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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찾는 순간 나는 죽는다

LNCK 2022. 12. 21. 20:50

내가 나를 찾는 순간 나는 죽는다_태승철 - YouTube

 

◈내가 나를 찾는 순간 나는 죽는다          대하35:1~27      2017.03.07.


대하35:1~3절만 찾아서 읽어봅니다.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켜 
첫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왕이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하고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


본문 대하35장은, 유다의 멸망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요시야 때가 그 배경이죠.

▲'자기 사랑'에 몰두하는 현대인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 10가지" 뭐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으로 살자!" 
또는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궁금해하지 말라" 

그 외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모든 사람을 이해시키려 하지 마라"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으려 하지 말라" 
"모두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말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느라고, 내가 나를 살 수가 없다" 

여러분, 소크라테스 때부터 관심이 '나 자신'이에요. 

제가 강릉에 사는데, 경포대 바닷가를 산책겸 나가보면 
젊은이마다 셀카봉을 들지 않은 젊은이가 없습니다. 
가히 '셀카봉 열풍'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본인 SNS계정 관리에 다들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젊은이들의 어떤 관심을, 강릉시가 잘 알아서 배려를 했는지,
해변가에 가보면, 액자모양의 틀이 있어요. 

그러면 그 뒤에 서면, 내가 마치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액자안에 
그림의 주인공처럼 나오는 거예요. 

또 어떤 곳은 큰 반지 두 개가 있고, 
그 반지의 안에 벤치가 있어서, 남녀가 함께 앉으면, 
큰 반지 2개를 서로 나눈 그런 사이인 것처럼.. 사진에 나오죠.

하여간 뭐 셀카를 통해, 자기 모습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은지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궁극적 관심은, 출세나 성공인데요...
왜 사람들은 고위직에 오르고 싶어 합니까?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나라를 위해, 또는 큰 일을 위해 일하는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모습! 
그런 자기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또한 훌륭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이렇게 볼 때, 자기 자신보다 더 우선적인 관심이 있겠는가요? 

어떤 여자/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은 것도 
그 여자/남자와 결혼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은 겁니다. 

아이들을 낳아서 잘 키운 것도, 
그렇게 훌륭한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되고 싶은 

자기 자신을 찾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겁니다. 

돈 많이 벌고 싶은 것도, 돈을 펑펑 쓰면서 남들보다 뻐기며 사는 
자기 자신을 찾겠다는 겁니다. 

돈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고, 
자식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고, 
고위 관직이나, 기업 임원이라는 직위와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 하고 
결국 인간의 모든 노력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입신양명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참 나 자신을 찾게 되면, 
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 납니다

(*이런 다소 의아한 명제가 나오게 된 근거는,

본문에서 요시야 왕이, 훌륭한 개혁운동을 성공한 후에

그만 젊은 나이에 전쟁에 나가서 죽은 것을 빗대어서 하는 말)


그 마지막 목적인 자기 자신을 찾았을 때, 더 이상의 삶은 없는거에요. 

근데 우리는 마치, 나 자신을 찾고 있고, 
나 자신을 찾아가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은, 나 자신을 찾는 '자아 실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가르치지요.

그게 진정한 삶인데... 죽으면 사는 도리 말입니다. 사람들은 반대로 살죠.)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있고, 나는 나 자신을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찾은 나 자신을 가지고, 이제부터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인생이란, 그렇게 나 자신을 꽃피우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위 관직에 오르고 싶어하고, 
대기업 임원도 되고 싶고, 의사도 되고, 
또 사업가도 되고 싶어하고, 훌륭한 자녀의 부모도 되고 싶어하죠.
많은 신자들로부터 존경 받는 목회자가 되고 싶어도 하겠지요.

근데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나를 찾았고, 그 나로 사는 것이 ... 삶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을 찾음으로써, 생이 끝난다는 거예요.

('자기 자아'라는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한 인생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뜻)

'내가 나를 찾았다'는 것이 확실하고, 진실된 거라면 
나는 더 이상 지금 진정한 나를 살고 있지 않는 겁니다.  

왜요? 그게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혀서 얻은 새 생명이 아니니까요!

그저 세상적으로 출세한 거죠.

 

근데 우리는 '나 자신이 있음(자아 실현)'을 잘 할 때
비로소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십자가와 정반대죠.

여기에 엄청난 오해가 깃들어 있고, 
인생이 비극적이고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하는 명제를 
최고의 명제로, 우선적인 명제로 내걸기까지는 

많은 지식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지식을 통해서 '과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알고 있는가?'를 확인한 거죠.

그런데 '아무도 그들 자신을 알고 있는 자들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겁니다.

 

소크라테스가 복음적 관점으로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오늘날 사람들은 다 열심히 자기 자신을 찾고 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 .. 우리는 복음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해야죠!


◑그러면 '내가 나를 찾고 나면, 나는 없어진다'는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요? 

자, '나를 찾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문에서 요시야 왕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신앙개혁 운동을 합니다. 
하나님을 찾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을 찾자니, 내 마음에 다른 것이 들어와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세상에 가치들에 대해서 죽어야 됨을 알고
그런 가치 때문에 추구하게 되는 우상숭배를 다 타파합니다. 

'성전을 생활화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구나' 라는걸 깨닫고 
성전을 수리합니다. 그러는 중에 율법책을 발견했어요. 

그 율법책을 중심으로 언약을 갱신하고 
본문은 유월절 얘기가 다시 나옵니다. 

앞서 히스기할 때 유월절을 크게 지냈는데, 
요시야 왕이 또한 유월절을 더 크게 지킵니다.

유다의 역사 속에서 사무엘 선지자 이후에 
다윗과 솔로몬보다도 더 크고 대대적으로 
유월절을 지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8

▲근데 재밌는 것은 '유월절을 지킨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 뭐라고 얘기를 하느냐면 

이 레위인들에게 '다시는 법궤를 너희 어깨에 메고 다니지 말라' :3
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그 앞에 므낫세 할아버지와, 아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우상의 제단을, 성전 속에 만들어 세우고.. 이러는 도중에 
법궤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치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지키는 과정 중에 
법궤를 성전 안에 모셔두고는 
'다시는 어깨에 메고 다니지 말라'는 얘기를 합니다.  :3

여기서 요시야가 생각하는 유월절의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유월절은 어떤 사건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는 사건이에요.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 가서 번성했는데 
그 애굽에서 번성한 야곱의 자손들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이구나!' 라는 정체성을 확립한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나 자신이 누군가를 찾은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유월절 사건의 의미를 
지금 요시야 왕 때에, 그러니까 첫 유월절 이후 9백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9백년 정도가 지난 이 즈음에 
요시야 왕은, 어떻게 유월절을 해석하고 
자기들의 정체성의 문제를 확립하고자 하냐면 
'법궤를 움직이지 마라'  :3

25:3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

▲그러니까 우리 마음은, 성전처럼

지성소와 성소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어떻게 돼야 되느냐?
법궤처럼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돌판이 법궤 안에 들어있지 않았습니까? 
그 모양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다시 말하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셔드려라!' 
이것이 나의 정체성, 내가 누군가를 찾는 거라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성전처럼,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나 아몬 때처럼

성전에 우상의 제단이 세워지고, 법궤는 뒷전으로 치워지고.. 그럴 수도 있고,

그러니까 마음에 지성소에 이라는 생각이 담겼으면 
내 마음에 지성소를, 돈을 벌어서 채우려고 하는 것이고 

자기 마음의 지성소에 자식이 담겼으면 
자식의 형통을 통해서, 자기 마음에 지성소를 채움으로써 만족하려 합니다. 

내 마음에 지성소에 무슨 생각을 붙잡고 있느냐? 
법궤가 좌정하고 계시느냐?

 

아니면, 돈을 생각하고 있느냐 
건강을 붙잡고 있느냐 
고위직이라는 직위를 붙잡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붙잡고 있느냐? 

▲근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으로서의 인간이 
나를 찾는 것은.. 

진정한 나는.. 
내가 자식을 잘 길러서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거에요.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일까요? 재미없지만 참으시고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내 마음에 지성소에 돈이 들어왔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만족하고 싶다. 

그러면 지금 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고 있는 상태에서 
돈 벌기 위해서 애쓰고 사는 삶은...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진정한 나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나,

내 마음 지성소에 법궤인 말씀이 좌정되어 있는 나.. 가 진정한 '나'인 거죠.)

'진정한 나'는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존재만이 들어와 있는 상태,

그래서 이 마음에 공백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우려고 할 때 
이때 진정한 나를 찾은 거라는 겁니다. 원래 창조 원형의 회복이 일어나죠.

▲이게 요시야가 보고 있는 '유월절의 의미'였다는 거예요. 
(*좀 비약같지만 말은 맞습니다)

 

유월절이 뭐예요? 장자가 죽었어요. 
'장자'가 뜻하는 바가 뭡니까?  

장자는 내 마음에 첫번째 관심의 대상을, 장자로 상징한 거에요. 

첫번째 관심의 대상이 돈이다 그러면 
그 돈이 장자로 상징된 거고, 

내 첫번째 관심이, 지금 현재 내가 진행중인 어떤 프로젝트의 성공이다 그러면 
그 프로젝트의 성공이 '장자'로 상징되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 이외에 첫번째 관심이 되어 있는 마음은 
'다 죽어야 마땅하다' 이겁니다. '장자'가 죽어야 되죠.
이게 유월절의 회복이죠.

 

그 외의 것은 죄다 우상이요, 죄악이요, 
그거는 '나 자신'이 아니라는 거에요. 

인간의 '나 자신'은 언제나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존재만이 들어와 있을 때 
그때 진정한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유월절이 회복되는 겁니다.
왜냐면 '장자'가 죽는 것이 유월절이니까요!


▲이 본문에서 우리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오늘 본문 뒤에 보면, 요시야가 죽어요. 

팔레스틴 북방 갈그미스 에서 
지금 바벨론이 신흥 왕국으로 부상하고 세력을 펼쳐나가면서 
앗수르가 BC 610 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패합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잔류 군인 정도만이 
갈그미스 라는 곳에 지금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애굽의 바로느고가

이 바벨론이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돕는) 전쟁을 하기 위해 지금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왕국 유다를 거쳐 지나가야 되니까 
요시야가 중간을 가로막고, 애굽왕 바로느고에게 전쟁을 하겠다고 나선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분 21절부터 보면 
느고가 뭐라고 말했냐면 '내가 너와 싸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갈그미스로 올라가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네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내 말을 어겨서, 나와 전쟁을 해가지고 
요시야 네가 죽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이니까 물러나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21~22

이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바로느고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문은 얘기합니다. ↙

: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먼저 이상한 것은 
'이 전쟁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서' 
지금 이 애굽 왕이 북쪽으로 유다를 통과해서 올라가고 있다 그러면 
왜 요시야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겠느냐 라는 얘기입니다. 

'요시야한테, 느고가 올라갈 텐데 그와는 싸우지 말라' 
이렇게 한 마디만 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요시야로서는 바로느고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요시야 시대 때, 여선지자도 훌다, 예레미야 선지자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었고 
유월절을 그렇게 대대적으로 지킬 만큼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요시야 한테는 전쟁에 관한 얘기를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이 이방 왕 바로느고 에게만 전쟁에 관한 얘기를 해주셨겠느냐? 이런 얘기에요. 

 

이렇게 전쟁에 대한 귀띔을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는 한 
요시야로서는, 팔레스타인 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바벨론의 남하 세력을 저지시키겠다고 올라가는 느고와 
전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겨우 앗수르의 지배하에서 벗어났는가 했더니 
'또 다시 애굽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 이건 아니죠. 

그래서 요시야 왕으로서는, 애굽과 싸울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러면 

아무리 그 바로 왕 느고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하는 거라' 해도 
그 말을 들을 수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요시야는 바로느고를 저지하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사합니다.
뭡니까? 

요시야의 개혁은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 때의 
성전 안에 까지 이방의 제단들을 세웠던 지독한 우상숭배...

 

므낫세 때, 우상숭배가 이방인들의 섬김보다 더 심했다고 하잖아요. 왕하21:9

므낫세 왕 때, 그때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 결정되었습니다. 왕하21:12~15
요시야의 개혁은, 그 멸망이 결정된 상태에서 일어난 신앙개혁이에요. 

그리고 유월절의 준수... 이게 다 요시야 때에 개혁이 일어났지만,
이미 할아버지인 므낫세 때에,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가 결정되었죠.


그럼 이게 요시야의 개혁이 왜 일어났느냐?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있냐면

이제 23년 뒤에 남유다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포로생활을 할 때에 

70년 포로생활을 여호와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선민 됨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던 근거가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에 부흥하며 새롭게 확립되었던 
이때 신앙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있잖아요.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바로 요시야 때, 어린 시절을 지냈겠죠. 
그런 사람이라는 거예요. 

다니엘이 어릴 때, 유월절 회복을 통해서 
선민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한 상태에서 포로로 잡혀가서 
70 년을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다니엘뿐만 아니라 여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면 요시야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하는 이 사실이 
앞에서 유월절을 유다 역사 속에서 최고조로 성대하게 지켰다는 것과  :18
어떻게 연결되느냐 이겁니다. 
온 백성들이 얼마나 슬펐으면, 예레미야도 그를 위해 애가를 지어 불렀죠. 

대하35:25 '예레미야는 그(요시야)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지금 이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성을 찾았다는 이야기와 
요시야의 죽음을 
역대기 저자 에스라가 연결시키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게 될 십자가 복음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을 찾게 해준다'는 얘기입니다.  *설교의 주제

나 자신을 찾는 게 뭐라고요? 
내 마음의 첫번째 관심의 자리, 내 마음에 첫번째 관심의 자리에 
'십자가(장자의 죽음)가 하나님을 모셔드리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면, 요시야가 전쟁에서 죽은 것처럼 
'이제 이 땅에서 내 생애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겁니다. 

'내 몸이 살아있어도, 내 생애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거죠)

요시야는 죽었기 때문에 생애가 끝난 거지만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시려는 말씀은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내가 나 자신을 찾게 될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찾게 되면 
이제 내 생애는 
요시야가 것처럼 
'더 이상 내 생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왜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뭡니까? 

장관 하라고? 엄마 아빠 하라고? 
돈 많이 버는 사업해 가지고 많은 곳에 다 좋은 뜻으로 돈도 많이 쓰고 
약한 사람들 돕고 그렇게 살라고?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천만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간디처럼 살라는 것도 아니고, 
정말 루즈벨트처럼 경제공황을 극복하는 경제 대통령으로 살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영웅이 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나 자신을 찾으라'는 얘기입니다.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 첫번째 관심의 대상이 
이 세상에 육체로 접하는 세상 것들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육체로 접근이 불가능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 첫번째 대상으로 모셔드림으로써 
진정한 나 자신을 찾으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그 첫번째 대상이, 내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십니다. 
내용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그 기쁨과 만족의 내용이 되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내 생애는 더 이상 진전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돈'이라는 걸 마음에 지성소에 담고, 내 첫번째 관심이 되면 
이 세상을 열심히 사는 이유는 
돈이라는 게 땅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땅에 있으니까 열심히 벌어서, 기쁘고 만족하려고 
땅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사업하는 거잖아요. 

자식의 성공과 형통이 내 마음의 지성소에 첫번째 관심사가 되면 
내가 열심히 자식을 가리켜, 땅에서 열심히 활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땅에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의 지성소에 들여놓은 것이, 
그것이 땅에 있으니까 땅을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우리 마음 지성소에 들여놓은 존재가 하나님이라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하늘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난 목적'이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내 기쁨과 만족의 원인을 찾아낸 거에요. 
그러면 그게 진정한 나인 거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내 활동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기쁨과 만족은 하늘(현재 천국)에서 이루어지는데, 왜 땅을 삽니까? 

그래서 요시야의 죽음이, 유월절을 통해서 선민의 정체성을 확립하자마자 
요시야의 죽음을 갖다 붙임으로써 (요시야의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 예표?)

복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마음에 지성소에 받아들여서 진정한 나 자신을 찾게 된다.

그 자신은 누구냐? 십자가에서 죽은 나요,
이 땅에 있으면서 하늘을 기뻐하는 자가.. 나 자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나더러 고위직에 오르라고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모셔드려서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삼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겁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고나면, 
그러면 그 사업과, 자식을 기르거나, 
내 몸의 건강조차도 
이젠 내가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는 게 되는 겁니다. 

근데 아직도 내가 몸을 관리하고, 내가 자식을 키우고, 
내가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면 
진정한 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내가 십자가에서 아직 안 죽은 거죠. 

진정한 나는, 하나님이 내 지성소에 들어오실 때 찾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온전히 완전히 궁극적으로 종극적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내가.. 진정한 나입니다. 

그 나를 찾았으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날마다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기쁜 나 자신을 찾고 
이 세상에 삶이 끝남으로써 
몸이 살아있는 동안 온전히 하나님께서 사시는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