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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1:5~10 사귐의 조건

LNCK 2022. 12. 18. 21:46

2015.06.14 사귐의 조건 (요일 1:5~10) - YouTube

 

◈사귐의 조건           요일1:5~10             2015.06.14.정리


▲믿음을 다른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귐'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요한일서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믿음은 사귐 (fellowship, 코이노니아)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과 사귐, 또한 다른 성도들과의 사귐입니다. 

바로 '십자가'가 그것 을 보여 주는 심벌이죠. 
하나님과 수직적 사귐과, 다른 성도들과 수평적 사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사귐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전혀 사귐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지만, 함께 믿는 성도들과의 사귐이 전혀 없다면 
'나는 과연 믿음 가운데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이 거룩한 사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그 거룩한 하나님과의 사귐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성도들이 있었다는 거죠.

예수님을 믿지만, 자신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걸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로 더불어 사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헬라어로 사귐은 '코이노니아'인데, *fellowship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동행'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동료, 파트너'가 된다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자꾸 동역하려고 해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겠다' 라는 마음이 들면 
먼저 조심하십시오. 생각나는 대로 행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 동행해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하나님과 동반자의 발걸음을 먼저 걷지 않고는
대부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과 자신이 무엇인가 동역한다고 할 때 
오히려 잘못된 길로 빠져버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로 결과지어질 때가 더 많다는 것이죠. 

하나님과 충분한 동반자, 동행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동역은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말로는 하나님과 사귀고 싶다 말은 하면서 
정말 진실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계3:20절에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때로 예수님을 전도해서, 새신자가 영접하도록 전도할 때 
사용되지만, 원래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즉 라오디게아 성도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믿음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왜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느냐?
차거나 뜨겁다는 것은, 정체성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그 믿는 것인지/안 믿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 미지근한 신앙에 머무는 것인가요? 

그것은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찾아오셔서 
그와 더불어 교제 하기 원하시나, 그가 문을 열지 않고 막아놓기 때문이죠.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도 문을 닫아 놓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함께 먹는다'는 교제, 사귐을 의미합니다. 
영어 컴패니언 (동반자)도 '빵을 함께 먹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함께 먹으리라' .. 이것은 교제, 사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성도와 가지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왜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미지근한 가운데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도이지만, 하나님과 사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라오디게아 일부 성도들이 자기 마음 문을 열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였던 거죠.

왜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았을까요? 
두려워서 그런 거죠.

사실 우리가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을까봐 두려운 거 보다도, 
진짜 나타나실까봐 두려운 거예요. 
'하나님이 정말 우리 집에 나타나시면.. 내가 얼마나 불편할까?' 염려하죠. 

어떤 분은 믿음이 뜨거워질 까봐 염려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있죠.
성령충만 받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내가 성령충만 받으면 이상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계속 마음 문을 닫고 있는 거예요. 

기도하다가도,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것 같으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 버려요.

충만하게 임재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성령이 임하시려고 하면, 바로 직전에 기도하다가 일어나서 나가 버립니다.
그렇게 마음 문을 닫아놓는 거죠.

일부 성도는, 살아계셔서 내가 깊이 만나는 하나님보다는 
성경책 안에 가두어진 하나님만 만나길 원해요. 

내가 급하고 원할 때는, 주님을 찾아서 만나고, 
보통 때는 주님을 성경책 안에 가두어 놓죠.
우리는 하나님을,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원할 때 만나려 하는 거죠. 

우리의 친구들 중에서 정말 만나기 싫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이 있을 때에만 연락하는 사람입니다. 

일이 있으나 없으나, 늘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사귈 때 
진정한 우정이 싹트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내가 무엇인가 구할 것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관계가 아니라 
구할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만나는 것 자체가 좋은 사람..

진정한 우정은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지,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만나는 것이 절대 아니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 이전에,
하나님을 만나면, 그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서 만나는 것이죠.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 간절한 우리의  소원이 될 때,
우리의 사귐은 깊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사귐을 두려워 하십니까?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큰 요구를 할까봐,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떠나자고 할까 봐 
우리는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정말 만나는 것을 기피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사귐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두 번째 이유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고 있는 3가지 거짓말을 
우리에게 분석해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거짓말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둠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1:6

요일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요한은 '거짓말'이라는 충격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말로써 하는 고백과, 행함으로 나타나는 실제가 다르다는 것.. 그것은 거짓말
아라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입술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 그렇게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내 인생에 왕은 나다!' 하는 거죠.

얼마나 우리의 입술의 고백과, 우리의 행동의 삶이 다른지는, 
우리 자신이 알고 있고, 하나님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경험한 것 이상으로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요한의 시대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그들의 삶을 보면 '어둠가운데 하고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죠.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5절)는 말씀을 전제로 하여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적 사상에 빠져 물질 세계를 악한 것으로 배척함으로써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죠. 
그로 인해 그들의 행위는 방종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사귐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한 것입니다. 

성도들로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악된 삶을 상징하는 어둠과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 때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빛 가운데의 삶을 동반하게 되어 있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과 전혀 관계 없는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사실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하고, 자주 하게 되는 사람들이 
저희 같은 설교자들입니다. 

늘 설교하고 늘 말씀을 가르치면서, 그 말씀대로 일일이 살 지는 못한다면 
거짓말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거죠. 

우리 입술로 고백하는 고백과, 우리의 삶으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가 난다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기보다는 
이것을 '거짓말'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삶으로는 사귐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을 못하는 까닭은 
바로 자기 위선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거짓말은,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기만(스스로 속음)이죠.     1:8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8절에 '죄 없다'는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나는 평소에 죄를 짓지 않고 산다' 라는 뜻이죠.

교인들 중에도, 이렇게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자기는 평균 이상의 선한 사람으로..' 스스로 인식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죠.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이나 율법사 같은 사람이죠)
 
어느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죄가 아니라, 단순한 실수이거나,
인간의 발달에 따르는 고통을 뿐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나는 죄 없다' 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본절에서 사도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 들입니다. 

'죄없다 하면' ..  죄가 자신들에게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죄가 부재함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스스로를 기만하며 속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께서 자기 속에 거하실 때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 때문이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회개할 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됩니다.


3) 세 번째 거짓말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10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요한이 염두에 둔 영지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이 6절과, 8절에 이어 
10절에 세 번째로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인간 전체가 범죄하였으며 
죄에 신음하고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스스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행위이죠. 

한편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선포된 말씀과 구약성경의 모든 증거가 
이들 이단적 경향을 가진 자들에게 수용될 여지가 없음을 시사합니다.

8절과 10절은 비슷한 내용이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죄라도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구원 받기 어려운 사람은 '거짓된 마음을 가진 사람' 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죠.
    '자는 척 하는 아이는 깨울 수가 없다'

    자고 있으면 깨우는데, 
    자는 척 하니까.. 깨울 수가 없는 거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은.. 변화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 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경험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구원받은 척 하면
해결 방법이 없는 겁니다. 

'나는 구원을 아직 모릅니다' 그러면, 구원의 대상, 전도의 대상이라도 되는데 
구원 받은 척하면, 전도 대상자에서 누락되잖아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핵심은 정직입니다. 
자기 위선, 자기 기만, 자기 만족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사귐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증언한 사도요한

사도요한이 요일1:4~5절에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을 이렇게 기록했어요.

1:4~5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를 분명히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듣고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여러분 모든 철학적인 사색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을 우주의 중심이 두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연구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연구해서는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들여다 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래서 사도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요일1장을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일서1장에서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1:5

1:1~4절은, 서론이고, 인삿말이죠.
실제적은 시작은 1:5절 '하나님의 빛이시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과 같은 맥락으로 시작한다는 뜻이죠.

사도요한 만큼, 하나님의 본성을 간결하게 
영적인 언어로 그 정의를 내린 사도는 없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표현했다면, 즉 '사역'에 초점을 두었다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본성'을 설명했어요.  *본성 vs 사역   

그래서 요4장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했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요일1장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1:5

또 요한일서 후반부인 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은 빛이시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렇게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성령 안에서 그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관한 정의'를 분명하게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요한이, 자기 서신서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증거)으로부터 시작할 때'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증거했죠.
여기서 '빛'은 진리를 의미하고, 또한 거룩을 의미합니다.

'너희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했는데,  1:4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설명합니다.   1:5

우리가 생각하기엔 '사랑의 하나님'이 먼저 나와야 될 것 같은데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나중에 뒤에 나옵니다. 4:8, 16

요한1서 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두 개의 단어로 설명했습다. 
하나는 빛이고, 하나는 사랑입니다. 

요한1서는, 빛이신 하나님을, 사랑이신 하나님보다 더 먼저 설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질 때 
어떤 하나님을 먼저 알고,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걸까요?

빛이신 하나님, 다른 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돼요. 
'아니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왜 사랑이신 하나님을 먼저 강조 안 하고 
빛이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까?' 

먼저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 우리의 실존,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사랑이신 하나님을 (빛이신 하나님보다) 먼저 만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거예요.

<빛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어둠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회개할 수 밖에 없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가면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빛이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순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로마서도 이런 순서로 기록되어 있죠.
롬1~3장까지는,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있는 인간의 죄악들을 고발하죠.

사랑이신 하나님을 먼저 설명하지 않고, 
공의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로마서는 먼저 설명하고 있죠. 왜요?

거룩하신 (빛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우리가 십자가가 필요한 존재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죠.

그때 우리를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죠.

만일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먼저 서면 
우리는 계속해서 거짓말하고,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나는 죄없다.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서, 
그렇게 우리 자신의 상태를 왜곡하고 포장하고 덮어버림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진리)이시라' 이렇게 먼저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빛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 요구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백입니다. *건페션 confession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이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실 때, 빛을 비춰주실 때,
나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어둠속에 숨겨진 것들을 들추어 냅니다. 

그 들춰진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기를 거스르는 것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1:10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어서 요구되는 절대 조건, 
어쩌면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백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죄의 고백입니다. 

내가 내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죠.
죄를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내 안에 있는 죄와 죄성을 더욱 민감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입니다. 빛되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때 
우리가 우리 마음의 커튼을 견고하게 닫고, 문을 닫고, 
그 빛되신 하나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때 
우리는 계속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되요. 

문을 열어도 활짝 다 여는 것과, 조금만 여는 것은 다르죠.
여러분, 동쪽 창문에 아침에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면, 
빛이 비춰지는 그 일정 부분에서만, 마룻바닥의 먼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커튼을 젖히고 활짝 열면, 
온 마루바닥에 먼지가 다 드러나게 되죠.

이렇게 우리 안에 마음 문을 활짝 열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온전히 발견하여 회개하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이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는 거죠.

'믿음의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더 경건해졌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더 착한 일을 많이 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있는 죄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사람이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악한 인간은
자기가 그리 좋은 사람은 못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기가 늘 옳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우리가 선해 진다는 것은
내 안에 엄청난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부터 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 앞에서 빛의 비췸을 받고, 자기 죄를 자백하라'고
지금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고전인 <참회록>을 쓴 어거스틴, 
그가 이 책을 쓴 배경 중에 하나는, 

그가 AD 396년에 히포(북아프리카의 도시)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팍에서 그이 과거를 들추며 어거스틴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거스틴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그의 과거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했느냐, 
마니교에 빠진 적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저 사람은 자격 없다' 그렇게 비판하기 시작했죠.

바로 그 시점입니다. 감독이 된 2년 후에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참회록>을 저술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변호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참회록을 썼습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9장까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회심할 때까지 
자신이 지나온 삶의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글을 씁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을 성자로 만들게 했습니다. 우리는 성 어거스틴 이라 부르죠.

사람들이 '당신은 이렇게 나쁜 사람이에요' 라고 지적하니까 
그는 '아니요. 나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인입니다' 
이를 테면 그런 식으로 말한 거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은밀한 죄까지
다 고백해서 그 책에 쓴 것입니다. 대단한 영성입니다. 

△바울의 일생을 통털어 보면, 그는 자신이 점점 더 악한 사람이라고 고백하죠.
-고전15장에 보면 '나는 사도들 가운데 지극히 가장 작은 자다. 
 그래서 나는 사도로 불림 받기에도 합당치 않다'

-딤후1: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럼 바울이 점점 더 나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한 게 아니죠. 
그는 더 선한 사람이 되고, 더 의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빛되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까이 나아갈수록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죠.

한경직 목사님은 종교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받았을 때 
얼마나 자신이 과거에 잘못된 일(신사참배) 했는지를 
회개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자랑이 아니라요.

박윤선 목사님은, 80세 되는 자기 생일에서 
후배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를 축복하는 자리에서 이런 고백을 하셨답니다. 
'여러분 저를 그렇게 높이지 마십시오. 저는 80년 묵은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들이, 진정한 빛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나타나는 그런 진정한 모습이죠. 

점점 점점 자신의 악함을, 자신의 부패한 본성을 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귐을 더 가까이, 더 친밀히 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이죠.

'이제 나는 회개했으니 고백할 게 없고, 자백할 게 없고
나는 의롭고, 나는 하나님과 가깝고...' 

이렇게 자기 위선과 만족과 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회개할 것이 많아지는.. 점점 고백할 것이 깊어지는 사람!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갈 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맺은 약속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9

그 약속에 신실하셔서, 우리를 날마다 용서하시고 
그리고 죄의 오렴으로부터도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죠. 

단 한 번의 자백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고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 회개한 후에도, 끊임없는.. 반복된.. 계속적인 자백으로 
점점 더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목욕한 후에도 발은 계속 씻어야죠.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귐의 조건은 단 한 가지!
빛이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백하는 것, 
정직한 자백!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깊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이러한 자백을 통해, 하나님이 용서와 정결함을 체험하고 
더욱 더 하나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기쁨, 생명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빛이신 하나님, 문을 열고 받아들이며 
날마다 자백하며, 고백하며, 회개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기 위선, 자만, 자기 기만에 빠져, 자기 만족에 빠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나, 거짓말하는 저희들 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진실한 고백과 사귐으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