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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4장, 말세 때는 가정이 회복된다 말라기 설교모음 여러 설교 정리
말라기 4장은 말라기의 마지막 장이면서 동시에 구약성경의 마지막 장이죠.
그리고 400년 이라는 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이 기간을 신구약 중간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이나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끌려가다가 죽기도 하고 포로 생활하면서도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왜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이나 죽을 고생을 했느냐?
그 이유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더 이상 우상숭배는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여호와만 섬기기로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외형적으로만 돌아왔지
마음이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해놓고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언제 우리가 도둑질했습니까?”라고 한 거죠.
하지만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도 여호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온다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4: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여호와의 날’은 어떤 성격의 날인가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됨과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여호와의 날을 대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 :1
그리고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 :2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여호와의 날을 맞이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1.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팔자걸음을 걷는다든지 말하는 태도가
건방진 것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의 사상이나 삶 속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고
죽은 후에도 좋은 세상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권위와 결정권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행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를 끼치고 마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8:44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12:30
예수님의 편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말라기가 예언하고 있는 그날은
무서운 날이 될 것입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4:1
초개는 지푸라기를 말합니다. 교만하고 악을 행하며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푸라기처럼 취급하시므로
아궁이에 던져져 모두 타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엉뚱하게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따라 다녀봤자 아무 유익도 얻지 못했다고 하면서
일부 열심당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로마로부터 해방되고자 반란을 일으켰죠.
그것을 로마 황제가 그냥 두겠습니까?
A.D. 70년 로마 장군 타이터스에 의해 유대인 110만 명이 죽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110만명이 죽고
9만 7천 명이 포로로 끌려가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나와 있죠.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은 무서운 날이 된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은 축복된 날이 되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2
‘의로운 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
단순히 육신의 질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대속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죠.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1:77~79
사가랴는 예수 그리스도를 ‘돋는 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는
의로우며 돋는 해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육신이 약한 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한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죄로 인하여 멸망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광선을 발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마음의 상처를 입고 슬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의 광선을
발하여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날은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의 광선을 발하는 날입니다.
◑4: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시고, 의인들과 함께하는 날이 됩니다.
"악인을 밟는다" 함은, 구원 얻은 하나님 백성의 최후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물론 초림 때에 완전히 실현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친히 악도들을 멸망시키실 때에 완전히 실현되죠.
※말라기도 그렇고, 다른 선지서들도 그런데, 구약 선지서의 특징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겹쳐서 설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몇 개의 봉우리가 마치 나란히 솟은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실제로 등산을 해 보면, 첫 봉우리에 올라가면,
그 다음 봉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사이에 간극이 아주 넓죠.
말라기와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볼 때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겹쳐 보였죠.
뚜렷한 구분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산들이 겹쳐보이는 것처럼요.
그래서 말라기와 다른 선지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예언합니다.
사실 '말세'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초림~재림사이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본절에 '발바닥에 재처럼 밟는' 것은, 엄격히 따지면 재림의 때를 예언한 거죠.
그러나 말세의 기간 내내,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3절에서는 ‘너희(성도)가’ 원수들을 발로 밟는다고 했는데,
이 장면은 초림에도 이루어지지만 (그래서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았죠)
완벽하게는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지금은 똑같아 보여도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과,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이 옷을 입고 다녀도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마10:14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사도들을 박대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지 말고 발에 먼지를 털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왜 성도들이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을
발의 재처럼 여기게 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롬16:20
사단을 우리가 발로 밟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도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면 자식들이 잘못되고 가정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단의 목을 잘 밟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나 교회에서도 우리 성도들의 기도로
사단의 목을 밟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날, 축복의 날, 사탄을 이기는
승리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여호와의 날(:1)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그러면 여호와의 날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말라기서는 두 명의 위대한 선지자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명은 모세이고, :4
-또 다른 한 명은 엘리야(세례요한)입니다. :5
본절에서 선지자 말라기가,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합니다.
그같이 말씀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는 말라기는,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로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이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에 세례 요한(여기서는 엘리야라 함. 5절 하반절)이
오신 목적도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아래 5~6절이 그 뜻입니다.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선지 엘리야"는 세례요한을 가리키죠.
세례요한을 엘리야라는 이유는, 두분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이죠. 눅1:17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함"은,
그 당시에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개척하겠다는 뜻이죠.
세례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것이죠. 눅3:4-6
말라기는 구약을 마무리 짓고 400여 년 후에 올 신약시대를 예고하고 있죠.
연속극의 마지막 장면이 다음에 할 연속극을 기대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듯
말라기도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1. 구원은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경험을 줍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들이 있다면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2
소도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때가 있습니다.
한 겨울 내내 마굿간에 갇혀 지내던 소가, 봄이 되어 풀밭에 풀어놓으면
소들이 기뻐서 풀밭을 펄쩍펄쩍 뛰며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의인들에게는 그런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베드로에게 고침받고, 구원받은 성전 미문앞 앉은뱅이도 펄쩍펄쩍 뛰었죠.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는 자유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육체적, 영적인 문제들이 모두 치료되고
회복되고 참된 자유자의 모습, 구원받은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기뻐서 송아지처럼 펄쩍펄쩍 뛰는 단계를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은, 그런 경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단계를 보통 radical conversion(극단적 회심)이라 부르는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라고, 이 단계를 경험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끝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계속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①구원의 감격 단계 뒤에는
②-1 능력(두나미스)의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불에 휩싸입니다.
그것은 너무 강렬하고 감격적인 경험 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그곳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를 때,
우리는 (그 능력 때문에) 거칠고 사나와 질것입니다.
②-2 신비주의의 단계도 있습니다.
달콤한 황홀경의 세계입니다.
이곳은 진정 떠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 곳에 머물면서 그 맛을 볼 수는 있지만
여기에 계속 머무르고자 할 때 신비주의의 늪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깊어 보이지만 결코 깊은 곳이 아니며
(천사를 본다, 입신을 한다, 환상을 본다, 예언을 한다는 것이나
꿈과 환상에 집착하는 것은 놀랍고 달콤하지만)
신비주의는 나 중심, 쾌락 중심, 육체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 기도생활에 있어서 도취는 목표가 아닙니다.
도취는 하나의 도피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약, 최면술, 단전호흡, 요가, 기 훈련, 기공 체조에도
초월적 명상, 마인드컨트롤, 심령 과학, 세상 음악에도
영의 종류가 다를 뿐이지, 도취와 황홀경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황홀감이 없다면 사람들이 그런 것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초월적인 경험(꿈과 환상)을 직접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들이 얼마나 황홀한 느낌이나 해방감을 주는지 알지 못하며
사람들이 왜 그런 것들에 빠지는 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신앙여정의 “초기”에, 그런 미혹된 경험만을 갖고 있으며
참된 성령의 경험이나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의 진위를 분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달콤한 느낌(도취, 황홀감)이 다 바른 것은 아니며
설사 바른 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경험이 영혼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성령의 은사로 능력, 도취의 경험을 합니다. 올바릅니다.
그런데 그것에 계속 집착하다가, 98%는 나중에 스스로 마귀에게 속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처럼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만 하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어린 영혼일수록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게 되며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영혼이 성장하게 되면
그 경험을 가져가 버리십니다.
제자들은 ‘그저 이 곳이 좋사오니..’ 하고 애원 하지만, (마17:4)
그들이 눈을 떴을 때 아무 것도, 신비적인 구름도 남아있지 않고
오직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육신의 혈기, 욕심 등, 자기 죄성이 별로 죽지 않았을 때
신비의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은 독약과 같습니다.
그는 그것을 소화할 만한 능력이 없으며
교만해지고 완악해져 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사탄의 궤계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속은 것을 모든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데
본인만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3 깊은 계시의 세계도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눈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고 느낍니다.
그곳도 빨리 떠나야 합니다.
그는 실제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착각의 상태에 놓여있기 쉽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시각과 관점으로
다른 사람과 모든 것을 비판하게 됩니다.
그 자신이 얼마나 냉정하며 날카로운지
온유함과 사랑이 없는지... 그는 자신을 보질 못합니다.
이와 같이 남의 상태를 함부로 판단하고
자신의 신앙이 좋은 줄로 아는 사람은 사탄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왜냐면 사탄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애쓰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 분의 긍휼을 구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속한 사람은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으며
오직 사랑의 시각으로 다른 이들을 보고 대할 뿐입니다.
③ 많은 곳을 여행한 후에
여행자는 기도의 단순함으로 돌아갑니다.
여행자가 머물 곳은 단순한 “사랑의 장소”입니다.
이곳은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며, 주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영혼들을 사랑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됩니다.
기도의 단계들은
행복하면서도 위험하고,
위험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높은 영계로 여행하는 사람도 있고
어두운 골짜기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영계의 높은 곳에 있는 줄로 착각하는 영혼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기도의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이 길을 걸을 때 그 분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기도의 계단을 오르십시오.
기도의 단계들을 통과 하십시오.
자신이 높은 영성인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볼 수 있도록
계속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기도는 여러 단계의 계단을 통과하는 영혼의 여정인 것입니다. (펀 글)
▲2. 말세에 가정의 회복이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6 ‘그(엘리야, 즉 세례요한)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물론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된 성도들의 관계를 뜻하지만,
문자적 해석으로,
그것은, 실제 가정에서, 아비와 자녀의 마음을 서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가 돌이켜지고, 회복되면
시일이 지나면 차츰, 우리 가정에서도
나와 아버지, 나와 아들과의 관계도 돌이켜질 것이고,
그것이 말세에,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시고,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 땅에서 이루기 원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이 만약 말세이면,
하나님이 말세 때, 중점적으로 하시는 일이.. 구원의 완성인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가정의 회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세에는 가정의 깨어짐이 심화될 것이란 뜻도 됩니다.
그만큼 가정이 깨어졌으니까, 주님은 가정을 회복시키시는 거죠.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의 부자관계가 회복되어질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 아비와 자녀의 마음이,
서로 돌이켜지고, 서로 회복되어지는 것이고,
또 우리가 6절에서 주목할 것은
만약 그 회복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임한다는 경고가..
본문 말라기 4장1절~6절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마지막 일은, 가정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셔서 하시는 일은,
오순절날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가 처음으로 한 봉사는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의 사명은, 사탄이 처음 친 가정, 무너진 가정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가 회복된 예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기 바라십니까?
잘 되길 바래서 잘 해줘도, 어쩌면 여러분 부모의 삶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저주가, 아무리 자랑 하려고 하는 여러분의 자녀의 삶을,
제한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인 제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와 관계가 안 좋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제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졸업사진에 보면, 아버지가 안 나옵니다.
제가 자라는 결정적 기간에,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아들과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릴 적 제가 안 좋았던 관계가,
이제 똑같이 저와 제 자녀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들 하는 짓이, 꼴도 보기 싫을 때도 있었습니다.
많이 혼을 내도 안 통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두려웠습니다.
‘얘가 자라면 두렵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위기가 왔습니다.
제 아들이, 이스라엘에서 유대인 학교에 다닐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 ‘얘가 숙제를 1년 동안 안 해왔다’고
부모인 저를 호출했습니다.
저는 배신감과 함께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동시에 속에서 두려움도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와 사이가 안 좋아지겠구나..’
분노 안에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이거 큰 일 났구나, 가만히 넘어갈 수도 없고..’
그 때 본문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말라기의 본문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 선지자가 와서 먼저 아비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돌이키고..’
선생님은, 숙제를 하는 어린이로 돌이키게 하려고,
부모인 나를 학교로 불렀지만,
제가 말라기 본문 말씀을 딱 붙잡는 순간,
말씀이 제게 빛이 되는 순간 깨달은 것은,
제가 서울 보광초등학교 2~3학년 시절에,
숙제를 제가 2년 동안이나 안 해갔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때 제가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Its good, he is better than me.’
‘괜찮습니다. 우리 아들은 제보다 더 낫습니다.’
저는 숙제를 2년 동안이나 한 번도 안 해 갔는데,
아들은 1년 동안 한 번도 안 해 갔으니, 제보다 더 낫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담임선생님은, 저를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우리 아들은, 옛날 제 모습보다 낫다고 하니까,
막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점점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새벽에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3시에 집을 나서야 했을 때,
아내도 자고 있고, 딸도 자고 있었는데,
어린 우리 아들이 일어나서, 아빠의 샌드위치 도시락을 만들어 주었을 때,
정말 마음에 감동과 감사가 밀려왔습니다.
본문 말라기 말씀을 외우면서,
제가 ‘아비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돌이키려고’ 기도하며 애를 썼을 때,
‘아들의 마음도 아비에게로 돌이켜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딸이, 아빠인 저 더러 학교에 못 오게 하는 것이 이해됩니다.
비가 오면 이스라엘은 무지 세게 옵니다.
그래서 제가 걱정이 되어서, 학교에 우산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딸이, “아빠 학교에 오지 마”
“왜?”
“창피해”
그런데 제가 어릴 적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저도 어릴 적 그랬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엄마 아빠 닮았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지금 제게, 똑같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보광초등학교로 꼭 우산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저는 화가 나서, 우산도 쓰지 않고, 일부러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빠가 히브리어를 서투르게 해서 놀림 받으니까,
아빠는 학교에 오지 마. 애들이 아빠 말을 따라하면서, 놀리잖아”
그런데 제가 말라기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우리 가정의 회복을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가 잘 되어야,
아버지의 목회도 잘 되고, 자녀의 장래도 잘 된다는 사실을,
그 중대성을, 제가 깊이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날도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저는 우산을 들고, 딸의 학교로 갔습니다.
“아빠가 우산 들고 와서, 안 창피하냐?”
“괜찮아. 우산 가지고 와”
놀랍게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창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버지인 제게도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놀랍게 저와 아버지와의 관계, 그러니까 우리 아들로 말하자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가, 손자로 인해 치유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 돌이켜지고,
자녀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돌이켜진 ..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