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율법교사 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율법교사)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그리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율법교사는 전문가답게 줄줄 암송하지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너무 성의 없이 대충 대답을 하세요.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 이런 식으로 너무 대충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10:28
왜 그랬냐면 율법교사가 영생을 질문하는데 그 질문하는 의도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했다'고 그래요. :25
이게 얼마나 웃기는 코미디같은 얘기예요? 성경은 예수님을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본체시요, 영생의 근원'이라고 말씀하고 있단 말이에요. 히1:3 등 근데 그분께 나아와 가지고 지금 영생을 시험삼아 질문 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러니 대충 대답하신 거죠.
그랬더니 율법교사가 재차 다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
아니, 이 율법교사가 정말 자기 이웃이 누군지 몰라서 이렇게 질문 했을까요? 아니죠. 알아도 너무 잘 알았지요.
그럼 그 의도가,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29
한마디로 말하면, 이 사람은 이미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당연히 자기는 잘 섬기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그리고 이웃까지도 완벽하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과 사명을 다 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예수님 앞에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의 생각을 이미 아시죠. 그래서 비유 하나를 말씀 하십니다.
그 예수님의 비유에, 율법교사가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이웃하고 예수님이 생각하고 있는 이웃이 다르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들이 영생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었는지요! 우리가 이에 대해 함께 좀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10:30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는데, 강도가 옷과 지참금을 빼앗고 그리고 때려서 다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다' 그래요.
근데 마침 제사장이 거기를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힐끔 보고서, 그냥 지나쳐 버리고...
또 레위 사람도 지나가다 그를 힐끔 보고 그냥 지나가 버리고...
다 죽게 된 사람을 도와주려 하다가, 자칫 잘못 하면, 자기가 너무 손해 많이 볼 거 같았겠죠. 그가 만약 죽어버리면.. 수습할 문제가 아주 커지는 거죠. 그러니까 그를 다 피해서, 자기 길을 가는 거죠.
그렇지만 한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치료해주고, 그를 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대조가 되는, 두 부류의 이웃입니다.
▲여러분들이 짐작하건데 율법교사가 생각하는 '자기 이웃'들이 이미 다 나와 있지요. 제사장과 레위인.. 들이 자기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소개하는 이웃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마리아 인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본문의 그 강도당한 이웃을 유대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내려가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래위인이 어떻게 지나갔다고요? '피해서 지나갔다'고 그래요.
이 율법교사가 듣기는, 자기 백성, 자기 양들을 책임져야 될 지도자 격인 사람들이 양을 버리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이게 충격이었겠지요.
그런데 더 충격인 것은, 그 유대인에게는 자비를 베푼 자가 사마리아 인이었죠.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아시다시피 개, 돼지 취급을 했던 사람들이었죠.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더러운 원수들이었죠. 그래서 그 땅을 밟는 것만으로도 더럽다고 여겨서, 빙 둘러서 돌아서 다녔죠.
율법교사가 얼마나 사마리아인을 싫어했으면 예수님께서 '강도 당한 자의 이웃이 누구냐?' 이렇게 질문할 때
시원하게 '사마리아 인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깔끔하고! 그런데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하고 정체를 모호하게 우회적으로 대답을 했죠. 율법교사는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정말 그냥 원수지간인데 '내가 하나님의 본체이고, 그런 존재니까 내 말 들어!' 이렇게 강제적으로, 율법교사에게,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압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런데 원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한 가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의 한 가정에서 시작된 하나였던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이 그러나 이제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됐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다가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의 10지파는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죠.
근데 앗수르 제국의 그 식민지 정책은, 민족들을 막 섞어버리는 거죠. 혼혈정책을 썼습니다. 여기 사람은 저 쪽에 옮기고.. 해서 피를 섞어 버렸죠.
왜냐면 같은 민족끼리 혼연일체 단결해서 폭동을 일으킬까봐 아예 민족들을 섞어버린 거죠.
그 식민지 정책에 의해서, 북이스라엘 10지파의 사람들은 앗수르로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또 이방인들이 북이스라엘로 이주해 와서... 피가 다 섞여 버렸어요.
그래서 이때부터 유대인들에게 그들은 '더러운 자들, 개, 돼지들' 취급받았죠.
사마리아 인들은 그렇게 버림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봐서 알지만, 메시아를.. 예언자들이 계속해서 예언했던 그 메시아를 기다리는.. 메시아 사상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전부는 아니라 일부라도)
피가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속 내면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목마름으로 기다리고 있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죠.
그런데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혼혈되었다는 이유로 개, 돼지 취급한 거예요.
근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사마리아 인들이 유대인의 이웃이다, 받아줘라!'고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핏줄은 더렵혀혔지만, 원래 한 가족, 이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 모세율법이 있다' 이거지요. '메시아 대망 사상도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모든 민족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은 모든 인류가, 첫 사람 아담 안에서 한가족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씀하죠.
성경의 이 말씀이 분명한 진리라면, 모든 열방과, 모든 사람들은.. 한 가족으로 지원받은 형제 자매인줄로 믿습니다. 아담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인류는 한 가족 임이 분명해요. 가족이라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뭐 조금 잘못한다고.. 조금 나쁜 짓 크게 했다고 버려요? 그렇지 않지요. 가족이라면 잘못했다고 버리지 않죠.
그래서 이 성경은, 모든 열방이 첫사람 아담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 사람이 나한테 나쁜 짓을 했어요. 너무 악한 짓을 했어요. '그 놈은 나하고 원수야! 나와 한 가족이 될 수는 없어!' 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말하죠. '내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하라, 축복하라!' 여러분, 자기 가족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까, 아니면 힘든 일입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께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라.. 이것을 너무 거창하게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지 못할 일을 시키신 것처럼 막 어렵게 생각하고, 힘들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을 계명으로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이라는 건요. 당연하게 해야 될 일을 하는게 사명이에요. 주님은 우리에게 당연히 할 일(이웃 사랑)을 주시고, 그게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이 주신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가 거뜬히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네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셨죠. 눅23:28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런데 말이죠. 우리 민족에게, 특별히 우리 탈북민들에게 정말 정말 정말 껄끄러운 한 가문이 있지요.
'정말 북한의 김씨 일가를 우리 가족이다' 라고 해야 돼나요? '그들도 우리와 한 가족이다!' 이거 정말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죠? 아예 생각하기도 싫지요.
율법학자에게 사마리아인이 이웃으로 용납이 안 되듯이, 우리한테도 김씨 일가는 너무나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도 안 되는 이 원수를 통해서 훨씬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눅10:34~35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사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인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누군가를 많이 닮아 있어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기가 가진 기름, 포도주를 전부 다 쏟아서 치료해 주고..' '주막 집에 데려다가 치료비를 다 대주고...'
그리고 마지막에 제일 중요한 게 있습니다. '내가 갔다가 다시 오리라!' .. 본문에는 '내가 돌아올 때에' :35 이건 예수님의 재림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감옥에서 지낼 때, 너무너무 힘들었대요. 그러다가 계속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을 역지사지의 마음을 부어주시더래요.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우리가 나를 통해서 해석하는 것과, 주를 통해서 해석하는게 완전 달라요. 주님이 역사하시면, 언제나 역지사지로 생각하게 되죠.
'내가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내가 만약 저 간수라면...' '내가 만약 나하고 많이 친하게 지냈던 그 중앙당 간부라면...'
심지어는 나를 잡으라고 지시한 '내가 만약 그 김정은이었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더래요.
결국은 '주님 앞에서 그놈이나 나나 다 똑같은 죄인이다!' 그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게 되더라는 거예요.
다 상대를 통해서 나를 해석하는 거예요. 타인을 통해서 나를 해석하는 거죠. (앞서 율법교사는, 자기 관점에서, 자기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을 해석했죠)
주님을 만났을 때, 성령 충만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 사명을 '네 원수를' '사랑하고' 나아가서 '죽기까지 축복하라'
우리는 이게 너무 어렵다고 여깁니다. 아뇨.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너무나 쉬운 거예요. 주님은, 결코 우리가 못 할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명하지 않으세요. 부모가 자녀에게, 불가능한 일을 시키는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내 짐은 쉽고 가벼우니라' 하신 말씀이 맞다면 마11:30 얼마든지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에요.
금년에는 주님으로 우리가 충만케 되기를 원합니다. 남은 시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령으로 충만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을 회복하시고 새롭게 결단하게 하시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 축복하라' 하신 그 말씀을 우리의 당연한 사명으로 붙잡고,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온 열방에 증거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