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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4:7~21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LNCK 2022. 12. 22. 20:14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요일 4:7-21) - YouTube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요일4:7~21              출처, 정리

△말씀을 시작하면서, 잠시 눈을 감고 제가 드리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어떻게 느끼고 계실까요?' 라는 질문 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지금 생각하고 계실까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하는 질문입니다. 
30초간 잠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다 포함할 순 없겠지만, 세 종류의 생각들로 
한번 여러분의 생각을 추정해 보고자 합니다. 

1)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모습에 대해서 <실망>하고 계실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어떤 심각한 죄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고 있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마 나에 대해서 실망하고 계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2) 또 다른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모습에 대하여 <분노>하고 계실 거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나의 크고 많은 죄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3) 한편 또 다른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를 생각하실 때, 그분의 마음 속에 사랑이 샘솟고,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계실 거야' 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자기도취에 빠진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그런 뻔뻔스런 사람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죄를 잊고 있는 것도, 
또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아는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3)의 생각이 든다면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거하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에 대하여, 전혀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분노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 대해서 실망하시고, 또한 분노 하십니다. 
그러나 실망과 분노가 있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에 대해 때로 실망도 있고, 분노도 있지만 
자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떤 부모는 사랑이 완전 사라지는 부모도 간혹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부모라면, 실망과 분노보다도 
사랑이 더 큰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의 어떤 문제나 
우리 행위(범죄)로 인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성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와 어떤 문제, 우리의 상태에 따라서 
조변석개 달라지지 않으시는.. 
하나님 본성에서 나오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이 성품이 무서운 것입니까?
성품은요, 어떤 상황, 어떤 문제를 대하든지..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성품이 온유와 사랑으로 가득한 성도는  
아주 큰 문제, 큰 대적 앞에, 원수 앞에 설 때도 
사람과 존중으로 그렇게 대하게 되는 거예요. 성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기 성품이 분노와, 의심과, 그리고 공격적인 분은 
아주 작은 문제 앞에서도,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싸우면서 대화합니다. 그게 성품이죠. 

우리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어떤 죄와 허물과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그 마음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결정짓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샅샅이 드러내서 
처벌 하시는데 집착 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날마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분노하시는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얼마나 신중하고 철저하게 다루는지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순종하지 못하고 죄 지은 자신을 자책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더 가득 차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두려움에 대한 상반된 메시지를 (둘 다) 주시는 거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죠.
-또 한 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몸뿐 아니라 영혼까지 멸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까? 이런 상반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하는 두려움은.. 우리가 제거해야 되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되는 거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에,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하는 이 두려움은
결코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본문 4:18절 말씀을 먼저 보십시오.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에 대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4: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두려움으로 가로막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아담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말한 대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원래 인간에게 없었던 두려움이, 죄로 말미암아 찾아 온 것입니다. 

'벌거 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입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사라졌을까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지식의 옷, 문화의 옷, 종교의 옷, 
이런 여러 옷들을 입음으로써, 자신을 포장하여 
자신의 두려움을 감춥니다.

때로는 선행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감추고 
하나님 앞에 나가고 싶은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는 이 존재로부터 나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우리는 포장 함으로써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옷을 벗겨 버리십니다. 
'너 스스로 만든 옷으로는 그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여러분, 이 두려움은 어떤 문제를 만들어 냅니까? 

'벌거벗어 있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못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많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조차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수고와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헌신과 사랑을 먼저 드려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이러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깊은 두려움.. 이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죄책감에서 나옵니다. 

죄책감에서 나오는 그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게 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되지 못한 사람이며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 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내쫓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려움은, 생각보다 아주 뿌리가 깊어서 
그리고 교묘하게 우리 마음에 숨어 있어요. 

문제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몰라요. 

우리의 많은 문제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문제, 
또 우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의 많은 부분이 
이 두려움 때문에 다 나오는 거예요. 

성격이 급하고, 쉽게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하는 사람도 
다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에요.

우리 아이들의 심리를 보면, 공격적인 아이가 왜 그렇게 나오는가? 
알고 보면 두려움이에요. 
두렵기 때문에 자기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죠. 

우리 몸 안의 질서, 그 면역체계가 파괴되는 것도 뭡니까?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불순한 영향에 대한 과민반응입니다.
우리 몸의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이 깊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우리 관계도 다 파괴되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많을수록 미신에 잘 빠지는 거에요. 
두려움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의 말에 민감해서 잘 흔들리는 것입니다. 
다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하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으로, 마치 노예와 같이 
'내가 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실 거야'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지 못하는,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즉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거예요. 

오늘 주일 예배 출석하는 게, 혹시 두려움 때문에 나오신 분 계세요?
주일 날 예배 출석 안 하면, 하나님이 나를 벌 주실까봐 두려워서 
두려움 때문에 혹시 교회에 나오신 분 계십니까? 

그러면 한번 과감하게 주일예배에 빠져 보세요. 
'하나님이 정말 나를 벌 주시나?'  

제가 예배를 빠지라고 그렇게 잘못 인도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한다면 
신앙의 기초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하는데 
그 수고와 헌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런 기쁨의 섬김이 아니라 
자꾸 자기 공로가 되는 거지요.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많은 것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셔야 된다'고 하는 
잘못된 관계 속에서 들어가는 거예요. 

잘못된 종교적 의무감, 종교적 공로 의식,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잘못 되어서 나오는 결과죠. 

그런데 이 두려움 자체는,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이 두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두려움이 없다면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도 없다. 
두려움이 약이라면, 사랑은 치료이다. 
두려움은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사랑이 온전해질 때 두려움은 끝난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두려워하는 마음을 통해서도 역사하셔서실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쫓으면  :18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는가요?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여기서 '담대함' 이란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게 되었을 때  :18
우리 마음 속에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17

이 담대함은 뻔뻔함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우기며 
자기는 괜찮다고 여기는 그런 뻔뻔스러움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양심의 자책에 따른 그러한 죄가 분명히 있음을 알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거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섰을 때도 
담대할 수 있는 그 담대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케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케 되지 못하면 

날마다 우리는 두려움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거에요. 
천국 가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 하는 거죠.
하나님 앞에 벌 받을까 봐 무서워서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되면 
우리는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서두에 질문드릴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지금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마음 속에 사랑이 샘솟고 
그리고 지금 나를 활짝 미소짓는 얼굴로 웃고 바라보고 계실 거야!' 
이게 담대함입니다. (*자기 암시로 고의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이 있으면, 저절로 이게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나를 기뻐하시며 
나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계실 거야' 

▲그런데 아직도 그러한 마음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왜 우리 안에 온전케 되지 못합니까?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믿음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믿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지식적 믿음이 아니라, 신뢰 관계에서 오는 믿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그런 믿음의 단계로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나를 용서하시고 
나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제가 믿게 해 주십시오!'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뛰어난 신학자인 벵겔 이라는 분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발전을 이렇게 4단계로 표현했습니다. 

1) 두려움도 없고, 사랑도 없는 단계 
우리가 죄인인 줄도 몰랐을 때는, 사랑도 없고 두려움도 없어요.

2) 사랑 없이 두려움만 있는 단계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 줄 깨달았을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3) 나의 큰 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이 여전히 있는.. 두려움과 사랑이 모두 있는 단계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완전히 믿게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케 됐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사랑만 있는 단계, 담대함만 있는 단계!

(그렇다고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게 아니죠.
두려움과 경외감은 여전히 있지만, 사랑이 지배적이란 뜻이죠)

여러분 우리의 영적 생활이 이렇게 발전해 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그렇게 점점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기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두려움에서 이렇게 담대함으로 변화시킨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케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기에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쫓고, 또 담대함을 가지고 해 주시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 온전한 사랑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 사랑이 온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에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십니다. 
성령님은 또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그 성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온전한 사랑,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히 하나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는 온전한 사랑, 완전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완전하신 사랑이 아니라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두세 사람이 함께 아무리 연합하려고 해도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독생자가 가기 싫은 걸 억지로 오신 게 아니라 
그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순종해서 스스로 자원하여 오셨고 

성령님을 보내시고, 성령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 속에 
우리가 거할 수 있게 하셨다는 거예요. 

'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다' ... 라고 말씀합니다. :9   

사랑은 여기에 있다는 것이죠.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는 거예요. :13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나요?
사랑 때문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해서 창조하신 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거에요.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에요.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셨어요.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왜 온전한 사랑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조건 없이, 아낌없이 값없이 그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에요. 

눅15장에 보면,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서 그 아들을 껴안고, 그 아들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마음이 풀려서 잔치 베풀어 준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도 
탕자가 자신의 삶을 뉘우치기 전에도, 회개하기 전에도 
그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아들을 이미 용서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언제든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먼저 달려왔다는 거예요. 

아들에게 먼저 달려갔다는 그 모습이 너무나 중요한 거에요.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마음이 풀려서 용서해 준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 아들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먼저 베풀어 주시는 사랑! 


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한 사랑입니까? 
먼저 우리를 찾아 오시는 사랑이기 때문이에요.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온전한 사랑은 언제나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1) 만약이라는 사랑
만약 당신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겠다... 
조건적 사랑입니다. 

2) 무엇 무엇 때문에의 사랑
그것은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죠. 
당신의 이러이러 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죠. 
그것은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조건이 없고,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을 때는 사랑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3) 온전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사랑이에요. 
먼저 베풀어주는 사랑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화해를 요청하고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

이 사랑은 언제나 우선권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언제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어느 날 문득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오면.. 내가 먼저 나온 줄 아시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돌아온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처럼 
두 손을 활짝 열고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작 올 걸...' 

'이렇게 먼저 용서하고 기다리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걸' 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보다 항상 먼저 우리를 앞서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어떤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자책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표정은, 미소가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이런 면이 있죠. 그런데 이런 면만 100% 전부로 믿으면 
'도덕적 해이, 도덕방임주의'에 빠질 수도 있죠. moral hazard)

이 사랑이 왜 온전한 사랑입니까? 
이 하나님의 먼저 베풀어주시는 온전한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이 사랑이 '나'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로 '서로'에게 그 사랑이 향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기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강조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을 어디에 할애 했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쫓고 
담대하게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이해시키고 설명하는데 
더 많은 본문을 할애하고 있는 거예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서로 향하여, 누군가를 향하여 사랑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거죠. 

8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어떠한 사랑은 
그 사랑은 모두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사랑이에요. 

시내에 흐르는 물은, 원래 어디 있던 겁니까? 
저 넓은 대양 바다에 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증발되어 구름으로 되고, 비가 되어서 대륙에 뿌려지면서 
그 물이 골짜기를 따라 시내를 내려가서 바다로 흐르듯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에게 그 사랑의 단비가 내려서 
그 사랑이 흘러가는 거예요. 

사랑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 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이런 사랑의 순환이, 우리의 삶 속에 흘러나게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랑이 메말랐다면 자신을 자책하기 보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를 어떻게 사랑 하셨는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그 사랑을 믿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는 사랑이 내 안에 다시 흘러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상대방에게 먼저 요구하기보다, 내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나'로부터 '우리'로 변화되는 
그런 사랑으로 변화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