷 입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자기 육체를 옷 입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나타나는 특징은 뭐냐면
결국은 성경이든, 율법이든, 이 인간 세상이 만들어내는 
외형적, 형식적, 율법주의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든지
이미 그건 교회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  4:19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 
정말 요만큼 작지만, 그 작은 아기가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듯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해산을 해야 되겠다.. 라는 얘기를 하시는 거에요. 

여기서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얘기를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스승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 

근데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도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 
그리고 '다시 낳아야 되겠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왜 '해산'이라는 얘기를 하냐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아지기 위하여 
유대인으로서 갖는 모든 특징과 자부심을 다 버리고 그들에게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전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도 사도 바울이 갖고 있던 질병과 
사도 바울의 겉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고, 속 사람을 받아들여서 
그들이 교인이 됐는데,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완전히 다른 세계(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죠.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어머니 자궁 속과 세상은 너무나 다른 세계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복음으로 해산된다는 얘기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게 됨으로써 
이전에 내 마음이 내 육체를 딛고 살던 세계로부터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옷 입고 있는 그런 세계로 
그리고 내 몸은, 성령이 내 몸을 옷 입는 
그런 이상한.. 세상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로 태어났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 라는 것은, 어느 지역에 있는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당 조직도 아니고, 가톨릭에서 말하는 그런 전 세계를 하나의 조직으로
묶고 있는 그런 게 아니라 

교회 라는 것은, 세상 속에 섞여 있는 교인들이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그 상태 전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뭐냐? 세상과 다른 세계입니다. 다른 조직이나 다른 공간이 아니라요.
다른 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산'이라는 말을 쓰신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세계에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게 뭡니까? 
이 다른 세계에 태어난 결과가 뭐냐면 '그리스도의 형상'이죠.

근데 그리스도의 형상이 뭐지요? 
그리스도는 예를 들어 변화산에서 나타나셨을 때 
그리스도에게서 변화산에서 나타났던 그 발산되는 광채는 
아버지의 광채 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하나되심이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있을 동안은 버려진 것이니까 
그 3일은 빼고..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분리되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은 
아버지와 일체 대신 형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지금 '교회' 라고 하는 
다른 세계에 다시 태어나도록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 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24시간 알아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버지와 일체되는 것이고, 그 형상으로 덧입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지금의 나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만을 마음이 가지 않고 있고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마음 
마음에 다른 것을 담고 있는 마음

이런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되면 
그 십자가 생활화가 무르익어 가면 무르익어 갈수록 

처음 단계에서는 아직 미숙해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내가 살기에 급급한 겁니다.
자꾸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상 것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고 있는 상태를 죽여서 

내 마음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아버지만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데 급급한..

아직 미숙한 과정을 지나게 됩니다. 

그 단계나 지나다 보면 성숙해서
어느덧 나도 모르게 모든 행위와 원칙으로부터 자유한 단계가 열리게 되는데 
그 단계가 되면 성령께서 내 육체를 옷 입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행위를 따라가지 않는다 거예요.
율법주의적 신자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해산된 교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있어요. 우리가 먼저 살아야 돼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내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을 붙잡고 좋아하는 이 상태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이 옷 입어서 
보좌 우편까지 따라가서 
(예수님 안에서) 내가 아버지를 직면하는 상태를 유지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 옛 자아, 옛 사람이 죽으면 죽을 수록 
성령님이 나를, 내 몸을 장갑 삼는 일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성령님이, 마치 장갑 속에서 손이 움직이듯이
내 속에서 움직여 가실 때,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진정한 교회이고,
이런 교회를 다시 세워지고, 해산되어지고,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늬만 남은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진정한 천국 시민들이 모인 교회'가
나타나야 되는 것이고, 그걸 이루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