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와 요한복음 3:16절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이렇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사랑'이 증거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즉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증거들이 나타납니까?
2가지의 증거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깁니다. 즉 기쁘게 여깁니다.
16절에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우리 목숨을 내놓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의무감을 강조한다는 게 아니라, 의무를 넘어선 기쁨이라는 것이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도 마땅하다고 여긴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정말 깊이 있게 '아는' 단계에 도달하면,
정말 그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랑..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영적 목표죠.
그러면 (목숨 내 놓는) 출발점은 뭘까요? 17절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만 끝난다면 불안해서 돌아갈 수 있으므로, 17절 말씀을 주셨어요.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는지' 한번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첫 번째 출발이라는 것이죠. 그게 영생, 구원을 점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라는 겁니다.
세상에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한 것처럼 생명을 다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의 특징'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3:18절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2. 두 번째,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라고 한다면 어떤 증거가 나타나는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구하고, 그 구한 것을 받게 된다는 거죠.
3:20~22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위 20절 해석이 좀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될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2개의 상반된 해석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와 요한 칼빈도 전혀 다른 해석을 했어요.
루터는 '위로'로 해석했어요. '우리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너무 자책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라' 그렇게 위로의 의미로 해석했죠.
칼빈은 정반대로 '경고'로 해석 했어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책할 것이 있을 정도로 그런 마음이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인가?' 이렇게 '경고'로 해석했죠.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둘 다 일리가 있어 보여요.
저희는 루터교가 아니라, 칼빈의 후예들, 장로교이기 때문에 칼빈의 해석을 따라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경고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 마음이 볼 때도, 우리가 책망 받을 것이 있을진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책망받을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므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거죠.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이라는 게 뭡니까? 이 말씀에 근거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설 때도 떳떳하게, 가책(책망)할 할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랑하라'는 거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적하실 것이 있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사랑해 보라는 거죠. 그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늘 기도하면 이런 자책이 일어나죠.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더 힘써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마음에 자책이 있죠.
우리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더 후회하게 되는 건 뭡니까?
내 주변에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을 후회하게 될 거에요. 우리 마음속에 자책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사랑한다면 어떤 축복이 있나요?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그런 축복 누린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친밀한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거죠.
우리 마음속에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자책할 것이 없는 정도로 많이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한 것, 그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 응답이 확실하게 효과적으로 빨리 이루어지는 그런 조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사랑받는 친밀한 자녀로 되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10~11절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주셨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우리는 이렇게 거꾸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를 언제나 축복하시고, 나의 뼈를 단단하게 하시고 배불리시고 물댄동산 같게 하시면 제가 굶주린 사람도 돕고, 배고픈 사람을 섬기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바꾸어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그 앎대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더 깊은 은혜로, 나의 삶에 임재, 응답해 주신다는 거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가/ 거하지 못하는가가 결정되죠.
간신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그냥 간신히 구원받는 자녀가 아니라 그 구원의 감격과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고 누리며,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성도,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아는' 사람으로 '신트로피'의 드라마를 써가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