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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순교자 주광호 선생

LNCK 2022. 12. 22. 10:50

http://www.nkmission.org/main/a_nk_view.php?admin=&no=35&t1=&t2=&t3=&t4=&PHPSESSID=632153a9e47b98db580e6e6c44f20b4a

 

◈탈북민 순교자 주광호 선생


최광 선교사의 증언

1998년 8월 8일, 나(최광 목사)는 김포공항에서 중국 길림성(吉林省) 
장춘(長春)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생전 처음으로 만나게 될 북한 형제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북한 사람들보고 빨갱이라고 하는데 뭐가 빨갱이일가?’ 
‘눈이 빨개서 빨갱이인가?’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주광호 선생이 있는 길림시의 한 아파트를 찾아 갔다.

긴장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아파트 문이 열리고 키가 175센티가 

넘어 보이고 어깨가 떡 벌어진 주광호 선생이 문을 열어 주었다. 

나를 이 성경통독 사역장에 보낸 박선교사님은 주광호 선생에 대해서 
김정일 위원장의 비자금을 관리하다 중국으로 도망 나온 사람이라고 했다.

주광호 선생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최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슴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4명의 북한 형제들과 조선족 강길호 형제가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곧바로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곳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둘러보니 북한 형제들은 입들을 꾹 다물고 쏘아보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얼굴들이었고 눈빛들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숨이 막혔지만 마음을 가라 앉히고 내 소개를 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최광 선교사라고 해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주광호 선생이 자기 소개를 했다. 
자기는 북한 특수부대 출신으로 15명 정도는 2~3분 내로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연마했으며,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20~30명의 다른 선교사들을 만났다고 소개를 했다. 

주광호 선생은 자신을 북한 선교사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해병대 병장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만나서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주광호 선생은 나를 애송이 선교사로만 취급했다. 

내가 처음으로 북한 사람들을 만났고, 중국도 처음 와보았다. 
당시 나는 아직 목사 안수도 받기 전인 전도사였고 
말도 별로 많이 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선교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 초보 선교사였다. 
주광호 선생은 사역장의 주도권을 나에게 주지 않고 
본인이 계속해서 사역을 진행해 나갔다. 

 

(원래 박베드로 선교사와 동역하던 그가,

사정상 이제 나와 동역하게 된 것이다)

주광호 선생의 사역은 내가 생각했던 사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북한 형제들에게 거칠었고 힘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만 했다. 

돈을 사용에서도 투명하지 않았다. 큰돈을 자유롭게 쓰던 사람이어서인지 
작은 돈을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은 중국문화였다.
사람들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잔돈은 아무렇게나 계산해 버리는데,
과거에 우리나라도 그랬다. 세계 다른 곳에서도 서구 선교사들이
현지인들과 자주 부딪히는 문제가, 작은 잔돈 계산이 불투명한 점이다.
괜히 얼굴 붉히지 말고, 그들 문화를 이해함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정말 엉망이었지만 사역을 진행하면서, 
그는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는 처음 북한선교 사역을 시작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납고 순종하지 않는 북한 형제들을 휘어잡아 나에게 순종하게 해주었고, 
북한에 대해서, 중국 조선족 교회들에 대해서, 
북한 보위부가 활동하는 방식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주광호 선생은 내게 북한의 반反기독교 교육실태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북한 정부는 외국으로 나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친다고 했다.

“외국에 나가면 십자가가 걸려 있는 교회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근처에는 가까이 가면 안 된다. 
교회의 지하실에는 사람을 가두어다가 사람의 포를 떠서 사람 고기를 
밖에 내다 팔기 때문에, 교회 건물만 보면 빨리 도망을 가야 한다.”

북한의 인민학교(초등학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했다.

“평양에 미국 선교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과수원 울타리 밖에 떨어진 썩은 사과를 9살 어린애가 주워먹자 
그 선교사가 그 애를 붙잡아다 청강수(염산)로 이마에 ‘도적’ 이라고 새겼다. 
선교사들은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고,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앞잡이이다.”

북한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반 종교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악하고 나쁜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한다. 

탈북자들은 두만강을 넘어와서 처음 선교사를 만나거나 교회라는 들으면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십자가가 있는 교회 건물을 보거나 
조선족 교회 사람들을 만나면 자꾸만 피해 다녔다. 

그렇지만 중국 공안에 쫓겨 갈 데가 없어지자 
탈북자들은 조선족 교회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교회들에서는 그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잡비도 주었다. 

탈북자들은 교회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을 잡아먹는 곳도 아니고, 교회 사람들이 
청강수로 이마에 도적이라고 새기는 무리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성경 말씀을 접하다가도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동안 북한에서 얼마나 큰 거짓에 속아서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북한 형제들에게 매일 성경을 통독 시키고, 기도훈련을 시키고 
말씀을 암송하게 하면서 몇 달 동안 사역을 진행하니 
북한 형제들의 변화가 점점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광호 선생은 흥분해서 말했다.

“선교사님 북한 선교, 소망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내가 많은 현장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 귀하게 다듬어지는 곳 잘 없습니다. 
앞으로 함께 저 북조선을 복음으로 통일할 때까지 힘차게 함께 전진합시다. 
선교사님과 함께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주광호 선생은 나를 이 사역 장으로 보내주신 
박베드로 목사님 사모님께 편지를 썼다.
  
「주광호가 서신 전합니다.
사모님을 비롯한 온 집안 식구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을 보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라고 씌어져 있더군요. 

이번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희 마음을 몰라 주었어도 
나의 참 아버지 하나님은 저의 마음의 깊은 곳까지도 알아 주시어 
동행하는 하나님임을 증명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소질 중에 제일 미약하고 미약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사모님께 한장 쓰고 싶은 마음 억누를 수 없어 
한장 서툰 글로 올립니다.

온 집안 식구들은 다 무고하시겠죠?

저는 적당히 무게가 100Kg에 거의 가까웠습니다. 
하하~ 예수 믿고 예수님 따르는 이 길이 물론 헐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번 어려운 일을 통하여 피눈물의 길이라는 것을 
더욱더 절감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느끼게 되면서 
분명하게는 하나님께서는 저를 끝없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과 
더 큰 그릇으로 사용하시려고 계획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배짱 좋은 최광 전도사님과 파트너로 되게 하여주시고 
기세 좋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참말로 감사하게 되며 
이런 배짱 좋은 동역자들이 우리 북조선 사역에 
많이 필요되고 있는 이 시기를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북조선 사역에서 
실패에 실패를 거두고 있습니까?

북조선 사역을 감당하느냐 못하느냐에 
세계 선교를 감당하느냐 못하느냐는 관건 점이며 사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북한이 세계선교 감당)

북조선은 사탄의 요람지인듯 싶습니다. 
그 사역만 하면 사탄은 별의별 모양과 방법으로 헌신 자들을 거꾸러 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실로 하나님으로 부터 무한한 권능을 받을 때라야만  
실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말씀과 기도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하여 성경 천독 읽기의 불길을 치켜올리게 하신 것은 

북조선 복음화뿐만 아니라 남한의 부패와 타락, 
남북한의 복음통일 세계 복음화를 감당시키시려고 
새로운 중생된 영을 배출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열매는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큼직하게 맺게 하여주시고 
앞으로도 더 크게 맺게 하여 주실 것만 같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성경 천독 읽기에서 
날로 날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진정 우리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현시대는 개혁의 시대이며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강한 에노지를 
공급받아야 땅 끝까지 의 복음화가 가능하다고 느껴집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도바울의 교리의 핵심을 잘 인식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마틴 루터와 같이 개혁 단행을 할 것을 
현 시기는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북한과 많이 부패되고 있는 중국 조선족 교회들, 
말씀을 제일 많이 안다고 하면서도 말씀과 너무 떨어져 엉뚱한 것을 하고 
있는 한국의 주의 종들의 모습을 보면서 
본 고장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돌아와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현재 저는 제일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짧은 사역 기간에 너무나도 많은 체험을 하게 하셨고 
능력에 능력을 부여해 주신 하나님 기도하였던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응답하여 주시니 진실로 우리 위대하신 구세주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 
넓이와 길이를 다소나마 느끼게 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최광 목사님을 통하여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은혜 사랑에 더욱 사명 감당하는 것으로 
보답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모님이 목사님 다음에 
저의 기도를 끝까지 하여 주실 것이라 봅니다. 

요즘에 우리 사역장은 세상 눈으로, 사람 눈으로 볼 때에는 험악하나 
그리스도의 기쁨과 희락이 최고조로 넘치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사모님을 비롯한 온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축원하며 
이만 여기서 맺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8,11,23 주광호 올립니다.

*다음 기회에는 편지와 사진을 부탁드립니다. 
참 제가 하나님 축복으로 약혼했습니다. 사진은 후에 보내겠습니다.


한국으로 온 후 바쁜 일정에 쫓기다 보니 
이 편지에 대해서 나는 깜깜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집구석에 싸여 있었던 편지가 순교자 주광호 선생의 
지나온 발자욱을 세상에 알리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박베드로 목사님의 사모님도 이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순교자 주광호 선생이 자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서 
많은 은혜를 받으리라고 기대한다.

이 사진은 길림에 있는 우리 사역장에서 15일간 장기 금식하고 
보호식 마치면서 길림시 시계탑 로타리에 산책 나와서 찍은 사진이다. 
윗줄 맨 오른쪽이 주광호 선생

무디 형제는 기분이 좋으면 늘 그렇게 하듯이 시계탑 로타리를 
그냥 걷지 못하고 정보 행진을 하면서 걸었다. 
북한의 군사페러이드때 북한 군인들이 기계처럼 걸어가는 동작을 그대로 했다. 

북한 형제들은 이런 동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군인 생활을 오래동안 해야만 할 수 있다고 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주광호 선생이 
북한 형제들에게 명령하듯이 선포했다.


“이제 시내 구경하던 생각을 정리하고 학업에 전념합시다!”

이전에는 한 번 외출하고 돌아오면 며칠 동안 어수선했지만 
주광호 선생의 이 한마디 말로  북한 형제들은 곧바로 안정을 찾았다.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주광호 선생은 북한과 탈북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는 자주 설교할 때마다 울면서 북한을 구원하자고 호소했다. 
그의 설교 거칠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기에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눈물과 사랑이 있었다. 
탈북자들 중에서는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주광호 선생과 나는 탈북자 선교에 대한 방법과 생각들마다 
뜻이 언제나 일치했다. 

주광호 선생은 나의 모든 생각들에 통쾌하게 호응했고 
적극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나의 사역을 보조해 주었다. 
정말 큰 힘이 되었던 귀한 동역 자였다.

당시 중국에는 탈북자가 많았다. 의지할 곳 없이 이리저리로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있었는데  
10명의 탈북자들로만 사역을 하는 것이 너무 작아 보였다. 

많은 탈북자들을 감당하고 싶었다. 최소한 30-50명은 감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길림의 아파트는 너무 좁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다가 주광호 선생과 의논했다. 
주광호 선생은 기뻐했다. 한 동안 생각하던 주광호 선생은 
북한군에서 작전회의를 하듯이 방안들을 진지하게 하나씩 꺼내 놓았다.

“첫째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둘째는 위험부담은 좀 있지만 공장을 빌려가지고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탈북자다운 발상이었다. 만약 공장을 빌려서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 공장 사장은 감옥으로 가고 공장도 문을 닫아야 한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러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깊은 산속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자고 했다. 

통독은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발전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할 수 있다 했다. 
하도 우기기에 나는 주광호 선생과 4일동안 연길의 깊은 산속을 헤매면서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주광호 선생이 적당한 곳을 아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연변의 깊은 산속 시골마을인 의란진으로 가서 경운기를 빌려 타고 
길이 없어지는 곳까지 갔다. 경운기가 들어가지 못하자 
다시 몇 시간동안 도보로 걸어 들어갔다. 

힘들게 가보니 정말 조그마한 동굴이 하나 있었고 움막도 있었다. 
넓은 공간은 있었지만 막상 이런 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자니 난감했다. 

답답한 마음에 산 정상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사역을 하려면 많은 양식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로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공급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안전은 보장 되겠지만 생활이 불가능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광호 선생을 따라 그런 곳 까지 찾아간 나도 
북한 탈북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한참 웃었다.

주광호 선생은 북한 형제들을 모집하려고 나와 함께 연길과 의란, 도문, 
개산툰, 등 많은 지역을 다녔다. 주광호 선생은 한 명의 탈북자라도 
더 돌보고 싶어 했다. 탈북자들을 만나면 진정으로 마음 아파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많은 은혜를 받았다.

▲우리가 산동성 제남으로 이사 갈 때 
주광호 선생은 약혼자 소매 자매를 찾아 심양으로 갔다. 
이 후 그는 소매 자매와 결혼하고, 산동성 일조에서 다른 사역장을 꾸렸다.

훗날 주광호 선생은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상황들을 잘 알기에 
연변과학기술 대학의 이처장님을 모시고 제남으로 내려왔다. 

중국 돈 3만 위안이라는 큰돈을 지원하려고 내려왔다. 
당시에는 거금이었다. 예배를 드린 후 이처장님이 나에게 물었다.

“사역비는 어떻게 해결하죠?”
“하나님이 주십니다.”

나의 짧은 대답에 이 처장님은 기분이 나빴는지 
가져왔던 돈을 주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주광호 선생이 떠나가면서 나를 원망했다.

“아니 사람이 왜 그래요?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안됩니까? 
그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너무 한거 아닙니까…”

지금 와서 돌아보니 내가 주광호 선생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많이 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후 주광호 선생은 상하이에서 소매 자매를 중심으로 
‘자매 사역장’을 꾸리고 북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나를 정식으로 초청하기에 가보니 5명의 자매들이 있었다. 
주광호 선생은 애인인 소매 자매와 결혼했다. 

그 후 주광호 선생은 산동 성 일대와 연길, 상해 등 여러 곳을 돌면서 
북한 탈북자 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기도 때마다 우리 사역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해 주었다.


순교자 소매 자매 

주광호 선생과 결혼 한 소매 자매는 
탈북 한 후 장백 산 밑의 한 은신처에서 3개월 동안 성경에 심취해서 
공부하고 후 신 구약 성경을 구슬 꿰듯이 깨달은 사람이었다. 

성경을 깨닫고 나서는 약 3백 쪽에 달하는 시를 써서 나에게 주었다. 
그 글을 잘 간수했지만 공안에 쫓겨 급히 이사 다니다가 분실하였다.

소매 자매는 청도시 해군 병원에서 딸 에스더를 순산했다. 
나는 광호 선생과 함께 해군 병원으로 축하하러 갔다. 

순산한 지 한 달 후부터 소매 자매는 40일 금식 기도를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해변에 나가 하루 1시간씩 자면서 철야기도를 했다. 
소매 자매는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들었다.   *소매 로도 알려짐

“너는 북조선 복음화의 초석을 놓는 자다. 
그 땅에 세례 요한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다.”

소매 자매는 이 음성을 여러 차례 받았다. 
하지만 이 음성의 의미와 앞으로 자기 삶에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알지 못했다. 

그 후 소매 자매는 박베드로 목사님 팀과 함께 천안문 광장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이 되었다. 

아내가 북송 된 후 주광호선생은 아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정말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소매 자매가 북한 보위부 감옥 안에서 전도한 
나용숙 자매와 송혜연 자매가 한국으로 와서 
나를 찾아와 소매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매 자매는 북송 되어 북한 보위부에 끌려 갔지만 
하루에 한 시간도 자지 않고 계속 꿇어앉아 기도하면서 
보위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북한 보위부 사람들은 협박을 통해서는 그의 신앙을 꺾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유혹하기 시작했다.

“너는 출신 성분도 좋고 집안도 좋지 않냐? 
그러니 너의 집안사람들을 봐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만 해라. 그러면 풀어 주겠다.“

소매 자매는 오히려 보위부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은 나를 한 번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수님을 나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선생님도 예수님을 믿어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믿어 보면 알 수 있어요.”

소매 자매는 사형을 앞두고도 조금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갇혀 있던 송혜연 자매와 나순실, 최자매 등 
여러 북한 자매들은 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소매 자매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다 자기 목숨이 아깝고 죽는 것이 두려울 텐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을까? 
저 자매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저럴 수 있을까? 
나도 석방되어 중국으로 가면 믿어야겠다’

훗날 이 자매들도 탈 북 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아내가 체포된 후 주광호 선생도 얼마 후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그가 청도 옆 일조日照에서 사역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을 때, 
북한에서부터 특별 호송 요원들이 
중국까지 들어와 그를 압송해 갔다고 한다. 
탈북자 호송에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주광호 선생의 딸은 현재 중국 동북지역 먼 친척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찾을 수만 있다면 한국으로 데려와서 내가 돌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나는 주광호 선생과 그 부인 서 자매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두 사람이 순교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살려둘 북한 정부가 아니었다. 

주광호선생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립다. 

♬오늘도 멀리 타향 길에서 복음을 안고서
예수님 십자가 그 사랑 전하여 가노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인도하시네

흰 눈길 밟아 가면서 이 시간도 북한으로
오늘도 또 가야 하는 길 복음을 안고서
새벽 미명을 깨뜨리며 진창길 밟아가네

예수님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을 안고
평화의 기쁨 전하려 이 시간도 북한으로

하나님 부르심 받들고 발걸음 가볍게
고난을 이겨가면서 즐겁게 찬송 부르네

예수님 재림 기다리며 환란을 이겨가면서
모든 것 주께 맡기고 이 시간도 북한으로
이 시간도 북한으로 이 시간도 북한으로♪

이 노래는 1998년 주광호 형제와 함께 지내던 
김철수 형제가 지은 노래이다. 김철수 형제는 북한으로 복음을 전하러 
들어가기 위해 40일 금식을 한 후 이 노래를 작사, 작곡을 했다. 

김철수 형제는 내가 길림 사역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북한으로 들어갔다.  
주광호 선생에게 이 노래를 배운 후에 
우리 사역 장에서는 계속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우리 사역 장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찬양이었고, 
나와 모든 북한 형제들의 신앙 고백이었다. 
부를 때마다 우리는 많이 울었고, 또 듣는 이들도 많이 울었다.

▲주광호 선생이 전도한 사람
2001년 우리 사역이 서안에서 전부 공안에 체포된 후 
나는 4일째 되는 날에 한국으로 강제 추방을 당했다. 
그 후 2008년 4월에야 나는 입국금지가 풀려 중국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북한 탈북자 사역을 시작했다. 
다시 탈북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중국의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하얼빈시 동녕촌에 살고 있는 윤자매를 만났다. 

놀랍게도 윤자매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성경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윤자매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자매는 북에서 고아로 자랐다. 
남편도 고아인 남자를 만나 아이 셋을 낳았지만 
남편은 36세에 굶어 죽었고, 뒤이어 아홉 살 난 아들이 굶어 죽었다. 
열두 살 난 딸도 굶어 죽었다. 

마지막 남은 딸을 살리려고 식량을 구하러 탈북했다. 
중국으로 나온 윤자매는 성경 공부를 하는 사역장에 들어가서 
성경 통독을 하였다고 했다. 

당시 북한 탈북자들에게 
성경 통독 사역을 한 선교사님들이 흔치 않았기에 
내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었다.

“어느 선교사님에게 배우셨나요?”

윤자매가 말했다.
“주광호 선교사님이 인도하는 통독 사역장에서 공부했습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신비감에 휩싸였다. 
주광호 선생이 10년 전에 목숨 걸고 했던 사역의 열매를 만난 것이다

윤자매는 광호 선생과 그의 아내 소매 자매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그때 윤자매는 북조선 복음화를 위한 확실한 사명을 붙잡았다. 

윤자매는 그 후부터 소매 자매와 언니 동생 하면서 지내다가 
폐결핵으로 죽기 직전의 조선족 남자를 만나 
그 남자를 간호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에 
그 사랑으로 조선족 남자를 섬기기로 했다. 

그 후 윤자매는 소매 자매와 갑자기 연락이 끊어지면서 
그가 한국으로 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은 북송되어 순교)
지금도 소매 자매가 보고 싶어 애가 탈 때가 많다고 했다.

나는 윤자매에게, 주광호 선생과 소매 자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윤자매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었다.

윤자매는 옛날에 주광호 선생과 소매 자매로부터 받은 사랑과 
그들을 통해 받은 은혜로 남편을 섬기고 돌봐 주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다. 

동네 사람들이나 교회 사람들 모두가 윤자매 때문에 
남편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고, 
다른 모든 이들도 윤자매로 인해 감동을 받고 있었다. 

윤자매는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교회에서도 인정해 주고, 남편도 떠나면 안 된다고 애걸할 정도로 
잘 해 주고 있고, 식모 일을 하면서 한 달에 800위안을 받고 있었다. 

일을 잘하니 주인은 내년부터 1천위안을 주겠다고 더 줄 수도 있다고 한다. 
탈북자였지만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었다. 
윤자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역장으로 오고 싶어 하며 말했다.

“선교사님 하나님이 저를 다시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여태껏 육신적으로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풍요로웠지만, 
마음은 정말 허전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선교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에게 다시 사명을 일깨워 줬습니다.”

윤자매는 1년 동안 성경 공부를 한 후 
한국으로 보내 주겠다는 나의 제의를 거절했다.

“선교사님, 저는 1년간 공부를 하고 훈련 받아도 한국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중국에 남아서 북한이 열릴 때까지 북한 선교를 하겠습니다.”

주광호 선생은 떠나 갔지만 
그가 남긴 제자에게는 그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나는 주님께 감사했다. 주광호 선생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나는 보았다. 주광호 선생! 
그는 역사에 오랫동안 기억이 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김권능 목사의 증언

☞나의 형제, 주광호 (ENG SUB) - YouTube

 

저(김권능 목사)는 1997년도에 생존을 위해서 북한을 탈출했다가 
1998년도에 최광 선교사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2012년에 한국에 와서, 총신대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인천한나라은혜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권능 목사입니다. 

제가 순교자 주광호 선생을 처음 만났던 때가 1998년도 8월이었어요.
그때 사실은 그분이 탈북자인 줄 몰랐어요. 

당시는 우리가 돌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야산 골재 채석장)
그 연변 변두리 지역에 조선족교회 전도원이라고 부르는 분하고 같이 오셨죠.

처음에는 제 친구를 데리고 나가서 한참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친구가 돌아왔어요.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이제 학교 간대요.' 

그러더니 나보고 '같이 안 가겠냐?' 물어보는 거에요. 

제가 한참 고민을 하다가 
사실은 그때는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우선인데, 
학교 라고 하는 것이 조금 좀 거북스럽긴 했어요. 돈도 못 벌고 하니까요. 

한참 좀 고민하다가 친구도 간다 그러고.. 
이제는 내가 돌공장에 혼자 남을 거 같고.. 그래서 '저도 가겠습니다' 그랬죠.

그 다음 날, 우리는 연길 시내로 가서 어제 본 주광호 선생을 만났어요. 
그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연길에서 길림시로 갔어요.

그 분은 기차에서 오는 내내 우리한테 뭘 가르쳤나 하면,
'주기도문 암송 해라, 그리고 시편 136편 암송 해라, 사도신경 암송해라.
학교에 가는 사람이 이것도 암송 못하면 안 된다.'
그래서 제가 기차에서 그것만 암송하면서 갔어요.

길림시에 밤 12시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말하자면 학교라는 곳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생각하던 '학교'는 아니고  
사실은 성경통독장 이었어요.

거기서 최광 선교사님을 처음 만났거든요. 
그 때 최광 선교사님이 이렇게 기도를 하셨는데 
'이 민족을 좀 살려주시고, 우리 동족들을 좀 구원해 주시고...' 
이런 기도를 할 때, 제가 들으면서 마음이 진짜 좀 따뜻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거기 보니까, 이전에 돌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거기에 나보다 먼저 거기 통독장에 와 있었어요. 반가웠죠.
친구가 없어져서 어디 갔는지 궁금했는데, 사실은 통독장에 와 있었던 거죠.

다음 날 아침에 주광호 선생이 '다 모이세요!' 하고 우리를 다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북한에서 왔습니다!' 하더라고요. 

제가 그 분도 탈북자 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지요.
그 분은 자기 원래 북한억양 으로 이렇게 우리한테 메시지를 전하는데 
정말 북한선교에 대해,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제가 주광호 선생님께 감사한 것은,
어떻게 보면, 제(김권능 목사)가 최광 목사님을 만날 수 있는 
그 중간 역할을 하셨던 분이시죠.

이 분은 과거에 북한 특수부대, 그것도 기수 역할을 하던 분이었죠. 
그러니까 그런 스타일로 설교도 하고.. 막 이렇게 말씀도 전하고 하는데 

그때 막 탁자를 두드리면서 그 분이 했던 말이 
'우리 동족들 북한에서 굶어죽고 있는데, 우리가 구원 해야 되지 않느냐?' 
라고 하면서 엄청 뜨겁게 설교할 때마다... 제 가슴이 막 울렁거렸던 거 같아요.

이분한테 신분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분도 참 대단하셨다..'

막 기차 타고 다니고, (열차 안에서 신분증 검사를 종종 함)
여기저기 막 중국교회에 가서 자고 다니고 했는데 
누군가 공안이 단속하면 분명히 걸리는 데도,
겁도 없이 그냥 주의 일을 하면서 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북한 탈북민 형제들을 만나면, 
또 데리고 가서 양육을 하고 
'앞으로 이렇게 사역하다가 공안한테 잡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처음에 믿음이 없을 때 그런 말할 때, 
그 분은 '괜찮아, 하나님이 다 살려 주실 거야.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어!' 

막 이런 식으로 하니까, 그 분의 신앙의 모습이 
정말 북한 노동당에 최고로 충성했던 사람이 
정말 예수 믿으면 저렇게 바뀌어질 수 있다.. 라는 것을 우리한테 보여준 거죠.


▲주광호 선생이 탈북하고 예수 믿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1995년도에, 12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까 
집에서 식구들이 굶고 있더래요. 

그때 당시에 그 가족들을 보안원(경찰)들이 괴롭히고,
자기 어머니가 나가서 조금씩 장사하면 
보안원들이 와서 괴롭히고, 장사 하지 말라고 그러고... 

꼭 지정된 그곳에서만 장사 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한 번씩 와서 물건을 빼앗아 가거든요.

근데 장사하는 사람은, 그 물건들이 자기 전재산이고 생명과도 같죠.
그 당시에 장사는 장사가 아니었죠. 거의 행상 수준이었죠.
거기서 물건 다 팔아야 겨우 쌀 500그램 사서 가족의 하루 끼니를 해결했죠.

근데 보니까 그걸 못하게 하고, 못살게 굴고 하니까 
주광호 선생이 보안원을 두들겨팬 거예요. 
그래 놓고 이렇게 도망쳐서 탈북을 했던 거죠. 

그리고 주광호 선생님의 사모님은
평성의 과학자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평양에서 28킬로 떨어짐
부모님들이 다 과학자였죠. 엘리트 집단이죠. 

그리고 대학에서 국문학과도 졸업하고, 그래서 글도 힘있게 잘 써요. 
그런데 사모님(이하 소매자매)도 그때 경제난 때  (*1995~ 고난의 행군 때)
뭐 북한에서 하라는 대로 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큰 타격이 왔으니까요 

근데 이 분은 탈북해서 그 장백(백두산) 쪽에서 눈 속에서 헤매고 다니다가 
그 발가락 몇 개가 다 잘렸어요. 동상을 입어서. 그런 아픔이 있었고... 

그러다가 훗날에 두 분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그 후에 소매 자매는 자매사역을 하신 거지요. 

탈북민이 가족 단위로 사니까, 형제들을 만나면
자매들도 같이 돌보게 되고, 통독사역, 양육을 받게 되죠.

그 사모님이 워낙 이렇게 잘 하니까 자매들을 잘 인도를 했고 
나는 여러가지 고통을 겪고 여러가지 북한에서의 어떤 잘못된 교육을 받고 
그러다 보니까, 그게 예수 믿고 나서 자기의 삶이 올인하기가 사실 어렵거든요.

그런데 그 분(주광호 선생 내외)들은, 북한에서 그렇게 공산 교육받고도
막 그렇게 복음에 올인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다른 탈북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모델로 되어 있었던 거 같아요. 


▲그 후에 제가 또 가장 가까이에서 
그 분의 소식을 알게 됐을 때가 북한에서 였어요. 

나는 2001년 7월 달에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붙잡혀서 
북송되어 약 3~4개월 정도 북한의 보안소에서 취조를 받았어요. 

제가 2001년 9월 달에 거기 수감되어 있을 때 
주광호 선생도 보위부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북한에서 들었어요. 

당시 그분은 산동성 일조에서 통독반 사역을 이끌고 있다가
학생들과 같이 다함께 중국 공안에 잡힌 것이죠. 

나중에 주광호 선생과 같이 수감되었던 북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보위부에 잡혀 왔어도, 광신자였다.
아니 보위부 수감 중에도, 나보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사람들이 막 쉿쉿! 주의를 주었다는 거죠.

보위부 수감 중에서도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건 살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거예요.

감방은 작잖아요.
그런데 자꾸 툭툭치면서 '예수 믿어야 돼, 예수 믿어야 돼!'
그 정도로 전도에 열심이었습니다. (라고 동료 수감자가 나중에 증언해 주었죠)

이 분의 부인(소매 자매)이 먼저 2001년도 2월에 북송이 되었습니다.
2001년 춘절 때, 중국의 파룬궁 믿는 사람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건이 있어서, 공안들이 막 특별기간을 정해서 감시감독할 때,
천안문 광장에 평소 습관대로 기도하러 나갔다가, 불심검문에서 체포된 거죠.

그때 같은 구치소에 있던 분들이
예수 안 믿는 분들이 그 소매 자매를 보고, 또 주광호 선생을 보고
'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대단하구나!' 라고 감동했고,

그래서 나중에 석방된 후에, 자기도 예수를 고백했던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사모님은 보위부에서도 계속 찬양하고, 
계속 이렇게 얻어맞고 매 맞고 하게 되면 까무러치다가 

정신만 돌아오면 또 노래하고 그러니까... 

순교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두 가지 부류가 있어요.
한 사람은 그걸 보고 감동이 돼서 '나는 저분처럼 예수님 믿어야 되겠다'

그런데 훗날에 내가 만났던 자매는, 그 자매가 이렇게 순교당하는 모습 보면서 
'저 사람은 미쳤지..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왜 자꾸 그렇게 하다가 얻어맞고..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뭐 이렇게 이해를 못 하고 있더라고요. 

'저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보위부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이런 중앙당의 사람(보위부 고위급)들이, 그런 인식을 가지는 게 어디서 왔냐면 
바로 이런 주광호 선생처럼, 이렇게 순교하시는 분들을 바라보면서 
가지는 거예요.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구나...' 
그러니까 북한이 기독교에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죠.


북한이 늘 가르치는 게 뭐냐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조국과 더불어 너희들은 영생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보다 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 들인 거예요.

그리고 그 순교자들을 통해서 
이 사람(취조원, 보위부, 간수)들은 직접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니까 

당시 북한에서 북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보다 수준이 더 높았어요.

더 높게 봐요.(아주 존경했어요)

이것은 다 순교자들 때문인거죠. 그들의 담대한 신앙 때문이었죠.

저는 참 이 분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할 때마다 
정말 많은 일들을 하셨고 
정말 우리 탈북민들에게 복음을 많이 증거 하셨고 

그런데 두 분 다 순교를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이 과연 예수 믿을 수 있을까?' 라고 질문에..

그분들은 북한에서 그렇게 철저한 공산당 교육을 받았는데 
유물론 교육을 받고 그랬는데 

정말 그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를 고백했던 사람들이니 만큼

그것을 듣고,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분들께 대한 그 존경심이 있지만 

아울러서 그 분들을, 그렇게 위대한 순교자 되게 만드신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북한이 소망이 있다고 하는 게 
북한에서 지금은 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찬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렇게 주광호 선생 내외분처럼 
그런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저는 그 분들 통해서, 그걸 바라보고 
지금도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지금 그들이 흘린 피가 
북한에서만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했던 우리 마음속에서도 계속 역사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통독장에서 함께했던 친구들이, 목회하고 신학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이 삶으로 보여주는 것들이 다 그렇게 하나씩 열매로 드러나고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