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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해석 "이단이 받을 심판과 그 최후"

LNCK 2023. 1. 3. 11:19

◈ <유다서> 해석  "이단이 받을 심판과 그 최후" 

유다서는 도합 25절밖에 되지 않지만 
이 짧은 서신 안에 서신으로서 갖추어야 
할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1-4절의 문안 인사를 포함한 도입, 
5-23절의 본론, 
24-25절은 송영이 포함된 종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사도 유다는 당시 교회에 은밀히 침투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교묘하게 흔드는 
이단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서신서를 작성했습니다. 

즉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과 특성이 무엇이며,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서를 기록한 사람은 주의 형제이자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의 형제, 유다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단들이 
잘못된 진리를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으로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은 인정하였으나 
완전한 인성은 부정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정하는 
이단교리인 가현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직 영만 중요하고 육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기에 
극단적 금욕주의로 가거나 혹은 극단적 쾌락주의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이 교회안에 들어오게 되자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사라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성적 방종을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죠. 

이에 위기를 느낀 유다는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이단들을 경계하고 타협없는 거룩한 싸움을 이어나갈 것을 독려하기 위해 
붓을 들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1-4절)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는 본서의 수신자를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자’라고 하여 일반적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임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지키심은 받은’의 헬라어 원형은 ‘테레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심판의 날까지 택하신 자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서신이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벗어나게 하려는 
영지주의 이단들을 경계하고 바른 진리를 붙잡도록 교훈하기 위해 
쓰여진 것임을 볼 때 ‘테리오’, 즉 ‘지키다’라는 단어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도는 영생에 이르기까지 지키심을 받은 자로서 진리 가운데 
자신을 지키기에 힘써야 할 것임은 은연중에 교훈한 것입니다. 

이는 뒤에서 등장하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천사들을 대비되게 
소개함으로써 그 교훈이 선명해집니다.

2절,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다가 성도들에게 긍휼과 평강이 있을 것을 기원합니다. 
왜냐면 성도를 구원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교회 가운데 
침투한 이단 사상 가운데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성도들이 신앙을 지켜 궁극적으로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일반으로 받은 구원’이란 교회와 사도들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구원의 진리, 즉 만인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을 가리키며, 
동시에 하나님이 행하실 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처음에 유다는 이 서신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구원의 진리를 쓰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 이단들의 문제가 대두되자 기록 목적을 급하게 바꾸어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해 싸우라’는 아주 강하고 
전투적인 어조의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힘써 싸우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에파고니조마이’로서 
‘다투다’, ‘격렬하게 싸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시제를 적용하면 영적인 싸움을 
‘매순간 끊임없이 싸우다’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즉 유다는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지주의 이단들과 지속적으로 싸워 나가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에 멈추지 말고 
그 받은 믿음을 현재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계속해서 지켜 나아가야하는 사람입니다.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4절에서 유다서 기록의 직접적인 동기가 ‘가만히 들어온 사람’ 때문임을 말합니다. 
직역하면 ‘그들은 이미 몰래 들어왔다’가 되는데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어떤 악한 것을 비밀리에 그리고 미묘하게 
침투하는 것을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권위를 경멸하고 율법의 폐기를 주장하여 육체적인 방종을 
일삼으며 교회를 미혹하여 무너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육체적 방탕으로 바꾸었으며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습니다. 

특별히 영지주의 이단들은 영과 육을 철저하게 분리하였으며 
따라서 육체적 방탕이 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신득의의 교리를 오해하여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무조건적 용서가 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육신, 즉 그분의 완전한 인성을 부정하며 
주님의 재림과 심판도 부정하기까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전혀 지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도록 우리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한번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죄와 싸우는 거룩한 전투를 우리는 치러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이 세상에서 수호하고 실천하는 일을 감당해내야 합니다. 

세상에 그 어떤 유혹과 방해가 있다 하더라도 타협하지 말고 
말씀을 듣고 지켜내는 사람이 바른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의와 불법을 즐겨하고 
복음과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받았다고 믿는 구원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구원 받은 사실을 넘어! 
성도의 아름다운 믿음을 드러내며 사는 결단이 있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심판 받은 사람들  (5-10절)

유다는 영지주의 이단들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성도라면 이미 알고 있을, 그러나 다시 한번 되새겨야 들어야 할 
세 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서술합니다.

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다는 불신앙으로 심판을 받았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첫 번째 
사례로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하심 때문에 애굽에서 
종살이를 면하였지만 광야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불평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출애굽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불순종 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불신 때문에 심판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두번째 사례로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했다가 
심판을 받은 천사들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내용일 
수 있으나 5절에서 유다의 언급을 볼 때 
이 천사 이야기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인식되고 있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이 천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본연의 직무와 거처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주의 재림과 심판의 때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가두셨습니다. 
여기서 ‘가두셨다’의 헬라어 원어는 ‘테레오’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지키신다’라고 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가 바로 
이 ‘테레오’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흑암에 가두신다고 할 때 
이 ‘테레오’가 사용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안에서 
‘테레오’ 되겠지만, 하나님을 불신하고 교만한 자들은 흑암 속에 
영원히 ‘테레오’ 될 것임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다는 세번째 사례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타락과 방종으로 심판받은 가장 대표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7절 음란의 헬라어 원어는 강조의 의미를 가진 접두어 ‘에크’와 
우리가 잘 아는 포르노의 어원인 ‘포르튜오’의 합성어인 ‘엑포르뉴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음란의 상태가 아니라 비상식적인 성적결합도 불사하는 
혐오스러운 간음에 푹 빠져 있는 타락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적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 범죄의 결과로 그들은 영원한 불의 형벌로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가지 사례는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권위에 도전이 있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안에서도 바로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지주의 이단들입니다. 

유다가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무아경 속에 빠져 신과 접촉하였다고 주장하거나 
신비한 체험을 중요시여기며 방탕함에 빠져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홀히 여기며 
그분이 미워하시는 육신의 방탕한 죄악들을 행하였습니다.

9-10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9절의 이야기는 위경 중 하나인 ‘모세 승천기’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모세의 시체를 소유하는데 있어서 
미가엘과 사단이 논쟁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미가엘은 사단을 비방하는 대신, 하나님께 판결을 맡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미가엘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사단의 권세가 컸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재판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볼때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했던 이단들의 죄는 
어떻습니까? 천상의 존재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할진데 
하물며 이단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거스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단의 최후  (11~20절)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셨을 때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단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의 어떤 모습 때문에 ‘화 있을진저’ 역정을 내셨을까요?

첫째, 그들은 ‘가인의 길에 행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길에 행했다’는 말은 ‘가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인의 잘못은 동생 아벨을 살인한 죄라고 여기지만, 
보다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창4:5)’. 
가인이 상식적인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왜 내가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실까?’를 
먼저 자문해보았을 것입니다. 

‘혹시 내가 드린 곡식에 흠이 있나? 썩었나?’ 먼저 자신을 돌아보았어야 하는데, 
그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는 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지 않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예배가 형식적으로 변하게 되고, 
예배가 형식적이 되면 매사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됩니다. 
나를 돌아보기보다는 남을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하나님을 탓하며, 종국에는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본능에 충실한 짐승처럼 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도처에서 분노조절 장애로 인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하며,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삯을 위하여 발람과 같이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2~24장에 의하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두려워한 모압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에게 재물과 명예를 약속하며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부탁합니다. 

발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면서도, 모압왕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왔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세 번이나 축복합니다. 

이 모습에 진노한 발락이 발람을 몰아세웠지만 발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발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압왕에게 여자들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미혹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발람의 모략에 넘어간 이스라엘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과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민31:15-16). 

이처럼 발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속내는 재물과 명예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이처럼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이끈 그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정복했을 때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기록한 여호수아 13:22은 그를 더 이상 ‘선지자’라 부르지 않고 
‘점술가’로 부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를 ‘불의의 삯을 탐낸 탐욕의 선지자’, 
‘하나님의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 거짓 선지자’, 
‘음행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던 선지자’(벧후2:15-16, 계2:14)
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구원파,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바로 이와 같은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사회를 위해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성경을 멋대로 재단하고 해석해서 
예수님을 팔아서, 주님의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집단이 바로 이단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현혹된 데는 
세속화된 일부 개신교회에도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위선 그리고 무례한 태도, 성장제일주의, 
등과 같은 문제로 교회의 사회적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교회 내부의 의사결정권에서 밀린 젊은 청년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신천지는 바로 이 틈을 파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과 딜(deal)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고라의 패역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고라의 패역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에 대한 도발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뜻합니다. 

민수기 16장에는 레위 지파 고핫의 손자이자, 
모세와는 사촌 관계인 고라와 르우벤 지파 다단과 아비람이 당을 지어 
모세에게 반역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지낼 때 각 지파에서 나름대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한 이후부터 
절대적인 권위에 눌려 지내면서 서서히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이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 초기에 불거진 불평불만 세력을 규합해서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등한데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만 
제사장직을 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임명하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지도자급 250명이 집단행동에 
나섰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지진과 불과 염병으로 고라와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과 재물을 모두 멸절하셨습니다.

사도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침입해서 잘못된 교리로 교인들과 
교회를 분란에 빠뜨리는 것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중대한 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으로 인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즉 목회자의 자질 문제, 재정 비리 문제, 당회원들의 문제, 
교인들 간의 당파 싸움으로 인해 교회가 분란에 빠진 경우도 많이 있죠. 

그런데 이같이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 
이는 곧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사실 앞에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고라도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드러납니다. 

우리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어야만 나를 향하신, 
가정을 향하신, 공동체를 향하신, 교회를 향하신, 
사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12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넷째로 그들의 실체가 ‘애찬에 암초’이기 때문입니다. 
애찬은 ‘사랑의 잔치’라는 뜻으로 교우들이 예수 안에서 교제하기 위해 함께 
먹는 공동식사를 뜻합니다. 

항해하고 있는 배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바다 속에 숨어있는 암초입니다. 
암초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이웃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애찬은 가난한 자들을 초대해서 준비한 음식으로 구제하며, 
예수 안에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는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애찬의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애찬에 참가한 성도들을 거짓된 말씀으로 유혹해서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했죠. 

이단들은 표면적으로는 위험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힘들거나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등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친밀하게 다가오고, 어느 정도 친밀해지면 거짓된 교리로 인도해서 
결국에는 믿음을 파선시키는 암초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서 진행되는 성경공부에 초대받는 경우, 반드시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교역자에게 먼저 상의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섯째, 그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역할은 양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 
약한 양, 상한 양, 병든 양을 찾아 돌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청지기 의식이 없는 이단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양을 돌보지 않고 이용하기만 하고 대접만 받으려 하죠.

본문은 그들을 향해 ‘물 없는 구름’과 같고 
‘뿌리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물 없는 구름과 뿌리 뽑힌 나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단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 존재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과도 같이 
시끄럽게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고도 그것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되레 큰 소리를 치고, 거짓 정보로 사람을 현혹하다가 
결국에는 암흑 속으로 사라질 유성과도 같은 유리하는 별에 불과합니다 (13).

유다는 ‘모세의 승천기’에 이어 또 다른 위경인 ‘에녹1서’를 인용해서 
오래 전에 에녹이 이들의 멸망을 예언했음을 상기시켰습니다(14-15).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에 이단들이 당할 심판을 경고하면서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본문에서 4차례에 걸쳐 강조한 말은 ‘경건하지 않은’입니다. 
주님의 심판 기준은 ‘경건’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경건한 행동과 말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사도유다는 경건하지 않은 이단들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하나님께 경건하지 않으면 ‘원망, 불만, 정욕, 자기 자랑, 아첨’과 같은 
악한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물 때문에, 양식 때문에, 
무더위 때문에, 적들의 침입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만나를 먹으면서도 맛이 없다고 불평했고, 
가나안 정탐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 유리하다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헤롯왕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며 자만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몸에 벌레가 생겨 죽고 말았습니다(행12:21-23). 

성경은 ‘아첨하는 행위’를 악인의 특징으로 꼽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시12:3)

이같이 경건하지 못해 악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을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19)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딤후4:6-7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말하며, 
딤후2:15-16절에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영지
주의자들의 거짓된 말, 잘못된 사상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하죠.

경건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17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사도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딤전4:6-7절에서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고’, 
딤후2:15-16절에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라’고 말합니다.

경건하지 못한 파멸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의 교훈, 교회의 가르침에 유념해야 하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라 (20-21절)

유다서는 앞선 17-19절에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기록을 상기시키면서 
이어지는 20-21절에서 신자들에게 미혹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 당시 신자들을 위협했던 것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배교’와 ‘교회의 분열’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오늘 우리에게 거짓 교사가 없다 하여 
이 말씀이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말씀의 기준’과 ‘분별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과거 신자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받았던 미혹보다 더 큰 시험이 
우리 눈앞에 놓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0-21절은 세 가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며 
다양한 거짓 가르침에 맞서 교회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키고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20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영적인 집을 견고하게 세우는 첫 번째 
방법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입니다. 

여기 ‘안에서’ 라는 표현은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열어주십니다. 
또 우리가 주님에 대한 더 많은 것들을 깨닫도록 친히 가르쳐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 하나님 안에서 더욱 풍성하고도, 능력 있는 기도를 
성부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하나님을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유다서 19절의 말씀과 같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이들과 함께 하시지 않기에, 참되고 거룩한 기도를 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이들의 인생 또한 ‘거짓’과 ‘죄악’이 가득하게 됩니다. 

거짓 교사들(즉 배교자들)은 입으로는 항상 ‘하나님’을 언급하지만 
이들의 실재 삶속에서 기도란 불필요하여, 
항상 제쳐 놓아도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배교자들에게 하나님은 없는 존재이기에 기도할 필요 또한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기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던 
그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는 결국 그들 자신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님과 
연결시켜주는 생명의 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신자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기도를 중단할 수 없습니다. 

21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신자들이 거짓 가르침에 대항해 굳건하게 설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을 굳건하게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원리를 담고 있는 말씀이 요한복음 6장 28-29절입니다.

요6:28-29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랍비라고 
주장하던 이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 질문과 대답은 유다서에 나타난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두 번째 방법과 그 본질이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는 은혜의 사실을 믿고, 
그 사랑에 깊이 잠겨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을 향한 선한 싸움은 
세상의 일반적인 싸움과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충분한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에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더 쟁취하려는 자세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주신 사랑의 모습을 품고 내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특별히 많이 이루어서, 
그 존재와 의미를 증명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그 회복된 형상 자체로, 
다른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잠겨있는 것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으나,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이 거한다면, 그 믿음의 사람은 지금, 
이 악한 세상을 향해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가르침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명과도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신자들에게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미가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그리고 이제 신약의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일과 함께 구원의 최종적 완성과 최후 심판의 날을 
믿음으로 받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러한 ‘기다림’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에 
하나님의 말씀 또한 살아서 반드시 그 말씀대로 성취될 것이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땅은 여전히 죄가 만연하고 그렇기에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전쟁터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 속에서도 
우리가 흔들림 없이 믿음의 길을 지켜 갈 수 있는 이유는 
당장 오늘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에 처할지 몰라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최후 심판의 날에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입니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유다서 20-21절에 기록된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세 가지의 방법은 
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점을 설명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성령 하나님으로 기도해야하고, 성자 예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이웃을 긍휼히 여기라  (22-23절)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는 방식으로 
보다 굳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의 거짓들에 
빠져있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기를 권면합니다. 22-23절입니다.

22-23절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22절에서 도와주길 권면하는 사람들은 먼저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놓인 삶의 문제를 놓고, ‘의심’과 ‘질문’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그 ‘의심’과 ‘질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을 듣고, 
믿음을 얻게 사람들에게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진리의 빛이 
그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만, 
그 생명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큰 의심과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특별히 잘나고, 
똑똑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은혜의 결과였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렵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의심하는 자들, 질문하는 자들을 업신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예수님 자신을 
알고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의심’과 ‘질문’을 터부시 여기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여러 현상들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성경 안에서 더 깊고 풍성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열망 
즉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나의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얻게 되지만, 
이와 동시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의심’과 ‘나약함’. ‘더러운 죄악’을 
긍휼히 여기고 이들을 도와주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성숙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와의 연합의 과정에서도 찾아오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웃을 이해하고 품는 과정에서 더욱 깊이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점에서 의심하는 자들을 위하여, 죽음의 불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미련한 자들을 위하여, 더러운 죄악에 빠져 사는 악한 자들을 위하여도, 
우리는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놓고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리하셨습니다.

▲송영 :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24-25절)

유다서는 무엇보다도 그 마지막 말씀인 24~25절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며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서게 하시고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분이십니다(24절). 

그러니 “오직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라고 
송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5절). 

이것이 우리가 이 시대와 또 오는 시대에 부를 영원한 찬송이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하나님을 경외함과 인내로써 지키며 일평생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심판 날에도 무너지지 않을 집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날에 주 앞에 영광과 즐거움으로 서는 은혜를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