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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25-36 하나님의 부요한 지혜

LNCK 2022. 12. 11. 10:50

https://www.youtube.com/watch?v=W8yHRNrJPPQ

◈하나님의 부요한 지혜        롬11:25-36      2022.12.04

▲지난 시간 복습
롬11:24절까지 말씀을 요약하면 3단계의 축복의 사슬chain들이 나타납니다. 

1) 첫 번째 축복의 사슬은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이 구원의 주된 흐름이 넘어간다는 거죠. 

이스라엘이 부러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나뭇가지가 부러짐으로써 
거기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축복의 사슬은, 다시 이방인에게서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그복음 역사가 (반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시기심이 일으켜진다는 겁니다. 

11:11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14 '이는 내가 어떻게든 내 동족에게 시기심을 일으켜 
그들 가운데 다만 얼마라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축복의 사실은, 또다시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다시 이방인을 흘러가는 축복의 사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거는 앞으로 미래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므로 '예언적 고백'이라고 말할 수가 있죠. 

이것은 이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 이루어지므로 
또다시 열방에 더 큰 부요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는 것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종말이 이르기 전에, 
이런 이방인들의 부요함, 즉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됐다면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큰 부요함을 가져오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 있다면 충만함(전 인류의 구원)이 있을 것이다.. 라는 거죠. 

그리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은, 
더 큰 이방인의 부유한 구원으로 전파될 것이다... 

그래서 23절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1:23 또한 그들이 불신앙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24 그대가 본래 돌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하물며 원가지들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쉽게 
자기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잘려나간 상태로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 가지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을 다시 접붙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3단계 축복의 사슬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러나 이 바울의 예언적 고백이 

1단계, 2단계가 이루어졌다면 
3단계도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 녹취 시작, 위 동영상의 15:45초~ )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1:26

11:25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이 비밀에 대해 알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이방 사람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가 완악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완확함 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들은 완악함 가운데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사람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라는 것은 :25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충만하게 전해질 때까지 
이스라엘이 완악한 상태에 있지만 
다시 이스라엘에게 그 복음의 역사가 증거됨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가 올 것을 '가능성' 정도로 말합니다. 
근데 점차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먼저 23절에 보면, '장차 이스라엘에 구원의 때가 있을 수 있다' 라는 
가능성 possibility 정도로 말합니다. 

11:23 또한 그들이 불신앙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덧붙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을 먼저 말하죠. 

그런데 24절에 보면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능성에서 → 개연성 probability 으로 더 확대됩니다. 

11:24 '하물며 원가지들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쉽게 
자기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방인들도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면 
원 가지인 그들은 얼마나 더 쉽게 원래 나무에 접붙임이 되겠습니까.. 
라는 개연성이죠. (*개연성 : 아마 거의 그렇게 되겠지만, 두고 봐야 되는 일)

그런데 26절을 보면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확실성을 설명하죠.  *가능성 → 개연성 → 확실성 으로 확대됩니다.

'받게 될 것입니다' .. 확신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26
라는 문제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미래의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하는데 
'온 이스라엘'이라는 이 단어가, 그래서 중요한 단어입니다. 

로마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 목회자들이 
이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서 많은 논문들을 썼습니다. 

주석서를 보고, 자료를 참조해 보면, 여러 해석들이 나옵니다.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제가 또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를 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1) '국가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오니즘이라고 해서 잘못된 유대지상주의에 빠지는 거죠. 

 

2) '인종적인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또 '인종적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4) '예수님을 믿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 곧 교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면 롬9장, 10장, 11 장의 흐름 속에서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안타까움,
그들을 향한 구원의 열망 그것을 9~11장에 계속 설명했고 

또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불신앙, 완화함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시기심이 일어나, 유대인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또 다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온열방으로 확산되는 이것은 분명 
'인종적 이스라엘' 과 '그밖의 이방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 어떤 복음전파의 단계와 사이클을 설명하고 있는 문맥이 분명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유대인'에서 → '교회'로 넘어가기는 
너무 비약이 심하다는 겁니다. 몰론 그렇게 해서 가는 분도 있지만요.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 이란, 
'온' 이라는 단어 때문에 여기서 해석상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 온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 인류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는 그렇게 되길 원하고 
하나님도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완악함 가운데 거부하는 이들이 분명 있다는 거죠. 

홍수의 심판 속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끝까지 조롱하는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세와 종말이 오고, 심판이 있다는 수 없는 예언과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조롱하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함 가운데 처한 이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셔야죠. 
이게 맞는 말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자기 완악함으로 구원의 손내밈을 받아들이지 않는 책임이 
인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란,  :26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않기에 
이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 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인종적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수..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보다는 더 많은 유대인의 구원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온 열방에 또한 부요한 구원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거죠.

이 해석이 문맥전체의 흐름 속에 가장 매끄러운 해석입니다. 

그래서 25절에 '형제들아, 나는 여러분이 비밀에 대해 알기를 바란다'고 할 때 
현재와 같이 이스라엘이 불신앙 가운데 
그 중 일부 믿는 사람들이 끝까지 간다면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 거거든요. 

놀라운 어떠한 영적 사건이 장차 일어날 것을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바로 '비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되는 어떤 위대한 사건, 
영적 사건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국가적 차원에서 구원받는다는 것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재 이스라엘의 나라의 결정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따라야 한다는 
어떠한 친유대교, 또 친이스라엘적인 정치적인 지지로 휩쓸려서도 안 되겠죠.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정치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올바르게 복음하면서 비판할 수 있어야 되는 거에요. 
'크리스천 시오니즘'에 빠져도 안되고 

반대로 또 반유대적이고, 저들은 메시아를 버린 민족이다.. 
저들은 완악하므로 메시아를 죽였다.. 라는 시각으로  *안티 세미티즘
심지어 마르틴 루터도 그러한 잘못에 한 때 빠졌었죠. 

놀라운 것은 히틀러 시대에, 그런 독일이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중요한 근거 
중에 하나가 마르틴 루터의 논문의 일부 였죠. 

물론 논문 전체를 다 공개하지 않고, 그 중 일부만 인용해서 
유대인들을 비하하는 식으로, 나치가 이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아픔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이 로마서 9~11장 말씀자체를 보면 
장차 이스라엘 인종적인 그 유대인들가운데 

하나님은 그들을 먼저 택하셨지만, 버리시지 않았다. 
그들의 완악함 가운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완악함이 이방인들이 돌아오는 계기가 되고 
이방인들의 구원으로 그들을 시기하게 해서
그들이 다시 구원의 역사로 나타나게 되는 미래를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들이 한때 불순종한 상태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온 세상 사람이 구원에 대한 중요한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서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완악함처럼 
모든 사람의 불순종과 완악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긍휼을 가지고 대하신다는 겁니다. 

롬11:32 '11:32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가운데 가두셨다' 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불순종 하게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불순종하고 있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긍휼을 베푸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났다..는 거죠. 

사람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인간들의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궁휼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불순종과 완악함에 대하여 긍휼하심으로 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주1)

하나님은 이렇게 불순종과 완악한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의 죄악을 십자가로 씻어 주시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는 은혜로 우리를 변화시키기에 
이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보면서, 그걸로 끝나는 역사가 아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일시적인 완악함 입니다. 

이제 다시 그 들에게도 많은 수가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계획과 스케줄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1:33~36절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송영이 나오는 것입니다. 

11:33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아낼 수 없도다.”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는가? 누가 주의 조언자가 됐는가?”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 주의 보상을 받겠는가?”

11:36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인해 있고 그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분에게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함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이여.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누가 그분의 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유할 따름이지, 그 하나님의 판단과 지혜를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가는 유일한 길은,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우리는, 행한 이후에 결과를 알고 깨달을 뿐이에요. 

다 알아서 깨닫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행하므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지혜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따름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누가 주의 조언자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조언도, 어떠한 도움도, 어떠한 물질도 
어떠한 헌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끔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의 기도를, 어쩔 수 없이 새벽기도 시간에 
근처에서 들어보면, 하나님께 가르쳐 드리는 분이 가끔 있어요. 

'하나님이 이래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면서 막 '누구는 저래야 되고, 누구는 이래야 되고..' 
하나님께 막 코치를 하고 있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 지금 이렇게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으로 
지금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신데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코치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하나님께 우리의 간구를 아뢸수 수 없다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러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래 주십시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조언하지는 마세요. 

또 하나님을 도와 드리려고 하지도 마세요. 
'하나님, 제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이제부터 제가 하나님을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요즘 좀 힘드시죠? 제가 제 일을 좀 그만하고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일을 벌여서, 
하나님이 뒷수습하는 게 더 많으신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에 우리가 경외하고 순종함으로 통로가 될 뿐이에요.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는 보상이 되어서는 안 돼요. 

'하나님 제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무엇을 주시렵니까?'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보상해줄 의무가 없으십니다. 
누구에게도 하나님이 대가를 보상해야 될 책임이 없어요. 

왜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데, 무슨 보상이 필요하겠어요?
그럼 우리의 헌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드린 헌금의 의미는 뭡니까? 

우리는 드릴 수 있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특권일 뿐입니다. 
우리의 헌신 그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다윗이 그런 고백을 했죠. '내가 누구인데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는 그 자체로, 그것이 보상이요, 축복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나님과 거래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도와 드렸는데, 
하나님 이렇게 나를 안 도와주십니까? .. 이건 잘못된 기도에요.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는 기도이죠. 
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만물의 통치자시며 
만물이 그로 인하여 있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만물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의 기원이요. 과정이요.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인데,
누가 그분을 도와드리며,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며 
누가 그분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며 
택한 이스라엘도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며, 또 구원하실 것이며 

그들이 얼마나 완악함으로 버티느냐의 문제이지 
하나님은 모든 구원을 이루어가시며 
온 열방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는 거에요. 

누군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지 못하면 전적인 인간자신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과, 우리의 삶의 방식과, 
우리의 마음의 동기가 이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그로 인하여 존재하고,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기에 
우리의 모든 삶이 목표와 역사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송영이 어디에 나옵니까?
롬 11장 마지막 부분에 나와요. 

롬1장부터 11장까지, 정말 우리가 배운 모든 복음의 진리,
모든 교리의 결론은 무엇이 되어야 되죠? 
하나님께 대한 송영, 경배가 돼야 돼요. 

또 12장 부터는 "우리의 삶의 적용"이 나와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의 삶의 모든 이유와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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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긍휼과 은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긍휼 mercy 이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될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해주는 게 긍휼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존재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에, 우리가 지금 살아남아 있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고, 또 은혜 받기에 합당하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생존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긍휼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로서 내가 가치가 있는 거에요. 

노아의 홍수심판 때, 하나님이 온 세상을 끝내셔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인데 
우리를 이처럼 생존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차적으로 긍휼하심이에요. 

마땅히 받아야 될 진노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주시는 공휼, 
그래서 우리가 2차적으로 두 번째로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 grace 란 무엇입니까? 받을 수 없는 것을 주시는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은혜의 은혜됨은 무엇입니까?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룩하게 되며, 영광스럽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먼저 우리는 긍휼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편기자들이 하나님께 가장 많이 호소한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Have mercy on me' 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에게 은혜 내려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강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할 수 있는 건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될 진노와 심판을 받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요청만 우리는 할 수 있어요. 

그럴 때 우리가 받아야 될 진노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시는 긍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짐으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씻어주시고,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결코 죄에 정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은혜에 의해서 정복되는 것입니다. 
Grace is not overcome by Sin, Sin is overcome by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