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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3:11~24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LNCK 2022. 12. 20. 22:16

2015.08.02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일 3:11~24) - YouTube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일3:11~24           2015.08.02.


◑서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조직행동과 의사결정>에 대한 전문가인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제임스 마치
교수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을 내릴 때 
두 종류의 의사결정 모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1) 첫째는 결과를 중시하는 모델입니다. 
비용과 이익을 따져서, 이 결정을 내리는 나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올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는 거죠. 결정 내리기 전에, 이것을 반드시 생각해게 되죠. 

이 모델은 주로 단기적인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2) 두 번째는 정체성을 중시하는 모델이죠. 
이것은 '나는 어떤사람인가?' 를 먼저 생각하고 
그 질문을 스스로 자신에게 묻고,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장기적인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정체성에 근거한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무리 법이 정교하게 만들어져도,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아는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정체성)를 깨닫는 변화가 없으면, 
잠시 변화되는 것 같다가도.. 다시 되돌아 가고 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아는가?' 
이 정체성 자각이, 바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많은 가르침은, 바로 이 정체성을 올바로 세워 주시는데 
할애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우리 인간에게 있어야 될 바로 그 정체성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정체성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거죠.

지난 주에 살펴본 요일3: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정말)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녀!'

'얼마나 큰 사랑이 나에게 부어졌는가!'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며, 
내가 정말 누구인지를 내가 확실히 깨달을 때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누군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할 때 
-대개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합니다. 
-내가 태어난 지역을 설명합니다. 
-과거의 나의 직책을 나의 자신으로 설명합니다. 
-현재의 직책으로, 직업으로 나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바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라는 정체성입니다. 

어느 누가 내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할 때 
'제가 누구인가 하면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로울까요!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거나, 잘못되게 사는 거의 대부분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나는 누구에게로부터 사랑 받지 못했다' 라고 하는 그런 인식이 
그 마음 속에 숨어 있습니다. 특히 성장기에는 더 심하죠.

'나는 사랑 받지 못했기에,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다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 존재인가를 깨달았더라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심을 깨달았더라면, 
그렇게 인생을 방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잘못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이 정체성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로 매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문제가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눅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집나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 아들에게서도

이 정체성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는 집안 일에 매우 성실 했죠. 둘째 아들처럼 집을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매우 성실하고 착한 아들로서 아버지께 봉사했고, 자기 의무를 다 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갔다 돌아온 그 동생이 
아버지의 환대를 받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을 보고 
그는 불평했고 분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성실하고 자기 의무를 잘 준행하는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했어야 했을 텐데 
그는 왜 기뻐하지 못 했고.. 불평하고 분노가 일어났을까요?

그의 마음 또한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는 아버지께 성실히 순종했지만,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그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아버지가 불평하는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죠.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너의 것인데...' 
바로 이 아버지의 말이 그의 정체성의 근본바탕이 되었다면, 

그는 동생이 집에 돌아왔을 때도, 불평하고 불만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가 그 동생을 위해서 베푸는 잔치를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을 나간 동생과 마찬가지로 
큰 아들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던 거죠. 

그는 집안에서 아들의 의무를 다했지만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보라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다 내어주시기 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다'는   3:1
그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으로, 바로 우리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죠. 

요한일서는 바로 이 우리의 무너진, 망가진 정체성을 다시 세워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는 유독 '안다, 알다' 라는 단어가 많이 자주 사용되었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인 거죠.

그걸 '알아라, 아느냐?'는 거죠.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추측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아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아십니까?' 
'당신이 안다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요한일서가 던지는 거예요.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압니까?
그 아는 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가십니까?' 이렇게 본문은 물어오는 거죠. 

과거 우리 조상들은 '앎'라는 단어 와 '삶'이라는 단어를 한 단어로 사용했죠. 
그래서 이응과 시옷을 합쳐서 '△' 모양의 자음으로 표기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 과 '사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
한 단어인 것을.. 학교다닐 때, 국어시간에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그것을 깨달았어요. 요한일서를 보면서요! 

'당신이 아는 것을 정말 아는가? 
당신이 안다고 하면, 당신의 삶에서는 그 앎이 그대로 나타나는가?'

이 질문을 계속해서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던지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정말 (삶으로) 아는 성도가 되어야 되는 거죠.

'내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아는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 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또 알아야 될 
또 하나의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사망(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는 거죠.

3:14절이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입니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4절에서 '알거니와' 하면서 '안다'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뭘 아는 거죠?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안다고 말씀합니다.

'옮겨질 것이다'라는 미래형으로 말씀 하지 않고 
'옮겨졌다' 라는 과거형으로 말씀하고 있죠. 

성도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예수님을 잘 믿어서 
나중에 죽음에 있다가 생명으로 옮겨질 것을 바라며 사는 삶이 아니라 
즉 미래형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사람들이다...' already not yet
이 표현을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도 사용했었죠.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졌다' 
그렇다면 그 증거는 무엇인가요?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3:14
이 구절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된다'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설명하면 종교적 율법이 되고 말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해 한다' .. 가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 이게 맞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 해야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기에   :14
그런 정체성에 근거해서, 그 결과로, 그 증거로 우리는 사랑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이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거죠.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인 임을 증명하는 것이죠. 

여러분,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은 
절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주의, 큰 아들

우리의 믿음 생활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종교적 의무감에만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한다.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뭣뭣을 해야 한다. 해야 한다'
라는 종교적 의무에 머무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는   :14
성도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하면, 놀라운 것은, 의무가 다 기쁨이 돼요.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부모로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규칙을 지킨다면 
얼마나 그게 불행할까요.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의무는 다 기쁨인 거죠.

여러분,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재라는 것을 
잘 설명해주는 책이 있습니다. 

김영길 장로님께 쓰신 <신트로피 드라마>라는 책입니다. 
아주 작은 책입니다. 한번 꼭 여러분이 읽어 보실 필독서로 권해 드립니다.

이 책은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과학법칙과 상반되는 
또 하나의 법칙을 설명해 주는데요,

'엔트로피 법칙' 이 있죠. 
1864년 독일의 물리학자 클라우디우스 가 최초로 발견해서 알려진 법칙이죠.
우리 말로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모든 물질은 점점점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간다'는 거죠. 
퇴화하고, 점점 소멸해 가고, 부패해가고, 늙어가는 거죠.
모든 것들이 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점점 변해간다는 게 엔트로피의 법칙이죠.

그런데 '생명체'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신트로피' 라는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생명체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는 신트로피에 법칙이 작용해서 
점점점 질서도가 더 높아진다는 거죠. 

그런데 이 세상을 보면 엔트로피 법칙만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은 점점 더 무질서해 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점점 미워하고, 갈등하고, 분쟁 하고, 싸우고, 
전쟁하고... 이것은 물질 세계에 존재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사람들이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이죠.

그런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 안에는 
'신트로피 법칙'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거죠. 

서로 모르던 사람이 모여서 서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서로 갈등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화목하게 되고 
깨어지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회복하게 되고... 
이것이 모두 신트로피의 법칙,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법칙인 거죠.

이 세상에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신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사는,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됩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을 
오늘 본문에서 예를 들죠. 바로 가인입니다.

아벨을 질투해서, 미워해서 살인까지 한 가인!
아무 이유 없이, 자신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로 말미암아 
동생 아벨을 죽였던 가인!
그것이 바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사는 대표적인 인간입니다. 

그 가인의 후예들의 모습들이 성경역사에 기록되어 있죠. 
요셉의 형들을 보십시오. 그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함으로써 
요셉을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사울을 오십시오.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다윗을 질투하고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죠. 다 동일한 패턴입니다. 

세상에서 죄에 사로잡힌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거죠.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이면,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갈등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그래서 붕괴되고 점점점 썩어가는 
그러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자연인들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흐름이 또 있습니다. 신트로피의 법칙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고, 그들을 축복함으로
새로운 백성들의 물줄기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그 사울을 복수하지 않고, 의를 따름으로써,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죠. 신트로피의 생명 창출이죠.

예수님을, 당시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지도자들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예수님을 질투하고 미워하므로 그를 죽이려고 했죠.
그리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신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죽음(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놀라운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도, 이 엔트로피의 법칙과 신트로피의 법칙이 늘 상존하죠.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들이기에
우리는 '신트로피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백성인 줄로 믿습니다. 

질투와 미움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축복의 법칙을 따라 살아할 때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자신을 죽인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서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심으로 사랑하셨죠. 

그것이 본문 3: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통해 
세상에 신트로피의 드라마, 신트로피의 법칙을 시작해 주신 것입니다.

근데 우연의 일치처럼 요한일서 3:16절의 메시지와 
요한복음 3:16절의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와 요한복음 3:16절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이렇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사랑'이 증거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즉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증거들이 나타납니까?

2가지의 증거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깁니다.
즉 기쁘게 여깁니다. 

16절에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우리 목숨을 내놓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의무감을 강조한다는 게 아니라, 의무를 넘어선 기쁨이라는 것이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도 마땅하다고 여긴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정말 깊이 있게 '아는' 단계에 도달하면, 

정말 그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랑..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영적 목표죠.

그러면 (목숨 내 놓는) 출발점은 뭘까요?
17절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만 끝난다면 
불안해서 돌아갈 수 있으므로, 17절 말씀을 주셨어요.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는지' 한번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첫 번째 출발이라는 것이죠. 
그게 영생, 구원을 점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라는 겁니다. 

세상에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한 것처럼 
생명을 다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의 특징'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3:18절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2. 두 번째,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라고 한다면 
어떤 증거가 나타나는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구하고, 그 구한 것을 받게 된다는 거죠. 

3:20~22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위 20절 해석이 좀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될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2개의 상반된 해석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와 요한 칼빈도 전혀 다른 해석을 했어요. 

루터는 '위로'로 해석했어요. 
'우리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너무 자책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라' 
그렇게 위로의 의미로 해석했죠.

칼빈은 정반대로 '경고'로 해석 했어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책할 것이 있을 정도로 그런 마음이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인가?' 이렇게 '경고'로 해석했죠.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둘 다 일리가 있어 보여요. 

저희는 루터교가 아니라, 칼빈의 후예들, 장로교이기 때문에 
칼빈의 해석을 따라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경고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 마음이 볼 때도, 우리가 책망 받을 것이 있을진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책망받을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므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거죠.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이라는 게 뭡니까? 
이 말씀에 근거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설 때도 
떳떳하게, 가책(책망)할 할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랑하라'는 거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적하실 것이 있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사랑해 보라는 거죠. 
그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늘 기도하면 이런 자책이 일어나죠.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더 힘써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마음에 자책이 있죠. 

우리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더 후회하게 되는 건 뭡니까? 

내 주변에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을 후회하게 될 거에요. 
우리 마음속에 자책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사랑한다면 
어떤 축복이 있나요?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그런 축복 누린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친밀한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거죠.

우리 마음속에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자책할 것이 없는 정도로 많이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한 것, 
그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 응답이 확실하게 효과적으로 빨리 이루어지는 
그런 조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사랑받는 친밀한 자녀로 되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10~11절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주셨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우리는 이렇게 거꾸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를 언제나 축복하시고, 나의 뼈를 단단하게 하시고 
배불리시고 물댄동산 같게 하시면 
제가 굶주린 사람도 돕고, 배고픈 사람을 섬기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바꾸어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그 앎대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더 깊은 은혜로, 나의 삶에 임재, 응답해 주신다는 거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가/ 거하지 못하는가가 결정되죠.

간신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그냥 간신히 구원받는 자녀가 아니라 
그 구원의 감격과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고 누리며,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성도,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아는' 사람으로 
'신트로피'의 드라마를 써가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