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장 번제 레1장 설교녹취, 정리
◑서론
레위기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외면, 소외받는 말씀 중 하나죠.
왜 사람들은 레위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고 뒤로 제쳐 놓는 것일까요?
아마 먼저는, '이 레위기의 내용이, 나와는 상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해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레위기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 그 유대인들,
특별히 그 가운데서 레위인, 제사장들과 관련된 말씀이지,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오해,
그것 때문에 아마 레위기를 뒤로 제쳐놓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시대하고도 레위기가 좀 안 맞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성령을 보냄 받아서, 우리가 이제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뭐 율법과 제사와 절기와 정결예식.. 뭐 이런 것들을 지켜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예배하던 그 시대의 내용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전혀 다른 시대라고 생각해서
이 레위기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레위기는 조금 뒤로 제쳐놓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레위기를 잘라내서 버려야 되겠죠.
그러나 레위기가 필요하니까, 성경 66권에 넣어진 것인데,
우리는 구약의 규례, 의식, 제사법을 통해서.. 그 의미, 그 정신,
그 상징적인 뜻을 배우게 되죠.
즉 신약의 예배, 신약의 거룩, 신약의 성화, 성결한 삶이 과연 무엇인지,
그 본래적 의미를, 레위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거죠.
신약의 해석이 훨씬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신약에도, 레위기를 수 십 회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이, 구약 레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씌어진 것이죠.
서로 상반되는 별개가 아닙니다.
(구약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상반되게 이해하는 것은 오류죠.
연장선상에서, 더 발전된 의미로 이해해야죠)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연결성
레위기는, 본문 1장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2절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레위기는 그냥 다른 성경과 뚝 떨어져서 레위기가 처음 나온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다음에 나와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출애굽기, 홍해
시내산에서 언약을 받고, 회막(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되는가에 대한 말씀,
그리고 성막을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가득 차서
모세가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해 계셨어요. 거기서 출애굽기가 끝났거든요.
근데 레위기는 그 다음에 이어져서
하나님이 이제 그 회막 안에서 모세를 부르고 계십니다.
회막 안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1~2
여기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신다' 라는 것은,
모세를 지금 세 번째 부르고 있거든요.
첫 번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한번 구원해 보겠다고 했던 그 모세가
사십 년 동안이나 절망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 밖에 있었던 것처럼
느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사이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두 번째 모세를 부르신 것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주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셨어요.
본문 말씀은 세 번째 모세를 부르십니다. 1:1
이제는 하나님이 모세를 자기에게로,
-구원으로 부르시고
-언약으로 부르시고
-이제는 회막 안으로 부르셔서
자신과의 관계 속으로, 자신과의 어떠한 우정, 그분에 대한 예배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모세만 불렀습니까? 2절을 보시면
모세를 부르시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을 다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2
위 구절은 사실은 '예물을 드릴 때' 이런 뜻입니다.
'예물을 드려도 되고, 드리지 않아도 되고... 이게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은 예물을 드릴 거라고 지금 전제하고서
여기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제사지내다'
우리 말로하면 '예배드리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언약으로 부르셨어요. 여기까지는 출애굽기.
그러나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 앞으로 부르신다 말입니다. 여기부터 레위기!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르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부르신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말씀은, 출애굽기가 있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모든 자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거죠. *칭의 이후 성화의 복음
◑레위기는 <성화의 복음>
지금 하나님은 단순히 자유와 구원, 그리고 언약으로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고, 이제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자리로 부르셔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말씀하신 그 분이
'어떻게 그러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게 되는가?'
'어떻게 거룩을 이룰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에 대한.. 거룩을 위한 지침,
그것을 보여주는 영적인 교훈들이, 레위기에 담겨 있단 말입니다.
우리도 구원을 받았어요.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언약을 맺어 주셨고
우리는 그분과 언약을 맺었어요. (여기까지 출애굽기)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분 앞에 나와서, (이것은 레위기)
어떻게 그러면 그 거룩하신 분 앞에서
우리가 거룩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가르쳐 준다는 거죠.
레위기가 거룩한 길을 위한 지침들을 우리에게 주면서
레위기에 있는 모든 말씀들은 거룩을 위한 지침들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레위기는,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복음이기도 해요.
출애굽기는, 구원이 없는 자들, 죄와 사망 권세 가운데
노예로 살고 있던 종된 자들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해 내시는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어떻게 건져 내시는가에 대한 기쁜 소식이었죠.
출애굽기는 구원받는 자를 위한 기쁜 소식이었어요. *칭의 구원
그런데 지금 본문 레위기는, 그 구원 받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지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성화 구원
그리고 그 구원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 받은 자들이, 어떻게 그들이 받은 신분과
그들이 받은 축복을 여전히 누리며
그 안에 거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쁜 소식 이고요.
혹 그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개하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거룩 안에 있을 수 있는지..
우리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거룩)들을 또 다시 어떻게 되찾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연결해 나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구원 받은 자들이, 죄성을 가진 자들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과 예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쁜 소식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모세오경의 정 중앙에 있어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모세오경의 중심에 있죠.
그러므로 레위기는, 구원받은 성도의 중심에 있어야 되는
매우 귀중한 말씀이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어떻게 하면 거룩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인 지침이기도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고 세상 가운데 있는
가나안 한복판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을 계속해서 예배하고
죄때문에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계속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그 언약안에 머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귀중한 구약의 복음서다.. 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번제의 의미
그러면 이제 레위기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는 회막으로 부르시고
'나와 만나자, 그리고 나를 예배해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이제 나를 예배하는 자가 되었으니
나를 예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처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번제를 말씀하시거든요.
너희가 나를 만나고 나를 예배하기 위해서는
'번제를 통해서 나를 만날 수 있다. 나를 예배 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레1장을 통해서, 번제 안에 있는 원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는지
4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앞으로 담대히 나가서
그분을 예배 할 수 있는지...
▲1. 그 첫 번째는 <제물을 통해서> 라고
하나님은 레1장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어떤 자들인지를 기억하십시오.
이들은 이미 어린양의 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니 그들에게는 이미,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역사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이 회막에 임재하셔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부른 장소에서
또다시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고 하니까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너희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너희가 나와 함께 만나, 나를 예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가축 중에서 소, 양, 염소로도 할 수 있고,
가난한 자들은 새의 새끼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되,
어떻게 하든지 이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라고 말하면서
회막문에서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그러니까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제물이 있다"는 거죠.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4절을 보면,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자가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하나님을 예배 하기 위해서는
내게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있는데
그러니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면 되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제물을 태워야 된다 라고 말씀하면서
먼저 그 제물에 안수하라는 겁니다.
'안수'라는 히브리어 사마크 는, '기대다, 맡기다, 누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살짝 손을 스치며 '이건 내 거야' 하는 게 아니라,
나 전체를 제물에 맡기는(기대는, 의지하는) 거예요.
제물과 나를 하나로 만드는 거예요.
레위기 1장에는 번제가 나오는데,
뒤에는 속죄제, 속건제가 나옵니다.
이거는 구체적으로 내가 죄를 지었고, 내 죄를 제거하기 위한 제사거든요.
근데 지금 1장의 번제는, 구체적인 행위나 죄에 대한 언급이 없어요.
그런데 왜 속죄를 해야 되는가요?
이것은 더 근본적으로, 내가 죄를 짓기도 전에
구체적인 어떤 죄를 행하기도 전에
우리는 존재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내 본성 속에는 죄가 있고, 나 라는 존재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 전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죄 전체를 여기 안수 함과 동시에
나의 죄 전체를, 내 존재 전체를
이 제물에 나를 맡기면서 안수를 하라는 것이죠.
▲2. 그리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 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그 송아지를 죽인다는 뜻이죠.
나 전체를 송아지에게 맡겼고(전가시켰고), 내 죄의 본성, 존재적 죄
이 모든 것들을 그에게 안수 했고, 나 전체를 의미하는 이것을
자기 스스로 죽인다는 거에요.
그리고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사방에 뿌렸다.. 라는 것은
실제로 죽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죠.
즉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번제할 제물, 그것에 나의 모든 죄를 전가하고
나의 모든 것을 의지하여 죽임으로써,
그 번제물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과 연합 되어서
즉 나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할 수 있다.. 라는 거죠.
이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구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예배로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또다시 뭐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번제의 제물이 되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여전히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피를 흘리신 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오늘의 번제물도 되시고
오늘의 번제 양도 되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칭의구원'으로만 만족하시면 안 됩니다. *단회적
칭의 다음에는 '성화구원'이 있습니다. *계속적, 영속적
△아브라함이 창22장에,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그 순간
우리는 거기서 여호와이레 라는 제단을 쌓았고
그 곳에서 '아~ 그분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
십자가의 어린 양이 되시는구나..' 라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창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그리고 난 이후에 13절을 읽어 볼까요.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 양이 되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준비된 어린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 '칭의구원'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번제물이기도해요.
-그런데 또한 그 어린 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준비되어 있는 번제양이기도 하다.. 라는 것이죠.
지금 아브라함이 '칭의구원' 받기 위해서 번제의 양으로 예배 드렸습니까?
아니에요.
이미 아브라함은 구원 받았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지금 번제양, 어린 양을 잡은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 하기 위해서 어린 양을 잡았단 말입니다.
창22장 상황은, 칭의구원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화구원을 설명합니다.
보통은 '구원하러 오신 어린양 예수' 관점으로만 보는데,
'우리의 예배, 온전한 태움인 번제적 헌신'의 관점으로도 봐야 한다는 거죠.
레1장 본문이 바로 그 관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로 드리기 위해서
오늘도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위한 번제양이 되셔서
날마다 그분을 통하여 또다시 그분의 죽음에 나 자신을 의지하고 연합시켜서
(이것이 번제물에게 '안수'를 의미하죠. 레1:4)
오늘도 하나님께 나가야 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 이 번제의 또 다른 원리 중의 하나는
번제는.. '전부를 드린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되,
그 제물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까지도 다 드릴 수 있도록
수소로 드릴 수도 있고, 수염소나 수양으로 드릴 수도 있고
그리고 들에 나가 비둘기를 잡아서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9절에 보니까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그리고 13절에도 똑같은 말이 반복되는 돼요.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새도.. 더러운 부위들을 빼놓고, 그 전부를 다 하나님께 태워 드리는 거죠.
17절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전체를 드린다는 뜻)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 하기 위해서는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2장에서 보게 될 소제는, 그 일부를 제사장들에게 줘요. 먹으라고.
화목제는 백성들이 같이 나눠 먹어요.
그런데 1장의 번제는 하나님께 전부 다 드리는 거예요.
이 제물을 하나님께 전부를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또 하나의 원리는
이 제물을 하나님께 전부로 드리듯이
이 제물과 연합된 내가 전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혹은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전부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마음만 드리지
우리 의지를 드려서 실제로 나를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아요.
마음으로 동의하고, 생각으로 동의를 하는데
실제로 내 몸을 거기까지 움직이진 않아요.
몸을 드린다는 것은, 의지까지 움직였다는 거죠.
생각이 마음과 의지가.. 내 몸이 움직일 때, 순종과 헌신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내 생각과 마음은 동의를 했는데, 내 몸을 드리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근데 어떨 때는 억지로 몸은 드렸어요.
근데 동의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드리는 겁니다.
바리새인들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들을 형식적으로 드렸어요.
그런데 거기에 진심이 안 담겨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을 수 없었죠.
근데 부자청년 같은 경우는 어땠습니까?
그는 전부를 드리지 않더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그것을
내 자신을 드려서 드렸지만
그러나 물질을 드리지는 못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몸은 드리기는 하는데, 마음을 드리지는 않았고
어떤 때는 마음은 있는데 몸은 드려지지 않을 때가 있죠.
어떤 때는 시간은 드렸는데, 물질은 드리지 못하고
또 어떤 때는 물질은 드렸는데, 내 시간은 드리지 못하고,
내가 가진 무엇은 드리지 못하고...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이런 경우가 너무나도 많더라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 할 때에는
그 제물 전부를 태워 올리면서
그 제물과 연합된 나 자신을 전부 드려야 된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전부를 드리라고 요구하십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당당하게 내 전부를 바치는 제사를 요구하시는 겁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전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 어린양으로 자기 아들을 주셨어요.
그리고 광야를 지나도록 자기의 생명인 성령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어요.
전부를 주시면서
자기 자신을 태워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전부를 받은 너희는 나의 것이고
이제 너희는 나를 예배할 때
너희도 나와 같이 너희 전부를 드려서 예배 해야 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제물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의 전부를 주셨던 것처럼
그와 연합되어서 우리도 전부를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4. 그럼 왜 화제로 태울까요?
17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렇게 짐승의 피를 뿌린 후에는 제물을 다 태웁니다.
<번제는 제물을 다 태우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를 드릴 때는 가죽을 벗기고 나머지는 남김없이 태워야 합니다.
수송아지로 제사 드리는 자는 수송아지를 다 태우고,
양이나 염소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양이나 염소를 다 태워야 합니다.
또 비둘기를 드리는 자는 비둘기를 다 태워야 합니다.
다 태우는 것은 남김 없는 헌신을 말합니다. 완전한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제사 드리는 자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제물을 모두 드려 태워야 합니다.
다 태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비둘기 드리는 자에게 "왜 양이나 염소를 드리지 못했느냐"고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양이나 염소를 드리는 자에게
"왜 수송아지를 드리지 못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단순히 죽이고 피를 뿌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왜 태울까요?
태우면, 모든 것이 어디로 향하게 됩니까?
위로 올라가게 되는 거예요.
번제는, 하나님께 태워서 '올려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의 뜻이 '태우는 제사'라는 말인데, '올려드린다'는 뜻도 됩니다.
번제를 히브리어로 '올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올려드린다'는 뜻. 2개 다 맞음.
이 모든 것들을 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올려 보내고..
여러분, 사람이 고기 굽는 냄새를 좋아하셔서 이걸 지금 맡으십니까? No
재을 다 태워 그 연기를 올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만 내 전부를 드린다는..
예배자의 믿음과 예배자 전부가 담겨 있는 거에요.
하나님은 고기냄새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제물에 하나가 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것을 흠향하시고 기뻐하신다.. 라고 말하면서
'오직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서만'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 관중이시고
모든 것들이 우리가 참여하는 거죠.
지금 우리 예배들이 많이 혼탁해 졌습니다.
5절을 보면,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그는' 이라고 되어 있죠. 이 단어에 주목해 보세요!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수송아지든지 다른 제물이 될 수도 있겠죠.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제물된 짐승을 잡을까요?
제사장이 잡습니까? No!
5절을 보면, "자기가 잡아요."
제사드리는 성도 자기가, 제물된 짐승을 데리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키는 거죠.
그리고 나서 그 성도가 그 짐승을 죽여요. (물론 레위인이 함께 하겠죠)
어쨌든 예배자가 구경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능동적 참여자라는 뜻이죠.
(또한 요즘 히브리 번제 식으로 한 번 체험 실습하는 분들의 간증에 의하면,
이게 쉬운 작업이 아니고, 잡는 slaughting 일이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 제물된 짐승이 죽었지만, 그 상징과 의미는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안수를 통해, 내 죄가 전가되었고, 나 자신이 전가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예배는 상한 심령으로, 죽은 것 같은 심정으로 드리는 겁니다.
물론 그 후에 부활이 또한 뒤따르지만요!
△그런데 예배는요. 내 속에 있는 악을 바라 보는 순간이에요.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이 흠 없는 존재가
나로 인하여 죽는 거예요.
여기에 다른 사람을 보여주거나, 내가 감상하거나 할 내용이 있겠습니까?
자 그렇게 해서 6절을 보니까
내가 죽였는데.. 그 제물의 피를, 제사장은 옆에 있다가 그걸 받아서 다 뿌려요.
6~7절에 보니까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예배는..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됐냐면,
예배의 정신이 많이 훼손되어 있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에서
'각을 뜬다'는 쪼개는 것입니다. cut it into pieces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번제로 드릴 때는
아주 다 자신을 세밀하고 자세하게, 하나도 숨김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나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죠.
대충 뭉뚱거려서 '나를 드립니다' 하는 게 아니라, 낱낱이 쪼개서 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예배는, 나의 죄를 바라보면서, 거기에 내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이게 내 죄입니다. 이게 내 모습입니다.
내가 나를 죽여야 됩니다. 그래서 제물이 죽는 것처럼 내가 죽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걸 다 태워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예배하려면
제물의 죽음을 통하여, 그 제물과 연합된 너의 죽음을 통해서
이 제물이 전부 하나님께 드려지듯
네 전부를 드려서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때에야
너희가 나를 예배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리하면, 레위기는 출애굽기 이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뿌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시내산에서 언약으로 자기 백성 삼으셨고,
거기서 성막을 지으시면서 거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레위기는 이제 그 성막 속에서, 모세가 회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이게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면이죠.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출40:34~35
근데 레위기에 와서, 하나님이 이제 그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1:1
그리고 회막(성막)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종종 대면하여 만나고 뵙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데,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격은
바로 제사를 통해서 입니다. 번제를 비롯한 제사를 통해서
그들이 정결, 거룩, 성결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죠.
근데 그것도 성막을 '회막' tent of meeting 즉 만남의 장막으로 표현합니다.
'너희가 나를 만날 거야'
'너희가 이제 나를 만나고, 날마다 나를 예배 하게 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죠?
번제를 통해서만 나를 만날 수 있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너희를 구원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매일 상번제를 드림으로써...
*아침과 저녁 두 번 드렸죠. regular burnt offering
그래서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의 제사였어요.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는 어떤 때마다 드려지는 거지만
번제는 아침 저녁으로 매일매일 드려졌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기억해야 되지만 *칭의구원
날마다 오늘 하루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그분을 다시 번제할 어린양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죽음을 의지해서 예배드리는 겁니다. *성화구원
유월절 어린양의 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내가 구원 받았지만
그러나 오늘의 번제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또다시 의지하여서
'나의 죽음을 통하여, 나의 전부를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 해야 된다' 라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오직 구원으로만 부름 받고,
애굽에서 나와서 자유로만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칭의구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거룩으로 부름 받았다 *성화구원
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 삶 속에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전부를 불태워 드려야 하는 이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상황과 형편을 근거로
좌절, 실망, 낙심할 이유나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신앙적으로 뻔뻔스러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의 피가
어린 양 예수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에
나의 못난 현재 상태와 모습 속에서라도
나를 여전히 완성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
지금도 놓지 아니하시고 붙들고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좌절하는 것은, 뒤집어 얘기하면 가장 교만한 태도입니다
왜 좌절합니까?
좌절은, 아직도 자기 속에 개선될 만한 여지가 있는데.. 라는 반영입니다
그마저도 희망이 없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전부 내던질 수 있기 때문에!
최고의 전략은 뭘까요? 신자가 살아가는 최고의 전략은 뭡니까?
하나님의 자비에 자기 인생을 전부 던지는 겁니다
이게 최고의 전략입니다
애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그 어린 애기가 울먹울먹 실룩실룩 하면서
엄마의 품에 으앙 하고 달려들면
그 자녀를 내질 엄마가 어디 있겠어요?
'다시는 그러지 마라' 하고 등을 토닥거려 줍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최고의 전략은
하나님의 자비와 어린 양의 공로에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사람!
그가 최고의 전략가 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청년들이 너무 너무 힘이 빠져 있어요
정말 힘 빠질만도 합니다 되는 게 없잖아요
비참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우리를 실망시키는 뉴스들이 힘들게 만들잖아요
그래도 그래 우리는 이 역사의 처음과 끝을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고
그 안에 내가 하나님의 경영 속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붙들려 있다는 걸 알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