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 동행"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된 믿음의 능력이요, 비밀입니다.
요한일서는 바로 그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으로 이끌어 주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이 기록한 책이죠. '서신서' 라고 분류하지만, 인사말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볼 때 글로 작성된 설교로 봅니다.
어떤 학자는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의 주석 역할을 하는 책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책이 있죠.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죠. 제1권은 누가복음, 제2권은 사도행전으로 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도, 그 두 책과 같은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된 때는, 주후 85년 경, 그때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던 1세대 사도들은 거의 다 죽었고 사도요한만 살아남았던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핍박을 피하고, 또 고난을 피해서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오랫동안 아들처럼 섬기는 그런 역할도 했기 때문에, 그는 오래동안 생존한 이유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자녀들아' 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데, 실제로 노년의 때에 이른 사도요한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 믿는 성도들을 양육하는 양육의 편지다.. 라고 봅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은 5:13절에 잘 나타나 있죠.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일서를 읽는 독자가 여기 명시되어 있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까?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5:13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죠.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대조가 되죠.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요20:3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기록된 목적은 여러분들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게 하고, 그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데' 기록 목적이 있었고,
요한일서의 기록목적은, '이미 믿는 이들이, 그들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고, 확신하게 하고,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4에 보면, 또 하나의 (기록)목적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일1:4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고 5:13, 1:1~2 2) 또한 기쁨이 넘치기를 하려 합니다. 1:4 3)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인데, 이 사귐은 사람들끼리의 사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귐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1:3
또 3절에서 보면 세 번째 목적이 이렇게 나옵니다. 1: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파합니다. 이는 여러분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이 세 가지 목적은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고 -그 영원한 생명 가운데, 서로 <사귐>이 있게 하고 그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신비한 사귐에 초대하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기쁨>이 충만히 넘치고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거죠.
▲1절에서 4절까지 보면 이 세 가지 목적이 순서대로 나타나고 있죠.
첫 번째 단어는 바로 '생명'이죠. 1~2절에 3번 반복됩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사귐' 입니다. 3절에 '사귐'이 2번 반복됩니다.
4절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체험하는 영원한 생명,
그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또 동일한 생명을 누리는 자(교우)들과 사귐을 갖게 하고..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어떤 고난, 환경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환경이 주는 기쁨, 육신적 감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질지라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그 기쁨, 그것은 영원한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인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영원한 생명의 사귐과, 이 기쁨이 우리 교회 성도들 안에 가득 차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 첫 번째 키워드는 바로 <생명>입니다. :1~2
1: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고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우리가 주목했고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1: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 앞에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 전파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란 표현은 요한복음을 연상하게 하죠. 요1:1
그런데 요한일서에서는 '생명의 말씀' 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그 '생명의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고, 그 '생명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으니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그 생명이라는 것이죠.
이 '영원한 생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오감을 통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체험 하는 그 오감 체험.. 그 이상의 체험이라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 이라고 하면 '그것이 무엇인가?' 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뭔지 언뜻 이해되지 않죠.
여러분, '생명'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우리 몸을 해부하면 '생명'이라는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우리 몸의 신체 중 하나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지만 근데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생명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요? 뇌 속에 있습니까, 심장 속에 있습니까? 그래서 생명이 있는 위치는 문화마다 이해가 각기 다릅니다.
헬라인들은 심장 깊숙한 곳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스프랑크논' (내장, 심장) 이란 단어 속에, 즉 생명 내장 깊숙한 곳에서 생명의 원천이 있다.. 그렇게 믿었어요.
생명 그 자체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살아 있는 생명은, 우리가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죠.
'영원한 생명'도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영원한 생명'의 실체가 존재하고, 그 영원한 생명의 실체가 있기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 안에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왜 이렇게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을 겁니다.
1) 첫째는, 요한일서를 읽는 그 시대 사람들의 영적 위기 중에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던 거짓 교훈이 판을 치던 시대였기 때문이죠. 이때로부터 시작해서 후에 '영지주의' 라는 사상이 발달 하는데 이 당시는 '초기 영지주의' 시대였죠.
그게 무엇이냐면, 육체를 선하게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적 정신적인 것만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구원을 그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이런 잘못된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어떻게 육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느냐?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그런 거짓된 이단들이 당시의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한일서 4:2절에 보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단이다' 라고 이단분별법을 설명해 주신 거죠.
주후 80년 전후는,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증인이 살아있었기에 이런 글이 나오는 거죠.
역으로 설명하면, 그 당시에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는 뭐냐면,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나요?' 였죠.
그 당시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기했던 불신앙은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그 당시에 예수님은 실제로 보았던 증인들이 살아있었던 그 시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도전했던 것이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이었죠.
왜 그랬을까요? 증언자들이 살아 있기에.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이런 분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가 그 당시에 고민이었어요. 그런 이단들이 퍼져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 625 전쟁 때, 전쟁에 참여했던 분들이 살아있는 아직도 그런 시대에 누군가가 신문에 625 전쟁에 대해서 잘못된 글을 실으면 '이거 아니다. 틀렸다' 라는 외침이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서신이 요한일서죠. '어떻게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분임을 부인할 수 있느냐?'는 거죠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 있었던 생각은, '실제로 예수님이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람의 몸을 잠시 입었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 당시의 잘못된 이단 사상이었죠.
그런데 오늘 날 합리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불신앙은 뭡니까?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심은 내가 믿겠다.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셨다고 까지는 내가 믿겠다' 왜요? 역사 책에 나오니까요. 기독교 라는 종교가 존재하니까요.
'예수님이 사람이라면 난 믿겠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못 믿겠다'
시대가 많이 흘러, 그 당시에 실제 살아있는 증인이 아니라 기록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하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못 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심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2) 두 번째 목적은, 이렇게 예수님을 표현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지금도 경험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도 그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예수님과 살아있는 만남!
예수님은 육신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자고, 함께 식사 했지만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 그들은 의심 속에, 죄악 속에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자들은 어느 시대에, 어떤 문화 속에 있다 할지라도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하신 생명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 같이 체험할 수 있는... 그리스도 임재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우리 신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 신앙의 목표도 바로 여기에 있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어떤 제도, 조직, 어떤 사상체계, 이론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살아 있는 그 분과 우리의 만남(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사도 요한의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사귐> 입니다. :3 영원한 생명과 사귐으로 성도들을 초대하고 있는 겁니다.
1: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파합니다. 이는 여러분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죄를 용서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그 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죠. 그래서 우리 머리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하나님의 계획, 성령 하나님의 역사,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의 신비는, 이 놀라운 신앙의 영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누는 이 "사귐"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간의 사귐도, 우리끼리의 사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사귐, 그 사귐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이 삼위윌체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릴 수 없어요.
죄인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바로 그것이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자가 되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고,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귈 수 있는 자가 되고 의로운 자로 우리를 여겨 주시고, 우리를 양자 되게 하시고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그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회복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야만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생명은 물체와 교통 할 수 없어요. 생명은 물질과 사귈 수 없어요.
'물질과 내가 사귄다' 그러면, 그건 좀 이상한 거죠. 치료를 받아야 돼요. 생명은 생명과만 사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동물과도 사귐이 일어나는 거 있잖아요. 반려동물과 뭔가 사귐이 일어나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인 거죠.)
그런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와 사귐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죽어 있어서 그래요.
그거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그 부활의 은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살려 주신 거예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요.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거죠.
예를 들면, 우리 신체 장기가 못 쓰게 될 때 이식 받잖아요. 생명의 놀라운 능력이죠.
그런데 생명을 이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어요. 장기는 이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그 자체를 이식할 수는 없는 거에요.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내 생명을 저 죽은 사람에게 이식해 줄 수 없죠.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생명 이식' 수술을 하시고 그 생명 이식 수술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은 죽고 그리고 부활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이식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생명 이식 수술을 받은 것이에요. 영원한 생명에 이식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거예요.
생명은 생명의 소리를 듣습니다. 생명은 생명의 소리,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이 내 안에 계실 때 우리는 주님 음성을 듣고, 주님과 교제하고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게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분과의 사귐이 가능합니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고백에서만 머물러선 안 돼요. 두 번째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럼 당신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와 동행하고 있는가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사귐 속에 있는가요? 날마다 성령을 따라 살고 있는가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가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고 있는가요?'
이런 질문을 우리가 깊이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그 사귐의 결과는 반드시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4
1:4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 나누는 이 사귐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어요. 요한복음에서도 이 기쁨을 이미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어요.
요15:11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기를 하려는 것이다'
요16:22 '너희도 이와 같다. 너희가 지금은 슬퍼하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볼 때는 너희가 기뻐할 것이요, 너희 기쁨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결코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환경이 주는 기쁨은, 환경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건강이 주는 기쁨은, 건강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물질이 주는 기쁨은, 물질이 없어지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이 기쁨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왜요? 영원한 생명이 주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사귐 속에서 가지는 이 기쁨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에요.
이 기쁨을 노래한 찬양이 있죠. 이 찬양을 부르면서 말씀을 맺기를 원합니다.
442. 저 장미꽃 위에 이슬 (1)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후렴:주님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2)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리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3)밤 깊도록 동산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음성이 쟁쟁하게 들려오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찬양의 고백이 나온 거예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의 사귐 속에서 이런 쟁쟁한 음성을 들었고, 이런 기쁨을 누렸고, 그래서 이런 찬송의 시가 나온 거예요. 이런 기쁨을 우리가 함께 누리는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