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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3:17~4:1 하늘 시민 vs 십자가의 원수

LNCK 2022. 12. 14. 14:56

하늘 시민 [빌립보서30] -  YouTube    *이 동영상 25:30초까지 녹취


◈하늘 시민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아라)      빌3:17~4:1       2022.12.04.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2장과 3장은 사실, 빌립보서의 가장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메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바울은 
케노시스(비움) .. 즉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또 자기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쭈욱 나눕니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 3:17~4:1입니다. 
빌3장의 마지막 부분이죠. 
4장은 이제 개인적인 인사들 이런 것이 주를 이루고 있죠. 

빌립보서의 본론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몇 가지 구체적인 권면들을 나누면서 
바울은 서신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세 가지를 권면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는 내용이었고 
-두 번째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아라   (*본 설교)
-세 번째는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는 
이 세 가지 권면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권면이 
사실은 빌립보 교인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권면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첫번째 ◑나를 본받으라 하는 것으로 지난 번에 살펴봤고요. 
오늘은 ◑두번째,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아라  
그리고 ◑세번째,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는 이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아라"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은 빌3:18절에서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를 행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케노시스와
반대로 사는 것을 얘기합니다. 

케노시스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고 반대로 살아간다는 거에요.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는 대신, 그것에 반대로 살아갑니다. 

낮아지는 대신, 높아지려고 하고 
자신을 비우는 대신, 자기를 높이 세우려고 합니다. 
또 형제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영적인 원리는.. 일차원적입니다. 
일차원적이란, 플러스 아니면 마이너스 라는 거에요. 
애매하게 이리저리 돌아가는 게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영적인 원리는 딱 플러스 아니면 마이너스 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십자가를 위해서 사는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냐.

그러니까 '십자가의 원수로 산다'는 것은 뭐 특별한 게 아니고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중간에 애매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십자가의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십니까?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쭉 살펴보면서 
혹시라도 우리 삶 가운데, 십자가와 반대로 살았던 것들이 있다면 
깊게 회개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회개와 반전의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그렇다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19절에서 그 구체적인 이야기로 3가지 언급합니다.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1)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2)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

▲1. '그들의 신은 배요'
십자가의 원수를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인데, 그 신은 배 belly 라는 거에요. 

사람은 여러분 누구나 섬기는 신이 있습니다. 
신이란, 그의 삶에 절대적인 것 .. 그게 신 god 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삶에서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생각하든지/ 생각하지 못하든지 간에
하여간 절대적인 것,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거나 

뭐 절대적으로 내가 의지하는 것, 절대적으로 내가 소망하는 것,
절대적인 어떤 필요이거나, 
또는 절대적으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하여간 내 안에 '절대' 라는 말이 붙은 것.. 그게 그 사람의 신(우상)이에요. 

내가 인식할 수도 있고/ 인식 못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이 보면 보이는데, 자기는 인식 못 하고 있을 수도 있죠.

예를 들어서 돈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결국 신일 것이고 
성공을 절대적으로 원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그의 신일 것이고 
자식을 절대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자식이 신일 것이고 
그리고 어떤 신념이나 철학도 신(우상)이 될 수 있지요.

그리고 이런 신(우상)들이 모여서, 내 존재의 근거가 되고, 뿌리가 됩니다. 

그게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는 거죠.

'돈을 좋아하는 사람, 성공을 좋아하는 사람, 자식에 목 매는 사람' .. 이렇게 규정 돼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나는 어디서 삶에 안정감을 누리고 있습니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진리로 믿고 있는 신념은 무엇인가요?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신(우상)속에 다 녹아있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섬기는 신, 절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절대적인 어떤 것들을 모아보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나의 신(우상)이 
내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누구나 섬기는 신이 있습니다. 
모양과 이름만 다를 뿐이지, 무신론자도 신의 있고요, 
'불가지론자'에게도 신이 있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는 자

하여간 모든 사람은, 결국 자기가 섬기는 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얘기합니다. 
'그 신은 그들의 배' 라는 거예요. 즉 '먹고 사는 것'이 자기 신이라는 거에요. 

그들이 섬기는 신은, 쉽게 얘기하면 '잘 먹고 잘 사는 거'라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사는 게 .. 여러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고매하고... 이렇게 보이는 것 같지만 
까놓고 그 속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결국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는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거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아주 신랄한 고발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를 행하는데' 그들을 이렇게 보니까, 
그들이 섬기는 신은 배더라, 잘 먹고 잘 사는 게 그들에게 절대적인 것이더라!
라는 거예요. 

오늘날 사람들을 절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뭡니까?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거라는 거에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만 있으면 
무슨 중요한 일을 다 제껴놓고 가서, 그 일부터 한다는 거죠.

또 사람들이 자기 인생 다 바쳐서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 뭡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가장 큰 가치는 뭡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이
가장 소망하는 게 뭡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가장 관심 있는 게 뭡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존재의 의미는 뭡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선거 때, 늘 등장하는 공약이 있죠. "경제야 경제!")   

이것이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십자가의 원수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근데 여러분, 좀 비참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만물의 영장인데, 자기 존재 의미가 뭡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어쩌면 짐승과 비슷하네요.

 

요즘 우리 주위에 어디 가서든지, 오리, 해오라기, 고라니,  이런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동물의 왕국을 보세요. 동물들이 하루종일 하는 게 뭐죠?

먹을 거 찾아다니고.. 먹고 사는 거.. 오직 그거 딱 하나 합니다!

사람들의 가장 소망하는 절대적인 소망이 뭡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여러분 조금 비참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인간이라면, 뭔가 좀 다른 것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인간에겐 여러분 이것 이상의 뭐가 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인데 
어떻게 절대적인 가치가 (동물과 똑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거고 
어떻게 절대적인 신념이 잘 먹고 잘 사는 거고 
어떻게 내 존재의 의미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일 수 있습니까? 

사람은 여러분, 이것 이상의 뭐가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참 슬프고 비참하게도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잘 먹고 잘 사는 거더라 ... 이게 바울의 고발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럼, 경제를 절대적으로 취급하는가 하면,
그들은 '몇 평에 사는가, 연봉이 얼마인가, 재산세를 얼마 내는가?
금융자산이 총 얼마인가, 무슨 명품으로 치장하는가? ...
이런 것들이 '자기 지위, 자기 신분, 자기 계급'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게 좋아보일 수도 있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들' 이라고 규정입니다.    

▲2.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삶의 두번째 특징은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입니다.  빌3:19

'영광'이란, 뭐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정의 말고 
여기서 '영광'이라는 말하는 뜻은, "자랑하고 싶은" 거에요. 

내 인생을 좀 빛내게 해주는 것, 
그래서 추구하는 것, 얻고 싶어하는 것 ... 이게 영광입니다. 

예를 들면 운동선수에게 영광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영광이고, 
또 학자들에게 영광은, 노벨상 타는 거죠.
또 이번에 월드컵 축구 하는 중인데, 그 축구 선수들에게 영광은 뭐겠어요?
월드컵에 참여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 본문에서 '영광'이란
내 인생에서 꼭 얻고 싶은 것, 
내 인생을 자랑스럽게 해주고, 빛나게 해 주는 것들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분 꼭 채워져야 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데요. 
심리학자들이 조사한 건데요, 그게 '안정감' 과 '중요감'이라는 겁니다. 

'안정감'은, 경제적 안정, 생명의 위협이 아닌 안정감.. 
이런 게 없이 늘 불안하면, 정상인으로 살 수가 없죠.

또 하나 '중요감'이란, 
사람은 자기가 그래도 뭔가 중요한 존재이고 
의미있는 존재라고 하는게 채워져야... 살 수 있다는 거죠. 

자기가 가정에, 사회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다...
그런 사람은 정상인으로 살지 못한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신'이란, 삶의 안정감하고 연결돼 있고 (신을 가질 때 안정감 옴)
'영광'은 삶의 중요감 하고 연결돼 있습니다. (영광을 가질 때 중요감 느낌)

'나는 그래도 중요한 존재야, 나는 의미있는 존재야' 
하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 ... 그게 '영광'이라는 거죠. 

그런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그 추구하는 영광이 부끄러움이 됩니다.' :19

'부끄러움'의 원어는, 부도덕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
또는 부도덕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부끄러움' 이라고 합니다. 

즉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 또 부끄러운 방법으로, 부도덕한 방법으로 
영광을 추구했다는 거에요.   *whose glory is in their shame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 
그러니까 남의 걸 든지 도절질하든지, 또는 사기 치든지, 거짓말하든지 
하여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 또는 부도덕한 방법으로 영광을 취했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실 바울이 살았던 로마 시대의 영광을 생각해보면 
겉으로는 큰 것 같고 화려해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뭐에요? 

정복하고, 죽이고, 빼앗고 그래서 만들어낸 영광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 사람들 눈에는 대단한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굉장히 성경적이지 않은 거죠.

그렇죠. 누군가를 죽이고, 빼앗고, 정복하고.. 뭐 그래서 취한 영광이니까요! 
정상적이지 않고, 부도덕한 거죠. 그러니까 부끄러운 영광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뭐 대단한 것 같고 영광스러운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억울함과 고통을 담보로 영광을 취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자 그렇다면 참 영광은 어떤 걸까요? 
영광이란, 사실 나보다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를 향해서 사용하는 비교용어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누구가를 만났을 때 
'아이고 만나뵙게 돼서 제가 영광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가 있죠. 

그러니까 영광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향해서 얘기하는 거지 
윗사람이 아랫사람 만나면서 '아이고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러진 않아요. 

자 그런 의미에서 이 '영광'이라는 것은 
비교할 때 사용하는 용어라는 거에요. 

자 그런데 제가 어떤 분을 만나서 '아이고 영광입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또 그분은 그분보다 더 탁월한 존재를 만났을 때 '아휴, 영광입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겠죠. 

또 그런 인사를 받은 탁월한 존재는 
자기보다 더 탁월한 존재를 만났을 때 
'아휴, 제게 큰 영광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영광'은 계속 피라미드 식으로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가장 정점에는 누가 있을까요? 그렇죠. 하나님이 계신거죠. 

그래서 이 '영광'이란 말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얘기에요. 
결국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거에요. 
영광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영광'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또 히브리어에서 '영광'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반영하는 것을 '영광'이라 그래요. 

그래서 이 영광의 원어를 보면, reflection 에서 나왔어요. *'반영하다, 반사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어떠한 속성을 반영하고 반사할 때 
그것을 '영광'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이게 히브리어로 영광이라는 의미죠. 

△자 성경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신데요. 
사실은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실 수 없는 거죠. 

상상해보세요. 하나님이 누구를 만나서 '아이고 영광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있냐는 거에요. 없지요. 

누구를 만나도 하나님께서 '아이고 영광입니다. 나보다 크십니다'
이렇게 얘기할 존재가 없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주실 수 없으신 분이세요. 
이렇게 '영광'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속성이 영광입니다. 

△자 그런 영광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나요?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진짜 영광은 뭐냐면, 십자가라는 거에요.
십자가가 진짜 영광이 되는 거에요. 
왜냐면 남을 죽이고 눌러서 얻은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는 자기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니까요. 

'(십자가를 앞두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그런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이 십자가와 완전히 반대되는 영광을 취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끄러운 영광이고,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영광,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영광,
낮아지는 영광이 아니라 높아지는 영광,
살리는 영광이 아니라 죽이고 정복하고 빼앗고 그것으로 누리는 영광!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는 거죠.
이 세상 영광, 부끄러운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슬프게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십자가가 반대되는 
부끄러운 영광을 취하면서 살아갑니다. 


▲3. 셋째 십자가에 원수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다' 라는 단어의 원어는 '마음에 두다, 똑같은 생각을 갖다'
이런 뜻이에요.  *포로네오, mind, be harmonious, to be of the same mind

그러니까 '십자가의 원수'는 땅의 것과 같은 마음, 같은 가치관을 갖는 거예요.

이들의 모든 관심은 땅에 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동차, 주식, 아파트, 직장 승진, 자녀교육
다 땅에 일들만을 생각합니다. 땅에서나 가치 있는 일들... 
십자가의 원수는 하늘의 일이 아니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과 생각과 가치관이 똑같은 거예요. 하모니를 이루는 거예요.

 

물론 뭐 이런 걸 생각한다고 전부 다 십자가의 원수는 아니지만 
평소에 그 마음이 어디 가 있느냐는 거에요. 

우리가 땅에 살다보면 이런 생각을 해야죠. 
그렇지만 우리가 진짜로 마음을 두고, 애정을 두는 것은 하늘의 일들이고, 

그 하늘의 일을 이 땅 가운데 이루어가려고 하는 사명감에 의해서 

그냥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지, 그게 십자가의 사람인데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자세가 없어요. 
하늘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고 
그냥 땅에 일에 진심인 사람이에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땅의 일에 '진심'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이 '십자가에 원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좀 섬뜩한 얘기입니다. 

뭐 대단히 사악한 일을 하고, 대단히 악한 삶을 사는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일들을 하면서 사는데.. 그게 '십자가의 원수'라는 거죠.

예를 들면, 맛집 찾아다니고.. 또 뭐 자녀교육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주식 찾아보고... 뭐 그냥 그런 일들... 

그런 일들을 했을 때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 수 있다는 거에요. 빌3:18~19

그런거 한다고 전부 다 십자가의 원수는 아니지만 
거기에 내 모든 마음에 가 있을 때, 그걸 바울은 뭐라 그러는 거에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하늘 일이 아니라, 이 땅의 일들에 내 모든 마음과 애정과 즐기는 것이 
다 가 있을 때, 그 일에 내가 '진심'일 때.. 그것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지난 한 주간 여러분 어떻게 사셨습니까? 
십자가의 사람으로 사셨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원수로 사셨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무엇에 진심이었냐?' 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거에요.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 있었습니까? 땅에 일들에 있었다면, 
뭐 사악하고 악하고 죄를 많이 짓고... 그래서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땅에 일들에 진심이었다면 

 

즉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면..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는 거예요.   :19

▲그리고 이런 십자가의 원수를 향해 바울은 뭐라 그러냐면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19

왜냐하면 땅의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다' 이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이 땅의 삶은 영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먼저 소멸되든지, 이 땅이 소멸되든지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옵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해요. 영원히 즐기지 못해요. 
그래서 그 끝은 결국 멸망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자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땅에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인데, 
그것이 왜 십자가의 원수냐 하면 

땅의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 땅에서는 망하는 길이 십자가거든요. 그렇죠. 
예수님이 결국 어떻게 되셨어요? 땅의 기준으로 보면 망하신 거죠. 
죄수로 오해받으셔가지고 결국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어요. 끝!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땅의 기준으로는 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면 십자가의 길은 누가 선택하느냐? 
하늘이 것을 보는 사람은 십자가를 선택해요. 

하늘에 있는 영광이 있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가치가 있다.. 는 것을 알고 
붙잡는 사람만 이 땅에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땅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것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에 원수다' 
이렇게 바울은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3. 큰 세 번째 권면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너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P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