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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1~3, 믿음은 신념의 마력과는 무관하다

LNCK 2022. 12. 13. 11:39

◈믿음은 신념의 마력과는 무관하다      히11:1~3        2014.06.10.설교 정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1~3

여러분, 최근 2013년 6월 30일 주일에, 미국의 수정교회 (크리스털 처치)가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였는데, 그 날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교회 건물이 가톨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버렸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30년 어간 목회를 잘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분이 은퇴하시자, 이 자녀들간의 다툼이 일어나면서
그 와중에 교인들은 줄고, 그만 재정적으로 이 교회를 지탱할 수 없는 
파산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교회 건물이 매각되고 말았죠.

정말 기념비적인 예배당 아닙니까? 어마어마한 예배당인데 
그 건물이 가톨릭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게 아니라,

이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전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이 분의 설교가 샘솟듯이 솟았던, 이분의 그 설교를 가능하게 했던 
신학사상의 핵심이 뭐냐하면.. 이게 바로 "신념의 마력"이에요! 
너무 어처구니없게도... 

▲왜 이걸 제가 관심 가지느냐 하면, 제가 중학교 시절에 저희 아버지께서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실 때, 원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셨지만 
아버지 스스로가 믿음으로 들어오실 때, 이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팬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중학생인 때에, 저랑 아버지가 계속해서 그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말다툼아닌 말다툼을 했었어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하여튼 로버트 슐러 목사님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근데 이분이 <hour of power, 능력의 시간> 이라는 TV설교방송을 했는데 
이게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퍼져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방영했죠.

그런데 이분이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설교의 핵심 내용이 
바로 "신념의 마력"인데, 이게 뭐냐 하면

1932년에 클라우드 브리스톨 이라는 기자 출신의 한 사람이 
조그만 책자를 하나 써냅니다. 그게 뭐냐면 <TNT 지구를 흔드는 힘> 책인데,
이 책의 주제가 "신념의 힘"인 거예요.    *T.N.T. It Rocks The Earth

그 책을 그대로 인용해보면 이렇습니다. 
"당신이 만일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집요하게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여 
마음에 영상을 그린다면, 그 모든 영상은 당신의 생애 중에 반드시 구현된다" 

내가 원하는 게 있잖아요? 그러면 내 마음의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그림을 그려 놓습니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 

근데 그가 책에서 예를 든 것 중에,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있어요.
베이브 루스가 타자석에 들어설 때, 저기 뒤에 조명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조명등 어디 쯤에다가 공을 내가 맞추겠다' 라고 하는 그림을 
자기 마음속에 그리고, 타자석에 들어선다는 거에요. 

그랬더니 쳐서 결국 홈런왕이 됐다 그러는데 
베이브 루스가 홈런 친 것보다, 삼진 아웃이 더 많은 거 아시죠? 

어쨌든 이런 예를 들면서,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림을 그리라는 거에요.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날마다 그것을 나한테 암시하는 겁니다. 

'나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거야, 나는 미인대회에 나가서 일등 할 거야, 
나는 무엇 무엇을 이루고 말거야!' 이런 걸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암시가 신념이 되게끔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패배자로서의 인생, 낙오자로서의 인생, 별 볼일 없던 인생이 
모두 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져듯이 깨져나가고,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분 Claude Bristol 이 그 책을 쓴 후에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부응해서 또 쓴 책이 1948년에 나온, 
아직까지도 읽히고 있는 <신념의 마력 The Magic of Believing>입니다. 

그 1948년의 <신념의 마력> 책 이후에 지금까지 나온 모든 자기계발서는 
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이 책의 아류입니다. *모방 또는 버금 무리

예를 들어 <긍정의 힘> 이라는 책이 있지요? 
<신념의 마력>의 아류이에요.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사상도 그렇고,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도 그렇고 
<신념의 마력>의 아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 <신념의 마력>이란 그릇된 사상 을 받아들인 로버트 슐러 목사가 
전 세계 기독교 세계에 미친 악영향과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죠.

(※그런데 로버트 슐러 목사는, 노년에 이르러 자기의 신학적 잘못을 자백하고
자기가 잘못 가르쳤음을 책을 써서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한국어로도 번역, 발간되어 읽어본 적 있는데, 책 제목이 생각나지않네요/주)


◑본문에 너무나 신념의 마력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 나와 있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

여기서 '믿음'이란 말은, 번역하기에 따라 '신념'으로 대체할 수도 있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 이것은 실제 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얼핏 보면, 바로 이 "신념의 마력"이 말하는 것과 같은 얘기를 
성경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구절을 가지고, '신념의 마력'에서 얘기하는 사상을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는 교회가 일부 있다니까요.

그리고 월드컵 때도 어김없이 등장하잖아요! "꿈은 이루어진다!"

▲그런 '신념의 마력'과 히11:1절이 무엇이 다른가요? 

여기서 '바라는 것들'이라는 것은,   :1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하는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성취하고 싶은 소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뭘 말하는 겁니까?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11:1절의 '바라는 것'은,  
우리가 임의대로 이루고 싶은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한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된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너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소형자동차 사줄께' 약속했어요.

아들은 고등학생으로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자동차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요. 
전혀 자동차를 지금 자기 것으로 삼겠다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아버지가 먼저 오셔가지고 
'너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자동차 사 줄게'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이 약속을 받고 나서 아이가 대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본문에 보니까, '이 세상에서 재산을 뺏길 때도 너희가 기꺼이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고 해요. 왜 그러냐면 '하늘나라에 영원한 재산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보이는 재산을 뺏길 때, 아무런 안타까움이 없이 뺏기면서 
믿음을 지켰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히10:34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그 바라는 것이 뭐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이 왜 나오게 됐느냐면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에 대해서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과 같은 거다.. 이런 의미이죠.

△그렇지만 '신념의 마력'에서 얘기하는 대로라면
이 세상이 너무 핑크빛 같아요. 

내가 원하는 게 있고, 내 마음판에 그 그림을 그려놓고 
날마다 거울을 보면서 '너는 그걸 이룰 수 있어!' 이렇게 얘기함으로써 
암시를 주고, 신념을 강화시키기만 한다면 
'나는 반드시 그걸 이룰 수 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인생이 즐거워지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 소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그 약속하신 것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믿음이 적용이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 많이 벌고 싶다' 
근데 하나님께 나와가지고 '하나님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 많이 벌게 해 주실 것을 나는 믿어!'
이렇게 거울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샤머니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치 하인처럼 부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거예요. 그건 "바라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믿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마귀의 속삭임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은 
내 것으로 약속해 주신 것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게 싫으면 믿지 말라는 얘기예요. 
자꾸 교회 안에 들어와가지고, 있지도 않은 얘기 하면서 
사람들을 이상한 대로 끌고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 이외의 것을 바라고 싶으면.. 다른 종교를 찾으세요. 

기독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 이외의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근데 그 '바라는' 것이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게 거의 없어요. 

그럼 뭘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냐? 
영원 전에 독생자 예수님과 하나님이, 성령님과의 교재를 통해서 
기쁨의 하나의 상태(삼위일체)로 영광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누리는 그 영광과 기쁨을 
우리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에 올라가서, 아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예수님이 누렸던 모든 기쁨과 영광을 다 나누어 갖도록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게 "약속"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무엇을 내 것으로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창세기의 족장들이나 신명기에 약속된 풍요의 복은,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이지,
그게 그들 신앙의 목적이나 종착역이 아니었어요.

구약시대에도,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하고 더 잘 살았죠.
그리고 신약시대에 대부분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건 저주 받은 것인가요? No!
환경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와 감격속에 살았죠!)

모세가 역사에 남을 지도자로서 기림(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게 모세가 꿈을 이룬 겁니까? 그 인생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거예요. 

사도바울이 어마어마한 전도사역을 했지만 
그 전도사역이, 그가 어릴 적부터 바라고 꿈꾸던 소원이 이뤄진 겁니까?
아니죠.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꿈과 약속이 이뤄진 것입니다.

교인들을 앉혀놓고,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무슨 코미디언의 이야기처럼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런 설교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도록 하신 것들은 
'약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 즉 그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내 것이 된다고 하는 믿음은 ... 하늘나라 속에 다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란 무슨 얘기입니까?
해가 뜨면 수억 수십억 수백억의 별들이 있지만, 보이지 않아요. 

또 지구가 돌고 있는 소리가 어마어마해요. 그 소리가 있지만 들리지 않아요. 
근데 일정 조건을 갖추면 보입니다. 

손에 있는 세균은, 현미경으로 보면 보이잖아요. 
그리고 해가 지면, 하늘에 별이 보입니다.
천체망원경으로 보면, 더 멀리까지 보입니다. 
조건을 갖추면 안 보이는 게 보이는 거에요. 

하나님과 하늘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건 뭐냐면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늘나라가 
보이도록 조건을 갖추는 상태가 ..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손에 있는 세균을 보기 위해 현미경을 동원하는 것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그러나 있는 그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보기 위해서 
"믿음"을 가지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아무나 가지면, 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되느냐? 
그게 아니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전에,
즉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전에는.. 우리가 못 봐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건 뭐냐면, 3D 영화를 들어갈 때 
입구에서 특수 안경을 주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지만 
당신 자신을 우리로 보게 하시려고 
특별한 사람들, 선택한 사람들에게 내 주신 3D 안경과 같습니다. 

'신념의 마력'에서 말하는 것처럼 
없는 상황을 마음에 그려가면서, 있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답답할 정도로, 내 마음대로 신념(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신념의 마력'에서의 신념(믿음)은  *영어로는 똑같은 believing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다 새빨간 거짓말이지요.

그렇게 거짓말 같은 신념을 반복해서,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주고 
그래서 혹시 자기 소원을 이루었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의 내팽겨치심, 내버려 두심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계발서를 읽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을 계발해서 뭐 하겠다는 겁니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게 되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져요. 
이게 바로 사실 믿음의 상태인 거에요. 

이 믿음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뭡니까?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들의 자리,
예수님께서 차지하고 계신 그 자리에 참여하도록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내가 믿게 되고, 그리고 실제로 내 마음이 그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아버지와의 교제를 이 땅에서 이루어나가는 겁니다. 

우리 것으로 이 세상에서 신념을 갖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너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시37:4

이 말씀은, 뭐든지 네가 소원하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1) 문맥을 봐야 됩니다. 시37편의 주제는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지 말라'는 겁니다. 1절 서두에 나와 있지요.

37: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왜냐면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2

그걸 전제로 해서, 반대로 4절에는

4절 “여호와를 기뻐하라 (불평 대신에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에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진 결과가 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5~6

자기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정하신 길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죠.

2) 위 시37:4절은, 마6:33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 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이것이 바로 '자족하기를 배우는 신앙'입니다. 빌4:11, 딤전6:6
자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시23:1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내 소원, 내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하나님의 소원)을 주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얘기입니다. 

'신념의 마력'에서 말하는 것은.. 내 소원, 내 신념이고
'믿음'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신념' 이에요.
그건 그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히11:1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영원하신 나라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을 다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져도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한 기쁨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러한 기쁨은, 현재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약간 맛을 보고 있습니다만
저 천국에 가서는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실상'이 조금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행2:1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여기서 예언, 환상, 꿈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는 거예요. 
나이에 상관이 없다는 거에요. 
'내가 환갑을 넘게 살았는데.. 내가 이제는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니에요. 나이에 상관없이, 내 인생의 진도에 상관없이 
자녀들도, 젊은이도, 늙은이들도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는 말씀이죠. 

과거의 영광에 메이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차 허락하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인생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은, 꿈을 꾸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행2:17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
를 가진 사람입니다. 히11:1
환상을 보니까, 자신 있게 미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황폐화 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죠.
혹자는 1993년 이후로 한국교회는 한 번도 반등한 적이 없다고 말하죠.

그럼 어떻게 반등할 건가요? 반등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꿈부터 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패턴이죠!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그 하시는 일을 보이지 않고는, 결코 행하지 않으시죠. 암3:7

꿈/환상/비전/예언이 없으면... 앞으로 반등도 없을 것입니다.
꿈/환상/비전/예언이 있으면... 장래에 반등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꿈꾸는, 환상을 보는 청년들,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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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사소한 것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린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걸어서 심방을 했습니다.

시골길은 바위를 폭파해서 생진 뾰족한 돌들로 덮혀 있었습니다.
어느 봄날 나는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몹시 무더웠습니다.

그런데 입은 옷은 겨울 양복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정장이었습니다.
땀은 나고, 힘은 들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를 더 짜증나게 한 건, 
바로 빵꾸 난 신발 밑창으로 들어온 모래였습니다.
그 작은 것들이 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들 줄 몰랐습니다.

저는 이 일을 통해 
"나를 화나게 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작은 문제들이구나!"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받은 큰 은총은 다 잊어버리고,
작은 문제들 때문에 불평하고 짜증낸다면...
말 그대로 <내게 믿음이 떨어진 증거>입니다.

큰 은혜 받고도, 사소한 것 때문에 목숨 걸고 불평한 사람이
구약에 대표적으로 '요나의 박넝쿨' 입니다...

작은 문제로 속상하고 괴로울 때, 큰 믿음으로 이기십시오!
그래서 제 삶 속에서 바로 바로 벌어지는 문제들로 인해서
속상하고 괴로울 때,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전에 거의 가진 게 없었지. 하지만 넌 감사했고, 행복했어.
이제 너는 더 많이 가지고 있어.
너에게 내린 하나님의 은총이 이와 같이 풍성하고 넘치는데,
왜 작은 일들로 인해 짜증내고 힘들어하는 거지?’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 크다는 걸 믿으면,
지금의 문제가 작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문제 때문에 시달립니다.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방황합니다.
그러다 믿음이 식어버리기도 하는데요...

▲믿음의 성장
물결이 거센 강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공사에 관한 이야기다.
건축자들은 처음에 두 낭떠러지 사이에 커다란 연을 날린다.
일단 연이 강 다른 편에 안착하면 줄이 연결된 셈이다.

이 줄에 좀 더 무거운 줄을 묶어서 강을 가로지르게 한다.
그리고 난 후에 더 무거운 줄을 엮어 강을 가로지르게 한다.
이렇게 한줄, 한줄 더하여 강철 케이블이 강을 가로지르게 된다.

계속 케이블을 늘려감으로써 나중에는 거대한 다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완성된 거대한 다리를 보고서
처음에 연에 한 가닥 줄을 연결하여 짓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이 발전한다.
위대한 믿음은, 시련에 시련을 거듭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해서 의지하며,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다.

각각의 시련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약속을 주장하여 응답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 삶의 믿음이라는 줄에 좀 더 무거운 줄을 연결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