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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15

LNCK 2022. 12. 19. 10:38

[Ep 15]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 좋습네다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15           행20:32            지난 회 보기

◑제5장. 기다려라 북조선아 우리가 간다
북한 선교의 앞이 훤히 보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처남 나태호 목사가 다시 서안의 우리 사역장을 방문하였다. 
3기 사역자들과 새롭게 시작하는 4기 사역장 10곳을 돌아보며 
북한 형제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들을 보며 많은 도전을 받고, 앞으로 북한선교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나목사를 복호선생 사역장으로 안내하여 복호 선생을 돕게 하였다. 

온 사역장을 기쁨의 넘치게 했던 소광선생 일도 있었지만 *북송 후 극적 재탈북  
가끔씩 불안한 소식도 들렸다. 

김순종 선생 사역장 형제들이, 토요일에 서안 중심 광장에 놀러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조선 말로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 이 자식들아, 너희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빨리 서안에서  도망해라 
안 그러면 너희들 다 잡힌다.' 

그 사람은 이 말만 하고, 곧장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와글대는 중국인들 속에서,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들은 형제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또한 '김광철 선생' 사역장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후에 가룟유다로 판명  
나타나서 사역장을 감시하다가 돌아가곤 한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새삼 우리가 서안에서 사역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기 사역 말인 2000년초 부터 시작해서, 
1년 넘게 이곳 서안 곳에서만 줄곧 사역했던 것이다. 

너무 많은 사역장이 서안에 밀집해 있어,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 같아서  
권희선생이 총괄하던 4개 사역장과, 
용섭선생 사역장을 정주로 이사시키기로 했다.  *정저우

하지만 4인조 복면강도가 사역장들 주변에 있던 은행을 습격하여 
4백만 위안을 털어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해 
공무원들이 범인을 잡기 위해, 그 주변 일대 아파트를 샅샅이 조사하는 바람에 
급히 서안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안전을 위해, 한 도시에서 길어야 1년 이상 사역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지만, 
3기 사역 때부터는 사역장 수도 많아지고 인원도 많아지다 보니 
한 번 이사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사에 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량으로 이동하면 
기차에서 체포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상한 소문들을 접한 이상, 빨리 이곳 서안을 떠나야했다. 

우리 사역장이 총 인원 130명을 넘어서는 대규모 조직 이었으니 
북한 정부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사해야 했지만, 그만한 큰 돈이 없었다. 
사역 대기 중인 3기 선생 사역자들과 
새로 세워진 4기 사역장 들까지 
전체 사역장이 이사하려면, 못 해도 족히 1천만 원은 있어야 했다. 

나는 소록도 북성교회 성도님들께 기도 부탁을 드리고 
가족들과, 사역장 선생들과 함께, 이사비용을 위해 기도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북한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이 사역을 기뻐하시는 주님께서 
필요한 물질을 주시지 않으실 이유가 없었다. 

역시 기도를 시작하고 이틀 후, S시에 계시는 국집사님 으로부터 
우리 사역장에 헌금하려고 1만 달러를 내 통장으로 입금했다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S시 한인교회에서도, 5백만 원을 우리 사역장에 헌금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곧 송금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다음 날인 2001년 6월 11일 저녁, 사역비 지급과 이사에 관한 논의를 위해 
선생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특별히 이번에는, 이제까지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말 없이 사역을 잘 이끌어 온 선생들을 위로도 할 겸 
시내의 한 호텔에 모이게 했다. 

마침 연길에 있던 용섭 선생도, 학생들 12명을 데리고 
그날 서안에 도착한 참이라, 이 자리에 함께하였다. 

3기 사역장 선생들로는 강규홍, 정용철, 김순종 선생이 왔고 
4기 사역장 선생들로는 신소광, 신재록, 이육, 이선장, 신수재, 김기철, 조복화 
그리고 조선족 김광철 선생이 참석했다. 

여기서 성근선생과 용섭선생과 나까지 모두 14명이 
크고 둥그런 상에 둘러 앉았다. 나는 곧 700위안짜리 식사를 주문했다. 
우리 돈으로 하면 10만원이 조금 넘는 식사일 뿐인데 
선생들은 너무너무 좋아하면서, 모두들 이렇게 화려하고 멋있는 식사를 
해 보기는 일생에 처음이라고 했다. 

'우와~ 선교사님, 이런 데는 처음 들어 옴다. 
너무 화려해서 몸이 다 으스스 떨립니다.' 

'야~ 김정일이도 아마 이런 데는 못 들어와 봤을 겁니다. 
선교사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이런 데를 다 들어와 봄다.' 

특히 정선생의 말을 듣고,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
'선교사님, 난 이제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구원받고, 두 아이 이곳에서 학교 공부 잘 하고 
이렇게 호화로운 식당에서 밥을 먹어 보니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의 규모있는 일반 식당 정도였지만 
이들에게는 이렇게 큰 충격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또 눈물이 났다. 

우리가 앉은 방엔, 상이 두 개 놓여 있는 조그만 연회실로 
방 안에는 우리 일행들 밖에 없어, 식사를 하며 회의를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 전에, 사역장 이사 건에 대해 의논하였다. 
'우선 어디로 이사를 갈 것인가?'에 대해 
광동성 광주로 가자는 선생들도 있었고 
절강성 황주로 가자는 선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호북성의 무한과 호남성의 장사가 
내륙이면서 성의 수도여서, 여러 면에서 아주 적합하겠다고 의견이 모아져 
그 곳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다음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이 많은 사람이 이동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미 사역을 시작한 4기 사역장들이 먼저 떠나고 
이들의 이동이 끝나면, 3기 사역장들이 떠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굴직굴직한 문제들에 대해, 의논이 잘 마무리 되어 즐거워하며 
식사기도를 마치고 다같이 눈을 떴을 때였다. 

갑자기 우리가 있는 방문이 벌컥 열리며 
중무장한 공안 30여 명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서안 사건    2001.06.11.

'꼼짝 마라, 다 꼼짝 마라!' 
너무도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들 앞에서, 우리는 넋을 잃었다. 

완전 무장을 한 공안 3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우리를, 발로 마구 차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선생들의 비명소리에, 방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공안들은 우리들의 웃통을 벗기더니, 벗긴 옷으로 머리를 빙빙 돌려감고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한 사람당 3명의 공안이, 소경이 되어버린 우리를 붙들고 
짐승처럼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우리가 있던 방 2층 복도에서부터 
1층에 대기한 미니버스까지 끌려가는 동안 
무장군인 100여 명이 통로 좌우를 지키고 있었다. 

공안들은 1층으로 끌어낸 우리를, 차에 짐짝처럼 던져 넣어
사람 위에 사람을 포개 실었다. 
밑에 깔린 사람이 숨이 막혀 머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몽둥이와 전기 곤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공안들의 미니버스에 실려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며 눈앞이 캄캄했다. 
'하나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어떻든 감사하겠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러나 감사하면서 한참을 가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안시 군부대의 차고였다. 

공안들은 흙바닥으로 된 차고에 우리들을 와르르 내려 놓고 
입구를 군인들과 함께 지켜 섰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처박고 엉덩이를 치켜드는 자세로 
벽을 따라 빙 돌려세웠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인정사정없는 매질이 날아왔다. 
그렇게 1시간 가량 지나니,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리면서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몇몇 선생들은 고통에 신음하다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쓰러져버렸다. 
그러자 공안들은, 쓰러진 선생들을 다시 원래 자세로 일어나게 하려고 
무자비하게 몽둥이질을 했다. 

그런 중에 나는, 계속 하나님께 감사하며 
옆에 있는 선생님들에게도 감사하자고 격려했다. 

잠시 후 복화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나태효 목사가 잡혀왔다. 
모두들 이미 무지막지하게 구타를 당해, 여러 곳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나목사는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곤란으로 실신해 쓰러졌다. 
한 30분 쯤 지나자, 우리가 갇혀 있는 차고로, 또 한 대의 트럭이 들이닥쳤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꽁꽁묶인 광철선생 사역장 형제들이 짐짝처럼 내려졌다. 

어떤 학생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엉엉 울며 끌어내려졌다. 
광철선생이 제일 늦게 차에서 내려, 차고로 들어왔다.  *조선족, 변절자

그는 들어오자마자,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을 건넸다. 
'선생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감사하세요. 우리 기도합시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인들은 광철선생을 발로 차고 밟고 하며 
마구잡이로 매타작을 했다. 나는 긴장이 되어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들이 잡혀 오고 2시간 가량 지나자 
공안들은 원산폭격자세로 더 이상 있게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두 무릎을 꿇고 앉게 했다. 

그러나 너무 매를 많이 맞은 상태에서 한참을 무릎 꿇고 앉아있으려니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밤 10시가 조금 지나, 나는 조사를 받기 위해 
군부대 사무실 5층 취조실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서안공안국 외사과 조사관 2명과, 몽둥이를 든 군인 두 명,  
통역을 위해 대기시킨 조선족 여성 7~8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이들은 국적, 주소, 직업을 묻고 
언제 서안이 왔으며, 현 거주지는 어디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재우고 공부시키는 데 드는 돈은 
어디서 공급되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하나하나 다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어서, 서안에 몇 개의 팀이 있으며, 
각 사역장에 북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으며, 
사역장 위치는 어디인지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소. 당신이 이 서안 시에 
몇 개의 사역장을 조직해 놓고 있으며 
전체 사역장의 총 인원은 얼마며, 
선생은 누구누구 라는 걸 말이오.

그리고 오늘 호텔 식당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각 사역장의 팀장 들이며 
오늘 이사 가기 위해 모였다는 것도 다 알고 있소. 
그러니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말하시오.' 

나는 우리 사역에 대해, 공안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당신들을 한 달 전부터 감시하고 있었소. 
그러다가 당신들이 내일부터 이사 간다고 하고, 
거기에다 모든 팀장들이 모인다고 하기에, 체포한 것이오. 

그러니 빨리 사역장들이 위치를 말하시오. 
당신들에 대해 우리는, 무장 테러단체로 신고를 받았소!' 

그제야 나는 우리를 체포하는데, 왜 그렇게 많은 무장 군인들과 
공안들이 동원되었는지 이해가 갔다. 

나는 통역하는 조선족 여성을 통해 조사관들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성경공부하는 사람들이고 
성경을 공부하고, 중국과 중국 사람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고 
북조선과 한국과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을 축복하며 기도하는 일이
우리가 했던 일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중국정부에서 우리에게 벌이 아니라, 도리어 상을 주어야 할 것이오.' 

내 말을 듣고 조사관들은 한동안 웃었다. 
'그래요? 좋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오. 
다 좋은데, 먼저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시오. 

우리는 김광철 이라는 사람의 신고를 받아서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소.'     *3기생, 4기 사역장 운영, 조선족

조사관은, 연길 공안국에서 서안 공안국으로 보낸 
40 쪽이 넘는 협조공문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 시간에도 차고에서는 끊임없는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통역하는 조선족 여성이 큰소리로 재촉했다. 

'빨리 솔직하게 다 말 하세요.' 
'나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잡히지 않은 사역장, 가족사역장 있었음)

그러자 몽둥이를 들고 있던 군인들이, 나를 때리려고 위협하고 
조사관 들도 한참동안 협박을 했다. 

그래도 내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자 
한 조사관이 내 뺨을 세차게 두 번 해갈기며 
의자에서 내려가 무릎 꿇고 앉으라고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조사를 시작하며 조사관이 물었다. 
'답변을 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통역에게 말했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고, 외국인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중국 말도 잘 못 합니다. 
나는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영사를 불러주세요. 
한국영사가 참관하는 가운데 조사를 받겠습니다.' 

설령 현장범 이라도, 외국인은, 그 나라 영사가 참관한 가운데 
조사받게 되어 있다. 

조사관들은 수사를 멈추고, 옆에 있는 군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조금 전 과는 전혀 다른, 아주 부드러운 태도로 나왔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때리지 않게 할 것이요.  차 한잔 드시겠소?'
'차는 됐고, 한국 영사나 좀 불러 주시오!'

'영사는, 조사를 다 마친 후에 감옥에 들어가면, 그때 불러 주겠소. 
좋게 상대해 줄 테니, 조사를 받을 수 있겠소?' 

'나는 영사가 입회하지 않으면, 조사를 받지 않겠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 
죄가 가중된다고 했다.

나는 통역하는 조선족 여성에게 말했다. 
'나는 남조선 사람이고, 당신은 중국 조선족이고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북조선 조선족입니다. 

우리 다 같은 민족 아닙니까? 
같은 민족인 우리 가운데서도, 북조선 사람들은 잡히면 순교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들을 가르쳤던 내가, 어떻게 저들을 잡히게 할 수 있습니까?
(아직 안 잡힌 사역장이 일부 있었음) 그러니 4일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선생들은 다 잡혀서 행방불명이 됐고,     *호텔에서  
선생이 없으면, 4일이 지나면 각 사역장마다 양식 다 떨어지기 때문에 
학생들이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질 겁니다. (학생들은 선생 행방불명으로 인식)

그리고 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러나 4일 동안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안 잡힌 사역장 학생들이 흩어진 후

말하겠어요. 그 전에는 사역장 소재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통역이 말했다.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통역할 수 있겠어요?
이야기를 해도 좋고, 그렇지 않으면 한국 영사를 불러 달라고 해주세요.' 

통역이 조사관에게 뭐라고 하자, 조사관이 말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소. 시간을 끌고 조사를 지연시키면 
죄가 가중 되니 빨리 대답하시오.' 

'만약 말하지 않는다고 나를 사형시키면, 그것도 주님께 감사하고,  
10년 20년 징역을 살게 된다 해도 감사하니, 나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12일 새벽 두시 반 까지 1차 조사를 받고, 다시 차고로 끌려 내려갔다. 

내가 취조를 받고 있는 동안, 연길 공안국 공안들과 
연변 변방대 군인들 120여명, 
그리고 서안 공안국 공안들과, 서안 군부대 군인들 200여명은 
각 사역장 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체포, 연행해 왔다. 

조복화선생, 김광철선생 사역장에 이어 이선장선생, 이육선생, 
신수재 선생, 신소광선생, 김순종선생, 정용철선생 사역장까지 
모든 사역장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왔다. 

내가 차고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우리 선생들과 학생들로 차고 안이 가득했다. 

이날 신재록선생 사역장과, 서안에서 멀리 떨어진 자매사역장과 
두 곳의 가정사역장은 체포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병원에 실려 갔다온 나목사와 함께 
북한 형제들과 격리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한쪽 벽에 낡은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양옆으로 장의자가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나갈 때와,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그 장의자에 꼼짝도 못 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공안 두 명과 군인 두 명이, 우리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밀착 감시하였고 
약 3분 간격으로 군인 간부들이 방문하여, 우리가 무사한지 확인하였다. 

새벽 5시쯤 너무 피곤해, 의자에 앉은 채로 내가 깜빡 졸자 
공안이 모기 파리 등 벌레를 잡는 살충제를 내 코에 확 뿌렸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대우에 참다 못해
어떻게 사람의 코에 살충제를 뿌릴 수 있냐고 항의하자 
공안은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졸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던' 것 같이    *행5:41
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려움들은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고에 가득 들어와 있는 우리 선생들과 학생들, 
그리고 북한선교를 생각하면 
차라리 '항의' 라고 해야할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들은 북한으로 잡혀가면 죽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하나님, 저들이 체포되어 들어가면 북한선교는 누가 합니까? 
북한출신 선교사가 몇 명이나 된다고, 이렇게 잡아가면 어떻게 합니까? 

5,000명 북한 선교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말 안됩니다! 
하나님, 제발 저들을 살려주세요. 제발!' 

 

새벽 6시가 되자 갑자기 차고 쪽에서 '주여, 주여, 주여!' 하는 
함성에 이어, 우렁찬 기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각 사역장마다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형제들의 기도 소리에 당황한 공안들의 호루라기 소리와 
혹독한 구타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형제들은 매를 맞으면서도 계속해서 기도하다가 
이어 찬송으로 넘어갔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에 죽네 

오늘도 멀리 타향 길에서 복음을 안고서...' 

다같이 여러 곡의 찬송가를 반복해서 부르고 
마지막으로 '이 시간도 북한으로'를 부르더니, 다시 부르짖기 시작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하나님 기적을 보여 주세요. 살려 주세요!'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기도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가는 군홧발 소리가 
시끄럽더니, 이어 또 다시 악 악 소리가 들려왔다.

무차별로 쏟아지는 사나운 구타 속에서도 
형제들의 찬송과 기도 소리는 끊이지 않고 2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나는 감사와 간격으로 통곡하며, 
의자에서 내려와 시멘트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저들을 행20:32절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모든 것이 다 맞습니다.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제 지식을 가르쳤으면, 제가 실망도, 낙심도, 기대도 하겠지만 
저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다듬어지고, 세워지고, 스스로 깨닫게 하셨으니 

저들을 통해서 하나님 영광 받으십시오. 
저들이 중국감옥, 북한감옥, 설령 순교의 자리에 이른다 해도 
저들이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하나님 영광 받아 주십시오.' 

순간 나의 어깨와 등 쪽에서, 큰 바위 같은 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응답의 신호

 

공안들이 물과 빵을 가져왔지만, 나는 먹지 않고 돌려보냈다. 
체포될 때, 앞으로 오랜 시간 감옥에 있게 된다면 
40일은 금식하며 기도할 테니 
이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이루어 주시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자, 공안들은 왜 먹지 않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매 끼마다 여러 번 찾아 와서 먹으라고 종용했다. 

그때마다 '지금 기도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금식기도가 뭔지 모르는 이들은, 기도를 하더라도 먹으면서 하라고 했다. 
그들은, 내가 죽으려고 단식하는 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낮에 다시 2차 조사가 있었다. 
계속해서 캐묻는 것은, 각 사역장마다 북한 사람이 몇 명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며칠만 기다리면 내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다 얘기하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주님 저는 이제 어디로 가야 됩니까? 

다음 날 공안 4명과 함께 여권을 가지러 집으로 갔다. 
나는 그들 중 조선족 공안을 통하여, 이 일에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벌써 한 달 전에, 조선족 김광철 선생이   *3기생, 4기 사역장 운영
연길에 있는 북한 보위부 출장소에 우리 사역장을 밀고 하였다. 

그는, 서안에 있는 8개 사역장의 탈북자 전원을 체포하도록 돕는 대가로 
2만달러를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돈을 더 받을 목적으로 
우리 사역장을 무장 훈련을 받는 테러 집단으로 신고했던 것이다. 

당시 서안에는, 자매 사역장과 두 곳의 가정 사역장을 포함해 
모두 12개의 사역장이 있었지만 
모든 사역장이 비밀 점조직 형태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철선생은, 선생이면서도 모두 8개 사역장만 있는 줄로 알았다. 

그가 연길 보위부 출장소에 계속 전화를 걸어 재촉하자 *보위부 연길 파견
연길 북한 보위부에서는 연길 공안국에 합동작전을 요청하였다. 

중국 내에서 북한 보위부 단독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길 공안국에서는, 중국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자신들이 처리하겠다며 보위부를 따돌렸다고 한다. 

이렇게 지연되자, 광철선생은 돈을 기다리기가 애가 타서,
다시 연길 공안국에 전화를 걸어, 8개 사역장 전원을 체포할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10만 위안의 거금을 요구했다.   *1천7백만원

그리고 연길공안국에 계속 전화해 협박도 하면서 
사역장 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세세히 다 통보해 주었다. 

언제 학생들이 내려오고, 어느 선생이 그들을 맞게 되는지... 
언제 이사를 갈 계획인지... 
그리고 이사 준비를 위해, 6월11일에 나와 선생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까지 
모두 통보해 주었던 것이다. 

고발 방법도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고발한 것과 비슷했다. 
체포되기 하루 전에, 예배를 인도해 달라며 
나를 자기 사역장에 초청해, 감시하던 공안들에게 내 얼굴을 익히게 했다. 

그리고 성근선생과 교웅선생도 자기 사역장에 초청해 
예배를 인도하게 하는 방법으로, 공안에게 얼굴을 미리 기억하게 했다. 

공안들은 두 선생의 뒤를 미행하면서, 각 사역장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러나 보계 시에 있는 자매사역장과, 두 곳의 가정사역장은
두 선생이 가지 않으니,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족 공안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광철선생이 1800위안을 그에게 맡겼다는 대목에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체포되기 전날 밤, 나는 광철선생 사역장에 예배를 인도하러 들렀다가 
그에게 사역비로 1,800위안을 주었고 
이것은 나와 광철선생, 두 사람만 아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을 조선족 공안에게 건넨 것임)

연길공안국에서는, 여러모로 이 작전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바쁜 업무를 다 제쳐두고, 많은 군인들과 3일간 기차를 타고 서안까지 
내려간다는 것도 귀찮고 복잡할 뿐 아니라 

기껏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이, 불쌍한 북한 사람들을 붙잡아 
국경지대까지 호송 하는 일이니,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밀고자 김광철(조선족)이 하도 독촉 전화를 하고, 협박을 하는 통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 북한 보위부의 테러로, 불상사가 생길까 해서 
군부대 차고에 우리를 감금 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족 공안이 또 하는 얘기가, 
광철선생이 자신은 체포되어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밀고자니까
'빨리 빼 내 주겠다'며 공안들이 억지로 그를 체포 대열에 밀어넣었다고 한다. 

공안들 끼리 작전수행 전에 회의를 하면서 
'밀고자 김광철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 몇 번이나 의논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광철선생이 차고 감옥으로 들어오며 
내 옆에 와서 말을 건낼 때 
군인들이 왜 마구잡이로 그를 구타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때때로 그의 영혼을 생각해 본다.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동고동락했던 수많은 동역자들과 제자들을 
체포, 북송시키고 
이제 하나님 앞에 가서, 그 죄의 대가를 어떻게 치를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3년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들었던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호언장담했던 그가 
마지막엔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가 닭울음소리에 심히 통곡하며 회개 했던 것처럼 
광철선생도 주님 앞에 심히 통곡하며 돌이켜 새롭게 되길.. 
그리하여 베드로사도 만큼이나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해서 1998년 8월부터 2001년 6월까지 만 3년간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오던 우리 사역은 
2001년 6월 11일, 나와 나태호 목사와 조선족 형제들 10여명을 포함한 
76명이 체포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새롭게 4기 사역장이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76명 중에는 용섭선생을 따라, 그날 서안에 막 도착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12명의 형제들도 있었다. 

수갑에 채워져 내가 공안들과 함께, 여권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서자, 

우리 가족들은 혼비백산했다. 

 

체포되지 않은 신재록선생 사역장과, 자매사역장을 해산시키고 
집에 있는 모든 돈을 털어, 그들에게 차비로 나누어 주라고 
어머니께 얼른 부탁했다. 

공안들은 나의 여권을 찾아 신원을 확인하고는 
다시 군부대로 나를 데리고 돌아갔다. 

 

군부대로 돌아오니, 공안들이 선생들과 학생들을 
모두 어디론가 실어가고 있었다. 

'저들을 어디로 데려가요?'
내가 조선족 공안에게 물었다. 

'갈 데가 있소? 연변 쪽으로 데려가 북한에 넘겨야지.. 저들을 어쩐단 말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합3:16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다시는 탈북자 사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앞으로 16년간 중국에 입국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조서가 마무리되었다. 

공안들은 북한 보위부의 테러를 염려해 
나와 나태효 목사를 밀착 감시(경호)하다가 
그날 오후에 삼엄한 경계 가운데 시내 호텔로 이송하였다. 

호텔에 도착한 후 조사관들은 3층에 두 개의 방을 잡아 
그 중 하나에 우리를 들여보내며 
'두 사람을 대통령 모시듯 할 테니 걱정 말고 푹 쉬라'고 했다. 

우리 맞은편 방에는, 4명의 공안이 문을 열어놓고 밤새 우리를 감시했고 
나머지 6명의 공안은 3층 복도, 호텔 정문, 프런트에 두 명씩 경비를 섰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 공안들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는 서안 공항으로 옮겨졌다. 

공안들은 기내 좌석까지 동승하여 우리를 감시하다가 
비행기 이륙 직전에 조용히 떠났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뜨니 인천공항이었다. 
계획에 없던 갑작스런 추방에 나는 너무도 막막했다. 


◑제6장. 이 시간도 북한으로! 
체포와 추방 이후 : 제2의 평양대부흥을 꿈꾸며 갑니다. 


♣형제들의 북송과 한국으로의 구조사역 

나는 한국으로 추방되어 온 후 
연변의 감옥에 있는 우리 선생들을 구조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선 중국은행 통장에 S시 국집사님으로부터 입금된 1만 달러를 
연길 공안국에 안면이 있는 유력한 분(조선족)에게 보내면서 
복송되었을 때 생명이 매우 위험한 17명의 선생들 명단을 주었다. 

그러나 이용섭, 김성근, 그리고 과거에 연길에서 체포된 1기생 유기풍선생 
세 사람만 석방되고, 나머지는 모두 북송되고 말았다. 

나는 생명을 쏟아부으며 사랑했던 선생들이 
북송되어 순교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가거나 
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중형을 선고받을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그들이 보고싶어서 
어떻게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합법적으로는 중국으로 입국할 수 없으니 
베트남이나 몽골을 통해, 여권 없이 중국으로 들어가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경비를 허락해 주시지 않아 
끝내 들어가지는 못했다. 

서안에서 함께 체포되었던 우리 형제들 74명은 
내가 한국으로 추방되어 나오던 날 
전원 연변의 도문 변방구류소로 이송되었다. 

그 곳에서 2주 동안에 심문과 조선족 선별 작업 후 
북한 형제들 59명만 북한 온성 보위부로 이송되었다. 

그때가 2001년 6월 29일이었다.  *6월 11일에 체포 후
북한 보위부는 학생들과 선생들을 철저히 구별해서 
학생들은 몇 달간 노동단련대에 보내어, 교화노동을 시킨 후 석방시켰다. 

그러나 사역장에 선생들이었던, 정용철, 조복화, 강기홍 선생 
그리고 신용재 선생에게는 5년에서 15년의 중형이 선고되었고 

이선장, 김기철, 김철수 선생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셨다. 

이후 2001년 말경부터, 북한으로 끌려갔던 학생들이 
한 사람씩 다시 중국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석방된 용섭선생에게 
북한에서 돌아오는 학생들을 모아, 중국에서 사역을 감당하게 하였다. 

형제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일부터 하면서 
신소광선생, 임경철 아바이, 조선족 신재록 선생 
그리고 체포되지 않은 유연옥 선생을 통해 
연길, 왕청, 도문에 사역장을 세웠다. 

그러나 연변 지역에서 탈북자 신분으로는 
사역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고 
한국으로 귀순해 들어올 수 있는 길들이 열리면서 
점차 이들의 인식도 달라져 갔다. *2001 김하중 주중대사 부임 후 대거 한국행

그래서 이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30여 명이, 두리하나 선교회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고 
학생들 20여 명과,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20여 명이 
용섭선생과 성근선생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용섭선생 자신은 2001년 12월에 다시 체포되어 
'타인 비법 월경 조직 죄'로 4년형을 받고 
중국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작년에 북송 되고 말았다.  *순교


.......................................

(김권능 선생의 증언)
이용섭 선생은, 연변 감옥에서 아직 형기가 9개월 남았는데,
어느 날 공안들이 와서 손 발 다 묶어서, 우리가 보는데서 질질 끌고 나갔어요.

그 이유가 뭐냐면, 중국에서 '국제 난민 신청'을 한 거예요.
그걸 한국대사관에도 보냈고, 중국 정부에도 올린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때가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주최하면서, 
세계 눈치를 많이 볼 때였어요.

뉴스를 보니까, 국제 난민 조약에 의하면,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본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을 우려가 있으면 '난민 자격'이 되는 거죠.
그리고 중국은 '국제 난민 조약'에 가입된 나라고요.

'야! 이거 중국 정부에 난민 신청 하면 되겠다!' 생각한 거죠.

중국 측에서는 생각하기를
'이 사람을 데리고 있으면, 우리(중국) 측에 불리하겠다!' 판단하고,
아직 형기가 9개월이 남았는데도, 바로 석방시켜서 북송을 시킨 거예요.
(그 후로 연락이 끊어진 것을 고려해 볼 때, 순교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