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2: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사람들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삶 속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거죠.
지금 사도요한이 본서를 써서, 모르는 것을 설명해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본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지만, 진리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것이죠.
사도요한이, 본 서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려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곧 진리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빛' 적그리스도들이 말하는 '인성이 없으신 분'이 아니라는 거죠.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미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해서 이렇게 말했죠.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바로 그 진리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요한은 기억하고 기록했죠. 우리가 믿는 진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 어떤 종교에도 그 믿음의 중심에 살아계신, 인격이신 분이 존재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주1)
사도요한은 이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사도요한이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대상은 사실 몰라서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믿는다고 하면서, 믿는 척하면서 예수님의 교리를 교묘하게 변형시켜 거짓말하는 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까지 들어와,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나간 사람들이라' :19
교회 안에 들어와 교묘하게 거짓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 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들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C. S. 루이스의 뛰어난 작품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주2)
△여러분, 사도요한 시대에, 가장 악영향을 끼쳤던 거짓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인간일 수 없다는 거죠.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그 당시에 그리스도의 대적자들, 적그리스도 라고 표현된 사람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신성은 인정하지만 예수님이 가진 인성은 인정할 수 없다... *초기 영지주의 그것이 그 당시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역사의 흐름을 알면, 우리가 거짓된 교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요.
사도요한 시대, 이 글이 쓰여져 당시에 적그리스도들, 즉 교회의 믿음을 해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요, 잘 들어보세요. 그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써 에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훼방하고 대적했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당시에는 사도요한처럼, 예수님의 기적과 교훈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던 거죠.
신문에도 보면은 '과거 6.25 전쟁에서 뭐 백마고지 전투, 무슨 전투 이런 기사를 가끔 회고해서 쓰잖아요. 그 기사를 잘못 쓰면 난리납니다. 왜요? 생존자들이 계시잖아요.
'백마고지 전투가 거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주장을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소리가 막 여기저기서 나올 거예요. 왜요? 생존자들 있잖아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했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놀라운 표적들은 다 사실이었다. 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기에.
그만큼 확실한, 표적과 이적의 목격자들이 그 당시에 존재했던 거예요.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공격함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왜냐면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신성과 인성을 모두 100% 겸하여 가지고 있어야 되시거든요.
신성만 가지고 있으면, 우리 인류의 대표자로서, 우리 죄를 대속할 수 없죠. 인류의 대표자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오늘 날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은 정반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주3)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인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습니다. -잠시 인간의 모습을 취했을 뿐이다. -잠시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런 교묘한 주장으로 예수님의 사람되심을, 성육신을 부인함으로써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신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했죠.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그 성육신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살아계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기초적인 것 같지만 이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리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이 진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에, 단 한 가지라도 제해 버린다면 그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진리를 굳게 믿고,
적그리스도의 무리를 이기며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요?
▲1.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간직하라
2:24~25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우리말성경) 만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여러분 안에 거한다면 여러분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2:25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인데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간직하라(거하게 하라)' 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굳게 믿는다' 는 것입니다. '날마다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간직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약속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4)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을 진짜 잘 간직하고 있는가/ 아닌가는 죽음 앞에 섰을 때 결정나는 거예요. 사실 '죽음' 이라는 그 실존 앞에서, 우리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영생)에 대한 약속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삶과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간직하며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여러 신앙강좌들을 개설 할 때 제일 인기 없는 강좌가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기" 입니다. 이런 강좌는 매번 폐쇄됩니다. 사람들이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서.
여러분, 죽음은 우리가 멀리하고 피해야 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린 자로 '사망한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담대한 외침으로 우리가 죽음을 대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부족하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내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래서 오신 분이 성령이신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기름 부어주시는 것이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 (이단적 가르침이 성행하던 시대에, 그들이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진리를 확실히 믿게 됩니다
요일2: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어 주심, 이것은 성령님을 의미하죠.
기름부으심은 헬라어로 크리스마 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카리스마 이죠.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크리스토스'이죠.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죠.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기름부음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크리스마, 기름부으심을 주시는 크리스토스(그리스도)이신 거예요.
그 기름 부으심은 과거 구약시대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들을 (감람)기름을 부었습니다. 이것은 '구별'을 의미하죠.
기름부음은 세상과 구별된 존재로, 세상에 죽음이 넘어설 수 없는 보호와 방어와 능력과 함께하심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기름 부어주시는 성령의 임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이제는 '내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예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는 차원에서 머무르면.. 항상 연약합니다.
왜요? 믿음의 출발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름 부어주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믿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확신, 훨씬 더 큰 능력이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 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체험한 성도들은, 남다른 확신이 있습니다. 남다른 구별됨이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기름부음) 로부터 카리스마(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카리스마가 없는 것은, 크리스마 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참고로, 카리스마는 세상에서 어떤 강력한 리더십을 뜻하는데, 와전된 거죠. 원래 카리스마는 성령의 은사,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에요. 그 중에 하나로 '뛰어난 리더십'도 될 수 있겠죠. 다만 독재적 리더십은 아니죠)
때로는 온유하고,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오래참음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하심... 그런데 그 카리스마가 나타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게 뭡니까?
내가 믿으려고 믿으려고 해도, 때로는 죽음 앞에서 두려울 수밖에 없는.. 그건 우리에게 당연한 거예요.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우리의 믿음에서 출발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체 생산X 믿음은 나의 노력으로만 도달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우리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기름부으심을 우리가 체험 할 때 하늘로부터 늘 확신과 평강과 은혜가 우리가운데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에 관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성령님' 그러면 어떤 역사, 은사... 다 중요하죠.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님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무슨 내용을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이 처음 성령님을 소개할 때, 설명해 주신 내용입니다.
요16:12~13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 '너희에게 할 말이 참 많은데 너희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12
△저는 오랫동안 '예수님께서 좀 오래오래 사시지.. 왜 짧은 생애를 마치고 가셨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나타나셔서 TV방송에 출연하셔서 산상수훈 저자 직강으로, 전 세계에 방영해 주시면.. 이러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생길까?'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33년의 짧은 생을 사시고 돌아가셨을까? 차라리 더 후대에 오셨다면 어땠을까? 더 믿기 쉽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좋은 방도를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게 "성령님이 오시면" 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16:13
지금은 내가 너희에게 다 말해줘도.. 너희가 알아듣지 못한다. 다 보여주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그것도 아닐 겁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믿을 뿐만 아니라, 깨달을 뿐만 아니라 확신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2:27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제자들의 믿음보다도 그 이후에..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죠.
그런데 제자들이 순교한 것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임하신 직후에 순교 했어요.
순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가 아니라 예수님은 안 계시고, 성령님이 오시 이후였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이렇게 감동해서 말하죠. '너희가 예수님을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렇게 믿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정말 감격스럽다.' 이런 베드로의 감격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동행했지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 본 적도 없는, 자기가 예수님을 전해서 믿은 제자들을 보는데 처음부터 순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신과 비교가 되는 거죠.
나는 예수님의 직접 저자 강의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는데도 부인 했는데, 그런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예수님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이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기보다 더 믿음이 좋은 것을 본 거예요.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 이유는 뭘까요? 바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죠.
그분이 진리를 깨닫게 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게 하고 그것을 증거하게 하시는 역할! 바로 진리의 성령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뭐냐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진리를 깨닫게 하고, 역사를 분별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에 관한 모든 것들을 다 확실하게 해 주시는 분, 바로 그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셔야 돼요. 성령의 역사 중에 우리가 가장 사모해야 할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능력' 이것을 우리가 가장 사모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범죄하면.. 기름부음이 끊어지고, 그 결과 진리가 흐릿하게 돼죠. 제 David Wilkerson 영적 아들들 중에 한 명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의 아내가 제게 편지를 했습니다.
“목사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름부음이 사라졌습니다.
남편은 영적으로 죽었고, 성도들은 선교센터(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제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남편이 너무나 변해서 어떤 사람인지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이런 편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아내가 또 전화를 했습니다. 남편이 방안에서 혼자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보냅니다. 방문이 열려있어서 들여다보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스크린에 최악의 음란물이 떠있었습니다.
“당신 뭐하는 거에요?”라고 하니 그는 “나는 중독 되었어. 당신도 나와 함께 이런 것을 함께 보지 않으면 당신과 이혼 하겠어”라고 협박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전화했습니다. “와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세” 그는 제 집으로 와서 이틀을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중독이 되어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이틀 동안 애통해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이혼하고, 무당과 결혼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범죄하면 기름부음이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흐릿하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틀을 깨고, 저주를 자초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깨닫지 못하게 되는 거죠. 기름부음이 떠났을 때!
▲3. (이단적 가르침이 성행하던 시대에, 그들이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머무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2: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요한은 '거하다, 머무르다' 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죠. :28
요15장에서도 사도요한은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한다'
그 나무에 생명력이 가지를 통해 열매 맺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가 그 분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열매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영적 성숙의 단계를 설명합니다.
1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으라. 말씀을 간직하라 2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체험함으로써 더 확신에 거하라 3 항상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된다.
우리 영적생활을 목표는 바로 이겁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15:4~5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떠난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무익한 삶으로 스스로 여기게 된다는 거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항상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이 마지막 때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 적그리스도의 시대에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죠.
날마다 주님 안에 항상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2 예수님의 기름부으심을 체험하는 믿음에서 3 예수님과 연합한 믿음으로 점점점 우리 믿음이 성숙해 짐으로
날마다 우리 삶 속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화) 연평도에서 군목으로 일하는 목사님 한분이 배를 타고 육지로 출장을 나왔다가 토요일 부대로 들어가는데 파도가 너무 크게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배에 탄 모든 승객들이 심한 배멀미를 하게 되었습니다.
화장실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화장실에 먼저 다녀 온 친구가 화장실이 구토물로 가득차서 더러워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화장실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몇 번이고 토할 것 같은 심한 고통을 견디어 냈습니다.
이런 고된 경험을 하고 주일 날 설교 준비를 하는데 묵상한 말씀이 마15:11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15:11-20)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마음이 오물보다 수천 배 더 더러운 것으로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더러운 마음을 가진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 안에 어떻게 <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더러운 마음에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임이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던 그 때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를 품고 계셨고, 이렇게 더러운 우리 마음의 중심에 들어와 계셨다는 것입니다.
오물이 있는 화장실조차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오물보다 수천 배 더 더러운 나를 품고 이토록 더러운 내 마음에 거룩하신 주님이 들어오셨다니! (*기름부음은 걷힐 수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군목 목사님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가슴 깊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체험한 내가 이제 품지 못할 사람, 품지 못할 용서, 품지 못할 그 무엇이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라는 이 표어 속에는 이처럼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와 넘치는 사랑을 깨닫고 체험할 때 비로소 주님이 내 안에 주님 안에 거할 수가 있게 되고 내 마음 속에 주님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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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러분, 어떤 종교에도 그 믿음의 중심에 살아계신, 인격이신 분이 존재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계율)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종교 차원이 아닙니다. 일반 종교는 교주 창시자가 죽어도, 계율을 따라 살면서.. 유지됩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행하는 종교이고요, 유교는 공자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거죠. 그들이 다 죽어 없어져도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하신 말씀을, 우리가 살아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분으로 존재하시는 거예요. 그게 타종교와 근본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리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살아계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가 살아계신 부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죠. 유교가 살아계신 공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죠. 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그 종교의 이단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 기독교 이단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 관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는 종교의 차원을 뛰어넘는 거예요. 오늘도 여전히 살아계신 그 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진리로, 성령으로,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은 '예수께서 곧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라는 진리입니다.
사도요한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 진리를 대적하는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이다. 혹은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앤티 크리스토스
신약에서 사도요한만 단어를 썼죠. 여기서 '적 그리스도'라는 뜻은 -예수님 인 척하다, 그리스도인 척하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려고 한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며, 훼방한다 ... 이런 여러 의미가 있죠. (*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와는 다름)
주2) C S 루이스의 뛰어난 작품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사단의 입장에서 교회를 어떻게 훼방할 것인가? 사단의 입장에서 어떻게 믿는 이들은 무너뜨릴 것인가? 가 잘 나타나 있죠.
그래서 그 믿는 이들의 속성을 설명하면서, 그런 성도의 약점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공격할 수 있는지 교회 속에 들어가 어떻게 믿음에서 떠나게 해야 할지.. 그 책에 잘 나타나 있죠.
거기 보면, 사탄의 가장 핵심적인 공격의 내용이 결국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교회는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참여하고, 열심히 무엇이든지 일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단 한 가지 이것 만은 확실히 믿지 못하게 하라는 거죠. 그게 뭡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그것과 별로 상관없이 열심히 교회에 예배에도 참여하고, 열심히 무엇이든지 하는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고백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가 많은 일을 하고, 봉사도 하고, 뭔가 열심히 모이고 교제도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고백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거죠.
우리가 우리가 모일 때마다 함께 찬양하는 고백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나아가는 고백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주3) 왜냐면 오늘 시대는 다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신학자들의 글을 보면, 교묘하게 이런 단어를 씁니다. 예수님에게서 기적적인 요소, 신비적인 요소는 다 빼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만을 부각시킵니다.
굉장히 멋있는 말 같죠. 내가 그냥 신앙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영역에서만 그리스도가 되시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가진 건 아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슈바이처죠. 그는 훌륭한 인도주의적인 봉사는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주4) 예수님을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죠.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그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분을, 어떻게 단순히 한 종교 지도자로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인생은 이렇게 살아라. 인생을 선하게 살려면, 인생을 위대하게 살려면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는 교훈을 주는 훌륭한 성인으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중에 한 분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로 알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예수님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약속하신 것은, 더 나은 진보적 삶을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 생명' 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