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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1~24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LNCK 2022. 12. 5. 01:5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 YouTube     6:44 ~  녹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롬11:1~24         2022.11.27.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요?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면서요?
그렇다면, 저렇게 예수 안 믿는 완악한 이들도, 하나님이 구원해줘야 되지 않나요?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완악한 이들을, 그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고난도 주시고, 재난도 주시고,
그들이 스스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 스스로의 자기 의가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상황을 통해, 인간의 관계를 통해, 때로는 질병을 통해
끊임없이 구원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 펜데믹도,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의 한 형태입니다.

전 세계적인 이 재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를 낮추시고 
끊임없이 높아지고 높아지는... 무엇인가 새로운 기술이 발전되고 
무엇인가 개발이 되면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하나님을 계속 잊어버리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 제2의 바벨탑 사건처럼, 이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인간들을.. 멈추게 하시고, 낮추게 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시고 
구원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하시는 거예요. 

이 코로나 기간 동안에, 전 세계적으로 믿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구 CGN TV 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수백명씩 된다는 것입니다. 
TV 방송만 듣고도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 믿을 수 있느냐?'고 
방송국에 찾아와서... 

그래서 방송국 직원들이 복음을 다시 전하고, 결신을 시키고, 
기초양육을 해야 하는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구원의 손을 내밀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구원 초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완고함, 완악함, 자기 의.. 이 견고한 죄악의 진(요새)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본문 롬11장에 이르러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형편을 보고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1절에 나옵니다. 

11:1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 자신의 교만과 완악함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69편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덫과 올가미가 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시69:22

그 구절을 바울이 이렇게 인용하죠.
롬11:9 '또 다윗도 말하기를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덫과 올가미와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고..'

'밥상'이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상징입니다. 
풍성한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은혜가 
도리어 그들에게 덫이 되고 올가미가 된다... 
'발목을 잡는 덫이 되어 구원에 이루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리지 못 하게 하는 올가미가 되게 한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밥상, 풍성한 은혜의 밥상을 보면서 
자기 의를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높이는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밥상' 앞에서..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내가 얼마나 능력이 많은지, 
내가 얼마나 잘 나고, 똑똑하고, 위대한 지를 생각하게 될 때 
그 밥상은 도리어 덫이 되고, 올가미가 된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압평지에서 신명기 말씀을 통해 
모세를 통해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장차 들어가게 될 땅에서 너희가 배부르게 될 때 조심하라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 

광야의 시절,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약속의 땅에서 너희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시고 
너희가 심은 것에 더 넘치도록 풍성한 밥상을 너희에게 주실 때 "잊지 마라!"

그렇게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그 풍성한 밥상이 그들에게 덫이 되고 
올가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죠. 
그 은혜를, 은혜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은혜로 주어진 것을, 자신의 의를 세우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그 밥상이 덫이 되고 올가미가 된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문제가 아닙니다. 부요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풍성한 밥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밥상을 덫과 올가미가 되게 하는 것이죠. 

서구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소득 수준이 점점 더 높아질 수록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 

가난하고 궁핍하고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했던 이들이 

어느덧 밥상이 점점 풍성해질 수록, 자기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는 모습...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속에 나타난 거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갔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들의 노력으로 그러한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나요? 
그들이 잘나서 큰 민족을 이룬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의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더 겸손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이, 더 자기 의에 빠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안에 숨어있는 무서운 죄악, 완악함의 모습입니다. 

'밥상이 덫과 올가미가 되었다' ...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완악함에 처해있는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실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만 악악함에 처해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를 두 가지 예를 듭니다. 

첫 번째 예는 바울 자신입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입니다.'  :1

바울은 지금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십시오!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에 빠져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같이 이렇게 완악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환시킨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동족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 예를 듭니다. 
구약의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던 엘리야선지자 입니다. 

엘리야선지자는 당시 악한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그 부인 이세벨 시대에 
하나님의 예언을 전했던 선지자입니다. 

아합이 바알신을 발이 발신을 섬기던 그 시대의 갈멜산에서 

850명의 제사장들과 영적 대결을 했습니다. 
'누가 불을 내릴 수 있는가? 불을 내리는 진짜 신이다!' 라는 상황 속에서 
바알의 제사장들이 몸부림을 치며, 발광을 하며 
바알 신에게 불을 요청했지만, 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면, 아합과 이세벨은 회개했어야 될텐데 
그들은 회개는커녕,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웠습니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렙산 동굴에 숨게 됩니다. 

앞서 갈멜산에서 놀라운 영적 승리를 경험하였던 엘리야가   *왕상18장
호렙산 동굴에 숨어서, 절망과 좌절과 침체에 빠져 있습니다.  *19장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왜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를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너를 대신해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의 직무를 하게하라. 
그리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이 네게 남아 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정직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주 냉정한 말씀입니다. '엘리야야, 꼭 너가 아니라도 돼!' 

실패와 절망과 침체가운데 있는 엘리야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무엇입니까? 
'너 참 수고 많았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 호렙산 굴에까지 숨었니?
내가 너를 이해한다. 얼마나 아합과 이세벨이 두려우면, 네가 여기 숨어 있겠니?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니?' 

그런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엘리야는 어쩌면 기대했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너를 대신해서 엘리사를 세우고, 7천 명이나 남아 있어!' 
이 말은 '세상은 너 없어도 잘 돌아간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냉정한 말씀을 주셨을까요? 
이 말씀은 '선지자로서 이제 너는 그만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해고한 듯한 그런 말씀이 아닙니까?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애같은 영혼을 달래 주고 
'그래 네가 얼마나 힘들었니' 그런 위로의 말일 것 같은데 
엄중하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문제를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왜 이런 영적침체에 지금 빠져 있습니까?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대답은 엘리야의 말 속에 숨어 있어요.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닌 거죠. 

7천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의인이 남아 있고, 엘리사도 있는데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 같고 

그리고 나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 같고 
나를 통해서만 해야 되고 
자신이 너무나 중요해진 것이, 당시 엘리야의 문제였어요.

'자기 의'에 빠지면, 자기가 너무 중요해집니다.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의 마지막 착각은 뭡니까? 
자신이 세상에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갈 것 같은 착각이에요! 

'아 이 세상 불쌍해서 어떡하나? 내가 없는데...' 
이런 착각에까지 빠지게 되는 거에요. 

거기에 대한 치료책은 뭡니까? 
'너 없어도 세상은 아무 문제 없어!' 
엘리야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 주는 거죠. 

그 전에 하나님 엘리야를 먹여 주시고, 재워 주시고 
이렇게 쓰다듬어주셨죠.
그러나 그 '밥상'이 덫이요, 올무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그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자기 의에 빠진 이 엘리야의 모습이 
사실은 동족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다... 라고, 바울은 지적하는 겁니다. 

동족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 민족과 함께 하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자신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의'에 빠졌고, 교만에 빠졌고... 

결국 '자기 의'에  빠짐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놓쳐버리는 결과가 빚어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영적 승리를 경험한 이후에,
어느 순간에 자기 의에 빠져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사람을 통해, 어느 한 그룹을 통해 
어느 한민족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언제나 남은 자들이 있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교만한 자를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이 쓰시는 통로는 겸손하고 정결한 사람입니다. 

'자기 의'가 없는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갈멜산에서 불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그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뿐이에요.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순종하여 말씀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통로가 된 것뿐이죠. 

그전에는 아합과 이세벨이 악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악해 졌습니까? 
그게아니죠. 그 전에도 아합은 악했어요. 

그런데 담대하게 갈멜산에서 대결해 나갔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세벨이 위협한다고, 호렙산 굴에 숨어 있는 거지요? 

이러한 과도한 절망, 과도한 열등감, 과도한 침체는... 교만입니다. 
과도한 철망은, 그 이면에 과도한 '자기 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열등감'과 '교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요.
즉 열등감이 아주 심한 사람은 아주 교만한 사람이에요. 
영적침체에 깊이 빠지는 것은, '자기 의'가 그만큼 높을 수 있다는 거예요. 
'자기 의'가 없는 사람은 넘어질 것이 없으니, 아프지도 않아요. 

제가 오래 전에 하용조 목사님이 저희 부교역자 몇 명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어느 부목사님이 뜬금없이 이런 푸념을 하는 거예요. 
'하목사님, 저는 영어도 못 하고...' 그러면서 주절주절 자기 푸념을 하는 거예요. 

하목사님은 식사를 하시다가 이렇게 대꾸하셨어요. 
'슬퍼하지 마! 사실이잖아...' 

'당신이 영어 못하는 게 사실인데, 뭘 그렇게 푸념을 하느냐?' 라는 뜻이죠.

우리는 자신의 모든 상황을 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이 정도 돼야 되는데...' 그건 교만이죠.

그 부목사에게 통역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아무도 영어 잘 하는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왜 영어를 못 하지?' 그렇게 스스로 자기비하 하는 것은
교만이죠.

'자기 의'가 높을수록, 깊은 침체에 빠집니다.
지금 엘리야가 바로 그런 영적 문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엘리야의 예를 들면서, 
그것은 동족 이스라엘의 영적 교만이
'바로 엘리야의 상태와 흡사하다'고 바울이 지적한 것이죠.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의 예도 그렇고, 그리고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남은 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11절에서 
'그렇다면 그들 동족 이스라엘이 완전히 내버려야 할 정도로 넘어진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11:11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쓰러져 내버려야 할 정도로 
넘어진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절~14절 까지, 이스라엘의 넘어짐, 자기 의에 빠져 교만해져서
밥상이 덫과 올가미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한 
신비로운 해석이 등장합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사도바울 가운데 역사하심으로써 
현재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바울에게 역사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끝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역사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목적이 있으며, 
그리고 더 큰 하나님의 복을 만드는 통로가 될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하나님의 축복의 사슬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까지의 말씀을 요약하면 3단계의 축복의 사슬chain들이 나타납니다. 

1 첫 번째 축복의 사슬은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이 구원의 주된 흐름이 넘어간다는 거죠. 

이스라엘이 부러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나뭇가지가 부러짐으로써 
거기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러짐이 접붙임의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에게 임한 이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이방인에게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참 감람나무라고 비유하고 
이방인들을 돌감람나무도 말하는데, 돌로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우리 말로도.. 가짜는 아닌데, 영양가도 없고, 상품가치가 없는 그러한 나무 열매에
'돌'이란 이름을 붙인 거예요. *우리 말에도 '돌배'라는 말이 있지요. 

유대인들을 '참 감람나무 olive'라고 하고,
우리를 '돌 감람나무 wild olive' 라고 해서, 좀 기분 나쁘긴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가짜'라는 의미는 아니죠. 

그런데 먼저 택함을 받았던,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줄기가 되었던 
그들의 가지들이 부러짐으로써, 
불신앙으로, 완악함으로, 자기 의에 빠져서 부러짐으로써
이방인들이 접붙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 증거가 사도행전의 역사에 나타나죠.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한계가 있었어요. 율법의 갇혀 있었고, 여전히 자기 의를 쌓는 
율법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겁니다.

행11장에, 안디옥의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나타나 
바나바가 파송이 되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크게 부흥시켜서 
안디옥 교회는 이방선교의 중심 센터가 되죠. 

그래서 사도행전의 역사의 주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행11장부터 안디옥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때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 중심의 교회죠.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대상도 
로마교회, 즉 이방인 교회가 중심이죠.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원줄기 예루살렘의 사도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그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경험한 이들이 

복음이 온 이방에 확산되는데 주 통로가 된 것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와 바울을 중심으로 통로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접붙임을 한 성도들이, 복음이 이방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는 것의 실제 그 당시 역사 속에 일어난 일입니다. 

▲2 두 번째 축복의 사슬은, 다시 이방인에게서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그복음 역사가 (반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어떻게 흘러가냐면, 유대인들에게 시기심이 일으켜진다는 겁니다. 

11:11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14 '이는 내가 어떻게든 내 동족에게 시기심을 일으켜 
그들 가운데 다만 얼마라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동족 이스라엘에게 시기심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시기심은 나쁜 거 아닙니까? 왜 그런데 여기에 쓰고 있습니까? 

내 것이 아닌, 나의 권리가 없는 것에 대한 것은 나쁜 시기심이죠.
그러나 마땅히 내가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권리, 
즉 내 것에 속한 것에 대한 시기심은.. 선한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 대해서 가지는 시기심은 마땅한 거죠.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좋아하고 존중한다면, 마땅히 시기해야 되죠. 

그러나 그 배우자가 '나는 당신이 아무렇게 행동해도 좋아,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당신이 다른 사람을 생각해도 나는 이해해! 
나는 시기심이 없기 때문이야!' 그게 옳은 태도입니까? 이런 시기심은 있어야 되죠.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마땅히 주신 그 축복, 구원의 그 은혜를 
마땅히 가져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시기심은, 정당하고 선한 시기심입니다. 

지금 20세기 이후에 이스라엘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 두 번째 축복의 사슬이, 현재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메시아닉 쥬라 부르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본문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 마음 가운데 '거룩한 시기심'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갈릴리 주변에 살고, 나사렛에서 살고 있죠. 
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의 명칭을 
우리들 이방인들은 '갈릴리야 갈릴리' 하고 찬송을 부르고, 
평생 한번 그 성지순례 가볼까, 말까 하며 적금도 들어서, 성지순례 가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온 이방인들은 그 갈릴리 호수에서 배 타고 눈물 흘리며 예배 드리고... 
그걸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대체 저들은 왜 저러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시기심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다시 유대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3 세 번째 축복의 사실은, 또다시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다시 이방인을 흘러가는 축복의 사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거는 앞으로 미래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므로 '예언적 고백'이라고 말할 수가 있죠. 

이것은 이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 이루어지므로 
또다시 열방에 더 큰 부요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는 것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종말이 이르기 전에, 
이런 이방인들의 부요함, 즉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됐다면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큰 부요함을 가져오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 있다면 충만함(전 인류의 구원)이 있을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은, 
더 큰 이방인의 부유한 구원으로 전파될 것이다... 

그래서 23절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1:23 또한 그들이 불신앙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24 그대가 본래 돌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하물며 원가지들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쉽게 
자기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잘려나간 상태로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 가지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을 다시 접붙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한번 믿음을 거부하고 떠났다 그래서 
'너는 다시는 기회가 없다' 하시고,
그래서 완전한 멸망 가운데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다시 접붙이시고 또 접붙이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애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다시 주께로 돌아올 기회가 남아 있고,
또한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3단계 축복의 사슬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러나 이 바울의 예언적 고백이 

1단계, 2단계가 이루어졌다면 
3단계도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은 22 절입니다.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나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머무르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 역시 잘려 나갈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자랑하고 교만하지 않도록 
유대인들의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원 가지도 이렇게 아끼지 아니하셨다면, 

자기 의를 내세우고, 믿음으로 은혜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가지를 자르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기억하라! 

또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인자하심을 상기시켜 주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렇게 인자하신 분이니 
언제든지 다시 접붙일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돌아오라! 

이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업하심을
함께 통합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머문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이고 
그리고 자기 의에 빠져있는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에, 
완악함으로 끝까지 그 초대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하심 앞에 서 있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온전히 붙잡고,
참 포도나무 되신 그 분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만 머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준엄하심의 심판을 받아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