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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2서, 성도들을 참으로 사랑한 사도요한

LNCK 2023. 1. 1. 19:49

◈성도들을 참으로 사랑한 사도요한           요한2서           여러 설교 정리

 

아래 1절은, 사도요한이 성도를 참으로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공자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공자가 참된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이런 말을 했다고 봅니다.

그러니 평생 도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습니다만

이것이 진리라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14:6절을 아시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였지만 무엇이 길이며 생명이며 진리인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길과 생명과 진리를 알게 되었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까? 다른 것들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습니까?

 

오늘날은 진리에 대한 질문조차 없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미 이 시대의 흐름이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여기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고 여깁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하자면

사람들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가가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거룩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 자기가 옳다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디모데 후서 3:1-5절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세상이 꼭 이 말씀과 같은 세상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자기 사랑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진리의 기준이며 척도가 되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면 진리이고

나를 괴롭게 하고 손해가 나게 하는 것들은 다 비 진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백번을 잘 해주다가도 한번 잘 못하면

백번 잘해 준 것은 어디에 갔는지 간곳이 없고

나의 마음에 상처가 되거나 경제적인 손해가 생긴다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남편이 좋은 남편입니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이 좋은 남편'이라는 진리가

아내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진리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진리 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참으로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신

예수님이 배척을 받았던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배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진리가 무엇임을 알며, 그 진리를 아는 자들을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은 요한서신서의 2개의 키워드입니다.

 

이 서신을 기록한 사람이 장로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문체나 내용을 보아서

요한 1서를 기록한 사도요한으로 봅니다. *원전에는 정관사 ‘호’가 있음

 

△‘그 장로’가 어디에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까?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합니다.

 

이 부녀와 자녀를 특정한 인물로 보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로 보는가.. 하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둘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정이든 교회이든 간에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택하심을 입었으므로 장로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장로만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성도)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쏟아지는 설교들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듣기가 정말로 희귀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이야기하면, 사람의 선택과 결정이 무너져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이야기하면 (칼빈의 예정론 등)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참 귀한 분이라서요.

 

1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를 향하여 참으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택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참 성도)도,

또한 그들(이웃 성도)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동료 성도)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진리를 아는 일들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2절을 봅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함께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리가 어떻게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까?

 

요14:16-17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진리가 되시는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영으로서, 자기 택한 자들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영은 진리의 영이기에 세상은 능히 받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에 받을 수도 없는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며 생명이며 길이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니,

사람들에게 배척받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진리라고 따르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에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과 행복을 진리의 척도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는 밀쳐내고 싶은 진리이지 환영하며 받아들일만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언제 진리에 관심이나 있습니까?

그저 내 몸 하나 편하고 행복한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이런 슬로건이 교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꿈대로 되는 교회’도 있고 말입니다.

 

진리는 간 곳이 없고 자신들의 욕망만이 담겨져 있는 곳이

과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딤전3:15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기뻐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가 주체가 되셔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주심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넣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그 약속하신바 진리의 영을 우리 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가 임하면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에

이제부터 자기의 진리관은 무너지고

주님의 진리가 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진리가 채워지는 것입니까?

 

3절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 성도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 임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다.

 

고린도전서 2:1-5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전하면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말과 전도가 사람이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서신이나 바울서신의 공통점이 진리에 대한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내용만이 아니라 진리가 어떻게 성도에게 주어지는지 그 과정도 같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바탕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시므로 자기의 택하신 자들에게

진리를 영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자들은 드디어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이 평강 또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맛 볼 수도 없는 평강입니다.

 

마치 진리의 영을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것처럼

은혜와 긍휼로 주어지는 평강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한 결 같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이야기 합니다.

 

그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는 것은 장로의 기쁨인 것입니다.

동일하게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1~2

 

4절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이 계명은 이미 요한1서 3:23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을 믿음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나타나는 것은 역시 택하심을 입고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할 진리로 인한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주어집니다.

 

이런 내용이 기쁨이 됩니까?

지금 세상을 사는 형편은 돈도 없고

몸도 아프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데도

성경이 약속하는 이런 진리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모든 자 중에 포함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약속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4

 

추석을 지내면서 무슨 기쁜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기쁜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오늘 말씀에 나타나는 기쁨과 같은 것입니까?

 

3절에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한다’고 합니다.

4절에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기쁨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어른들은 누가 승진을 하였는지, 누가 부자가 되었는지를 가지고

기쁨을 이야기 합니다.

아이들은 누가 용돈을 많이 받았는가를 가지고

자기들의 기쁨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저의 집이 큰집(장남)이 되다보니, 명절에 상당히 많은 손님들이 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수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야기의 중심은 세상의 이야기들이지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기쁜 이야기들을 쏟아 놓지만

정작 진리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에게 어떤 만족과 유익이 있는가가 진리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손님들이 돌아갈 때 ‘예수 사회’를 전도지라고 하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촌동생이 예수님을 믿는데 왜 이런 것을 주느냐고 말하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과연 무엇으로 기쁨을 삼고 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받은 것은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 사도를 분별하여 드러낸 것을 잘한 것이지만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받았던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사랑하였던

그 처음 사랑은 어디에 갔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처음부터 가진 것과 처음부터 들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을 새 계명같이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거짓 선생들은 자꾸만 새로운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시라고 말하면서, 처음부터 듣고 처음부터 가진 새 계명을

지나쳐 버리게 하려는 자들이 있기에

처음부터 들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일2: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여기서도 ‘옛 계명’이라는 것이 구약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이 새 계명인데, 이 새 계명을 지나쳐 버리고

자꾸만 다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는 자들이 나오기에

새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듣고 처음부터 가진 그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새계명은 요한일서 3:23절에서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무엇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까?

자꾸만 새로운 계시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들은 것, 처음부터 들은 것은 사실 은혜의 소식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에서 보는 ‘처음부터의 가진 것’ 과 ‘처음부터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러나 이 새 계명이란 이미 구약에서 다 예언된 것입니다.

이 진리가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요한이서 1:2-3절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한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진리와 사랑을 받은 자들이 너무 기뻐하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가기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같은 기쁨을 말하는 자를 만나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이1:1~2

같은 사랑을 받은 자들의 사랑인 것입니다.

 

6절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본절은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죠.

그러나 그 두 종류의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두 종류의 사랑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교인들 상호간의 사랑으로 나타난다(요일4:7-1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동반됩니다.

(요14:15,21, 15:10, 요일5:2,3)

즉 사랑의 시금석은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그 가운데서'란

'계명' 또는 '사랑' 가운데서를 뜻하죠.

하나님에 대해 순종을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한 순간부터

기독교 복음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들어 온 것입니다(요일1:1-5).

 

 

7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그러면 미혹하는 자는 무엇으로 미혹하겠습니까?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1서에서도 길게 다루었습니다.

 

7절부터는, 거짓교사들을 집에 들이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호티'('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진리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4-6절까지의 내용과

7-11절에서 언급될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가

서로 상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진리와 사랑'은 성도가 갖추어야 할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로서

이를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곧 미혹하는 자이며 적그리스도들입니다.

4~6절과 접속사 호티(왜냐면)를 넣어서 7~11절을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본절은 요일2:23, 27과 4:1~3을 다시 반영합니다.

 

8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우리의 일한 것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1) 혹자는 '너희가 일한 것을'을 가리킨다고 주장,

(what you have worked for, NIV, RSV)

 

2)혹자는 '우리가 일한 것을'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죠.

(which we have wrought, KJV, NEB, RV, JB)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합니다.

만약 수신자들이 미혹하는 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면

요한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수고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죠.(갈4:11, 19)

 

'온전한 상’

그리스도인이 신실하게 행한 진리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영생의 보상을 의미합니다.

 

9절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를 따라 행할 때

온전한 상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함을 강조한 앞 절에 이어

 

본절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조차도 상실하게 됨을 나타냅니다.

 

'지나쳐’

진리를 넘어서 지나치게 나아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스스로 믿음의 초보 상태를 벗어나

진보되고 성숙된 믿음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모습을 나타내죠.

 

'그리스도의 교훈’

-'그리스도의 교훈'을 의미하거나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을 의미합니다. 둘은 큰 차이 없죠;

 

그리스도의 교훈이 새 계명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과 그런 믿음의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 안에 거하는 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나쳐 버리게 하려는 자들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려는 것, 이것이 미혹입니다.

 

10절,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기 자식이 누구와 사귐을 가지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아는 것처럼,

누구와 사귐을 가지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죠.

또한 그 사람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그 자식이 누구와 사귐을 가지는지에

대하여 늘 관심을 가지도, 또 어떤 친구와 사귀라고 교훈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누구와 사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한1서 1:1-4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사도들이 직접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진 바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2서 9절을 봅니다. 이 사귐, 이 교훈을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지 못하되

이 교훈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무엇인지 요17장을 찾아봅니다.

 

요17장 전체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그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서 믿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예수님임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관계 속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편입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성령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신 것은

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실 때에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을 향하여서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아직 예수님과 아버지의 하나 된 관계 속에

제대로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백성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심으로

아버지와 하나 되는 관계 속에 넣어달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시고 불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죄인들과 연합이 되시고

그 죄의 저주를 받으신 것이 십자가의 세례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하나 됨의 관계를 만드셨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임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예수님과 하나 됨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지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하나 됨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바른 교훈인 것입니다.

 

10절에,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 당시에 순회전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잘 대접하라고 요한삼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회전도자들이 무슨 교훈을 하는지 잘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드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인사도 하지 말고 집안에 들여놓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단들이야 단번에 알 수 있으니 별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위험한 것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오는 자들입니다.

가장 전통적인 것 같고 바르게 말하는 것 같으나

자칭 ‘유대인들의 회, 사단의 회’가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보면, 자칭 유대인의 회라고 하는 자들이

바로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synagogue of Satan

 

11절에, 예수님의 교훈 외에 다른 교훈을 가진 자와 사귐이 있다는 것은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복음으로 붙들고 있는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교훈을 전하는지, 어떤 예수님을 전하는지,

세상에서 성공하는 예수를 전하는지,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를 전하는지 잘 분별해 사귀기 바랍니다.

 

또한 교회에서 사귐을 가져도

세상 적인 사람보다 영적인 사람과 사귀시기 바랍니다.

 

말만 나오면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말을 섞다 보면 함께 물듭니다.

더러운 이야기는 그 입에도 담지 말라고 합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여기서 너희 기쁨이란,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기쁨이 충만해지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현장에서 맛보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아무나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에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한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이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문안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땅의 소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그리고 이루어내실 하늘의 소식만이 참으로 기쁨이 되는 소식입니까?

하늘의 소식만이 기쁨의 소식이 되려면

어느 정도로 이 땅의 소식들에 대하여 절망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드시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그 일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만드시는 일인 줄 알고 기뻐하면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는 자들과 사귐을 가짐으로 기쁨이 더욱 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더욱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50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서

저 John Piper 는 장미꽃 50송이를 삽니다

 

이 장미꽃 다발을 손에 들고서 한껏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향합니다

200달러어치죠

 

이 커다란 꽃다발을 제가 등 뒤에 감추고

평소와 다르게 도어벨을 딩동 누릅니다

(평소에는 제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가wl요)

 

아내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기를,

제가 일부러 문 앞에 서서 기다립니다

 

아내는 현관문을 열고서 저를 쳐다보면서

좀 어리둥절해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길

"해피 웨딩 애니버서리 노엘!"

하며 등 뒤에 감추었던 꽃다발을 척 내밉니다.

 

그리고 아내 Noel 가 말하길..

"오, 조니,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왜 그런 비싼 비용을 들였나요?"

 

그런데 제가 대답하길 "그건 남편인 나의 의무요!

가정관련 책에서 읽었소, 이건 남편들이 다 이렇게 하는 일이요!"

 

이 대화가 뭐가 잘못됐죠?

여러분이 다 고개를 좌우로 젓고 계시네요

 

맞아요, 고개를 저을 일이죠

부부관계가 이렇게 되어선 절대 안 돼죠

의무가 아니라, 자원하는 기쁨의 섬김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러니 교회 가서 "이건 그리스도인의 의무야, 우리는 그렇게 해야 돼!

내가 책에서 읽었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기독교의 모든 섬김, 봉사, 순종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도어벨을 울리고

하나님이 문을 여시면 이렇게 말하세요

 

"주님을 여기서 만나뵙는 것보다

제게 더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저는 주님이 필요하니까요!”

 

◑적용 / 기쁨을 주는 삶

 

본문에, 요한이 성도들로 인하여 심히 기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기쁨은 결국 하나님의 기쁨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전권대사로 교회에 파송한 성직자들의 기쁨은

곧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1. 진리 안에서 행하는 성도들을 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4절).

 

목회자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성도들이 진리안에서 행하는 삶입니다.

진리안에서란 주님안에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주를 사랑하며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님의 종인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줍니다.

 

2.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을 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5절).

 

사랑은 당사자들에게 우선 큰 기쁨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본인이 먼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도 기쁘지만, 사랑을 주는 사람은

더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며 기뻐하는 성도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의 실체십니다.

독생자를 통해서 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그사랑을 받은 자답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고 간청했습니다(5).

 

자발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명령이기에 마지 못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받은바 사랑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불법이 성하므로 각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이 꼭 들어맞는다고 보여집니다(마24:12).

 

△목회자가 오랜만에 딸과 주말 오후에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도 바쁘지만, 딸도 학원이니, 야외학습이니, 레슨이니 무척 바쁜데,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이 같이 집에서 소소한 놀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무 성도님이 지금 위독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순간 매우 망설여졌습니다.

자기가 지금 임종을 앞둔 그에게 심방을 가도, 그에게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평소에 교회 생활에 열심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목사의 심방을, 모든 가족들이 다 원치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러나 결국 목회자는, 자녀와의 소중한 시간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소중한 주말 오후가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죠.

어쩌면 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원 심방을 마치고, 그 성도님의 임종 예배를 드리고 나서

병원을 나설 때는.. 목회자의 마음은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랑을 주고 받는 일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3. 계명을 지키는 모습을 볼 때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6절).

 

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계명이 있으므로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고 복 받는 비결도 깨닫게 됐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임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이 주신 계명대로 행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큰 기쁨은 없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책망하며 한 말은 항상 우리의 삶의 지침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23)

 

목회자들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기쁘고 목회할 보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