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자 My Messenger’란 이름의 뜻을 가진 선지자 말라기가 있습니다. 그는 포로시대가 끝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 (B.C. 516년경)이 끝난 이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앞시대를 살았던 학개와 스가랴의 감동적인 설교를 들었던 백성들은 성전 재건과 함께 찬란한 역사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오리라고 했던 여호와의 큰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창대와 번영은커녕 오히려 기근과 흉작으로 고통이 연속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2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회의와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2:17
저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선한 자로 보게 되었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크게 무익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14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15
말하자면 모순논리, 모순사고, 모순의식, 모순감정으로 충만해져 버렸습니다. 그러한 모순관계가 저들의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말라기는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백성 앞에 나타났습니다.
말라기서는 전부 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절 수는 57절밖에 안 되는데, 그 중에 하나님 자신이 ‘나’라고 하는 1인칭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구절이 무려 47절이나 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과 얼마나 깊고, 크고, 넓고, 끝이 없는 인격적 관계성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모순관계”에서 오는 불행을 해소하고, “상관관계 intimate relationship”의 행복을 회복할 것을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받은 행복이라고 선지자 말라기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 관계성의 행복한 내용들이 무엇인가요?
◑1. 사랑관계의 행복입니다.
말1: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먼저 나를 사랑, 요일4:10 -무궁한 사랑, 렘31:3 -선택적 사랑 신7:7~8, 말1:2 -언약적 사랑 말4:4 -구속적 사랑 신4:37, 호11:1 으로 사랑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실로 무상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자비하신 아버지’ ‘온전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 ‘온전한 빛들의 아버지’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모든 영靈의 아버지’셨습니다. 히12:9 그래서 성령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 롬8:14-15
그러므로 부자관계의 단절은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우리는 지난 2000.08.15일, 남북이산가족의 만남에서, 50년이 넘도록 부자관계가 단절되었던 비극이 얼마나 아픈 것이었던가를 봤죠.
그 부자관계의 회복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행복한 것이었던가를 보았습니다. 그나마 그 관계는 2박 3일로 다시 끊어지고 기약없는 이별의 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부자관계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갖는 모든 관계 중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만큼 그렇게 뜨겁고 간절한 관계는 다시 없습니다. 바로 그 혈육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마7:11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식들인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구해야 될 자식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에 따라 좋은 것(성령님, 하나님)으로 채워주시는 관계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혈육의 관계가 잘 될 때 웃음이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관계성의 행복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 사랑의 계시적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고 싶은 그 이상한 충동, 그 이상한 행복, 그 이상한 기쁨, 그 이상한 자원심이 일어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식을 향한 혈통적 부성과 모성의 그 사랑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계시입니다.
습3: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부자관계의 행복이 어떠한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섬김을 최상의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1:6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에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의 연을 끊진 않겠지만, 멀리 하시겠다는 겁니다.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2020~2021년 사이에, 코비드-19 사태로 인해, 사상 초유로, 예배당 문이 닫히던 시절이 잠깐 있었습니다. 그때 위 10절이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부모님께 매달 용돈을 드리는 자녀들이 있고, 못 드리는 자녀들도 있죠. 사실 월급날에, 급여를 받는 즉시 자동이체로 월급의 대부분이 지출되는 현실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이 쉽지 않죠.
그런데도 얼마간이라도 부모 몫을 떼는 자녀들은 ‘최우선 순위’가 부모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녀는, 하나님께 최우선 순위를 둡니다. 자동차보다도, 의류구입보다도, 여행보다도, 그 무엇보다도요!
그런데 만약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하나님 앞에 늘 지갑을 닫고 있다면, 아니면 ‘다리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린다면’ :8 오늘날 우리에게도 10절이 적용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너는 예배드리러 안 나와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못 나갈.. 어떤 불가피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금이 가고.. 깨지는 거죠! 나의 영적인 부자관계는 지금 상태가 어떻습니까? 괜찮은가요?
◑3. 이상적 군신 君臣 관계의 행복입니다.
1:14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크신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열방 중에서 그 이름이 세세토록 떨친 큰 임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민족 중에서도 그 이름이 크게 떨치실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말1:5, 11
이스라엘은 이러한 큰 임금을 섬기는 신하요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요 주인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왕을 모신 이스라엘은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행간에 나타남 그 위대하신 왕께서 우주적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고, 그 이름이 열국 중에 크게 떨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왕을 섬기고 따르는 이스라엘의 행복이 어떠하겠는가요? 권세 있는 왕, 세세토록 살아있는 왕, 그 국권이 영원하고 그 도모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참으로 행복하도다!”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 말라기였습니다. 이상적인 군신관계의 행복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군신관계에는.. 신하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자는.. 피곤한 게 아니라, 행복입니다.
어릴 적에, 학교 선생님은 반장이나 부반장에게 종종 심부름을 시킵니다. ‘자료실 가서, 괘도 가져오세요!’ 등 그러면 반장, 부반장은 그걸 기쁨으로 감당하지, 투덜대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학생들도, 다들 부러운 눈초리로 반창을 쳐다보았지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종들, 신하들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명(일)’을 맡겨 주십니다.
(펀글) 「아녜스 곤자 베자시오는 *마더 테레사의 본명 로레토의 성모 마리아 수녀회에 입회하면서 자신은 ‘교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18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안락한 수녀원을 떠나 캘커타의 빈민가로 가서 ‘가난하고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일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는 그 일이 필생의 과업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그로 인해 후에 그는 ‘마더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테레사는 새로운 소명을 느꼈을 때 순종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지금까지 지내 오던 편안하고 안정적인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테레사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엄청난 소명은 아닐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안주하는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 주위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라고 촉구한다.
때때로 그 소리는 나팔 소리처럼 크게 울리지만 어떤 때는 바람처럼 잔잔하게 속삭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 듣고자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은 소명을 주실 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그 부르심과 시키시는 일을 오늘도 묵묵히 순종해서 수행할 때 지위와 나이에 관계없이 오늘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4. 특별한 소유관계의 행복입니다.
3:1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신26:18절에는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19:5-6절에는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특별한 소유, 보배로운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
이 특별한 소유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그것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한 날에 의의 태양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메시야적 믿음을 가지는 행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4: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저들은 특별한 소유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3:16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는, 바로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되어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출32:32, 빌4:3, 계3:5, 20:12
그 이름이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열국 중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구원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어느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남자들이 그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교제를 시작하지만 그녀와의 교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눈썹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는 남자들이 다 떠나버린 것입니다. *오래 전 과거 얘기죠.
그러다가 그 아가씨는 눈썹이 없이 없다는 것을 감춘 채 가난한 과일장사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여자는 결혼을 한 후에도 늘 눈썹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눈썹을 그리는 것을 가장 먼저 했습니다. 자기의 남편에게만은 눈썹이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을 도와 과일배달을 하던 직원이 몸이 아파서 일을 나올 수가 없게 되자, 부득이하게 여인은 남편을 도와 과일배달을 나가야 했습니다.
처음 해본 일이라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남편과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리어카에 과일을 가득 실고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동네로 팔러 가다가 너무 힘이 들어 잠깐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땀을 흘리며 쉬고 있는 여인에게 남편이 다가와서는 자기 목에 두른 수건으로 아내의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 주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고 감동적인 장면인데, 여자의 마음은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얼굴에 땀을 닦다가 눈썹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자꾸만 얼굴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조심스럽게 아내의 얼굴에서 땀을 닦아내는데, 눈썹 주위까지만 닦고 눈썹는 닦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는 수건이 눈썹을 닦을까봐 자꾸만 고개를 돌리는데, 남편이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보, 당신이 나에게 시집을 왔을 때 눈썹이 없는 것을 알았다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당신의 눈썹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생겼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자이기 때문도 아니고, 똑똑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냥 ‘나’이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그냥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십시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요, 그것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마치는 말 지금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불행을 벗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과 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모순관계의 불행이었죠.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은 관계성의 회복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사랑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부자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상적인 군신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행복이요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관계성이란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요 축복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 지음받은 인생은 대신 對神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의존적 피조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인 對人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물 對物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복이요, 계발이요, 다스림인 문화적 명령입니다.
결코 사람은 유아독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 상호관계성의 바른 정립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존의 법칙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주권적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상관관계의 법칙을 어기고는 잘 사거나 행복할 수 없죠.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때만이 행복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겨야만 행복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일 때만 진정으로 사람의 사람된 신분과 내용과 명예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영원하신 통치를 받아야만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결국 역사의 영원한 통치자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 특별한 소유, 보배로운 소유가 될 때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예수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속의 은총을 담고 있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30배, 60배, 100배의 복된 생을 누릴 자인가요? 바로 모순관계의 불행에서 상관관계의 행복으로 돌아서는 자입니다.
영감받은 선지자 말라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 보배로운 존재임을 잊지 말라!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받은 행복과 축복의 노다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순관계는 역리 逆理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질서요, 불행이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상관관계는 순리 順理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질서요, 행복이요, 축복이요, 영생입니다. 상관관계의 순리 앞에 축복받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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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제가 어렸을 때에 거지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집집마다 돌아가니며 음식을 얻어가거나 밥을 얻어먹고 가는 거지들이 하루에 몇 명씩 오기도 했습니다.
가끔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있노라면 거지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저희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거지가 오면 밥을 담아 주기 위해서 식당 한 켠에 거지 전용 양푼과 숟가락이 항상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거지가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오면 어머님께서는 거지전용 양푼에다가 먹다 남은 밥과 반찬 몇 가지를 담아서 마루로 내어 주십니다. 그러면 거지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그 밥을 먹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꼭 그렇게 거지처럼 대했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것 가운데서 좋은 것은 자기들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먹고 남은 것이나 세금으로 바칠 수 없는 것, 즉 온전치 못한 것, 불구인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마치 거지에게 먹다 남은 밥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제사를 드렸다는 거죠.
주2) 이사야 1:11-15절입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러므로 15절에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또 예레미야 7:1-11절입니다. 구약시대에 엄연히 서 있는 성전으로 제사하러 오는 자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이곳이 성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까? 평소의 삶은 도둑질 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전에 나아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헛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다시 이런 짓들을 하러가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곳을 향하여 도둑의 소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교회를 이렇게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