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3개의 다른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부분이 해석의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12절에, 자녀들이여 13절에는 아버지(아비)들이여 또 중간에 청년들이여.. 이렇게 나옵니다.
요한일서 를 묵상하는 많은 성도들, 목회자들, 학자들은 이 3가지 호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 궁금해 했습니다.
◑여러가지 많은 해석들이 등장하는데, 3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이것을 "육체적인 나이"로 해석하는 겁니다.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로, 청년들은.. 청년들로, 아버지들은.. 육체의 나이가 많은 어른들로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그 당시의 리더십, 장로들 같은 그런 영적 지도자들로 보고, 청년들은 보통 젊은이들로 보고 권면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죠.
근데 이 해석이 어색한 것은, 나열 순서가 애매하죠. 육체의 나이라면, 자녀들이 나오고, 그 다음에 청년들이 나오고, 그 다음에 아버지들이 나왔다면.. 이것이 물리적인 육체적인 나이의 순서다.. 이렇게 해석하기가 자연스러운데, 그 순서가 바뀌어서 기록되어 있다는 거죠.
또 나이에 따른 권면의 내용도, 연령에 맞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버지들은 ..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알았다.. 젊은이들은 .. 악한자를 이겼다는 내용이 나이에 따른 권면에 맞는 것이다.. 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2) 두 번째 해석은, 세 가지 호칭이 "영적 성장의 세 단계"를 보여준다고 보죠. 초대 교회의 어거스틴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자녀의 신앙의 수준 아버지 신앙의 수준 청년의 신앙의 수준으로 ..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라는 거죠.
물론 어린아이 신앙이 있고, 청년의 신앙이 있고, 아버지(장년)의 신앙이 있죠. 근데 이 해석에도 여전히, 그 서술 순서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 청년의 강한 신앙이 되고 → 아버지의 원숙한 신앙으로 간다면... 이런 해석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만, 본문에 순서가 어린아이 → 아버지 → 청년 ..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2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어떤 실수로 보기 어렵죠. 순서만 제대로 해 놓았다면, 이 해석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3) 또 한 가지는, 아버지,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은 (2번 반복되는 말씀의) 내용이 똑같은데, 아이들에게 주는 권면은 (2번 반복되는데) 내용이 다릅니다.
12절에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4절에는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주1)
그런데 14절에 아이들에게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나 아버지들에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이게 사실은 같은 내용이거든요.
아이들에게 한 권면이나, 아버지에게 한 권면의 내용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의 단계 차이다.. 라고 보기엔 해석이 어렵죠.
3) "모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세 가지 호칭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라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견해를 따릅니다.
왜냐면 '자녀들이여' 라는 호칭이 특정한 단계에 있는 성도들만의 호칭이 아니라 요한일서 전체에서,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호칭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본문 뿐만 아니라 3장, 4장에 이르기까지 틈나는 대로 '자녀들이여, 자녀들이여!'
이렇게 모든 성도들을 향해서, 그가 염두에 두고 기도하는 모든 성도들을 일컬을 때 요한은 '자녀들이여' 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이 사도요한이 비교적 노년의 때에 어쩌면 그가 이 서신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노년의 때에 기록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모든 성도들이 다 자녀들처럼 그렇게 여겨졌기 때문이죠.
또한 이 순서를 보면, 자녀들이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아버지(아비)들이 나오고, 그 다음에 청년들이 나오는 순서가.. 요엘서에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욜2:28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사도요한이 요엘서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위 구절에서, 그러면 자녀들은 예언만 하고, 늙은이들은 꿈만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만 보는 것이냐? 아니죠.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 예언도 하고, 꿈도 꾸고, 환상도 보는 거죠. 예언, 꿈, 환상은 본질적으로 같죠.
이렇게 볼 때, 사도요한이 요엘서2:28의 순서를 따라 본문 요일2:12~14절을 언급한 것은,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 될 3가지 중요한 영적 성장의 영역을 표현했다는 것이라고 보죠. 어린이, 아비, 청년의 구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요.
-죄사함의 은혜 :12 (이건 아이들에게 썼지만, 아버지, 청년들도 경험해야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 (이건 아비들에게 썼지만, 다들 경험해야죠) -악한 자를 이기는 것 (이건 청년들에게 권면했지만, 다들 악한 자를 이겨야죠)
이 세 가지는, 모든 계층의 성도들이 경험해야 될 영적 성장의 세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호칭의 변화에는 분명히 영적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처음 믿고 변화되므로 죄사함 경험하는 그런 경험이 있고
그다음에 아버지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경험이 있죠. 그것은 분명히 성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장한 사람은, 죄사함의 은혜는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요? 그런 것은 아니죠.
이것은 하나의 영적 생활에서 경험하고, 함께 성장해야 될 세 영역임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령별, 호칭 별로 설명함으로써 우리에게 '성장'이라는 그런 메시지는 주지만
그러나 3개의 각기 다른 성장 단계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죠.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될 세 가지 영역이 무엇인가요?
▲1. 첫째는 자녀로서의 영적 성장 - 죄용서의 은혜
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4a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모든 성도들이, 연령이 어떻든, 어떤 직분으로 섬기든지 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라는 말은, 영적성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봉사하다 보면, 특히 저희 같은 목사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이 놓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장' 개념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일'에만 열심내며 지내는 거죠.
자녀로서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용서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목사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은혜이죠.
여러분 죄를 범해서 이 사회로부터 때로는 버림 받은 사람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부모의 품 아닙니까.
자녀는 죄를 지어도, 부모 앞에서는 당당해요. 그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부모는 나를 당연히 용서하실 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피하고, 또 도망가려 하더라도 부모 앞에서는 용납과 용서의 기대를 갖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눅15장에서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달려나가 그를 끌어안고 맞이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부모가 살아계신데, 재산의 절반을 받아가지고 나가서, 외국에 가서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달려나가서, 그 아들을 맞이해 주고, 감싸주지 않았다면, 그 아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돌에 맞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먼저 뛰어가, 아들을 맞이해 준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죠!
우리가 믿음 생활, 교회 생활에 익숙하다 보면 어느 한 순간에 우리가 잃어버리는 게 있어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걸 잊어버려요. 그리고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 이라는 걸 잊어버려요.
여러분 '죄 사함의 교리'를, 기초양육 단계, 신앙의 초보 단계에서만 얻는 지식으로만 여기면, 그때부터 영적 성장은 멈추는 겁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계속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는 은혜를 누려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죄용서의 은혜는, 초신자 때 단 한번 누리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청년, 장년, 아버지가 되었을 때도 계속 누려야 하는..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이지만, 용서 받은 의인인 거죠. 우리가 죄가 없어서 의인이 된 게 아니죠.
끊임없이 우리가 죄책감에 사로잡히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죄용서 받은 죄인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엄청난 죄가 여전히 득실거린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날마다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죄의 용서를 날마다 누리는, 그 은혜 안에, 그 감격 안에 날마다 거하는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내가 오늘날 영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가를 테스트해 보려면 '내가 하나님의 <아이, 자녀>로서, 죄용서의 은혜를 오늘도 누리고 있는가?' 즉 '회개하고 있는가?' 이것을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회개와 죄용서는, 영적 초보단계에서 '거쳐서 지나가는' 단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나는 큐티학교를 20년 전에 졸업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큐티는 기초양육 단계니까, 나는 끝냈거든!' 이게 아니죠. 큐티가 일평생, 날마다 더 깊어져야 되는 거죠.
▲2. 두 번째는 아버지로서 영적 성장인데,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14절에도 같은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죠.
육체의 나이와, 영적인 나이가 병행하기도 합니다. 대개는 그렇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아직도 영적 어린 자녀 수준에 머무는 분이 있고 젊은 나이지만, 영적 아버지로서의 영적 성장에 이른 젊은이들도 있죠. 또한, 나이가 들수록 영적으로 퇴보하는 신자도 있죠.
△요셉이 다른 형제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어요. 창37:3절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우리말 번역에서는 '느즈막히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편애했다'고 해석하지만, he was the son of his old age
스펄전 목사님의 책을 읽다 보니까, '그건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라고 했어요.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아들-원로이므로' 입니다. *키 벤-자켄
무슨 말이나면, 히브리어에는 형용사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형용사적 표현을 강조할때는 명사 두 개를 겹쳐 씁니다.
'당신은 정의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원어로는 '정의-아들' 이렇게 명사를 겹쳐쓰죠.
본문에서 '아들-원로(노년)' 이렇게 겹쳐 쓴 것입니다. 그러니 '노년의 아들' .. 이렇게 노년에 얻은 아들로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대로 직역하면 '성숙한 아들, 원로같은 아들'이 되는 것이죠.
요셉은 어려서부터, 성령 안에서 그가 '아비의 마음'을 가진 자녀라는 거죠. '너는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생각만 하니?'
상상하자면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죠. 행37:4
부모의 마음을, 부모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부모가 해야 할 일을, 같이하는 자녀 ... 그것이 바로 자녀의 성숙입니다.
영적성장 이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
즉 다른 영혼을 품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그런 자녀들... 그런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지금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를 살피는 중입니다.
영적인 아버지란 어떤 사람들인가?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 설교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에 더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안타까워 했죠.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선생들은 많은데, 아비는 많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은데
한 영혼을 낳고, 그 영혼을 사랑과 인내로 양육하는 영적 아비들이 적음을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어려움도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은 많은데 아비가 부족한 거예요.
아비가 많은 교회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책임지고 양육하기 때문에 사생아가 없습니다. 버려진 자녀들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돌봄을 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라갑니다.
선생은 많지만, 아비가 없는 곳에는 옳고 그름은 잘 따집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을 시키는 일에는 부족합니다.
선생은 많지만, 아비가 적은 시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일대일양육을 통해서 이 아비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비의 마음을 품어서, 우리가 더욱더 성장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은 '태초부터' 나타났습니다. 역사의 순간순간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 마음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영적 성장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세 번째는 청년으로서 영적성장입니다.
13b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b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청년의 특징은 힘이 세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의 강함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강함을 의미합니다.
청년이 실수가 많고, 잘못 행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기 때문이죠. 마치 삼손의 강함과 같죠. 그때문에 그는 오히려 타락했습니다.
△이것은 '은혜 안에서의 강함, 약함 속에서의 강함'입니다.
사도바울도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되기 때문이라'
오히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환경의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강함인 것입니다.
나의 육체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강함,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대로 '내 아들아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2:1
이건 오뚜기 같은 신앙인을 의미하죠. 오뚜기는 넘어뜨려도 바로 바로 일어나죠.
때로 쓰러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왜요? 은혜가 나를 강하게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죠.
△이 강함은 또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강함' 입니다. 수1장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이것은 육체적인 용맹을 뜻하지 않죠.
이 '강함'은 그 뒤에 설명됩니다. '네가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형통하리라'
그러므로 '강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 순종하는 '강함'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도 14b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실 때, 너희가 강하게 됨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이기게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14 평소에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며칠 반짝 성경 읽었다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여, 악한 자를 이기는 '청년'이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을 말씀으로 이기셨을 때도. 평소에 늘 말씀을 가까이 하신 실력이, 거기서 표출된 것이죠. 어쩌다가 '찍어서 맞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례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오픈북 시험'을 볼 때도 있었잖아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대를 엄청하고 시험장에 갔습니다. 공부 안 하고, 오픈 북이니, 책을 열고 찾아서 시험 답안을 쓰려고 했죠.
그런데 답이 뭘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찾아서 쓰죠. 오픈북 시험도, 책으로 평소에 공부한 사람이나 찾아서 쓰지, 책을 열어보지 않은 학생은, 답이 어디에 있는지 못 찾아서 못 쓰는 거예요.
지금 학교시험 얘기가 아니라, 마귀의 시험을 얘기하는 거죠. 어떤 마귀의 시험이 닥쳤을 때, 그 시험을 말씀으로 능히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을 평소에 많이 알고 있어야 되고, 많이 묵상하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좀 웃긴 예를 들자면, 성경에 '말씀의 검'이 나오죠. 그런데 악한 자 마귀가 앞에 딱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검을 꺼내려는데, 검이 칼집에서 빠지지 않는 거예요. 평소에 칼을 빼서 쓰는 연습을 해 본 적도 없고, 또 워낙 칼을 안 쓰다보니.. 녹이 슬어서 안 빼질 수도 있죠.
또 어떤 사람은, 칼을 어디에 뒀는지 찾지 못해서.. 악한 자가 나타났는데, 즉시 그 검을 쓸 수 없는 경우도 있죠.
14절에, '청년'이란, 말씀으로 악한 자를 이기는 사람인데, 평소에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사람에게나 가능하다는 거죠. 평소에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영적 "어린아이"에서 더 나아가 말씀으로 악한 자를 이기는 "청년"이 되고 더 나아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성숙한 아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며 또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우리를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적 성장을 날마다 이루어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가는
범사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날마다 깊이 감격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날마다 깨닫는.. 그리고 악한자를 말씀하는 이기는 승리의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주1) 12절의 자녀는 헬라어로 테크니온 이고 14절의 아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 인데, 둘은 의미상 큰 차이가 없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