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1932~2018 '목사들의 목사'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분의 목회철학과 이분이 쓴 책들을 읽다보면 '아~ 목회가 이렇게 건강할 수 있구나, 목회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라는 것들을 목회자 스스로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는 거죠.
재미있는 사실은 '목사들의 목사'라고 불린다고 해서 이 분이 엄청나게 큰 교회를 목회하신 게 아니었어요.
미국의 메릴랜드 주 Bel Air 에서 *Christ Our King Presbyterian Church 30 여년간 장로교 목회자로 평범하게 목회를 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분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가를 돌아보면 이분이 이야기하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해있는 곳이 크든 작든,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그곳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는 인터뷰에서 고백하기를, 실제로 자기가 목회하는 동안에 모든 성도들이 다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장로님들이 다 자기를 반기지도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낼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얘기들을 들으면서, 자기를 반성하게 된다는 거예요.
특별히 '미국의 기독교도 경쟁과 소비주의 사회에 많이 물들어 있다' 라는 거예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아주 그 부분들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성경 안에서 그런 부분들을 잘 골라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거꾸로 이 세상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것>들에 대한 관점을 아주 탁월하게 제시해 주세요.
그래서 이분의 아주 유명한 책 중에 한 가지가 <메시지 성경>인데요. 이 책은, 원어 성경을 현대 미국말로 풀어쓴 책입니다. 당신 혼자서 쓰셨죠.
이 <메시지 성경>을 읽어보면 '아, 성경을 이렇게 일상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 라는 느낌을 갖게 되죠.
그런 면에서 유진 피터슨은 성경원어에도 정통해 있고 신학적으로도 아주 깊이가 있는 학자입니다.
▲그렇지만 유진 피터슨의 이야기가 결코 목회자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을 보면, 이분의 전체 책에서 일관되어지게 나오는 키워드가 한 개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라는 거예요. 네러티브 narrative 라고 하죠.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사용 하신다'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영성이라는 게 그만큼 자연스럽고, 우리 마음에 와닿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일상이 이야기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라고 거예요.
1) 첫번째, "성경은 이야기" 라는 거에요. 모세의 이야기, 예언자들의 이야기, 또 예수님의 이야기... 전도자들의 이야기..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 라는 겁니다.
2) 두 번째 "우리 삶도 이야기" 라는 거예요. 우리 삶이 아주 거창하게, 구원, 거룩, 진리.. 이런 어떤 추상적 개념이 주된 삶의 내용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아침에 밥을 해먹고,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또 직장에서 갈등이 있고,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연결되어진 게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거죠.
그래서 '목사님들의 목사님' 이라고 해서 이분이 너무 어렵게 책을 쓰시고, 설교를 하신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 일상적인 삶을, 이 분은 성경적으로 다룹니다.
"하나님, 또는 신앙 문제는 살균 처리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땅 (현실) 위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유진 피터슨
사랑과 진리, 죄와 구원 등은 주일날 교회 안에서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 일상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사랑과 진리, 죄와 구원 등의 주제를 삶의 현장속으로 치열하게 끌고 오세요.
그리고 "우리 현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 ..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거예요.
3) 세번째, 내 삶의 "진실한 이야기"는 우리를 자라게 한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가 다 중요하다는 건 아니다는 거에요. 우리가 흔히 얘기할 때 '잡담'이라고 하죠. 그건 중요하지 않죠.
'이야기'가 중요하지만, 또는 누군가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위선적으로 또 나를 과시하려고 하는 이야기들은 결코 우리 영성의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실한 내 일상의 모습을 드러낼 때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자라가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 있는 이야기는 뭐냐면 그냥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솔한' 이야기에요.
그 진실한 이야기 라는 것은 결국 계속 영성에서 강조하는 '마음' 또 '내 약함' '부족함'을 결코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토대로 유진 피터슨의 모든 책들은 이야기체로 기술이 되어져요.
◑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유진 피터슨은 다윗을,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적인 이상으로 그려놓지 않아요. 이 책에서, 다윗을, 우리랑 똑같이 성공하고, 실패하고, 욕심도 많고.. 그런 일반 사람의 마음을 다 가진 사람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따라가다 보면 '아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가까이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단초가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출연진 : 유진 피터슨이 다윗의 그런 연약한 부분까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다른 설교자들과 다르네요. 다른 설교자들은 다윗을 설교할 때,
세상에서 잘 되고, 뭔가 좀 이렇게 양 어깨가 올라갈 듯한
성공한 이야기들을 많이 설교하시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그 성공을 바라보면서, 본받아 나아가야 될으로 설교하시는데 저는 이런 실질적인 것들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출연진 : 저는 저의 약한 모습을 거의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거든요. 오래 얘기하다 보면 항상 결론은 제 자랑으로 끝나죠. 그래서 초등학교 때 제 별명은 '잘난체 OOO' 였어요.
이제 이 책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평범한 사람 다윗
이 책은 다윗을 '평범한 사람'으로 그립니다. 아주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다윗이 살던 시대는 철기시대고요. 전쟁도 많았던 시대였어요. 그 속에서 그래서 다윗은 생생하게 살아있던 한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다윗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동떨어진 어떤 철학책이나 교훈집이 아니라는 거죠.
다윗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이었는가 하면, 1)그는 막내였다는 거예요.
삼상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막내는, 히브리어로 '하카톤'인데, 하찮다는 뜻이에요. 별로 중요인사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
배경이 뭐냐면, 사울왕이 잘못하니까 하나님께 사무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2대 왕을 기름부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새가 자기 아들들을 다 사무엘에게 선을 보입니다. 일곱 명을 선보였는데, 사무엘이 감동이 안 오는 거죠. '아들이 더 없습니까?'
찾아보니까, 막내 다윗이 저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얘기는, 아버지가 보기에도 '쟤는 아니야!' 했다는 거죠.
다윗이 처음부터 엄청난 리더십을 가진 인재가 아니었다는 거죠. 가족들 안에서도,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막내였던 거죠.
2) 두 번째 다윗은 거짓말을 해요.
삼상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이 장면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기 시작한 시점이에요. 그는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갑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보니까, 눈치가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이때 다윗이 거짓말을 합니다. '사울이 보내서 왔다' 라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이 거짓말에, 아히멜렉이 음식도 대접을 하고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을 줍니다. 이 다윗의 거짓말 때문에, 나중에 아이히멜렉은 큰 피해를 입게 돼요.
무슨 말이냐면, 다윗조차도 정직하지 못하고, 삶이 아주 위기가 처해 있을 때 그 위기를 모면해 내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유진 피터슨은 그런 다윗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렇다라는 거예요. 거짓말하는 게 우리 라는 거에요.
이 책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으면, 다윗 만큼 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열등감을 느끼게 될 일이 없다. 사실은 그 반대다. 다윗은 우리처럼, 혹은 우리보다 더 나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우리가 더 이상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죠. 그런데 그 다음 지점에서 다윗이 우리랑 약간 결이 달라지는 지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 결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의 관해서는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에서 막내로 소외받고 있어도 또 살아가면서 삶의 위기가운데 내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도 다윗은 그런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다윗, 우리가 그를 보면서 그래도 뭔가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거에요.
우리는 이 지점에서 종종 유혹을 받아요. '내가 집에서 대우를 못 받으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거예요.
또는 거짓말을 하니까 스스로 낙심해서 '나는 하나님과 이제는 상관없어!' 라고 신앙을 자진해서 떠나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뻔뻔할 정도로, 매 순간순간마다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자기 위기를 모면하는 여러 가지 술책을 주위 사람들에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다 모든 일들 속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라는 거예요.
정말 믿음이 잊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죠.
믿음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붙잡아야 되는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사실 유진 피터슨은 '깨달으라'고 얘기해요. '하나님이 항상 그 자리에 계셨다' 라는 거죠.
우리가 영성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차이는,
-우리가 내 계획들이 잘 됐을 때, 또는 내가 신앙적으로 뭔가를 잘했을 때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결국은 영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깨닫는 건데 뭐냐면 내 계획대로 일이 안 풀릴 때에도 심지어는 죄를 짓고 있을 때에도 '나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사람이다' 라는 이야기를 계속적으로 다윗처럼 스스로 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거예요.
출연진 : 그래서 주변에서 '믿지 않으시는 분들이 말하기를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는 더 나쁜사람들도 많이 봤고 더 죄를 많이 짓는 사람들을 더 많이 봤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 저는 항상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이 그래도 교회 다녀서 그 정도예요. 만약 교회 다니지 않았다면, 더 나쁘게 됐을 거에요! 저도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저도 교회 다녀서 이 정도라도 살게 되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유진 피터슨은 결코 환상적으로 그리지 않고요. 평범한 다윗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
다윗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을 때 어떤 면들이 나타나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은 "거룩한 상상력"을 가진다
삼상17:29~40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과 골리앗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죠. 그런데 여기서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어린 다윗이 엘라 골짜기에 가서 골리앗을 만나는데 가보니까, 거기에 모든 사람들의 상상력이 다 멈춰 있었다는 거예요.
전혀 믿음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여기서 말한 상상력이란, 망상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믿음의 생각을 말하는데, 그들의 생각이 타락해서, 전혀 믿음으로 현실을 보지 못했다.. 라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리앗의 그 엄청난 덩치에 짓눌려, 백성들의 상상력이 무너져 내렸다는 거죠.
근데 다윗은 양떼를 지키면서, 짐승들을 지켜냈을 때 자기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에 대한 생각, 하나님께 대한 기대(상상력)가 타락하지 않았죠.
그래서 사울 앞에 나왔을 때, 사울이 자기 갑옷을 줘요. 갑옷을 주니까 이게 입기에 너무 크거든요.
그러자 다윗이 그 갑옷을 벗습니다. 그리고 골짜기 시냇가로 가서 물매를 집습니다. 무릎을 꿇고 물매를 집는데, 유진 피터슨은 '이 순간 다윗이 거룩한 상상력(기대감)으로,
결국은 이 위기를 극복해낸다' 라고 얘기해요.
오늘도 지지부진한 교회 현실을 보면서, 거룩한 기대감(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다윗 같은 사람은, 그 현실속에서, 하나님께 기대감(상상력)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되는 결정적 계기였어요.
이 표현을 이렇게 쓰고 계십니다. 책을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기대감)을 지니고서, 우리의 무릎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저 관습적으로 남들을 따라 살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령님이 기름 부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신 존재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전문가들, 그러니까 보통 세상에 처세가들이 말하는 바, '현대인은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얘기하는 그런 사람들의 의견에 기대고 살 것인가?"
이스라 백성들의 상상력(기대감)이 타락하자, 골리앗 공포증에 빠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상상력(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에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생각이 자꾸만 세상에 물드는 거죠.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안 돼!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가는 거야' 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이 주눅드는 거죠.
근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우리가 상상력을 거룩하게 가지면 그 위기의 순간에도
현실보다 더한 현실!
즉 세상에서는 지금 눈앞에 있는 게 현실이라고 하는데 영적인 세계에서 진짜 현실은
이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에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 라는 게 진짜 현실이라는 거에요. 그 진짜 현실에 눈을 뜨라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보통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말하는 논리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까.. 타락이 돼요.
생각이 제한되어지고, 눈앞에 보이는 가능성으로 계산해서 모든 일들을 해나가는데 하나님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기대감)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거죠.
출연진 : 그런데 그렇게 살면.. 저는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현실적이지 못하다. 너무 이상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 아니냐? 세상을 살아가는데 현실주의적 생각을 가지고서 좀 살아가야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되게 많이 들었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그래서 계속적으로 저희가 짚어가는 것은 '상상력'이라는 게 우리가 하늘에 붕~떠서 간다는 게 아니고요.
우리 삶의 본질을 제대로 보게 만든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 자녀가 지금 잘못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눈앞에 벌어진 현실은 뭐에요? 잘못을 하고 있는 아이죠.
그런데 진정한 현실은 뭐냐면 이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이고, 이 아이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라가는 아이다..라는 게 진짜 그 아이를 바라보는 현실이에요.
근데 우리가 눈앞에 벌어진 그 현상만 보면서, 그게 전부라고 평가한다는 거죠. 그래서 참된 영성이라는 건 뭐냐면, 끊임없이 그 사람, 그 문제의 본질을 보게 해준다..는 걸 말해요.
출연진 : 근데 아이를 보니까, 제가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길래 야단을 쳤어요. 그런데도 안 먹히더라고요.
그러다가 이제 밤에 조용히 와서 '사실 내가 오늘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이러면서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상황을 엄마가 이해를 해줘야되는 거더라고요.
'너 오늘따라 왜 이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모든 전후상황을 들어보면, 이해가 될 만한 상황이었어요.
△한 가지 재밌는 얘기를 해드리면요. 유진 피터슨이 목회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 그 지역의 목사님들을 다 초대했대요.
초대해서 2년간 매주 월요일 오전에 "정신분석 강의"를 들으신 거예요. (아마 전문 정신분석 강사를 초청해서 목사님들이 강의를 들은 모양) 참 유익이 많았대요. 그런데 한 가지 증상이 생기기 시작하셨대요. 그게 뭐냐면 주일날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서 성도들을 바라보노라면
'저 분은 보니까 우울증 환자' '저 분은 집안에 문제가 있는 분' 모든 성도들이 문제의 소유자로 보이기 시작했더라고요.
이게 뭐냐면 눈앞에 있는 현실이에요. 그런데 이 표현대로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냐면요.
저분들은 예배자인 거에요.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그 생각이 들어온 것들을 놓고 깜짝 놀랐다는 거죠.
이분이 아주 지혜로운 게 오전에는 그 정신분석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서재로 목사님들을 다시 모아서
목사로서 성도들의 삶과 목사님들의 진실한 신앙이야기를 다시 나누기 시작했대요.
그러자 주일날 예배에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서 '저 분은 우울증을 가졌지만 하나님 앞에 나온 예배자'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진정한 현실이고 진실인 거예요.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중하지 않는 거죠.
놀랍게도 이 모임이요. 26년간 계속되어지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은퇴하고 난 다음에도 지금까지 42년째 이 모임이 계속되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뭘 말하냐면 결국 우리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꾸 어디가서 누구를 만날 때, 착한 말, 좋은 말만 하라는 게 아니고요.
우리의 영적인 눈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신령하게 바라보라는 게 아니에요.
그 가운데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보면서 더 넓게, 더 깊게 그 사람의 본질을 바라볼 줄 아는 거죠.
내 앞에는 문제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내 앞에 있는 문제를, 문제로만 여기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주님의 뜻은 우리를 얼마든지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고 자라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문제 안에 담겨있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상상력'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걸 상상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고, 다윗은 그걸 보았다는 것이죠.
'상상력'이란 표현이 퍼뜩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 말이지만, 지금 현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암울한 거죠. 그러니 '상상력(기대감)'을 발휘해야만.. 그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그 상상력이 있었다는 것이죠. 골리앗 뿐만 아니라 매사에!
▲2. 두 번째,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인 증거는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하나님 앞에서 춤 추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흔히 말할 때 춤은 뭐죠? 신나게 댄스를 추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이걸 하나님과 연관시켰다는 거에요.
삼하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은 법궤가 자신이 있는 마을로 들어오게 되어지자 기뻐서 춤을 춰요. 자기 부인 미갈에게 체신머리가 없다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춤을 췄는데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윗은 그 순간에 왕으로서 공식 행사를 치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법궤가 들어오자,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었던 것이다."
"춤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을 표현하는 그의 몸짓이었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이 춤이라는 것이 그냥 그저 내 기쁨, 내 즐거움을 넘어서는 '우리의 모든 몸짓조차도 하나님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 라는 얘기에요.
물론 홍해를 건넜을 때도, 미리암과 여인들이 춤을 추며 찬양했던 적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것은 아녀자들이나 추는 것이었고, 지체 높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근엄하게 서 있는 자세로, 자기 위신을 지카는 것이.. 전통과 문화였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은, 즉 보통 사람과 달랐던 점은, 춤을 통해서도 (춤뿐만 아니라, 춤으로 대표되는 일상의 모든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그런 생활속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죠.
◑3.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인 증거 - 범죄했으나 회개 후에 더 강해짐
시51:10~11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죄하고 난 다음에 나단선지자가 다윗을 혼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다윗의 반응이었어요. 회개를 하는 거예요.
그 직전까지 다윗의 모습은 뭐였냐면, 자기가 인생의 왕이었어요. 왕으로서 모든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가운데서 죄에 빠진 거죠.
그런데 유진 피터슨은, 이 지점에서 다윗이 우리와 다른 점을 하나 짚어내요. 죄에는 공포증이 있대요.
이게 뭐냐면 죄를 가지고 있을 때,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다'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죄를 고백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그 지위를 상실할 것 같은 그 공포를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어떤 죄를 흔히 범한다고 할 때, 아무도 안 보길 원하고,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여기서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 순간에 우리가 죄를 짓는 거거든요.
그런데 정확히 내 죄를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는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면, '우리는 죄 공포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훨씬 못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는 죄를 고백해야 돼요.
죄를 안 짓는 게 아니에요.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해서 죄가 주는 공포증을 내려놓는 거예요.
이 책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주된 임무는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범한 죄를 인지하는 것이다."
사람은 죄를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 이게 죄구나!' 라는 것도 우리가 알고, 인정하는 거예요. "죄가 제거되면 우리는 이전보다 부족한 존재가 되는게 아니라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회개하면) 우리는 덜 우리 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우리 다워진다.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존귀한 대우를 받는다.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놀랍게도 어거스틴이 죄를 향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죄여!' 라고 표현해요.
죄를 멀리하는 게 아니고, 역설적으로 우리가 매일매일 생활에서 죄를 짓는데, 근데 그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된다는 거죠.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고요.
그래서 성도들은 끊임없이 죄를 지을 때마다. '아 나는 버림받았구나!' 가 아니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돼요.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라는 거예요. 매 순간순간 우리가 정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순간, 말에 있어서, 마음에 있어서...
주님께서 그런 얘기 하시지 않습니까? '이 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차이는 뭐죠? 우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라는 얘길 하는거죠.
출연진 : 근데 거기에서 약간 그런 생각이 드는게, 힘든 점이 좀 있어요. 내가 이렇게 죄를 고백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기로 마음을 먹지만 또 비슷한 죄를 또 짓게 됐을 때, 그걸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너무 힘들기도 하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거니까..' 라는 것을 이용해서 또 죄를 짓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요?
진실한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은 어떤 계명에서 내가 몇 가지를 어겼구나.. 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이 순간에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렸구나' 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가 마음에서 갖는 거예요.
자꾸 우리가 자판기에 동전 집어넣듯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하고 그냥 가는 게 아니고요.
영성은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죠. 내 마음에서부터 깊이 아파보는 거예요. '내가 그 순간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아팠구나'
우리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그에게 잘못을 해요.
나의 그 잘못 때문에 상대방이 너무나도 마음 아파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그 횟수를 줄이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회개가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법칙으로만 생각해서 자판기처럼 동전을 넣으면 언제든지 관계성이 깊어지면 '결국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 내가 이런 마음의 아픔을 드렸구나' '또 죄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리에서 상실되었구나' '내가 혼자 고아처럼 살았구나' 하는 것들에 대한 그 상황을 내가 깊이 마음 아파하기 시작하면...
물론 한 번의 회개로 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런 회수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라는 거예요.
계속 얘기하지만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법칙이 아니에요.
◑4. 다윗은 대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시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교회에서 저희가 찬양할 때 이 단어들이 익숙한 단어들이에요. 반석, 요새, 피할 바위, 방패, 뿔...
그런데 이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단어인가요?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잖아요.
'하나님은 나의 바위이십니다.' 여기 방송국 뒷 산에 떡하니 바위가 있단 말이죠. 그걸 쳐다보며 '하나님은 나의 바위이십니다!' 라고 찬양하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왠만큼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아니면 그게 불가능해요.
바위를 쳐다보지만... 무덤덤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전혀 상관없는 '바위'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거예요. 이걸 조금 어럽게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비유사성에서 유사성을 찾아낸다'고 해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곳에서 조차도, 다윗은 하나님을 찾아낸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다윗에 대해서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표현하셨어요.
"다윗은 온통 하나님에게 젖어 있었다. 다윗은 주변에 모든 것과 삶의 모든 경험 속에서 기도를 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되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죠.
"신앙의 주제들은, 단순히 살균 처리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 땅 현실 위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인간 관계 속에서 짜증이 날 때도 있고, 또 뭔가 내 것이 손해보는 것 같아서 움츠러들 때도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라는 거에요.
보통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 제가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중입니다. 주님제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순간에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부모된 우리가 자녀들을 막 혼내요. 내가 너무 너무 화가 나있어요. 그래서 문을 꽉 닫고 내 방으로 들어오는 거죠.
그때 하나님이 계실까요, 안 계실까요? 잘 못 느끼겠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죠.
영성이라는 것은, 내가 화가 난 순간에서 조차도 '그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감각이 자꾸 늘어가는 것을 말해요.
그 순간에 내가 부모로서 화를 냈으니까 그 순간에 '하나님 잠깐 저기 계세요!' 이렇게 하고 화 내는 사람은 없죠. 하나님이 그 순간에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다르게 행동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에도 비록 겉으로는 우리가 옷을 잘 차려 입고 가지만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게 한 가지 있다는 거에요.
겉으로 옷을 잘 차려입고, 또 각각의 직함들이 있다는 거예요. 뭐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또 성가대, 교사...
그런데 우리가 잊지 않아야 되는 것은 뭐냐면 멋진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 아픔이 있는 분들이 있구나, 상처가 있는 분이구나' 라는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교제를 나누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달라진다는 거죠.
저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책을 읽고 난 다음부터 달라진 태도가 하나 있어요. 식당에 갔을 때, 거기 일하는 분들이 뭔가 표정이 좋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왜 종업원이 표정이 저래?'라고 컴플레인을 할 수 있어요. 불평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아~ 저 종업원 분께서, 오늘 직장에 오기 전에 혹시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런데 열심히 종업원의 일을 하려고 하지만, 기분이 안 좋구나!
라는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거죠.
예배를 드리러 왔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그래, 온전히 거룩한 마음만 나한테 드려라!'가 아니라는 거예요.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면서 무너져있고.. 때로는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던 적도 있고요.
심지어는 일이 잘 풀렸어요. 그래서 마치 나 혼자 일을 다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때에도... 사실은 하나님이 도와주신 거거든요.
그리고 내가 뭔가 잘해보려고 했지만 넘어졌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이렇게 얘기하신다는 거예요.
'내가 안다. 네가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넘어진 걸 내가 안 되니까..'
영성이라는 건 결국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자꾸 알아가는 거에요. '이분이 이런 분이구나' 그래서 내 스스로가 이분하고 있는 시간들이 더 좋아져야 되는 거예요. 더 가까이 있고 싶어져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사람하고 자꾸 같이 있고 싶어지죠.
그런데 여러분을 한번 돌아보세요. 제가 '관계'라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하고 자꾸 같이 있고 싶으세요?
또는 '하나님, 정해진 시간만 좀 만나주세요. 나머지 때는 좀 제가 좀 편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제가 좀 놀고 싶다니까요.. 또는 내가 이 시간에 좀 화를 내고 싶다니까요. 근데 하나님은 그걸 싫어하실 거잖아요?'
아니요. 하나님 이렇게 얘기하신다는 거예요. '아니 내가 너의 현실의 삶에 함께 하노라 그러니까 나랑 같이 있어!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 나한테 줘 그러면 내가 그거를 내 방식대로 다 너희에게 돌려줄게!'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가운데 눈앞에 보이는 이 일상때문에 우리가 찌들어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그 찌들어 있는 것들 안에 보화들을 자꾸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내가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도 갖게 되어 지고요. '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사랑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받아 주시는데...' 하는 그 관계에서 오는 내 안에 안정감이 생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변화된다는 거예요...
한번 정리해볼게요.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이야기로 만드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아주 깊이 어루만지는 이야기들이죠.
여태까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약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썼던 몇 가지 용어들 거룩, 진실함, 찬송.. 이런 단어들로만 묶어놓고 그 단어들로만 하나님을 연관지었다라면
이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이런 책들을 읽으시고 또 '하나님 앞에서 동행한다'는 기독교 영성을 알아가면서
'아니구나,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구나!' 라는 것들을 조금 더 마음에서부터 받아들이시고 신앙생활이 조금 더 편안하게 말해서 주님 안에서 행복하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속에서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도전을 받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