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1~6:7까지 레위기의 5대 제사가 나오는데, 본문 6:8에서 7장끝까지는, 레위기 첫 번째 부분인 “제사법”을 마치게 됩니다.
1장부터 6:7까지는 5대 제사를 행할 때 백성 편에서 할 일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본문 6:8~7장 끝까지는 5대 제사를 행할 때 제사장 편에서 할 일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처럼 1장~7장까지의 5대 제사법은 백성 편에서, 제사장 편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백성에 대한 제사법 지침의 순서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에 대한 제사법 지침의 순서는 이와 달리 번제, 소제, 대제사장의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순서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순서를 따라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번제를 드릴 때 제사장에 대한 지침 (6:8-13)
번제를 드릴 때 제사장은 다음과 같은 일에 유념해야 합니다. 번제물은 아침까지 (번)제단 위 석쇠 위에 그대로 두어야 하며, 불은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밤새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았으니, 재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이 재를 버려야 하는데 이때 제사장은 옷을 갈아 입고 재를 진 바깥 정결한 곳에 버립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그 안에 세마포 속바지를 입어 하체를 가려야 합니다. 이런 옷을 입고 번제단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재를 버릴 때는 다른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큰 임무는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고 항상 타오르게 해야 하는 거죠. 이를 위해 제사장은 늘 나무를 공급하여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
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항상 드려지는 제사, 곧 상번제였습니다. 이 상번제는 매일 아침에 일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 저녁에 또 한 마리를 소제와 함께 태워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러한 상번제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했습니다. 번제단의 불이 절대로 꺼지지 않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칼빈이 이해하기로는 최초의 번제물을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랐기에, 이 불이 계속 타오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지키는 일을 생각할 때, 제사장은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 드리도록, 예배 드리도록, 그 예배의 문을 항상 열어 두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소제를 드릴 때 제사장에 대한 지침 (6:14-18)
백성들이 곡식 예물로써 소제를 드릴 때,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은 그 소제를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는 일을 합니다.
이때 제사장은 백성이 드린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웅큼을 소제물에 뿌린 기름과 유향과 함께 떠서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이때 소제물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분류되어 제사장의 몫, 영원한 소득으로 돌려집니다.
제사장은 소제를 먹는데 그것에 누룩을 넣지 말고 회막 뜰에서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 중에서 소제를 만지면 그들이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일반 백성이 거룩한 제물을 만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셋째, 대제사장의 소제에 대한 지침 (6:19-23) 이 부분은 백성의 소제와는 달리, 대제사장을 기름 부어 세우는 날에 드리는 소제에 대한 지침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 위임식 때 드린 소제가 이후에 대제사장의 매일 소제, 그리고 제사장의 매일 소제로 이어졌습니다.
주전 1세기 유대 철학자인 필로나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가로서 예루살렘 멸망의 순간을 모두 지켜보았던 요세푸스, 랍비들의 글에 의하면 제사장이 매일 소제를 드리는 규례가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레위기의 장소인 시내산 근처에서 대제사장의 위임식 때 드려졌던 제사장의 매일 소제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까지 꾸준히 이어졌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어쨌거나 오늘 레위기 6장에서는 대제사장 위임식 때 드려진 소제입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자손은 대제사장이 기름 부음 받아 세워진 대제사장 위임식 날에 소제를 드립니다.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의 반은 아침에, 반은 저녁에 소제로 드립니다. 고운 가루를 기름에 반죽하여 철판에 굽기도 하고, 기름에 적셔 여러 조각으로 썰어서 소제로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이때 제사장의 소제는 제사장이 먹어서는 안 되며 온전히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일반 백성의 소제물의 경우와 다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의 위임식 소제가 드려진 이후 이것은 모든 제사장들이 매일 드리는 소제로 정착되었습니다.
△이처럼 제사장의 소제를 매일 드려야 하는 이유는 인간 제사장의 약점과 허물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반복되는 제사장의 제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단 한번의 제사로 구원을 완성하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께 매일 나아가 그 보혈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라는 신앙고백만으로 충분한 은혜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넷째, 속죄제를 드릴 때 제사장에 대한 지침 (6:24-30)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번제물을 잡는 같은 장소에서 잡아야 하고, 그 제물은 제사장이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합니다.
또한 이 고기에 접촉한 모든 사람은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피가 묻은 옷은 거룩한 곳에서 빨고, 고기를 삶은 토기는 깨트리고, 고기를 삶은 유기는 물로 씻어야 합니다.
토기에는 제물의 찌꺼기나 냄새가 밸 수 있기에 깨트리고, 유기, 즉 놋 그릇은 깨끗이 씻을 수 있기 때문에 안 깨트리는 것 같습니다.
속죄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인 남자에게만 국한되었는데, 이는 그 제물이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제물은 소제, 속죄제, 속건제 제물인데, 이 제물은 제사장인 남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번제는 다 태우기에 누구도 먹을 수 없었고, 화목제는 제사장과 그 가족과 일반 백성 예배자도 함께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 제물은 일반 백성이 먹어도 되는 유일한 제물입니다. 그리고 6장의 속죄제 규례에는 안 나오지만 4장의 속죄제 규례에서는 피 뿌리는 예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제사장의 중요한 일이었고, 예배자의 신분에 따라, 즉 제사장, 온 회중, 족장, 백성 개개인일 경우 피 뿌리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특히 제사장이나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인 경우엔 피를 손가락에 찍어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분향단 뿔들에 발랐습니다.
지난번 4장 속죄제 규례를 할 때 피를 휘장 앞에 손가락에 찍어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30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피를 취한 속죄제물의 고기는 먹어서는 안 되고 불살라야 했습니다. 이처럼 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에 대해서는 족장이나 백성 개개인의 죄보다도 더 엄격히 다루었습니다.
▲다섯째, 속건제를 드릴 때 제사장에 대한 지침 (7:1-10) 7장은 속건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다룹니다. 속건제 경우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제물을 잡고,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기름과 내장과 콩팥 등은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제사장인 남자는 속건제 고기를 회막 안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은 속건제 제물, 번제물의 가죽, 소제물입니다.
소제물은 요리한 것이든 반죽한 것이든 반죽하지 않은 것이든 가릴 것 없이 아론의 모든 자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화목제를 드릴 때 제사장에 대한 지침 (7:11-36) 화목제물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목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한 것이며, 감사와 서원과 자원이라는 세 가지 성격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3장
이 세 가지 모습이 7장에 또 나옵니다. 12절에선 감사함으로 화목제를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 기름 바른 무교전병,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감사제물과 함께 드립니다.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예물로 드릴 수 있는데, 이때는 전체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제사장에게 돌립니다.
화목제물의 고기를 드릴 때는 두 종류의 고기가 있는데, 가슴 부위의 고기는 앞뒤로 흔들어 요제로 삼고, 오른쪽 뒷다리는 상하로 들어 거제를 삼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 후에 이 흔든 가슴과 들어 올린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의 영원한 소득으로 돌립니다.
이로써 제사장들이 생계 걱정 없이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이 미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가난할 때 제사보다 생계문제에 쓰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이는 예배의 약화를 가져오고 제사장 가족과 전체 공동체의 영성과 삶에 손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흔든 가슴과 뒷다리를 예배 집행자의 영원한 소득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에겐 땅이 그들의 기업이었지만, 제사장에겐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께 드려진 예물의 일부가 그들의 기업이었습니다. 화목제 예물 중에서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에 대해서는 둘째 날 혹은 셋째 날에 그 고기를 다 불태워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고기의 경우는 그 날에 먹고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 서원이나 자원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고기의 경우는 드린 날과 이튿날에도 먹지만, 셋째 날에는 남은 제물을 불살라야 합니다.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제물은 가증한 것이 되고 그 제물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첫째 혹은 둘째 날에 화목제의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면 먹지 말고 불살라야 하며,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 몸이 부정한 자가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만일 부정한 것을 만지고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도 역시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이를 볼 때 백성뿐 아니라 제사장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부정해서는 안 되고, 자신을 정결케 해야 제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어릴 때 엘리의 두 아들인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 제물을 함부로 취하여 저주를 자청했습니다. 이것이 큰 죄가 되어 한 날에 블레셋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레위기 등에 나타난 제물에 대한 규정이 복잡하고 엄격한데, 그만큼 제물이 소중히 다루어 져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만찬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했죠(고전11:27-29).
이러한 모습은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장의 제물 섭취와 연관이 있습니다. 깨끗한 제사장만 제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회개하고 믿어 깨끗해진 마음으로 예수님의 몸을 먹는 성찬에 참예해야 합니다.
△7:22-27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곧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 모두에게 주시는 지침입니다. 그것은 (모든) 제물의 기름과 피를 절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름과 피는 제사장이든 백성이든 누구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제물이 아닌 짐승의 기름을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있지만, 절대 먹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기름을 먹고 피를 먹는다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는지 7장 마지막 두 절에서 요약하죠.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
▲정리하면, 본문 레위기 6, 7장은 구약시대의 제사장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러한 옛 제사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한 번의 제사로써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배 자체는 유효하며,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배 인도자의 필요성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이 성직의 폐기를 의미한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가 말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불신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전함으로써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명을 가진 제사장이라는 거지, 교회에서의 성직의 무용함을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말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그리고 이것의 신약 버전인 베드로서의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라는 선언은 불신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전체 공동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사명을 말한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를 말하던 출애굽기 당시에도 제사장직이 있었던 것처럼,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을 말한 후 곧장 이어서 교회에서 성직자의 중요성과 역할을 말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이러한 뒤엣 것을 모르고 앞엣 것만 생각하다가 앞엣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이러한 성직의 자리와 예배의 모습은 개신교 교파마다 온도 차가 있기도 하지만, 구약시대나 교회역사 속에서나 현재 교회의 모습 속에서도 예배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예배집행자인 성직자에 대한 개념은 뚜렷합니다.
▲또한 예배와 제사제도에 관한 문제에 있어 본질과 형식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들은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도 많이 나옵니다.
이것이 형식의 무용함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자리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박하와 회향과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책망하실 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본질과 형식 둘 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레위기 제사의 모습과 제사장이 행하는 여러 형식적인 모습이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 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하나님을 공경하며, 그 예배를 거룩히 집행하며, 그 예배 집례자의 자리는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집례자는 예배자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예배의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와 존경을 드리고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제사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제사들에는 세밀한 절차가 있고 참여자가 있고 집례자가 있습니다. 그러한 세밀한 절차를 밟아서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들이 믿음과 은혜를 마음에 품으면서도, 때로는 지휘자요 때로는 연주자로서 예배라는 최상의 경배를 매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주부터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어 다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많이 팍팍하였습니다. 찬송은 힘들고 마음은 가라앉았습니다.
이처럼 온라인이라는 예배 형식은 약한 것이 분명한데, 이런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최상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훗날 오프라인 예배의 자리가 회복될 때, 매주 최고의 연주와 지휘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