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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3:13~18, 세 종류의 말

LNCK 2022. 12. 9. 17:41

https://blog.naver.com/karamos/220360533158

◈세 종류의 말     말3장 13~18       2012.11.11.정리

서론

본문은 말라기서의 6개 논쟁 3:13~4:3) 중에서 6번째에 해당됩니다. 

말라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43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부패했을 때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와 책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다가올 메시아 시대를 예언하는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이면서도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흠 있는 제물을 드렸고, 
백성들은 제사를 온전히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도적질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정생활에서도 이방 신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로 삼은 것도 모자라 
아내를 학대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다른 이유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언어생활 실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말이 나옵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의 말, 
-경건한 사람들의 말, 
-하나님의 말씀. 
이 세 종류의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언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불경건한 자들의 말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3:13~15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다 영적인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영적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오직 남은 자들만이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남은 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합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같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 表裏不同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 그리스도인일 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요 
불경한 자들이며 알곡이 아닌 가라지입니다. 

말3:14절에 보면 하나님을 섬기지만 헛되다고 생각했고 명령을 지키지만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건한 사람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종교인처럼 입고 다니고 종교 교육을 전공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며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을 갖추었다고 해서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의 말을 들으시고 완악한 말이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3:13 

‘완악한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만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대적하는 것 자체를 모르고 하나님을 꾸짖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악인들을 형통하게 하시니 
참 잘못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말3:14~15절을 보면 불경건한 자들이 하는 말의 내용입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겨봐야 헛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봐야 유익이 없다며,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되다고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잘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쉽게 하면 하나님에게 투자해도 건지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투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의 말에는 인본주의(기복주의)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복을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화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겨도 유익을 얻지 못하고 화를 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해 유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샤머니즘과 같습니다. 
박수무당에게 가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잘되고 남편의 사업이 잘되고 자기의 건강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면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겨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 입시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면 겁이 납니다. 
기도해줘서 떨어지면 무슨 목사가 영권도 없어서 
기도해도 떨어지느냐고 말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저는 기도하면서도 공부한 만큼 거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공의 아닙니까? 
신자든 불신자든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기 실력에 맞는 대학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해달라고 하면 찍은 것도 맞게 해달라고 기도는 합니다. 
하지만 대학에 떨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헛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경건한 사람들의 신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죠. 
하나님을 이용해 유익을 얻으려는 샤머니즘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유익을 얻지 못하는 종교를 헛되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는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의인은 손해를 보고 악인은 유익을 얻는다는 생각으로 
도리어 악인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며 봉사했는데 
자녀가 삼수해서 또 떨어지고 
앞집에 사는 사람은 우상숭배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 
자식이 서울대에 갔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고 말하며 
악인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경건한 사람들의 말입니다. 

교회 안에 속해 있지만 신앙이 없는 명목적인 신자들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은 영원히 구별하여 분리시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 
악인은 영영한 형벌에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말라기 3장 16절 중반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신다고 나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흘려듣지 않으시고 
조심스럽게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신앙 고백하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빠짐없이 들으시죠.

성경에 보면 오랫동안 기도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6 

안나 선지자는 시집가서 7년 뒤에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혼자가 되고 난 후에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했어요. 

여러분은 어떤 문제로 몇 년이나 기도해보셨습니까? 
아마 안나처럼 84년을 기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84년을 하나님께 메시아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응답이 됐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38 

안나 선지자는 매일 성전에 가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곤비해지는 것은 

첫째, 성경을 멀리하기 때문이고 
둘째, 기도생활을 게을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에 더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신앙고백도 들으시고 
기도도 들으신 후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3장 16절 후반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16 

인간의 언행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록해놓으신 기념책이 있다고 하십니다. 
‘기억하는 책 book of rememberance’ 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이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나오는 생명책과 동일한 것입니까?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책에는 구원받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기념책에는 경건한 자들의 언행이 기록되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억력의 한계가 있으셔서 기억하시기 위해 기록하신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무한하십니다. 

그리고 기념책은 여호와 앞에 있는 것인데 왜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두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경건한 자들을 위해 
여호와 앞에 기념책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모든 신앙과 모든 경건한 말과 너희의 기도가 
영원히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것과 기도한 것을 우리는 잊어버릴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성실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기념책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기록하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도 USB 메모리 하나에 수천만 명의 주민등록번호를 
다 기록할 수 있습니다. 
손톱만한 작은 메모리에 어마어마한 분량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도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못 하시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3:17 
*my treasured possession NIV, my own possession NASB

‘나의 정한 날’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는 것입니다. 
보석이나 다이아몬드처럼 아끼고 보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슈퍼마켓과 보석상은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슈퍼마켓에 가면 과자, 비누, 배추가 진열되어 있고 
아무나 물건을 집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석상은 다릅니다. 
다이아몬드 1캐럿도 유리장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만져보려면 열쇠로 유리를 열어야 됩니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아끼시는 것입니다. 
아무나 만지지 못하고 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를 슈퍼마켓에 있는 물건같이 두지 않으시고 
아주 특별하게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아무도 우리를 심판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3:18 

‘돌아와서’라는 말은 다시 한 번 So you will again 이라는 말입니다. 
그때 너희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구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은 상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날이 되면 다시 한 번 확연히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의인보다 악인이 더 잘되고 
의인과 악인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말을 하지만 
그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차이가 어떤 것이지 똑똑히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초개처럼 날려버리시고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석처럼 
대우해주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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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3:16절에, 하나님은 인간의 언행을 잊지 않고 
다 기록해놓으신 기념책(또는 기억의 책)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그분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에 억눌려 있는 오래된 
상처에 사로잡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기억하나냐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사랑은 자신이 받은 경험에 의해 기억되고, 
또 그 기억에 의해 베풀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자기 자신처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사랑의 체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의 체험을,
잊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처나 분노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 기억이 늘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게 됩니다.

반면 우리 마음 안에 기억된 사랑은, 남을 용서하게 만들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듭니다.

결국 과거의 부정적 기억은, 오늘의 내 삶을 더욱 불행하게 하지만
과거의 행복한 기억은, 오늘의 내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는 거죠.  

본문 16절의 ‘기념책’은, 우리의 좋은 면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본받아 ‘좋은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이라서 다시 한 번 되풀이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의 체험을,
잊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념책(기억의 책)’을 가지고 계신다면
우리도 ‘기억의 책’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과거의 좋은 기억은, 오늘 현재의 내 삶을 더욱 기름지게 하기 때문이죠!

▲3:17절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나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나의 자녀도, 배우자도 내 소유가 아닙니다. 

어떤 일 때문에 쉽게 분을 내고, 흥분하는 사람은
자기 사역이, 자기 인생이, 자기 자녀가 .. 
모두 제 것, 자기 소유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사역이, 어떤 사유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덤덤하고, 무던합니다. 전혀 흥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애당초 그는, 자기가 몸담은 사역이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기에
자기가 막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이 조심스럽지만, 손해가 나도 주인에게 손해가 나기 때문인 거죠.
그만큼 자유하고, 적어도 ‘자기 체면’에 대해선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간혹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위에서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인생이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체면, 자기 위신’ 에서 가급적 자유하게 삽니다. 요8:32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녀를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하면, 
자녀양육에 많이 자유로워집니다. 
적어도 자기 체면이나 얼굴 때문에, 자녀를 갈구지 않습니다.
(그럼 부모는 뭡니까? 청지기인 거죠. 성인 되기까지 키워주는 청지기)  

본문 17절에, 하나님은 성도를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고 했죠.
‘나는 하나님의 소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는 생각, 자기 소유욕이 점점 소멸됩니다. 

그로부터 내가 입신양명(출세해서 이름을 떨침)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르러봄, 특별 대우, 깍듯한 인정, 존경, 주목 등을 받아야 된다는
그런 기대를 많이 접게 됩니다. 내 인생은 십자가에서 죽었으니까요!

사람이 ‘내 인생은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만큼.. 많이 불행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내 인생을 높이 평가해 주지 않거든요.

반대로 사람이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소유’로 여기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입신양명’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기거든요.

그럼 ‘내 인생은 뭐가 남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그 길을 가는’
그것만 남습니다. 
그것이 낭비가 없는, 후회가 없는, 보람된 참 인생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세상에 그것만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