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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13장,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된 성도들

LNCK 2022. 12. 6. 04:29

◈슥13장,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된 성도들    여러 설교 정리


◑본문 해석

슥13장, 목자를 친 칼과 작은 자들에게 드리운 손 에 잘 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 당시 성전재건 사업이 수십 년간 중단되어 있었는데 
학개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직접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스가랴는, 성전에 대한 직접적인 거론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을 ‘그 날’이라는 
미래에다 포커스를 맞추어 줍니다. 
본문 13장에서도 ‘그 날’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 날’은 스가랴에서만 해도 12장에서 7회, 본문에서 3회, 
그리고 14장에서 4회나 사용할 정도로 스가랴서 마지막에 
집중적으로 종말론적인 구원의 날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를 이르는 이중적인 표현이죠.

특별히 본문 1절에서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날이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 즉 이스라엘 땅에 ‘남은 자들’에게는 
바로 구원의 날임을 선포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닥친, 이방인들의 압제와 
국가적인 현실의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기에 
거기에서 놓임을 받고 구원해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순서적으로 그렇게 되면, 형편이 나아지게 되면 
중단된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으리라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교회는 나중에 나가면 되고 
신앙은 뒤에 열심을 내도 된다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지구가 생긴 이래로 이 땅에서 살다간 셀 수 없는 별별 사람들을 
다 두고 보신 하나님은 우리와 생각이 다릅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구원이 우리들 삶에 먼저 우선이 될 때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요 진정한 소망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1절에서 ‘그 날에 한 샘이 열리리라’라는 
말로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샘’은 자연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을 가리킨다면 
‘열리리라’는 피동형이면서도 계속적인 뜻을 가진 분사형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와 더러움에서 
거듭나는 인생을 살게 하시되, 끝없이 계속적으로 우리들의 남은 인생까지도 
책임져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요 복된 소식, 
즉 ‘복음’인 것입니다.

2절에서는 그 날, 즉 메시아가 오시면 이 땅에서 모든 우상을 없애고 
거짓 선지자들과 더러운 영을 없애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되게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부모님을 통해 
징계를 내리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4절 이하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된 예언이 탄로날까봐 
평상시 입던 털옷마저 벗고 오히려 선지자였던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나는 원래 밭 갈던 하인이지, 선지자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는 것입니다. 

6절 "두 팔 사이의 상처"란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무슨 신탁을 받는답시고 
자해함으로써 생긴 몸의 상처를 뜻하는데, 그것에 대하여 추궁을 받게 되면 
"나의 친구의 집에서" 우연한 사고로 생긴 것이라고 둘러댈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방 선지자들처럼 예언한답시고 황홀경에 빠져 
자기 몸에 상처를 내었던 그 자국들은 숨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비하여 하나님이 보내시는 진정한 선지자요 메시아는 어떠합니까? 
7절 이하에서 증거해줍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7절 이하는 예수님이 3년 공생애를 마치고 예루살렘 성에서 고난당하시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는 본문이기도 한데, 
그러니까 BC516년에 성전이 재건되었다고 보면 
예수님 때보다 최소한 500년 전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들’은 ‘보잘것없는 적은 자들’을 가리키며, 
‘내 손을 드리운다’는 것은 ‘내가 돌아오게 하겠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8-9절에서 흩어지게 한 사람들 중 삼분의 일, 
즉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어려움 속에서 
그들을 지켜내시고 그 뜻을 이루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8-9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표현이 그냥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미치셨구나.’ 
이런 표현이 떠오른 것은 너무나 감격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향한 신실하심은 
어쩌면 늘 짝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우리들을 향해 
‘그날’을 고대하며 끊임없이 그리고 여전히 되돌아올 것이라는 상상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연인 같은 마음, 부모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적용

▲1. ‘그 날’ 즉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립니다.
신약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지속적인 회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신약적 의미로 성도)을 위하여 열리리라’ 

여러분, 샘을 보십시오. 매일 새롭게 물이 솟아 나옵니다.
신약 새언약 시대는, 성령을 통해 그 속에서 생수가 계속 솟아납니다. 요7:38

물론 주님의 영단번의 십자가 번제를 드리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지만,
그러나 목욕한 자는, 그 이후에도 발을 계속 씻는 것입니다.
 
1절의 ‘그 날’은 선지자들이 계속하여 예언한 그 날입니다. 
그 날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이 임하심을 통하여 성취되어졌죠.

그리하여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일반적으로 씻는다는 것은 더러움을 씻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 의대의 학생이 우리나라의 왕들의 건강에 대하여 박사논문을 썼는데, 
조선시대의 임금들부터 그들의 건강을 조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불결한 생활환경으로 질병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신과 같은 대접을 받던 임금이 각양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서도 
잘 씻지 않아서 각종 종기나 부스럼이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많이 씻어서 탈이 날 정도입니다만 
씻는다는 것은 몸의 청결문제만이 아니라 
신들에게 정성을 바칠 때에 제의적인 면에서도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도 신에게 정성을 빌 때에 목욕재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씻는 것에 대하여 어떤 규례가 주어져 있습니까?

민수기 8:6-8절 “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8 또 그들로 수송아지 하나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대신 드려집니다. 
그래서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는데 속죄의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또 수송아지의 번제물을 취하여 속죄 제물로 취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드리는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이, 먼저 정결해져야 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로 치면, 먼저 목욕재계를 했다는 것이죠.

민수기 19장에서도 각종 부정하게 된 자들이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려서 정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목욕재계한다고 하여도 죄를 씻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유출 병이 있는 것처럼 
계속하여 죄가 줄줄 새 나오는 사람인데 무엇으로 씻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장차 자신들의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줄 
‘그 날’을 고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7:38

즉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슥12:10 
그 찌른 자를 보면서 애통하여 회개하게 됨으로 
죄가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과 ‘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동문에서 물이 스미어 나오는데 
그 물이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서 흐릅니다. 
그 강물이 가는 곳마다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이 물이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는 성령이 임하게 된 자들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4:13-14절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영국인 병리학자가 
중국에 콜레라가 번지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내의 불륜을 견디지 못하여 선택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곳에서 우물과 강물을 현미경으로 조사하여 오염되었다고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마을사람들은 그 물을 먹으려고 고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염된 물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수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시고 마셔도 갈증만 더하는 세상의 욕망이라는 물을 공급합니까?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생수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외친 것처럼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오늘 이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더러움에서 씻어주실 
영원한 샘물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씻어짐을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된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출처-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제일 큰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의 복과 은총’입니다.
그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려 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라는 찬송처럼 258장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찬송을 날마다 부르게 되시기 바랍니다.

▲2. 자기 희생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 희생을 통해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희생이 없으면, 구원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7절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목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내 목자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짝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짝 된 자, 하나님과 친밀하고 동등하게 여김을 받는 자를 치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죠. 요10:30

그러므로 하나님의 짝된 자를 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요 
자기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말하니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인간에 의하여 죽임 당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희생’이 필요한 이유는, ‘사랑과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사랑과 공의.. 이것을 서로 모순적 명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판사가 법집행을 공의롭게 해야 하지만,
판사가 일반 죄인들을 보는 눈과,
법정에선 자기 아들을 보는 눈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공의로운 법정에서
‘일반 죄인들’을 쳐다보는 눈이 아니라
‘자기 아들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모순된 명제로서,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집행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논리가 아니라)
둘은 항상 같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사역에 ‘자기 희생’은 필수적입니다.

(펀 글) 윌리엄 보덴 이야기 William Boden  

「그의 부모가 대부호여서, 그는 세계 일주 여행을 다녔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다녀보니
아주 불쌍하고 가난하며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마음에 큰 부담을 느꼈다.

그는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자기가 물려받을
어마어마한 유산을 다 정리해 버렸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해서, 자기 성경책 첫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당시 자기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글을 한 문장 남겼다;

No Reserve!  (나를 위해) 아무 것도 남기지 않겠다! 는 뜻이다.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집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부친이 돌아가셨다. 이제 집으로 와서 집안을 대신 이끌어라’

그는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 때 그는 다시 성경의 앞 페이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No Retreat! 후퇴하지 않겠다! 는 뜻이었다.

그는 중국에 가서, 중국의 소수민족 무슬림들에게 복음 전하기 원했다.
그래서 먼저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 도착했다.

그가 이집트에 도착한지 얼마 후에
미국의 그의 가족들은 비보를 듣는다.
‘윌리엄 보덴이 이집트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에 가서 4달 밖에 안 되었는데 척수뇌막염에 걸린다.
그리고 그 병에 걸린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사망하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그는 자기가 원하던 선교지에 발도 디디지 못했다.
그의 유품이 미국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성경책 앞장에는 마지막 세 번째 이런 문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No Regret! 절대 후회 없음

그의 묘지에 이런 비문이 적혔다고 한다;
“윌리엄 보덴  1887~1913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그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

윌리엄 보덴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란초우에 가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병원을 세웠고,
중국의 무슬림들을, 그 병원을 통해서, 주께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놀라운 ‘십자가 희생정신’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져서 
수많은 제2의, 제3의 보덴을 낳고 있다. (*이것이 그의 사역의 열매)
No Reserve/ No Retreat/ No Regret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계속 낳고 있다.」

▲3. 성도(남은 자)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도 받고, 성도도 될 줄 아는데,
그것은 극히 구원의 6면체에서 일부만 보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성도 되기’는, 연단의 담금질 과정을 거진 자들입니다.

9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입니다. 1/3을 불 가운데 던져서 은과 금처럼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삼분의 일의 남은 자들이
연단을 통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자의 침을 당하여 양떼들이 흩어지고 
흩어진 양떼들 중에 소수의 남은 자들이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침을 당하시고 그 양떼들이 흩어졌지만 
그 흩어진 양떼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반드시 불과 같은 시련을 당한 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단을 말하면 구약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욥을 듭니다. 
욥은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던 욥이 어떻게 변하게 됩니까?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에 시편 44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양떼를 흩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흩어진 양떼들이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시편 44편의 죽임 당하는 양이란 자기 죄가 아닌데도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바로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도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39절을 봅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도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기에 
그의 몸인 성도도 같을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환난 가운데서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그 사랑만을 굳게 순전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헛된 곳에 한눈 돌리지 못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묶어두시기 위하여 그렇게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내 버려두면 우리는 길 잃은 양처럼 각기 제 길로 가는 자이기에 
날마다 목자의 고난에 참여시키고 그 흔적을 따라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7절도 봅니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영원한 것을 위하여 불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베드로 전서 2:20-21절에서 
또 이렇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전에는 길을 잃었지만 이제 목자 장에게 돌아왔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목자가 침을 당한 자리에서 
자기 양떼들도 목자를 배신한 흔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이 주님을 배신하는 자 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험들을 통하여 자기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만 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면 응답하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는 것입니다.  -출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소수의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연단“
시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이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실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연단의 과정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고 따라 가려고 하는 구세주가 그처럼 비참한 고난을 당하는 것만 해도 
벌써 따라갈 맛이 다 떨어질 것 같은데, 
이제 그 구세주를 그래도 따라가려고 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또 그런 고난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종교에서도 이런 식으로 교인을 모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사이비 교주도 이런 '고난'을 약속해 주면서 
추종자들을 끌어 모을 수는 없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실로 오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여기에서도 더욱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바로 그처럼 연단을 받은 '삼분지 일'이 결국에 가서는 
"은같이, 금같이" 단련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이나 금이 불을 통과해야만 아무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귀금속으로 
단련되어 나오듯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연단’
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진짜 순수한 신자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후에 그 참된 신자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벌어집니까?

바로 9절 하반절의 말씀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라는 실로 감격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참 신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자들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신자들을 당신의 진짜 선민이라고 인정해 주시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자기라는 존재의 참된 의미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완벽한 관계 속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금속의 연단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결정체만을 모으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과 그분을 따르는 성도가 겪게 되는 고난은
결코 참된 신자를 낙심시키거나 참된 교회를 와해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신사회로부터 핍박을 당할 때에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삼분지 일'의 소수가 '다수의 외식적 종교인'들로부터 확연히 구분됩니다.

외부로부터 극심한 박해가 있을 때야말로 참된 복음을 지키는 '작은 자'들만 
모여 있는 신실한 교회가 '세상과 짝하는 배교자의 무리'로부터 
뚜렷이 성별되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진짜 신앙은 
로마 제국의 칼날 아래에서, 중세 천주교의 종교재판의 자리에서 
오히려 '은같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세주시며 왕이시라고 죽을 때까지도 
당당하게 증거할 줄 아는 참된 신앙은 바로 일제와 공산주의의 총칼 앞에서 
실로 '금같이' 빛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교회사를 통하여 수없이 나타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참된 백성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당신의 세우신 참된 교회를 지키시기 위하여 
친히 행하고 계시는 놀랍고도 오묘한 구원 역사의 과정인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목자'를 칼로 치시고 
'삼분지 일의 작은 자'들을 불 가운데 던져 연단하심으로써 
그 어떤 경우에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진짜 신자'들을 모아서 
'당신의 백성'으로 높이 들어 주시면서 이 '선민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