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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 강해

LNCK 2023. 1. 3. 09:32


◈요한이서 강해                                        출처

 

◑사랑과 진리                           요한이서 1:1-6 

▲1. 초대교회의 정황과 문제
사도 요한의 서신들이 쓰여지던 당시의 교회가 경험하게 된 위기는 
소위 순회교사들을 어떤 기준으로 분별하고 접대하며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처음 2세기까지 교회는 주로 순회교사들의 가르침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이런 순회교사들을 잘 접대하고 
그들을 다음 행선지로 가도록 후원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롬15:24 참조)

특별히 1세기를 지나고 2세기를 향할 무렵이 되자, 사도들은 이미 다 죽었고 
생존한 사도는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의 천거서를 통해서 순회교사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점점 그런 확실한 증명서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복음을 전합답시고 돌아다니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부담만 끼치는
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순회교사들을 잘 분별하여 대하는 것은 초대교회에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는 이런 초대교회의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요한이서는.. 그런 자들을 주의해서,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요한삼서는.. 그런 자들 중에 참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잘 맞이하고 영접해라
이렇게 두 서신서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죠.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와 ‘사랑’이요, 나아가 주님과 ‘사귐’이었죠.
요한이서와 삼서는 그 기준을 토대 위에서 적용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2. 발신자와 수신자 (1절)
발신인을 보면, ‘장로인 나는’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요한사도가 왜 자신을 장로라고 쓰고 있는가요?

요한사도는 교회의 감독과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말함과 동시에 
자신을 이제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워진 장로들과 의도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썼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와 같은 장로’라는 거죠.
특별히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란 뜻일 것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1절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한다’
‘택하심을 받은 부녀’가 누구일까요?
먼저 ‘택하심을 받은 부녀’는 초대교회의 한 여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부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키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키리오스’의 여성형이라는 점, 
고로 수신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죠.

게다가 요한이서의 내용이 공동체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서신이 한 개인 보다는 교회에 보내진 서신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죠. 

또 이 서신에서 종종 2인칭 복수 대명사(너희)가 사용된 것도 
요한이서가 교회를 향해 쓰여진 서신이라는 견해를 지지하죠(6,8,10,12).

그렇다면 왜 사도는 이런 은유적 방식으로 발신자와 수신자를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을 쓸 때의 이유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정권 하에서 
기독교 서신의 발신인이나 수신인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것은 
혹시라도 후일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었죠.

▲3. 진리 때문에 사랑한다 (1b~2절)
1b ~ 2절에서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 
‘택함받은 부녀와 그 자녀들’을 좀 더 설명합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택함받은 부녀와 그 자녀들을 교회로 보는 견지에서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사도는 교회를 ‘참으로 사랑한다’ 고 말합니다. 

여기서 ‘참으로 사랑한다’ 는 말은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지만, ‘진리’ 라는 말에 정관사가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사적 의미로 ‘참으로 사랑한다’ 고 읽는 것입니다.

1) 성도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교회는 사도가 참으로 사랑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 가 참으로 사랑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모든 자는 누구입니까? 
사도는 특별히 많은 거짓 순회교사들과 이단들을 의식하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사도는 자신과 교회가 
진리가 없는 이단들과는 차별화된 존재라는 것을 밝힙니다. 

교회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이 참된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런 견지에서 오늘날의 교인들을 
가리켜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2) 진리는 복음의 내용이자 하나님 자신이시다(요일1:8, 3:19)
자, 이제 우리는 진리를 설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진리’입니다. 

사도가 진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추상적 개념이거나 
이론적 지식이 아닙니다. 물론 진리는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2절에서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
이로다” 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은 아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그러므로 본문에서 진리는 그 자체로는 복음의 내용을 가리키면서도 
그것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요일 2:21)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요일 5:20; 요 14:6). 

진리는 성도 안에 지금도 거하고, 또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할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3)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간다
그래서 사도는 3절에서 문안을 하면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1절에 ‘참으로 사랑하는 자’, 
2절에 ‘(사랑하는 것은)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3절에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4절에 ‘진리를 행하는 자를 보니 심히 기쁘도다’, 
6절에 ‘사랑은..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라는 구절들도 마찬가지죠. 

말하자면 진리는 형제 사랑의 범주이고 바운더리(boundary)입니다. 

4) 진리와 사랑을 분리하려는 경향
진리는 기독교 형제 사랑의 기초이며, 동기이며, 연료이고, 정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진리와 사랑을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죠.

진리와 사랑을 분리시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과 말씀을 분리시키려는 시도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성령 없는 말씀은 문자일 뿐입니다. 
말씀 없는 성령은 근거 없는 신비주의일 뿐입니다. 
말씀과 성령, 성령과 말씀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곧 말씀의 충만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과 지성을, 또 체험과 교리를 분리시키려는 모든 경향은 
사실 성경의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점에서 매우 균형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사랑과 진리, 진리와 사랑은 결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의 말처럼, 교회는 진리 안에서 피차 사랑하고 
또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들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4. 사도의 기쁨 (4절)
4절에서 사도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의해서 흔들려서 그들에게로 갔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는 
사도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조금 전에 ‘성도는 진리를 아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도는 진리를 알 뿐 아니라, 
그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 것에서 진리를 행하는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절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요일3:23을 참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무엇이 일관되게 나타납니까? 

진리를 믿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 진리와 사랑이 동일하게 나타나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입니다. 

사도는 교인들이 진리를 붙잡고 서로 사랑함으로 행하는 모습을 볼 때 
심히 기쁘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신앙이 가지는 윤리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약점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데 열심을 내지만 
정작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면에서 현저하게 약한 것입니다. 

앉아서는 신앙이 좋아 보이는데, 일어서면 신앙의 힘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사도는 진리를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심히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죠. 

진리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심히 기쁘다고 말합니다. 사도의 이 기쁨은
또한 하나님의 기쁨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사랑은 그 계명을 행하는 것이다. (5~6절)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사도는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한다’고 말합니다(5). 그는 서로 사랑하자고 권합니다. 

사도가 지금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은 결코 처음 듣는 계명이 아니죠.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가르치고 있는 옛 계명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완전하고도 극적으로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형제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새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형제 사랑은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의 서로 사랑은 세상으로 하여금 이들이 십자가에서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시고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가 될 것입니다.

사도는 6절에서 말합니다.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본문 4~6절에는 ‘계명’이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이어서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도 ‘그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씀은 NIV나 RSV가 번역했듯이 
사랑 안에서 행하라는 의미라고 보아야 합니다.

▲6. 우리의 사랑은 진리로 말미암고 있는가?
사도는 요한이서로 알려진 이 편지에서 사랑과 진리, 
진리와 사랑이 결코 별개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진리가 감소하면 사랑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사랑이 미약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진리의 미약함을 드러내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봅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까? 사랑한다면 그것은 출신 학교가 같거나 
수준이 같거나 고향이 같거나 기질이 같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진리 때문입니까? 

그 사람 안에 진리가 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합니까?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합니까?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교회는 모인 구성원들의 기질과 성격과 배경이 달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진리를 알고 진리를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모든 차이들을 능가할 만큼 큰 것입니까? 
복음의 진리는 그렇게 여러분에게 큰 것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를 향해서 사도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3
고 축복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 뿐 아니라 행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사랑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기에 
사랑 안에서 행하는 사람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교회에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 
함께 있을 것이라고 교회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분별하는 사랑          요한이서 1:7-11

순회 교사들이 올 때, 교회는 자신들을 가르치는 자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그들을 섬기는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갈6:6). 

하지만 종종 이런 섬김은 거짓 교사들에 의해 이용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환대를 이용하여 교회에 이단적 교리를 가르쳐서 
교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요한이서와 요한삼서가 쓰여진 배경입니다.

요한이서의 앞부분에서 기독교의 사랑과 진리는 
항상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진리를 도외시한채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나, 
사랑 없는 진리는 기독교의 가치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는 5~6절에서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했고 
“사랑은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서신의 뒷부분에서 사도는, 사랑은 “분별하는 사랑”임을 밝힙니다. 
무분별한 사랑은 사도가 말하는 기독교의 사랑이 아닙니다. 

종종 젊은이들의 분별력 없는 사랑은 비극을 초래하곤 합니다. 
분별 없는 사랑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분별하는 사랑’입니다.

▲1. 이단 조심  (7~8절)
먼저 사도는 7~8절에서 이단을 삼가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사도는 ‘이단’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미혹하는 자’,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썼습니다. 

사도는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예언대로 된 일입니다(막13:22~23).↓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사도는 예수님처럼 경고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비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처럼 ‘미혹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7절은 헬라어로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7절은 1~6절까지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은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까? 
미혹하는 자, 사탄의 거짓 역사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중요한 장치는 
서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을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는 함께 합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일에서 취약하면,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서도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1) 미혹되지 말라 (7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 .. 는 말은 
거짓 교사들이 새로운 지역이나 교회로 뚫고 들어가 
자신들이 가진 거짓 교리를 전파한다는 것이죠. 

그들은 적극적입니다. 우리가 지난 날 경험했던 어느 이단보다 더 적극적인
신천지가 교회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세기 말의 교회는 이런 상황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 이단의 거짓 교리 중 결정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성과 참 인성이 하나로 연합되어 
한 인격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단지 역사의 한 순간에 일어났거나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분리될 수 없도록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영구적인 효력을 가지는 진리입니다.

사도가 7절 하반절에서 ‘(그) 미혹하는 자’ 그리고 ‘(그)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헬라어에는 각각 정관사가 있습니다), 

 

이 서신을 받고 있는 교회(택하심을 받은 부녀)가 잘 알고 있는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자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2) 조심해야 할 두 가지 이유 (8절)
한 가지는 부정적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이유입니다. 

먼저 부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세워졌죠. 

만일 교회가 거짓 가르침에 의해 무너진다면 그것은 사도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사도 요한만 가졌던 부담이 아니었죠. 

바울 사도도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1).”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이런 부정적 이유만으로 성도들이 거짓 교사를 조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이유로써 온전한 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상은 일꾼의 품삯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신실한 섬김의 결과로 주시는 보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상을 얻도록 달음질해야 하는데, 
특히 이단의 거짓된 교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2. 이단을 대하는 법 (9~11절)

1) 그들은 형제가 아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이 말은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라는 단언입니다. 

사람이 한 사람의 중생 여부를 온전히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단언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 기준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가”의 여부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로 사도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먼저 부정적 의미를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것은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지나쳐’라는 단어는 
‘앞으로 더 나아가다’라는 의미인데, 
더 앞서 나가고 더 많이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들은 기독교 교훈을 능가하는 훨씬 더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던 영지주의 이단이 사용하던 용어를 
사도가 비꼬는 투로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더 나은’ 탁월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이단과 사이비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늘 자기들이 새롭고 누구도 깨닫지 못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그 지식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겸비해지고 자신의 죄인됨과 
비천함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지식과 거짓 지식의 차이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의 특징을 ‘지나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지나치는 것은 믿음 안에서 진보하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한다는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5~6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8~39).”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성경의 사람들이었고 
성경 안에 거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것은, 단순히 말씀을 읽거나 듣는 삶이 아니라 
들은 바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되라고 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것입니다(마 7:15~27).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나치게 나간 사람들은 단지 상을 잃어버리는 차원이 아니라 
구원 자체를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오직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만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9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그들은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우리의 형제도 아니다.”

2) 인사도 하지 마라 (10~11절)
자, 그래서 사도가 하려는 말이 무엇입니까? 
10절에서 사도는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찾아오면, 
너희는 그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너희가 사랑으로 받아줄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0

여기서 ‘나아간다’는 단어는 요한서신에서 성도들의 상호 방문이나 
장로의 심방(요삼 3,10) 또 예수님의 오심과(요일 4:2) 
적그리스도의 등장에도(요일 2:18) 사용된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순회 교사의 모습으로 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쓴 말이 이와 비슷한 정황을 보여줍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문제는 이들이 순회 교사의 이름으로 온다는 사실이었고,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 대접하고 환영할 것이 아니라 
분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매우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어떻게 이들을 분별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나봐야 분별을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집에 들이지도 않는다면, 무슨 수로 만나겠습니까? 

사도의 이 말씀은 이제까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한 사도가 
자신의 말을 뒤집는 것입니까? 형제 사랑은 차치하더라도, 
초대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던 나그네 대접의 원칙, 친절과 환대의 덕목에서 
볼 때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은 문제가 있는 태도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명령은 사도가 편지를 쓸 당시 
매우 비상한 상황에 처했던 교회에 해당하는 말씀이지 
일반적으로 적용할 말씀이 아니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존 스토트의 두 가지 설명은 유익합니다. 
첫째,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대상은 잘못된 이단 교리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 
거짓 교리를 가지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하는 공식적인 거짓 교사들이죠. 

단순히 거짓 교리를 믿고 있는 개인이라면 8절의 경고대로 
조심하면 될 문제입니다. 

둘째로, 집에 들이지도 말라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집’은 교회 모임을 가지던 
장소로서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개개인 신자들의 집이 아니라, 
교회로 모여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교제하던 집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예배당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롬16:5, 고전16:19, 골4:15, 몬2). 

이런 공적 모임에 그들을 들이지 말라는 말이고, 
그들이 교회 회중들에게 거짓된 주장을 설파할 기회를 주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점은 이 편지가 교회를 향해 쓰여진 편지라는 점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말고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사도의 명령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다른 모든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취한 태도를 어떠했습니까? 
갈라디아서 1:7~9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더 없이 강력한 태도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쓰는 편지에서도 같은 논지로 말씀합니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19~20).”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을 용납한 고린도교회를 엄히 책망합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 
그리고 창녀들과 함께 어울리셨다고 말하지만, 이 사람들은 거짓 교리를 
유포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선생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일곱 번에 걸쳐 “화있을진저”라고 무서운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마23).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사도 요한이 주는 명령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11절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악한 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부인하는 교리적 문제와 함께, 
형제 사랑을 부인하는 윤리적 문제 모두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참여한다’는 말은 적극적 의미를 반영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인사하는 것, 그들과 잘 지내는 것,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적극적인 악을 행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결코 참아주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 
복음의 진리와 더불어 공존할 수 없는 거짓 진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비진리와 복음적 사랑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관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관용의 가치가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거나 참 사랑에 대한 
오해를 초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3. 교훈과 적용

1) 교회 안의 목사들을 포함한다.
본문은 알려진 이단들에게만 적용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저주를 받아야한다고 말했던 거짓 교사들은 
명백한 이단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복음, 십자가와 부활을 말했던 순회 교사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복음에 율법의 행위를 더했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좋은게 좋은 거라는 식의 태도를 
기독교의 사랑이고 관용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일관된 논지는 이런 자들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13~15을 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이런 자들은 알려진 이단이 아니라 정통 교회의 목사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목사를 분별하는 교인의 책임을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분별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2) 이단에 대한 실천적 접근 방법
두번째로 적용할 부분은 이단이나 사이비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하는 
실제적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다수 교회당 문에서는 
[신천지 출입금지] 글귀를 보게 됩니다. 

이런 행위의 신학적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것을 제공해주는 것일까요? 
또 제가 가끔 말씀드린대로, 2년 후쯤 큰 길가에 
[신천지, 구원파 및 온갖 이단 사이비 (신도) 대환영]이라고 현수막을 
내건다면 이런 행위의 신학적 근거는 어디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행위를 허용합니까, 금합니까?

본문은 공식적인 순회 교사로 나아오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단지 이단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이단들을 우리 집에 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과 직장에서 혹은 일 관계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이 이단에 속했다는 것을 알면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무례를 범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친절하고 환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자기들의 거짓 가르침을 유포할 목적으로 가장하고 
교회에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 외에 우리는 자신이 준비된대로, 이단에 속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참된 복음의 진리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단 지도자들을 교회로 불러 거짓 교리를 가르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짓 교리에 미혹된 자들이 와서 참된 복음의 진리를 듣고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이키라는 것은 합당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분별하는 사랑입니다. 진리에 대한 분별이 선명해질수록, 
교회의 형제 사랑의 순도도 함께 순전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교회와 이땅에 세워진 
모든 주님의 교회들 가운데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