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 우리 앞에 고난과 역경이 오면, 그건 우리를 훈련시키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지난 후에는, 그것을 통해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소나기가 아무리 세차게 몰아쳐도, 비가 그친 후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뜬다. 빗물에 씻긴 맑은 하늘에 떠 있는 그 무지개는 무서웠던 소나기의 기억을 다 잊게 한다.
그처럼 나는, 내일에 예비해 놓으신 무지개의 약속을 기대하며 어제의 아픈 기억들을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3기 사역을 시작할 때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2000년 봄~ 우선 우리 사역을 꾸준히 지원해주시던 김우현 목사님께서 사역비 문제로 사역 확장을 반대하셨다.
그리고 많은 목사와 선교사도, 북한선교의 위험성때문에 더 이상의 사역 확장을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2기생 선생들을 (연변으로 학생모집하러) 파송하였다.
하지만 첫 걸음부터 정모세 선생을 잃어야 했고 연이어 이연수 선생과 유칼빈 선생을 다시 볼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아픔을 간신히 이겨내며 3기 사역을 진행하던 중 장만식 아바이를 잃어야 했다. *서안의 사역장에 공안이 들이닥쳐 전부 연행
장만식 아바이의 체포처럼, 나와 모든 선생들을 통곡하게 한 사건은 전 사역기간 중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의 체포는, 우리 사역장에 많은 여운을 남겼다.
또 그렇게 믿고 아꼈던 김권능선생이, 나의 사역 방식에 불만을 품고 사역장을 떠났다. 이런 고비들을 넘을 때마다, 나는 너무너무 힘든 나머지 이 사역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은, 이 사역을 통해 새롭게 자라나는 생명들을 보게 하셨다. 조금씩 푸르름을 더해가는 생명의 새싹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모든 눈물과 수고와 아픔들을 넉넉히 덮고도 남을 감격이요, 기쁨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주님만 의지해야 하는 힘겹고 위험한 사역이었지만 이제 3기 사역에서 세워진 선생들에 의해 4기 사역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순교선생 사역장에 김기철, 박에녹, 신재록 선생이 서안으로 왔을 때 많은 선생들이 역으로 마중나가서,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학생들을 모집해 온 이들을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이후에는 용섭선생이 보내주는 학생들을 서안에서 인계받아 3기 사역장에서 준비된 선생들을 팀장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사역장을 꾸리게 하였다.
용섭선생이 한 주에 한 팀씩 꼭꼭 보내주어 주1) 매주 새로운 사역장이 하나씩 생겨났다.
선생들이 체포될 우려도 없고, 비용도 훨씬 적게 드는 이런 좋은 방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는 늘어나는 사역장들로 흐뭇하기만 했다.
용섭선생은 예상했던 대로 역시 훌륭한 활동가였다. 그는 연변의 여기저기를 혼자서 조용히 다니며 학생들을 모집해서 9~10명 가량이 되면, 팀을 만들어 서안으로 보냈다.
그가 얼마나 노련했던지, 북한의 보위부나 중국의 공안들이 우리 선생들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많이 썼지만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신재록 선생팀에는 장아바이 사역장에 학생으로 있던 유연옥 형제가 다시 학생으로 내려왔다. 그는 그 사역장 학생들이 공안에 전원 체포될 때 아내 금자 자매와 함께 연변으로 갔었다.
이들은 연변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가지고 간 테이프로 성경통독을 하며 지냈다.
한번 말씀의 맛을 경험한 이 부부가 말씀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조선족교회 전도사가, 중국 돈 3천 위안을 줄테니 통독 테이프를 팔라고 여러 번 부탁했는데도 팔지 않았다. 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기 때문에, 팔지 않고 계속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다른 형제들도 말씀을 어느 정도 경험한 후에는 개인 사정으로 사역장을 떠나게 되면, 꼭 통독 테이프를 가져가려 했다.
정선생 사역장에 김주명 형제가 사역장에 3개월 있다가 아내 성온유 자매와 함께 떠날 때였다.
사역장 형제들이 모두 역으로 그를 배웅하러 나가사 사역장이 비어있는 사이에, 아내를 시켜 사역장에 한 세트밖에 비치되어 있지 않았던 <QA주석 전권>을 가져오게 했다.
들여오기 힘든 주석 전권을 훔쳐간 것은 괘심했지만 훔쳐서라도 가져가려 했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만은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연변에서 탈북민 학생들이 도착하자, 성근선생 사역장 선생들 부터 학생들을 인수받고 사역을 시작하게 하였다. *4기 시작, 2001년 여름
제일 먼저 이선장선생이 학생들을 인계받아 사역을 시작했다. 그 다음 조선족 이욱선생이, 뒤이어 신수재 선생이 사역장을 꾸렸다.
누가선생이 떠난 후, 김순종 선생이 이어서 맡았던 사역장에 조복화선생과 조선족 김광철선생도 각각 8명의 학생들을 인계받아 사역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성근선생과 나의 할 일도 끝없이 늘어갔다. 새벽 6시부터 이 사역장, 저 사역장을 돌아다니며 추가로 필요한 사역비와 옷가지들을 지급하고 수시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처리했다.
또 새롭게 세워진 4기 선생들에게, 사역에 필요한 경험들도 이수해 줘야하고 계속해서 오는 학생들이 들어가 살 집을 미리 찾기 위해 서안 도시의 여기저기도 돌아다녀야 했다.
새벽 2시까지 팽이처럼 돌아도, 일은 계속해서 쌓여만 가서 지치고 힘겨웠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했다.
이제 3기생 선생들 모두가 이렇게 사역장을 꾸린다면 대략 400~500명 가량의 학생들로 제 4기 사역이 시작될 것이다. (1기 8명, 2기 약30명, 3기 약80명 가족까지 1백명, 4기 4~5백명)
이젠 북한 선교의 대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였다.
저 죽음의 땅 북한은, 이제 우리 손에 달렸다. 사망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북한의 동포들에게서 이제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흥분과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쳤다. '기다려라 북조선아, 이제 우리가 간다!'
♣자매사역장 설립
1998년 사역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많은 분들에게서 자매사역도 좀 해야 하지 않느냐는 권면을 들었다.
사역장의 형제들도, 자매사역장을 세우자고 여러 차례 내게 건의했었다. 그러나 자매건 형제건, 사역장 하나가 세워지려면 그 사역장을 이끌 수 있는 선생과 그를 지도해주고 지원해줄 선교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형제사역장을 이끌어 가며 필요한 재정을 공급하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데, 그래서 자매사역장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또한 사역장을 이끌 수 있는 선생으로 세워지려면 아무리 짧아도 10개월에서 1년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훈련된 자매선생이 없었다.
그래서 갈 곳 없어 떠도는 북한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자매사역을 하는 다른 선교사에게 소개시켜 보내곤 했다.
하지만 2기 때부터 학생으로 들어오는 형제들 중에 어머니나 아내, 여동생 등 여성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를 볼 때마다, 자기 가족들을 어떻게 좀 돌봐줄 수 없느냐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던 중 연변으로 파송되어 갔던 정용철 선생이 나의 지시에 상관없이 자기 아들과 딸을 데려왔고 정선생 팀에 김예진 형제도 아내를 데리고 왔다.
장만식 선생 사역장 학생으로 들어온 유연옥 형제도 아내인 금자자매와 함께 왔다. 금자자매는 우리 집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성경통독을 했다.
또 김주명 형제도 성경공부 시키고 싶어서, 아내를 데려온 것을 돌려보낼 수 없어, 역시 우리 집에 같이 있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용섭 선생이 아내 문제로 상담을 해 와, 그의 아내 차이모도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여 끝도 없이 우리 집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가족만 해도 일곱 식구에, 정선생의 아이들인 은혜와 봉구, 이를 돌봐주던 조선족 문이모까지 대가족이었다.
아내는 여섯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도 힘에 겨운데 *친자녀 넷+은혜, 봉구 북한 자매들에게 성경 통독까지 시켜야 하니 몹시 힘들어했다.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문제로 상담해 올 때마다 최대한 자매는 받지 않으려 했던 나의 입장은 난처하기만 했다.
생각 끝에 우리 사역장에 연고가 있는 자매들만 학생으로 받아들여 자매사역장 하나를 운영하기로 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의 절반이 자매인데, 형제사역만 해서 그동안 마음에 늘 부담이 있다가, 자매 사역장을 세우게 되어 감사했다.
자매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되었던 한국교회사를 생각하며 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북한 여선교사가 세워지기를 기대했다.
우리 집에서 5개월 동안 성경통독을 하다가 연변에 갔다가 다시 온 금자자매를 자매사역장 선생으로 세웠다.
그리고 은혜자매, 김예진 선생의 아내 김온유자매, 이선장선생의 여동생 지혜자매, 새로 4기학생으로 들어온 장형제의 아내 김겸손 자매까지 모두 4 명의 자매들로 자매사역장을 만들었다.
자매사역장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은, 이내 전체 사역장에 퍼졌다. 사역장에 들릴 때마다 선생들과 학생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왔다.
'선교사님, 자매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곱씀까?' '다음 번 축구대회 때면 만날 수가 있습니까?'
어떤 형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부탁해오기도 했다. '선교사님, 저 지금 30세 입니다. 그 자매 사역장에 맞춤한 자매님 한분 쯤 어떻게 못함까?'
나는 자매사역장을 두 개의 가정사역장과 함께 서안에서 버스로 세 시간 가량 떨어진 보계 시에 세웠다. *바오지 시
안정된 마음으로 공부하는 총각형제들의 마음에 괜히 불을 붙여 놓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자매사역장을 보계 시에 세운 것 때문에 그들의 목숨을 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서안이 잡혔을 때 보호됨)
체계적으로 훈련받지 못하고 선생으로 세워진 금자자매는 사역장을 이끌며 매우 힘들어했다.
북한자매 들은 형제들 못지않게 사나워서, 한마디로 여전사 들이다. 이들이 사납게 선생을 공격하며, 사사건건 따지고 불순종하니 금자선생은 여러번 울며 더 이상 사역을 못하겠다고 연락을 하였다.
그때마다 자매사역장으로 가서 금자선생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자매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생각을 정리해주었다.
그러면서 자매사역장 하나가, 잘 훈련된 선생이 이끄는 형제사역장
7~8곳 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을 나는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전사들이 모인 자매사역장도 세워진 지 2개월이 지나면서 부터는 성경통독과 기도를 통해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이들은 밤마다 사역장 근처 강가로 나가서 북한 복음화와 전체 사역장을 위해, 또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위해 또한 행방불명된 지혜 어머니를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어가는 자매들을 보며, 이렇게 7~8개월 더 훈련하면 북한 출신 자매선교사도 여러 명 배출될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가졌다.
♣사람을 꼼짝 못하게 다루는 능력
4기 사역이 시작됨과 동시에 *2001여름 선생과 학생들 간에 술 담배 전쟁도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나를 도와 여러 개 사역장을 관리하던 성근 선생은 *사역장 전체 관리자 이제 막 선생으로 세워진 기철선생이, 험하디 험한 탈북자들을 어떻게 다스려낼지 늘 염려스러워했다.
기철선생은 아직 사역에 대한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북한에서 박사원까지 졸업하고, 북한 과학연구소에서 연구만 하다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이 지나기가 무섭게, 기철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근선생, 큰일 났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왜 그럼니까, 기철선생,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나 하마터면 학생들한테 맞아 죽을 뻔 했소. 그 죽일 놈들이 내가 술 담배를 못하게 한다고, 글쎄 여럿이 달라붙어 사역비고 뭐고 다 빼앗고, 나를 내쫓지 않았습니까.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기철선생은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간간이 말을 더듬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그 새끼들이 나보고 뭐라는지 압니까? 그 영남이라는 새끼는, 나보고 너 이 새끼, 조국과 김정일 장군을 배반하고 (북한에서 좋은 교육 받았으니까) 남조선 괴뢰도당 하고 맞붙어서 지금 뭐 하는 거야?
거 남조선 괴뢰도당을 이리로 빨리 데려오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 이러면서 나를 막 때리려고 하는 걸, 겨우겨우 도망쳐 나왔습니다. 거 힘센 학생들을 좀 데려다가, 이 종간나 새끼들을 손 좀 봐야 겠소!'
엄격한 사역장 생활을 견디다 못한 5명의 형제들이 공부를 포기하고 연변으로 돌아가려고 작당하고 나선 것이다.
성근선생도 '김정일 장군' 운운한 영남이라는 놈을 만나 박살내고 싶었다. 영남형제가 했다는 말은, 김정일에 대한 원한이 하늘에 사무친 그를 비롯한 모든 탈북자들을 가장 격분케 하는 말이었다. 중국에까지 와서 '김정일 장군'을 외쳐대는 자식을 가만 두고 싶지 않았다.
성근선생은 한국에 있는 내게 전화해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때 나는 새롭게 확장되는 4기 사역에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해 한국에 나가 있었다.
'선교사님, 그 말을 한 자식만은 꼭 붙잡아서 도륙을 내고 싶슴다.' 화가 나서 거칠게 말하는 그의 마음이, 나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사역장에 알려진다면 기철선생 사역장은 정말 큰 일이 날 것이다.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사람들에게 영남형제의 말은 마른 장작에 던지는 불씨나 다름 없었다.
'성근선생, 절대로 다른 선생들이나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마세요. 절대로요!'
'그러면 나 혼자 어떻게 합니까?' 성근선생이 발끈해서 물었다.
그렇다고 깡패들처럼 떼거리로 몰려가 몰매를 때려서는 더욱 안 될 일이었다.
군복무 10년씩의 경력을 가진 그들을, 성근 선생이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나는 '기도 많이 할 테니, 성근 선생이 기도하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성근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답답했지만 일단은 부랴부랴 그 사역장으로 달려갔다.
기철선생은 사역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조선족 형제와 함께 길가에 앉아 있었다.
몹시 피곤해보이는 기철선생은, 성근선생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성근선생, 어째서 혼자 왔소? 힘센 학생들을 좀 많이 데려오지 않고 뭐 함까? 혼자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지금 쟤들이 얼마나 미쳐 날뛰는지 압니까? 쟤들 중에 영남이와 명철이라는 새끼는 특수부대에 10년이나 복무하고 와서 그런지,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막 떨리네...'
아직도 잔뜩 겁먹고 있는 기철선생을 보니, 저들의 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성근선생은 짐작이 갔다.
이어서 조선족 형제가 말을 했다. '그리고 쟤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암까? 기철선생 한테서 빼앗은 돈이 모자라니까, 성근선생과 최광 선교사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근선생이 평소에 돈 많이 가지고 다니니까 붙잡아서 돈빼앗고 족쳐놓고 도망치자고 합디다.'
이 말을 들은 성근선생은 섬뜩했다. 전체 사역장을 관리하느라, 자기가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기철선생이 와락 성난 어조로 말했다. '아, 뭐 함까? 가서 다른 선생들 데려오지 않고... 저 새끼들이 지금 우리 사역장이 얼마나 큰지 몰라서 저럼다. 가서 몽땅 박살내 버립시다. 나보고 김정일이를 배신한 배신자라고 떠드는 놈 새끼들을 싸그리 박살내 놓읍시다!, 에이 망할..'
성근선생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험악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사역장 생활이 힘들어 잠시 투정삼아 부린 난동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기철선생과 조선족 형제에게 말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근데 다른 형제들을 데려다가 저들을 작살내는 방식으로는 안 됨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순수하게 성경만 배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선한 무리들이 아니라 조직적인 깡패집단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또 다른사람들의 힘을 빌려 해결한다면, 훗날 저들은 우리를 믿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 깡패들과 똑같이 일을 처리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해 봅시다!'
성근선생은 기철선생과 조선족형제의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걸 어떡하면 좋습니까? 우린 연약하고 저들은 사납습니다. 하나님,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은 저들도 다 주님을 믿게 해서 구원받게 하시려고 이곳으로 보냈는데, 우리는 어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세 사람은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기도 했다. 작은 기도모임이 끝났지만, 세 사람 중 누구에게도 이렇다 할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선다면,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학생들이 실망할 것이고 그만큼 사역에 미치는 큰 해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성근선생은 용기를 내었다.
'뭐 다니엘은 하나님 믿고 사자굴에도 들어갔다고 하는데 우린 그래도 사람무리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다니엘보다는 한참 낫지 않습니까? 뭐 들어가 봅시다!'
'난 싫습니다. 싫습니다. 들어가려면 두 선생이나 들어가쇼. 난 안 들어갑니다!' 조선족 형제는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결국 성근선생과 기철선생만 사역장안으로 들어갔다. 사역장에 들어서니, 사역장은 완전히 돼지우리같았다.
담배 연기가 방마다 자욱했고, 금방 술파티가 끝났는지 모두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기철 선생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술 사마시고 담배 사 피우고 카드 판을 벌인 것이다.
성근선생과 기철선생은 아무 말 없이 통독실로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성근선생이 와서 통독실에 들어가 있기만 하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한 명 두 명 통독실로 모여들었다.
한참 후에 성근선생이 눈을 떴을 때, 모든 학생들이 통독실로 들어와 말없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모두 조용히 앉아있기만 할 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침묵 침묵... 무거운 정적만 방안 가득 흐르고 있었다. 누가 어떻게 말문을 여느냐에 따라, 사태가 전도될 판이었다.
사태를 수습하려면, 자기가 먼저 입을 떼야 한다는 것을 느낀 성근선생은 웃으며 내키는 대로 말을 시작했다. '우리 앉은 김에 예배나 드립시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이렇게 나와버렸다. 하지만 형제들은 아무 반응도 없이 심드렁한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무서운 이 사람들이 갑자기 확 일어나, 성근선생과 기철 선생을 메다꽂고 돈을 빼앗아 도망갈 것만 같았다.
그는 애써 태어난 웃음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모두 힘들다는 거 암다. 나도 이 사역장에 와서 선생을 때려눕히고 도망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근데 그거 때려 부수는 건 문제가 아닌데 갈 곳이 없습네다. 다시 연변으로 돌아간다고 해봐야 반기는 사람도, 친구도, 집도 없지...
그렇다고 말도 모르는 이 중국 대도시 한복판에서 살아가기도 막막하고... 그래서 악쓰고 참고 참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가 됨다.'
여전히 학생들은 말이 없었다.
'지금은 이사역장에서 우리가 왜 이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 리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 해줄 테니 한번 잘 들어보시오. 그냥 심심풀이 삼아 들어보세요. 지루하진 않을 겁니다.'
이렇게 앞뒤 찬송도 없고 기도도 없는 예배가 시작되었다. 성근선생은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일전에 교회사 강의를 위해 오셨던 구창환 목사님이 해주신 얘기였다.
조나단 리빙스턴이라는 한 용감한 갈매기가 자연의 저항을 이겨내고 높이 더 높이 날아오르다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함께 살던 갈매기들을 하나 둘 그곳으로 데리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신앙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우화적으로 묘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사역장에 살벌한 기운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한참 후 얘기가 다 끝났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과 같은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두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사역장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담배꽁초며, 카드며, 술병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몰라라 하고 앉아 있던 학생들도 하나 둘 통독실에서 나와서, 이들을 따라 사역장을 정리했다.
두 선생은 저녁때까지 학생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학생들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성근선생과 기철선생이 저녁이 되어도 사역장에서 나오지 않자 조선족 형제도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성근선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생들을 깨우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아침 먹고, 12시까지 통독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통독하고, 기도하고, 말씀 암송하고, 큐티를 했다. 학생들도 아무런 반항 없이 일과 진행을 잘 따라 왔다.
다음날 성근선생은, 기철선생에게 다시 사역비를 지급하고 자기 사역장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이 빼앗아 간 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님의 역사는 그 이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주동했던 명철형제가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모두가 명철형제에게 말했다. '와 진짜 신기하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헷가닥 변할 수가 있을까?'
명철형제는 자기들이 돈을 빼앗을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자기들을 내쫓거나, 다른 선생들을 데리고 와서 혼을 내지 않는 성근선생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가 아는 세상 원리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었다. 그가 보기에 성근선생은, 정확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달랐다.
그는 훗날 사역장에 찾아온 성근선생에게 물었다. '아, 거 성근선생, 나도 특수부대에서 복무하면서 사람 깨나 다뤄봤는데 성근선생은 어느 군대에서 복무했소?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디서 그렇게 말 한마디 안 하고 사람 다루는 법을 배웠소? 나도 좀 가르쳐 주시오!'
성근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난 군대 라고는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중국 오기 전까지 학생이었는데, 사람 다루는 법을 배울 데가 어디 있슴까?
근데 거 성경에 보면 예수라는 분이 나옵니다. 그냥 거 예수라는 분이 하던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커졌다. '성경 어디에 예수라는 분이 나옴까? 나한테도 알려 주면 안 돼요?' (사역장 초기 시절이라 아직 아무 것도 모름)
성근선생은 사복음서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 날부터, 통독시간 외에도 틈만 나면 성경을 읽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성경에 대해 질문이 많아졌다.
'기철선생, 그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왜 매달렸어요? 거 제사장들은 왜 요렇게도 모질게 예수님을 안 좋아했어요?'
명철형제는 기철선생이 대답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수첩에 꼬박꼬박 적어두었다가, 간간히 사역장을 돌아보러 오는 성근선생이나 나에게 물어왔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멍한 눈빛으로 뭔가 생각하기도 하고 고민에 잠기기도 했다. 통독 시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대목을 읽을 때면 괜히 눈물을 감추려고 코를 킁킁거리다가, 화장실로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얼마 후부터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장서서 기철선생을 도와주며 사역장의 형제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이렇게 해야, 거 예수님한테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전번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어요? 내 정말 이제부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오!'
한달 후 기철선생 사역장은 모범사역장이 되었다. 성근선생과 기철선생이 자기도 모르게 이들에게 보여준 것은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도 들이대라' 는 말씀의 실천이었다. 마5:39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소광 선생
소강선생과 순교선생은 용정 변방대로 옮겨진 후 *학생모집 나갔다가 체포 30명의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중국 군인들은 이들을 용정 삼합에서, 함경북도 회령 세관으로 연결되는 중국과 북한의 국경 교두에서 북한 보위부 군인들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손목에 채웠던 수갑은 중국 물건이었기에 모두 풀어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야 이 간나 새끼들아, 한 줄로 맞춰서라. 빨랑빨랑 안 움직여? 죽고 싶어?' 보위부 군인들은 조금이라도 굼뜬 사람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총으로 내리치고 군화 발로 짓뭉갰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급히 한 줄로 서자, 군인들이 다시 소리 질렀다. '차례로 자기 이름하고, 살던 주소를 대라. 여긴 중국이 아니다. 허튼 이름들 대지 말고, 진짜 이름과 주소만 대라. 거짓말하면 죄가 더 가중된다.'
이들 속에는 노인과 여자, 아이들도 있었다. 보위부 군인들은 이름을 다 받아 적은 후 다시 소리쳤다.
'주머니 안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꺼내서 앞으로 던져라. 신발 끈과 허리 끈도 모조리 풀어서 앞으로 던져라. 신발끈과 허리끈이 없으면 뛸 수 없으니,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잠시 후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한 줄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의사들이 들어와 주사를 놓았다. 에이즈나 전염병을 예방하는 주사셨다.
주사를 맞을 동안, 총을 든 군인들이 앞 뒤로 지키며 서 있었다. 주사가 끝나자 군인들은 이들을 보위부 집결소까지 일렬로 행진시켰다.
회령세관에서 회령 보위부 집결소까지 걸어서 30분 가량 가야 했다. '야 이 새끼들아, 대가리들 깔아!'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엉거주춤 일렬로 행진하는 이들을 구경했다. 보위부 감옥에 도착하자 갑자기 한 무리의 보위부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총과 군화 발로 때리고 밟고 하자,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쓰러지고 이리저리 굴렀다.
그리고 또 '펌프 운동'이란 기합을 받았다. 사람들은 구령에 맞추어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기합을 받았다. 이 운동을 2시간 정도 시키면, 사람들의 항문에 숨겨놓았던 돈이 모조리 흘러나온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가지고 있는 돈 마저도 다 빼앗기면, 설사 보위부 감옥에서 무사히 나갔다해도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합이 끝나고 한 명씩 취조가 시작되었다. 소광선생이 취조실에 불려 들어가니, 2명의 군인들이 각목을 들고 서 있고 책상 뒤에 보위부 지도원이 앉아 있었다.
보위부 지도원이 막 앉으려고 하는 소광선생에게 다짜고짜 소리지르며 물었다. '중국에서 교회에 갔었나?'
앉은 후에 대답하려고 소광선생이 잠깐 뜸들이는 순간, 각목이 사정없이 그의 머리로 날아왔다. 순간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무수히 많은 별들이 번쩍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쓰러져서 데굴데굴 굴렀다. '야 이 새끼야, 무슨 생각을 했나, 무슨 밥 먹었나, 빨리 말 안 하나?'
또 다시 교회 눈앞에 무수히 많은 별이 날아다녔다. 이런 무차별 구타는, 묻는 질문에 대해 잔머리를 굴리지 못하고, 즉시 대답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 새끼가 말을 안 하네?' 보위부 군인들은 소광선생이 머리를 싸쥐고 굴러다니기만 하자 이번에는 옷을 벗겨서 각목으로 그의 등을 나무 패듯 패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쉴새없이 때렸고, 보위부 지도원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교회 갔었나?' '안 갔습니다. 안 갔습니다!'
'진짠가? 다시 말해 봐, 진짠가?' '진짜입니다. 선생님, 진짜로 안 갔습니다!'
'종교를 믿나?' '안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한국 사람은?' '못 봤습니다. 진짜로 코빼기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야!'
그가 대답할 동안 각목은 계속해서 내려 찍혔다.
'이 새끼가 거짓말하네? 야 좀 더 세게 찍어라!' 보위부 지도원은 오직 종교에 관한 것만 계속 질문했다.
매질을 견디다 못해 한국 사람을 만났다고 하면, 더 이상 때리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은 조용히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끌려간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한국 사람을 만났다고 하면 무조건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들을 만난 것으로 생각하며 자본주의 사상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머리에서 자본주의 사상을 빼낸답시고 오랫동안 정치범수용소나 보위부 감옥에서 혹독한 강제노동 형을 치르게한다.
그러니 아무리 때려도, 한국사람을 만났다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속에서 돼지 먹이다 왔다. 숯구이 하다 왔다. 나무 끌어내리는 일을 하다 왔다. 과수원에서 일하다 왔다.. 등등 생계를 위해 단순 탈북해서, 중국에서 일만 하다 잡혀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위부 지도원들은, 탈북자들의 90% 이상이 교회를 가거나 한국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는 것을 안다.
'뭐 하다 왔어?' 그의 정신이 혼미해 지기 시작하자, 보위부 지도원이 다시 물었다.
'과수원에서 일하다가 잡혔습니다. 아이고 진짜입니다. 제발 때리지 마십시오. 진짭니다!'
'내 가라!' 각목으로 무차별 구타를 하던 보위부 군인들이 그를 질질 끌어 감방에 던져 넣어버렸다.
순교선생은 산속에서 나무 끌어내리는 일을 하다 왔다고 우겨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래도 소강선생이 보위부 감옥에서 나가면서 본 순교선생은 뼈 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일주일 후 회령 보위부는 소광선생이 탈북하기 전에 철도 계통에서 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철도 보위부에 넘겼다.
북한은 철도 부분을 군대와 거의 같이 취급하기 때문에 철도는 사회에서 완전 독립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를 인계 받으러 온 철도 보위부 지도원은 그를 보자 꽥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까지 도망치냐?' 탈북하기 전에 그는, 철도차량 부속품 공장에 120명의 청년들을 이끄는 청년동맹 조직 비서였던 것이다.
그는 청년동맹 비서시절, 철도 보위부 지도원과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철도 보위부 지도원은, 그를 철도 보위부로 호송해 가서 다시 취조했다. 그러나 과수원에서 일만 하다가 잡혔왔다고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자 더 이상 죄를 캐내는 심문은 하지 않았다.
평소 그와 잘 알고 지내던 보위부 지도원은, 중국에 대해 평소에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야, 중국이 잘 살더냐?' '예'
'어디, 많이 잘 살던?' '중국 사람들은 다 이밥만 먹고 삽디다. 그리고 집집마다 자전거가 하나씩 다 있고, 텔레비도 전화기도 다 있습대다. 그리고 승용차가 있는 집도 있습대다'
'정말이가?' 보위부 지도원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진짭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적당한 선에서 해야 한다. 마음 놓고 함부로 이야기하다가는, 엉뚱하게 다시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내가보기에 너는 별로 나쁜 사람도 아니고, 죄 지은 것도 없네. 나가도 되겠다'
보위부 지도원은 그에게서 다른 죄를 찾지 못하자, 3일 후에 내 보냈다. 그러나 정치적 혐의만 없다고 인정받았을 뿐 보위부에서 나온다해도 석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안전부(경찰)로 이관되었다. 안전부에서는 중국으로 탈북한 동안 국가에 일하지 않은 죄를 물어 그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5월이라 한창 파종철이었다.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안전부 밭을 여기저기 다니며 파종을 했다. 그렇게 보름간 일하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도망을 쳤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이 지척이었지만, 들어가 보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만약 집에 들렀다가 도망치면, 도주자를 방치했다고, 아내가 또 불려다니며 고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 만에 와보는 집을, 산속에서 내려다 보며 아내를 생각하고 아이를 생각하며 울었다.
'하나님, 저 감다. 다시 간다!' 집을 뒤로 하고 두만강을 향해가면서 그는 내내 울었다.
내 목숨만 귀중하다고, 아내와 아이를 두고 떠나는 그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두만강 물에 들어서자, 마음은 벌써 서안에 가 있는데 발은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직 장마철이 안 되어서인지, 두만강 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허리에서 조금 더 올라 왔다.
그래도 물살은 센 강이라서, 자칫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물살에 밀려가 버릴 수 있었다.
낮에도 건너기 어려운 강을, 밤에 건너자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갑자기 그의 앞에 소용돌이 물이 나타났다. 순간 '죽었구나!'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소용돌이는 그를 비켜갔다.
중국 쪽 강 둑에 한 발을 턱 올려 순간, 그는 감사로 목이 매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고맙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무사히 강을 넘은 기쁨과 함께, 강 너머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 생각에 마음이 찢어질 듯 했다.
그는 중국의 계산툰에 도착하여 연길에 있는 용섭 선생에게 전화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머리를 얻어 맞아도 간수소에서도, 부위부 감옥안에서도, 안전부 밭에서 파종을 할 때도 절대로 그 핸드폰 번호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에 와도, 우리와 연결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용섭 선생님, 저 소광입니다. 저 살아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 빨리 서안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선교사님 보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그는 용섭선생에게 전화하며, 너무 반가워 엉엉 울면서 말했다. 일주일 후에 그는 용섭선생이 모집해 놓은 6명의 학생들이 데리고 서안으로 내려왔다.
나는 서안 역으로 마중 나가 소광선생을 만나자 멀리 떠났던 죽은줄 알았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와락 끌어안고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래 그래 죽은 사람도 살려주시는 하나님이 아무렴 우리 소광 선생을 버릴 수가 없지! 우리 전 사역장에서, 소광선광이랑 순교선생이 돌아오게 해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하나님 소광선생 다시 보내주...'
나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광선생 소식이 전해지자, 사역장의 모든 형제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그동안 두 선생을 위해 기도했던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 되었다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렇듯 소강 선생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때로부터 1년 전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 정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2000년 순교선생 사역장을 시작으로 4월 말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3기 사역장이 꽤 여러 개로 늘어날 무렵 남북 정상회담 개최 소문이 들려왔다.
당시는 사역장에 있던 형제들이 간혹 북한으로 끌려가면 바로 총살을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상회담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우리 사역장은 이미 1998년 8월부터 남조선, 북조선, 중국 조선의 세 개의 한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며 생활을 해 왔다.
날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한국을 위해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을 위해 또 중국 조선족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의 비전이, 복음을 통해 북한이 복을 받게 하고 우리 전체 한 민족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지도자를 양육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서곡이라고 믿고 회담을 통해 남북한 전체가 정치적으로 하나 되어 잘사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회담을 통해 남북한 화해무드가 조성되면 더 안전하게 사역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6월이 시작되면서 회담의 성사를 위해 전 사역장이 아침 금식기도를 했고 정상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에는, 전 사역장이 하루 종일 금식하며 기도했다.
2000년 6월 정상회담 이후, 회담의 성과로 인한 북한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해 6월 말에 북한으로 잡혀 나갔던 정칼빈 최노아 형제가 10월쯤 무사히 사역장으로 돌아왔는데 이들은 감옥에서도 그다지 큰 고생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탈북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붙잡혀 오면 욕이나 구타를 하지 말고, 돈도 뺏지 말고, 조서만 받고 석방해 주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특명이 내려져 탈북 했던 사람들이 고문 받거나 죽을 염려 없이 쉽게 풀려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2001년부터는 북한에 더 큰 변화가 생겼다. 중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성경 공부를 하고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간첩 활동을 하지 않은 탈북자들은 조서만 받고 석방해 주라는 김정일 위원장이 특명이 또 다시 내려졌다. (*우리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
그래서 2001년 6월에 대거 체포되었던 우리 선생들 중 많은 이들이 석방되어 재탈북하여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으로 인한 북한의 변화를 생생하게 현장에서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