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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21:1~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LNCK 2022. 12. 31. 06:17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시121:1~8  2022.01.02.스크랩, 정리


◑서론/ 자기 소원성취를 위한 금식은 원래 정신에 어긋납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제가 속한 선교단체에서는 매년 연말이나 
연초에 금식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3박 4일인데 첫날 저녁부터 금식을 시작해서 셋째 날 저녁까지 금식하고 
마지막 날 아침은 죽을 먹었기 때문에 실제 금식은 일곱 끼니였습니다. 

일곱 끼니를 금식할 때 제게 제일 힘들었던 때는 네 끼 때였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먹고 싶은 것들 이를테면 짜장면, 짬뽕, 치킨, 어묵 
등이 얼마나 눈앞에서 많이 아른아른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번은 금식 수련회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모든 모임은 끝이 났고 이제 다음 날 아침이면 
죽을 먹게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있었습니다. 

늦은 시각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제 숙소에서 나왔는데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엇을 먹는 소리였습니다. 

그 방에는 제가 아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 보았더니 
과자 파티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때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자정이 넘었다는 것은 약속한 금식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방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먹는 과자가 그렇게 맛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과자를 금식 수련회에 가지고 가서 
그것을 그때까지 먹지 않고 참는 것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면서도 금식이 무엇인지 금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단지 금식했다는 그 자체에 빠져서 만족하기 쉽습니다. 

​마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당시 금식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 금식하고 있어서 음식을 먹을 수 
없으니까 권하지 마십시오라는 의미로 머리와 수염을 길렀고 
얼굴에는 하얗게 분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진심이었고 본질이었는데 
나중에는 가식과 포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향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상을 받았다.’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영수증을 받았다’입니다. 

즉 그러한 모습으로 아무리 경건을 연습해도 그것은 이미 영수증을 
다 준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상급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금식일은 1년에 한 번 7월 10일 
대속죄일이었습니다. (*신년은 나팔절인 7월 1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국가적인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금식을 몇 번 더 하곤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금식의 횟수가 더 많아졌고 
더 외식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했습니다. 
눅10:12에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바리새인들이 1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틀 금식했다는 게 아니라, 두 번 금식했다고 했으니, 
두 끼를 금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의 헬라어가 네스튜오 인데,
이 말은, 완전 금식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 
또는 좋은 음식을 금하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abstaining customary and choice food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금식할 때, ‘쥬스 금식’ 같은 것도 합니다.
쥬스만 마시고, 평소에 먹던 식사는 하지 않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하시딤(구별된 자, 경건한 자)’의 전통을 따르고자
외식적이라도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금식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금식에 대한 오해는 금식을 하나님께 초고속으로 응답받는 방법이라고 생각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치 자녀가 자신의 요구 사항이 있지만,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밥을 먹지 않고 부모님께 생떼를 쓰면 들어주듯이 
우리가 밥을 먹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들어주신다고 여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원래 금식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건 단식투쟁에 더 가깝지요.
그 기도의 소원이 올바르지 못하고, 자기 정욕적인 것이면
아무리 금식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저런 이유를 핑계 대면서, 금식을 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샤머니즘적인 목적으로 금식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고, 
더욱이 ‘금식만 하면 다 해결된다’고 여기는 것도 오해입니다.

​그래서 금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금욕) 
-빨리 응답받는다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 라는 겸허한 신앙 고백입니다. 

즉 금식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아기가 출산되었지만 심한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금식하며 밤새도록 엎드렸습니다. 

나이 든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다윗은 요지부동이었죠. 
그러다가 7일째 되는 날에 다 그 아기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아기가 아플 때도 저렇게 금식하는데 아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상심하겠느냐 라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느낌으로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신하들이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자 다윗은 금식을 중단하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차려오게 하여서 먹었습니다. 

신하들이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왕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시더니 
아이(남성명사)가 죽자 음식을 드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다윗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

다윗은 금식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금식하면 이루지 못할 기도 제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 아이의 생사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식은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겠다가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코로나로 바뀌어진 환경​

이게 맞다/틀리다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
이런 현실이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왔다는 얘기입니다.

코로나19는 지난 2년 동안 전 세계를 강타하며 
교회는 물론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대면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비대면이 일상화가 되었습니다. 
비대면이 일상화가 되었다고 해서 
전혀 보지 않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한 욕구가 훨씬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비대면이 일상화가 되고 온라인을 통해서 많은 것이 이루어지게 되자 
우리에게 굉장히 가까이 다가오게 된 것이 메타버스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게임이나 엔터테인먼트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앞으로 이것이 사람들의 삶에 굉장히 많은 영역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버스는 초월이나 가상을 의미하는 접두어 메타와 
우주 또는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의 합성어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가 합쳐진 확장 가상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나 매트릭스 속의 세상이 메타버스입니다.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것도 모두 메타버스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의류, 가방, 자동차, 엔터테인먼트 등의 새 제품, 새 작품을 
공개하는 최고 통로가 TV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통로가 인터넷으로 바뀌고 
후에는 유튜브로 바뀌고 
이제는 메타버스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코로나19로 음악 팬들이 콘서트장에 직접 갈 수 없게 되자 
가수들이 메타버스에서 콘서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방탄소년단이 포트나이트라는 게임 메타버스 공간을 통해 
히트곡 다이너마이트 안무 버전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래퍼 트래비스 스캇이 메타버스 공간에서 콘서트를 열었는데 
1천230만 명이 동시 접속해서 참관했습니다. 
만약 그것을 서울 마포구에 있는 약 6만 6천석의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직접 공연했다면 그 경기장을 가득 채워서 186번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공연을 했을 때보다 10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올해는 물론 앞으로 메타버스와 관련된 경제 규모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기에 
더 많은 기업과 사람들이 메타버스 산업 속으로 뛰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에 훨씬 더 깊숙하게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메타버스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면 예배 공간을 마련해야 하고 
예배에 필요한 시설 음향 의자 등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공간이나 시설이 없어도 가상공간에서만 해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으로는 자기가 사는 가까운 곳 또는 그렇게 멀지 않은 교회에 
등록해서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 지방에 있는 교회의 일원이 되거나 
지방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있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국에 사는 사람이 외국에 있는 교회의 일원이 될 수도 있고 
외국에 사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죠.

​▲메타버스에는 네 가지의 영역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세계와 가상물체를 보여주는 기술인 증강현실과 *포켓몬고 게임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와 같이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하는 라이프 로깅, 
-구글 어스와 같이 위성사진으로 세계전역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는 거울세계 
-현실과 유사하거나 완전히 다른 세상을 구현해 사용자는 아바타를 통해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가상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메타버스에 더욱더 심취하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금 전에 무엇을 했는지 
다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나 연주회에 직접 가지 않아도 볼 수 있고 
내가 사기 원하는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서 매장을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도 맺어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해주고 
또 다가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더욱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메타버스가 지금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 더 발달하면 
삶의 질도 몇 배 또 몇 십 배 더 좋아지게 되겠습니까? 
또 메타버스의 깊이 들어갈수록 메타버스에서의 삶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사람들의 인격도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게 되겠습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에 올려진 사진이나 영상이 
그 사람의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과도하게 꾸며진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메타버스의 환경이 점점 더 커지면 커질수록 
인격의 함몰 웅덩이도 점점 더 커질 가능성이 큽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눈에 보이는 그 무엇에 주목하는 것보다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우리의 눈을 드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메타버스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교회의 역할이 더 중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며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앞으로 살아가실 공생애를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모두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향하지 말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가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디로 올라가면 천하만국이 다 보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식수원이자 가장 높은 산인 2,814미터의 헤르몬 산 
정상에 올라가면 다 보이겠습니까?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서면 온 세상이 한눈에 다 들어오겠습니까? 

마귀가 예수님께 보여준 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메타버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2022년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경제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갈등 등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3월에 대통령 선거와 6월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과대 포장된 말과 선심 공세, 상호 비방, 편 가르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죠. 

거기에다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책임도 있습니다. 
어느 부분을 돌아보아도 2022년이 새해로 엮어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망 가운데 2022년을 맞이하고 
올해가 새해로 엮어질 것을 믿는 것은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지켜주시는 분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눈을 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올해 표어 ‘눈을 들리라’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의 1년은 정녕 새해로 경작될 것이고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시121:1~8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금식의 참된 의미는 단지 굶는 행위에 있지 않고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것을 되새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금식이 단지 하나님께 빨리 응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식의 바른 의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그 하나님만 목적 삼고 살아가겠노라는 결단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셨지만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는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며 
눈을 들어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금식의 의미와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올해 2022년 우리 교회에 ‘눈을 들리라’ 라는 표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세속적 가치관으로 포장하여 다가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영원하다고 속삭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121:1

그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하나님, 
우리의 출입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옵나니, 오직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는 우리를 통로 삼아 
우리의 가정과 일터, 우리 사회를 세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올해가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새해로 경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