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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서 가이오를 멘토링 해주었던 사도요한

LNCK 2023. 1. 2. 17:32

◈가이오를 멘토링 해주었던 사도요한      요한3서      여러 설교 정리

 

◑본문 해석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가이오라는 인물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가이오”에 대한 칭찬,

-“디오드레베”에 대한 비판

-이 편지를 가이오에게 전달한 “데메드리오”에 대한 추천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요한이서에 이어 요한삼서에서 수신자에게 자신을

“사도”가 아닌 “장로(프레스뷔테로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요한이 자신을 장로로 밝힌 후,

가이오를 향해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1절),

“사랑하는 자여"(2절),

”내 자녀들이"(4절) 등과 같이 표현한 것으로 보아,

가이오를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친자식처럼 아끼는 부모와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사랑을 강조한 만큼

자신도 삶속에서 사랑을 베풀고,

사랑으로 품으며 살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고,

이처럼 사랑이 풍부한 나이든 어른이 된 것입니다.

 

과거 과격한 성격 때문에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요한이

이처럼 사랑의 사도로 변하게 된 것은

사랑의 근원이시자 오직 진리이신 주님만을 삶의 목적으로 살았기에 가능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같이 사랑의 사도로 바뀐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현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제가 짧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사람과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모와의 만남, 형제자매와의 만남, 친인척간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자녀들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등

이 모든 만남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두신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예배를 드리면서 신랑신부에게 서로가

하나님께서 나만을 위해 창조하신 남편이요 아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내 남편, 내 아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두신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한 서로가 배우자를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만 필연적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만남,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나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사람과의 만남을 우연적인 만남으로 여기는 사람은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신자인 가이오가 어떤 사람이기에

사도 요한의 편지에 이처럼 그에 대한 사랑이 넘쳐날까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2a)

 

가이오는 영혼이 잘 된 사람입니다.

영혼이 잘 된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3-4절)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영혼이 잘된 사람이라 합니다.

이어서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형제자매에게, 더욱이 낯선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은,

무엇이나 충성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회중 앞에서 그대의 사랑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대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게 잘 보살펴서 보내는 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5-6절, 표준새번역)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가까운 형제자매는 물론

낯선 이들을 성심성의껏 보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사례비를 따로 받지 않고 헌신하는 순회 전도인들이

자기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이들을 보살펴주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할 정도로 잘 보살핀 사실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태동되는 초창기이니 만큼 복음을 위해 이방인 사역을 하되

자비량으로 섬기는 이들의 몰골은 참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내밀지 않고, 정성껏 보살펴 준 일은

결국에는 가이오 역시 진리를 위해 일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대원 시절 중국 연변의 지하신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치기 위해 방문했었습니다.

그곳에서 북한 전도사역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보았고,

탈북했다가 회심해서 다시 북한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도하는 소명을

갖고 있는 분들도 만나보았습니다.

 

전도사역을 하는 분들이 탈북자를 만나면

제일 먼저 목욕탕으로 데려가서 목욕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 후에

숙소에 데려가서 잘 대접하며 푹 쉬게 한다고 합니다.

 

전도 사역자들의 이 같은 보살핌은 외부에 대해, 복음에 대해

굳게 닫혀있는 탈북자들의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하는 열쇠와 같다고 합니다.

 

그분들의 사역을 들으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국으로 탈북해서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해서 냄새나고 더러운 몰골인

그들을 정성껏 보살펴주는 그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이같은 보살핌을 통해 다시는 북한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탈북한 사람들

중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을 알고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이오(1~8)

먼저 편지의 수신인인 가이오에 대한 내용을 우리는 1~8절에서 봅니다.

 

사도는 단순히 가이오의 이름을 쓰는 대신,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고 씁니다.

 

사도요한은 가이오를 향한 자신의 특별한 애정을 표현합니다.

이 짧은 서신에서 3번이나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릅니다(2,5,11).

 

이 개인적인 서신은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편지입니다.

이 사랑은 그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리의 끈으로 묶여있는 사랑입니다.

 

사도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라고 쓸 때, ‘참으로’라는 말을 풀면,

‘진리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한편 이 표현은 사도 요한과 가이오를 사랑으로 묶어주는 요소는

진리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서로 사랑은 결코 진리를 떠난 사랑이 아니며

그 진리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고 사랑하게 하는 끈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가이오를 향해 이런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이오가 지금 교회에서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가이오는 교회의 세력을 잡고 있는 디오드레베에 맞서

진리의 편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을 아는 사도는 가이오를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사도는 가이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를 위한 기도로도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2).”

 

사도 요한이 가이오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이 가진 물질로 다른 성도들을 대접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역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물질과 건강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가이오는 삶을 목적을 하나님에게 두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순회 전도자들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는 진리를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는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죠.

 

이 기도의 내용은, 가이오의 건강이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진리의 사람(3~4)

사도는 형제들을 통해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3).

 

요한이서에서도 주의 자녀들이 진리를 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

심히 기쁘다고 썼던(요이 1:4) 요한사도는 여기서 다시 말합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3b~4).”

 

가이오 자신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전해준 형제들은

아마 가이오가 속해있던 교회에

요한사도의 이전 편지를 전달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9절에서 사도는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라고 말하는 이 편지는

요한이서가 아니라 유실된 편지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편지가 교회에 전달되었을 때, 교회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는

디오드레베 였습니다. 그는 사도의 편지를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이 9절에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라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소수에 속했을 가이오는 진리의 편에 서서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디오드레베에게 맞섰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오는 자신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이라고 믿는대로

순종하여 행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리고 가이오는 자신의 신앙과 고백에 합당한 태도를 보여주고

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참된 신앙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었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은 고백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삶입니다.

형제들은 가이오 안에 있는 진리를 사도에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가이오는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의 사람(5~8)

형제들의 증언은 중요합니다. 사도는 6절에서 다시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가이오의 두 번째 특징은 그가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가이오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이 5~6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가이오는 형제 곧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7절은 사도가 말하는 ‘형제 곧 나그네’는 주로 순회교사들이거나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7).

 

손 대접은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이오는 이점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오가 형제 곧 나그네된 자들을 환대한 일을 가리켜

요한사도는 ‘신실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신실한 일은 진리와 사랑에 기초하여 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가이오의 행위는 그저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가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이오가 순회교사와 전도자들을 환대하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7~8).”

 

요한사도가 볼 때 순회교사와 전도자들을 영접하여 환대하는 것은

잘 하는 일일 뿐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7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지금 사도가 순회교사 보다

순회 복음전도자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고,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가 이들을 책임져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가 이들을 영접하고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전도자들이 교회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

 

교회가 이런 복음전도자들을 환대하고 보내줌으로써,

교회는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로 자신을 입증하게 됩니다(8).

 

교회가 진리를 위해 일하는 자라고 말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복음전도자들을 환대하고 전송함으로써

교회는 자신을 진리를 위한 존재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요한이서와 비교해보십시오.

<요한이서>에서 사도는 영지주의 이단의 교리를 가르치려고 오는

거짓교사들을 분별하여 사랑으로 환대하라고 말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별하여 환대하라는 말은, 자칫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삼서>에서 사도는

참된 복음전도자들을 환대하고 전송할 것을 격려합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이 복음전도자와 선교사들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이 말씀을 적용해본다면,

주로 선교사님들을 영접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들을 환대해야 하고 전송해야 합니다.

전송한다 send bring forward 는 말은 ‘파송한다’는 말도 됩니다.

물론 참된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선교사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디오드레베(9~10)

두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디오드레베입니다.

사도는 그 인물을 한 마디로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9)”

 

그는 사도가 먼저 보냈던 편지를 거절함으로써 사도 자신을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권을 장악하고 사도 요한을 비방하였습니다(10).

 

사도는 디오드레베에 관한 소식도 이 편지를 전해주고

돌아온 형제들을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초대교회를 괴롭히던 영지주의 이단의 괴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다만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개인적 야망은 초대교회에서는 하나의 실패로 간주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디오드레베는 교회 안에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한편 그와 맞서 진리의 편에 선 가이오와 소수의 성도들은

디오드레베의 세력으로부터 박해와 곤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디오드레베가 한 일을 네 가지로 정리합니다.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10).”

 

첫째는 그가 악한 말로 사도와 사도에게 속한 사람들을 비방한 일입니다.

둘째는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않은 일입니다.

가이오는 순회전도자들을 환대하였으나 디오드레베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맞아들였다는 표현은,

교회가 공적으로 그들이 말씀을 전하도록 영접했다는 의미보다,

개인적으로 그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영접했다는 의미가 더 강해 보입니다.

 

세 번째로 디오드레베는, 순회전도자들을 환대하는 성도들이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자기가 안 할 뿐 아니라 남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디오드레베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이들을 영접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10

여기에 가이오가 당한 어려움이 충분히 암시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망치고 허무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디오드레베 때문에 그 본질과 하나됨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에는 디오드레베처럼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실,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동기로써

자기 신앙의 거짓됨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디오드레베가 ‘행한 일’을 잊지 않고 가서 심판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행한 일’, 그리고 디오드레베가 한 네 가지 일 모두에서

동사는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한 일은 한 두 번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울 사도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경고를 하는 셈입니다(고전 4:21).

 

디오드레베는 교회의 직분을 가졌고,

영향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지만, 신앙은 없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는 한 마디 평가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동기를 가진 사람은

결국 교회를 허무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메드리오(11~12)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도는 다시 한 번 가이오를 향해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면서,

디오드레베와 같이 악한 것을 행하는 자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11).

 

디오드레베와 같은 자는 하나님을 뵐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록 디오드레베가 영지주의 이단의 교리를 믿고 가르치는 자가 아닌

정상적인 교회의 지도자였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정통교리를 믿고 가르친다고 말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향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12절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이제 사도는 세 번째 인물을 소개합니다. 그는 데메드리오입니다(12).

많은 성경학자는 데메드리오가 유실된 앞의 편지와(9)

요한삼서를 전달해준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더욱 데메드리오가 교리적으로나 삶에서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증명해줄 필요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사도는 데메드리오가 삼중의 증거를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뭇 사람의 증거입니다.  :12

물론 여기서 사도가 뭇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디오드레베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결코 데메드리오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눅 6:26).

 

-두번째로 그는 진리의 증거를 받는 자입니다. :12

이 말은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진리에 부합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데메드리오의 모든 행동은 진리를 빛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삶입니다(딛 2:10).

 

-데메드리오에 대한 세번째 증거는 사도 자신의 증거입니다.

사도는 “우리도 증언하노니…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12

데메드리오는 삼중의 증거를 통해 그 선함과 참됨을 증명합니다.

 

▲온전한 신자의 영적 특징: 진리와 사랑

사도는 가이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두 사람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를 대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믿음과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성품과 신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자기가 으뜸이 되려고 하는 동기와 그 악한 행위들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이 거짓임을 드러냅니다.

 

반면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성도)의 증거와, 진리의 증거,

그리고 사도의 증거를 통하여.. 신앙의 참됨과 삶의 온전함을 드러냅니다.

 

비록 데메드리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그것은 이미 사도가 가이오에게서 보고 증거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3~4절에서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로 사도의 기쁨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어 5~8절에서는 가이오가 순회전도자들을 영접하고 전송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증거했다고 합니다.

진리와 사랑, 사랑과 진리는 한 사람의 신자 안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사랑 안에서 표현되고 사랑은 진리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런 성품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품과 분리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님을 디오드레베가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악한 것을 본받는 길 그리고 선한 것을 본받는 길입니다.

 

하나는 디오드레베가 걸었던 길이고, 또 하나는 데메드리오가 간 길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교회를 허무는 인생이었고

데메드리오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사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데메드리오가 걸었던 길, 선한 일을 본받는 길을 걷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적용 : 가이오의 멘토, 울타리가 되어준 장로 요한

 

그런데 우리는, 내 ‘울타리’를 허물기 쉽습니다.

 

어떤 한 젊은이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부모가 평생을 땀흘려 일구어 놓은 포도밭이었지요.

 

젊은이는 물려받은 포도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발전을 시킬 것을 다짐했지요.

 

사방이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쳐진 포도밭,

이 울타리 안에는 울창한 포도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타리에는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울타리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울타리를 허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포도나무를 새로 심었습니다.

 

얼마 뒤, 이 포도밭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점점 망가져갔습니다. 울타리를 베어버리자

사람과 짐승들이 마음대로 포도밭에 들어와, 나무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포도가 열리진 않지만

포도밭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도

포도나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위의 어리석은 젊은이처럼

울타리보다는 포도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포도나무가 없다면 포도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울타리 없이는.. 포도밭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듦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도와준 가족, 친구,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고생하면서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주셨으며,

선생님들은 정성껏 지도하여 훌륭한 인재로 길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응원과 격려를 통해 인정과 우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 모든 것을 일구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었던지요?

 

그들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를 밟고 올라가야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고마운 분(울타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존재함, 그 자체로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이오를 멘토링 해주었던 사도요한

본문의 세 주인공, 가이오, 데메드리오, 디오드레베는 다 남성입니다.

(물론 요한2서에서는, 무명의 부녀도 나오지만요. 요이1:5)

 

남성들은 우리 사회의 위기 지점에 있으며,

교회의 남성 사역은 그런 시대적 흐름을 같이 탈 수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2020-2021 학년도에

"미국 대학은 5년 전에 비해 150만 명의 학생이 감소했으며

남성이 감소의 71% 를 차지했습니다." *여성은 29%라는 말

 

이것은 Covid-19로 인한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40 년 동안 남성은 2년 또는 4년제 학부 프로그램에 입학한 학생의

비율이 점점 더 적었습니다.

또한 남성은 학위 프로그램을 마칠 가능성도 적습니다.

 

대학 통계가 성공이나 사회 척도를 정의하는 특성은 아니지만,

이러한 변화는 사회 경제적 계급, 인종 및 지리적 지역에 걸친

남성이 점점 더 덜 참여하고, 동기 부여가 적으며

 

이것은 결국, 건강한 아버지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적다는 신호를 보내는

요인들 중 하나입니다.

 

또한 「타임」지에 의하면, 남성은 여성보다 독신일 가능성이 더 높고,

부모와 함께 살 가능성이 더 높으며,

독신 여성보다 성공적인 경력을 쌓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젊은 남자들은 교회에서 나이 든 남자들에 의해 멘토링 (또는 제자 훈련)

되지 않습니다. 멘토링을 요청하지 않는 청년도 많고

멘토링을 해 줄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노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도에 대한 성경적 모델은 (부인할 수 없이) 삶의 멘토링입니다.

더욱이 멘토링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나이가 많고 성숙한 신자에게 의무가 있습니다. *본문의 사도요한처럼

 

영적 멘토가 되기 위해 성경 학자, 목사 또는 실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교회는 상처, 실패의 경험이 있었던 멘토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대 간 관계가 절실히 필요하며,

젊은 남성들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러한 우정에 더 개방적입니다.

 

밀레니엄 세대는 20 대 후반에서 30 대 후반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경력의 전성기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방향타가 없고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멘토링의 가치와 그것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가족과 교회에 미칠 수 있는

다운스트림 효과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북미 남성의 대다수는 현재 또는 음란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성적인 문화에 살고 있으며,

 

많은 크리스천 남성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이는 더 깊은 투쟁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남자들에게는 약물 남용, 분노 문제 또는 다른 죄문제로 힘겨워합니다.

이는 멘토와의 관계로, 상당 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영역들입니다.

적어도 멘토의 기도는, 젊은 남성에게 큰 격려와 힘이 될 것입니다.

 

북미의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가정에서 아버지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소년들이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모른 채

자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텔레비전, 인터넷, 대중 문화를 통해

남성다움이 어떻게 생겼는지 배웁니다.

 

당신의 교회는 아버지 없는 소년들을 위해, 그 틈에 설 기회가 있습니다.

남성 여러분, 어린이 사역에, 남학생 사역에 자원 봉사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아이에게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혼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소년이 여러 명의 긍정적인 남성 롤모델을

가지고 있다면 엄청난 승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 청년과 그의 미래의 자녀, 손주, 증손주들에게

미칠 수 있는 장기적인 영향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기본적인 일들을 잘 하는 것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도에 집중하십시오.

그들에게 경건한 남자, 남편, 아버지가 되도록 가르치십시오.

 

모든 교회가 제자도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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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요한이서 1절에서 설명드린 대로,

관사가 없으면 ‘참으로’라는 부사절로 이해할 수 있지만,

관사가 있으면 ‘진리 안에서’로 번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