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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2:1~9, 타락한 제사장들에 대한 경고 여러 설교 정리
말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9절, 타락한 제사장들에 대한 경고 (본 페이지)
◑2:1~9절은 <타락한 제사장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말라기의 총 6개의 예언 중 두 번째
말라기의 두번째 예언은 1:6~2:9에 걸쳐 기록되어 있죠.
앞서 1:6~14절에서는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고발합니다.
백성들은 총독조차 거절할 정도의 흠결 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더러운 떡, 병든 것, 훔친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모독한 제사장들에게
저주의 경고를 내릴 수밖에 없는 때를 알립니다. ↙
2:1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이미 저주를 내렸음에도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저주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저주를 무시했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경고하십니다.
그 저주의 내용이 3절입니다.
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는 후손을 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원어 문자적으로는 ‘팔을 자른다’인데 의역하면
‘제사장들이 누리는 사회적 권세와 능력이 상실되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절기의 희생의 똥을 뒤집어쓸 것이라고 합니다.
절기의 희생의 똥이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서
하나님께 제사로 바치는 짐승의 제물로부터 나오는 부정한 배설물을 뜻합니다.
구약 제사법에 의하면 짐승의 배설물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
진 밖에서 불태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부정한 짐승의 배설물이 제사장의 얼굴에 뿌려진다고 하니
처참한 치욕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는
짐승의 제물로부터 나오는 배설물이 진 밖에서 불태워지듯이
제사장들이 짐승의 배설물과 함께 내버려지고 태워지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시는 이유를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께서 레위와 세운 언약이 지속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레위와 세운 언약이란 율법대로 온전한 제사를 드리고
레위인이 지켜야 할 본분을 지키고 성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인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
하나님께서 제사를 제사답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을 모독한 제사장들을 저주하여 벌하시더라도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는 레위인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달리 말하자면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제사장을 벌하실지언정
제사와 제사의 직분이 사라지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직분을 받은 직분자가 범죄했다고 해서
그 직분을 없애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길 원하십니다.
오늘날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예배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에 예배는 영원히 존속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불경스럽게 하는 자들이 사라져야 하지 예배는 영원해야 합니다.
◑적용
말라기 시대 제사장들은 옳은 길에서 떠났습니다.
자신들이 옳은 길에 서 있지 못하니 사람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거역하게 하는 인도자가 된 셈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지 못하니
언약을 깨뜨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신약성도 모두는 제사장입니다
말라기 2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지도자 제사장들이
극도로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율법을 가르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며
백성들이 죄로 인한 저주를 받지 않고 죄사함을 받아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부패하여 앞장서서 악을 조장한 것입니다.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가 축복을 받을지 저주를 받을지는
그 사회 종교 지도자들의 삶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목사가 타락하면 그 사회는 별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목사가 아니니까 이 말씀이 상관없다고 생각해산 안 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목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1:6, 5:10, 20:6절을 보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5절과 9절을 봐도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그러므로 본문은 목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1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명령하실 수도 있는데
직접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급하고 간절한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총 4가지를 명령하십니다.
①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말2:5
② 제사장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말 2:6~7
제사장들은 언어가 중요합니다.
제사장들은 언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어를 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어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진실입니다. 제사장들은 정직해야 됩니다.
진리를 말해야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버지입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인 것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엡 4:25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골 3:9
제사장들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정직한 언어, 진실한 언어를 써야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뽑을 때도 거짓말하는 사람은 뽑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마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정결한 말을 해야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자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온통 욕설과 부정한 언어로 가득합니다.
인터넷을 봐도 언어가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세대 속에서도 성도들은 정결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덕을 세우는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는 언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4:29
신약성경에서 특히 야고보 사도는 사람의 혀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에 관하여 경고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6
지옥불이 사람의 혀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악한 말, 남을 해치는 말,
죽이는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입에서 지옥불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지옥불이 남을 태울 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의 바퀴도 불사르게 되는 거죠.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 복음을 증거 하는 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죄악에서 돌이키도록 하는 말을 사용하게 되기 바랍니다.
넷째, 은혜스러운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골 4:6
제사장들은 은혜스러운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③ 제사장들은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해야 한다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말 2:6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④ 제사장들은 “복음 전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말 2:6~7
▲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부탁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말 2:2
복인 줄 알고 누리던 것들이 도리어 고통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많아서 복인 줄 알았더니 다 속을 썩여서 고통이 되고,
돈이 많아서 복인 줄 알았더니 그것으로 인해서 불안하고 고통이 된다는 거죠.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 2:3
종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식물의 씨앗이라는 의미와 둘째, 사람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농사를 해서 씨를 뿌려도 농사가 안 된다는 이야기인지
자식을 낳으려고 해도 낳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자신의 사명을 다 하지 않으면
그 후손들이 하나님께 책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라기 2장 3절 중반에는 희생의 배설물을 얼굴에 바른다고 나옵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오기 전 화장을 하면서
화장실에서 퍼다 바른 분이 계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냄새나고 수치스럽겠습니까?
원래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는 제물의 배설물들은
성전 바깥으로 나가서 태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사장의 얼굴에 바르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9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의 다른 번역을 참고해 봅니다.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과거 개역
‘법을 다룰 때 인간 차별을 한 탓이다’ - 공동번역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한 탓이다’ - 새번역
오늘날에도 치우친/편파적인/차별된 성경해석이 많이 있습니다.
①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책임 .. 균형을 잃고, 편파적일 수 있죠.
②하나님의 예정, 작정 vs 자유의지 .. 성경에 둘 다 나옵니다.
하나님의 주권, 예정, 작정 등은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 위에 세위지는 것입니다. *피라미드처럼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를 무시하면.. 편파적이 됩니다.
③ 은혜, 믿음, 성령의 인도 vs 인간의 의지
오늘날 성도가 믿음을 갖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고 할 때
인간의 의지 will 를 너무 무시할 수 있죠.
인간의 의지를 등한시하는 이유는,
기독교를 유교나, 다른 율법적인 종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인데,
그렇다고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기독교’는 극단에 치우친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맞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를 범죄로부터 막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의지로, 죄악과 세상과, 육신과 싸워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 은혜의 도움을 받아서요.
많은 설교들이,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인도를 강조하다보니
‘신자의 의지적 결단’을 도외시하게 되는 극단에 치우칠 수 있죠.
주일날 설교를 듣고 나면, ‘의지적 결단’을 하게 하는 것이 좋은 설교죠.
물론 성령의 인도 아래서요.
하지만 ‘주님이 은혜로 다 이루게 해 주신다, 감사합니다. 아멘!’
이렇게만 매번 계속 설교된다면.. 극단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④성화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vs 인간의 책임
-성화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다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이 있고, 고전1:30
-성화를, 자기가 책임지고 열심히 이루어가야 한다는 관점이 있죠.
둘 다 성경적입니다. 한쪽으로 편향되면 안 됩니다.
⑤성령론에 있어서, 믿는 자는
-그 안에 성령님이 내주해 계신다는 관점과 (더 받을 필요 없다)
-내주해 계시더라도 거기에 안주 말고, 성령충만을 받아야 된다는
관점이 서로 대비적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칠 필요 없이, 둘 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둘 다 나오니까요.
⑥하나님의 속성에도 사랑과 공의,
두 속성이 서로 모순, 대치됩니다.
성경에는 둘 다 나타나있죠. 사도바울은 둘 다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과 <준엄하심>을 보라’ 롬11:22
⑦사도행전의 교회와, 서신서의 교회가 서로 대조적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승리적, 진취적, 부흥하는 교회의 모습이고요,
-서신서에 나타난 교회는.. 문제가 많고, 파당이 있고, 싸우고, 배도하죠.
오늘날 우리 지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⑧신앙의 겉형식과 속본질도 서로 대조적입니다.
우유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담는 우유병도 필요한거죠.
성경도 겉형식과 속본질을 둘 다 강조합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보십시오.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오직 한쪽만 옳다고 고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나라에, 진보적/보수적 정파가 있습니다.
같은 정파 안에서도 매파/비둘기파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누가 이렇게 말하죠. ‘양날개로 날아야 비상할 수 있다!’
한쪽 날개로만 날아오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본문 2:9에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할 때는, 후보자가 논문을 제출하면
그 분야의 박사들 4~5명이 반대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후보자가 그 반대 질문들을, 자기가 제시하는 논지로 다 이겨내야
드디어 논문심사를 통과하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지요.
그러므로 뭔가 박사와 같은 전문가가 되려면
‘반대 의견을 청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내용에 반대하는 의견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내가 따르고 있는 내용에 반박하는 주장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내가 주장하는 내용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이겨내고, 극복하고, 뛰어 넘어야
정말 ‘박사와 같은 전문가’가 되는 것이죠!
오직 내가 믿고 있는 부분만 옳다고 고집하고,
다른 일체의 반대 의견에 대해 귀를 막아버리는
그런 옹고집, 고집불통으로는...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잃습니다.
들은 얘기인데,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유럽에서는
TV에 토론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100분 토론’ 같은 게 있지요.
우리나라는 아주 가끔 ‘토론’을 하지만,
거기는 상시적으로 ‘토론’을 하고, 포럼을 가진다고 합니다. 거의 날마다 TV에서 토론!
나와 반대되는 의견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죠.
과거에 우리는 ‘난상 토론’ 이런 것을 했다가, 괜히 감정싸움으로 번져서
오히려 결과적으로 손해가 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안 한것보다 못하게 된 거죠.
그런데 서구사회는, 그리스-로마 시대 때부터, *아고라, 원로원 등
근대의 영국 명예혁명 등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런 ‘토론 문화’가 DNA 속에 내재된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면, 중세시대에 왕과 신하들이 난상토론 하는 장면들을 봅니다.
본문 2:9절은 ‘치우치면 백성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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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말2:1~9, 타락한 제사장들에 대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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