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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14장,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LNCK 2022. 12. 6. 14:40

https://blog.naver.com/karamos/220360526036


◈슥14장,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2012.09.16.          스가랴 설교 모음  

서론

스가랴 14장은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말씀을 증거하고 있으며,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7절엔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여호와의 날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 정관사 ‘the’를 붙여 “the day of the Lord”,
여호와의 날로 번역되는 것이 있습니다. 정관사 ‘the’가 붙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의 날, 혹은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슥14장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a day of the Lord”로서
‘여호와의 한 날’입니다. 정관사 the 대신 부정관사 ‘a’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개역개정에 그렇게 번역했죠.

이것은 어떤 심판의 날이나
재림의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어떤 날을 말하는 겨죠.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7
이것이 달력상으로 24시간이라고 한다면
“낮이 지나고 밤이 지날 것이다”라고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달력상으로 한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또한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스가랴 12~13장에 계속 등장하고 있는
“그날에는”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 메시아시대가 이루어지는 날을 가리키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신약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신약의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7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7b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세상은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4백여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백년 동안 하나님이 단 한 명의 선지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두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를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방인들도 로마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도 그들의 종교에
완전히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신비종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철학종교,
갖가지 신화로 이루어진 신화종교까지
이방인들은 세 가지 종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이나
다 그들의 종교에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몇 백 년 동안 그들의 종교를 믿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영적으로 공백이 생긴 흑암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들도 어둡고 유대인도 어두운 시대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빛도 없고 모든 광명한 자들이 떠난 시대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시대는 신약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 교회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누르고
최고의 종교, 진리의 종교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스가랴 14장은 신약시대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에 관해
세 가지 신비한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누르고 최고의 종교,
참된 진리의 종교로 우뚝 서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온 땅이 아라바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0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운데로 우뚝 솟게 되고
예루살렘 주변 땅은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예루살렘 지리는 예루살렘 주변이 산이고 예루살렘이 낮습니다.
시온산이 산 중에서 제일 낮은 산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변 산이 다 낮아지고
예루살렘이 가운데 우뚝 솟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라바’는 평지를 말합니다. 온 땅이 평지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평지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나머지 땅들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주변 땅들은 다 낮아져서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자리에서 높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서쪽에는 베냐민 문이 있고
동쪽에는 첫문 자리가 있고
성 모퉁이 문은 북서쪽에 있고 하나넬 망대는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왕의 포도주 짜는 곳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동서남북으로 올라와서 높은 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의 지리가 변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예언을 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2:2

여호와의 전인 시온산이 말일이 되면 우뚝 솟을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높은 산인 것처럼 뽐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기가 높은 산인 것처럼 뽐내고 있습니다.
다 높은 산인 것처럼 자랑을 하지만, 하나님이 다 낮춰버리시겠다는 거죠.

다 낮춰버리고 오직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복음 진리만이 최고의 종교,
참 진리의 종교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1절에 보면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거하고
또 예루살렘에는 저주가 없고 어떤 원수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교회는 우뚝 솟은 진리의 센터가 되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저주를 받지 않게 되고
악한 사탄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안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시는 저주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신약의 언어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3~35

하나님의 택함 받고 예수 믿는 우리는 저주도 없고, 송사할 자도 없고,
정죄할 자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도 없게 됩니다.
교회는 인류역사 가운데 진리의 센터, 구원의 센터, 하나님 통치의 센터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9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며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고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적인 존재는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한 분이고 필적할만한 다른 존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것을 신약의 언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나쁘게 사는 것보다 좋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합니다. 죄 용서를 받고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10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센터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우뚝 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고
이것은 지난 2천년 동안 충실하게 실현되어 왔습니다.


◑2.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둘째, 스가랴가 예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8

생수는 축복의 상징이고, 생수가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이고
열매가 풍성하고 농사가 잘 되는 축복된 땅입니다. 생수는 축복의 원천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축복의 근원, 생수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동일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겔42:1~5

요엘 선지자도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욜3:18

스가랴는 예루살렘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고
에스겔과 요엘은 성전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신약시대에 교회에 대한 예표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 생수는 절반은 동해로 흐르고 절반은 서해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8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축복을 주시되
팔레스타인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서사방 온 세계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생수는 동해도 흐르고 서해도 흐를 뿐만이 아니라
여름에도 흐르고 겨울에도 끊임없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7:37~39

교회는 축복의 소유자고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근원이고
성령의 부으심은 축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축복의 생수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도바울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갔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흘러온 것이
지난 2천년 교회역사입니다.

아시아에서 생수를 받은 우리는
이 생수를 다시 전 세계로 흘려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4

교회는 복의 근원입니다. 교회는 생수의 근원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든 어떤 기관이 있어도
생수의 근원이 되는 기관은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은 교회로부터 흘러나오며
교회가 이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생수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축복을 나눠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 주신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받은 복을 가둬두고 있으면 썩지 않겠습니까? 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동해로 서해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세계선교의 중심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핍박과 환란 속에 있는 교회를 끝까지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1~2

이는 예루살렘을 열방이 침공해서 약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읍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4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발이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서니
감람산이 쫙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절반이 북쪽으로 옮겨가고 산 절반이 남쪽으로 옮겨가서
예루살렘의 남은 백성들이 감람산 갈라진 길로 아셀이라는 곳까지
피신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셀이라는 말은 지리적인 위치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고요함, 평안함, 안전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을 열방이 핍박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사 안전한 곳으로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교회를 공격해서 승리하는 것 같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남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하여
피하게 되고, 살아나게 되고, 도리어 승리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6

예루살렘을 치러왔던 백성가운데 남은 자가 도리어 개종을 해서
여호와를 경배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열국은 교회를 핍박했는데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로 죽지 않고 살아남고
도리어 치던 사람들이 개종을 해서 여호와를 경배하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핍박을 당해왔습니다.
핍박 당하는 소수자요 약자였습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강자가 된 적은 없습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강자가 된 것이 중세인데
그것은 썩고 부패한 교회이기 때문이지
참된 교회는 언제나 소수이고 약자였습니다.

약한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 가운데 평안을 누리고
열국을 향해서 복음을 증거함으로
도리어 핍박하던 열국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승리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핍박하던 열국은 패배자가 되고
핍박당하던 교회는 도리어 승리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역설적인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8~9

하나님은 교회를 지키시고 피할 길 내시고 살게 하시며
도리어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질그릇 같이 약한 성도이지만 복음의 보배를 갖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단들과 정치적인 파워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해치려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입니다.
짐승은 정치적인 파워를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고,
영적인 거짓말인 이단사설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입니다.

짐승들이 교회를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발이 서시면
감람산도 갈라지고 홍해도 갈라지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스가랴 14장 전반부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하나님은 교회와 복음진리를 높은 산이 되도록 높여주셨고
교회는 진리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생수를 흘러내는 축복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하여 넘어질 것 같고 곧 망할 것 같아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승리자의 반열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모르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진리도 없고 축복도 없으며
승리자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패배자가 될 뿐입니다.

현세도 패배하고 내세는 영원히 패배합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치고 약탈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12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핍박하는 자는 결국 살도 썩고 눈도 썩고
혀도 썩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고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본문 슥14장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생수의 근원이고 축복의 근원의 역할을 해야 하며
우리가 생수를 흘려보내는 참된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하고 세상에서 소수자로 핍박을 받을지라도
결코 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축복자고 우리가 승리자입니다.
우리 교회가 생수를 세계로 흘려보내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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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ramos/220360526169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두 가지 방법              슥14:16~21        2012.09.23.

서론

오늘은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연속극에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연속극의 마지막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만들면
다음 주에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시원찮게 끝나면 그 다음 주는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가랴는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은 우선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는 살만한 집을 짓고
성전은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일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B.C. 520년에 두 선지자가 예언을 시작해서 4년이 지난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은 연속극 한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회가 끝나고 또 다음 회를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면
그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게 되실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메시아시대 혹은 신약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관한 예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용어로는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14장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는 신약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달성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존재 목적과 동일합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43:7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47년 영국에서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십니까?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부모가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1.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구약시대는 제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모든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함으로써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배는 실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민족적인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민족적인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의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거죠.

구약의 제사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드렸지만
신약의 예배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본문 슥14:16~19절까지는 신약의 예배에 관해 네 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6

▲첫째,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실천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절만 되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불신자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강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징계를 자초합니까?
한국의 교인들은 명절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협하고 자꾸 뒤로 물러가면 귀신들은 더욱 우리를 공격하죠.

저는 저희 큰 집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고 큰 집에 전화했더니 그날 밤 형수가 꿈을 꿨답니다.

길 양쪽으로 한쪽에는 절이 있고 한쪽에 교회가 있었는데
절의 스님들이 목탁을 치면서 우리가 졌다고 하자
교회의 목사님이 어서 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큰 집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들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주체에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는데
신약시대에는 이방인들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계7:9~10절은 천국에서 이 예언이 완성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천국은 예배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에서는 족속과 방언을 가리지 않고 각 나라에서 나온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과 어린양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함이
예배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했는데
유대인에게는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장막절).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되는데
7일 동안 초막(원두막)을 짓고 거기서 사는 것입니다.

초막절을 7일을 지내고 8일째 되는 날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데
초막절은 왜 지키는 것이냐? 레위기 23:41~4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초막절은 지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만
과거에 애굽의 노예였던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편안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과거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면서 장막에 거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7일 동안 초막을 짓고 거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것과
광야 생활 가운데 보호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처럼 메시아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지옥과 영원한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악한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인 것입니다.

▲넷째, 예배의 상벌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에게 현세에도 복을 주시고,
내세에도 복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19

어떤 분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년왕국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천년왕국이나 천국이 아닌 교회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축복이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과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이 아닌 저주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중구조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

예배 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십시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실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주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고, 예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에 행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고
영예며 축복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성결”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20~21

위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출28:36~37

구약시대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머리에 쓰는 관이 있었는데
이 관 앞에 정금에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서 매달았습니다.
그러면 이 관을 쓴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말 방울은 말의 목에 달아 말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한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솥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솥만 성물이었는데
메시아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다 성물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천히 여겨졌던 제단 앞에 피를 담는 주발 또한 성물이 된다고 했죠.

‘성물’이라던가 ‘성결’이라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거룩한 그릇이고,
사람이 쓰면 거룩하지 않은 그릇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구별되어 사용되었지만
메시아시대에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도
구별되어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인데 14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신약시대가 되면 제사장과 평신도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민족적, 지역적, 교육적,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게 되고
아무리 비천한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 원리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랍비 등 거룩한 척하고, 누구보다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창녀로 살던 여인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거룩한 여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남편이 여섯 번이나 바뀐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갈취하던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것을 다 내놓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아주 먼 곳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예수님 믿은 후, 구별하신 거룩한 성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수종들고 영광을 돌리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하면 “예”라로 대답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왜 부르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결론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출세하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 건강, 인기, 명예 이런 것들은 다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죠.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첫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둘째,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함으로써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 14장에서는 두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6
누구에게 숭배합니까? 여호와께 경배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20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됩니다.

스가랴 마지막 장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두 표현 ‘여호와께 숭배’와
‘여호와께 성결’이 강하게 새겨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