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자, 대형 차고 안에는 북한 형제들로 가득 찼다. 공안국 대형 차고 안에 갇혔지만, 북한 형제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거기 차고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이 되자 북한 형제들은 다 함께 우렁차게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공안들이 곤봉으로 아무리 때려도 개의치 않고, 함성을 지르면서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 기적을 일으켜 주세요. 우리 북한에 가면 다 죽어요.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목청껏 기도하다 찬송을 불렀고 또 기도했다.
고무 곤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밟아도 더욱 더 커지는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에 공안들은 당황했다.
북한 형제들의 기도는 절박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을 느끼자 공안들은 무장 군인들을 동원했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북한 형제 들을 떼어내 대여섯 명씩 다른 차고에 뿔뿔이 흩어서 가두어 넣었다.
무리가 흩어지자 기도의 열기는 식었다. 기도가 끝나고 북한 형제들은 말 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서안 공안국은, 북한 형제들을 중국과 북한사이의 국경도시인 '도문변방구류소'로 서둘러 호송했다. 서안에서 연변까지 2박 3일 동안 열차를 타고 가야 하는 멀고 긴 여행이었다.
100여 명의 무장군인들이 철도차량 하나를 전세내고 이들을 호송했다. 도중에 장춘 역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탈 때는 부득이 열차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그러면 군인 두 명이, 북한 형제들 한 명씩을 수갑을 채워서, 다른 기차로 옮겨 태웠다.
이렇게 하고도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들이 걸어가는 구간에는 경찰병력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
긴 터널을 만들고 그 사이로 지나가게 했다.
서안에서 도문변방구류소로 이송되는 내내 북한 형제들이 그렇게 애타게 기대했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송을 치밀했고, 조그마한 실수도 없었다.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다. 도문변방구류소는,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강제북송을 전문 담당하는 감옥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건물 답지않게, 단정하고 고요했다. 감옥에 도착하자 형제들은, 5개에 감방에 나눠져 수감되었고 곧바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형제들 속에 섞여 있는, 중국조선족 형제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도문구류소는, 목을 빼들고 감방 창문을 통해 강 건너 편을 보면 북한의 산들과 시골 집들이 보일 정도로 북한과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서도 북한 형제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통독은 할 수 없었지만, 사역장의 일과 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모임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하나님 뿐이었다.
사역장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체포된 형제들은 통곡했다. '이제 나는 죽었다. 성경 통독반에서 잡혔으니 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될 거야' '아이고 어떡해.. 누가 나 좀 살려 줘!'
조금이라도 성경을 배운 형제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줘요.'
그들이 갇힌 감방의 벽 안에는, 1기생 진칼빈, 박요한 선생이 잡혀 나가면서 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진칼빈 박요한"
조복화, 정용철 선생은 이 글귀를 보면서 다시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되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성경을 배운 정도에 따라, 확실히 믿음의 수준은 다르게 나타났다. 도문변방구류소는, 북한형제들을 오래 붙잡아두지 않았다.
간단한 신분 조사만 마치고, 서둘러 59명의 탈북자를 강제북송 시켰다. (나머지 조선족은 중국의 자기 집으로. 연줄을 통해 손을 썼으나 3명만 빼냄)
△트럭이 북한으로 출발하는 순간, 모든 북한 형제는 희망을 잃었다. '이제는 끝이다. 우리는 죽는다. 도대체 하나님이 정말 있긴 있는 건가?'
캄캄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트럭이 국경을 넘고 북한땅으로 들어서는 순간, 하늘도 땅도 달라졌다. 이제는 그 누구도 자기를 구출해 줄 수 없고 아무도 이들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캄캄한 지하세계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도문 감옥에서 두려움에 떨며 울던 형제들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희망이 사라지자, 다시 옛날에 그 감각 없던 모습들로 되돌아갔다.
북한에서도 낡은 트럭 한 대가 마중나왔다. 북한 보위부는, 자동차용 기름이 없어, 북송되어오는 탈북자들을 가까운 남양시 보위부 감옥에 가둬 놓고 조사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서안에서 체포된 이들에게는 달랐다. 보위부는 그들을 특별 취급해서, 트럭으로 마중나왔다.
트럭에 실린 북한 형제들은, 국경 근처인 온성군 보위부로 곧바로 호송되었다. 온성군 보위부 마당에 내리자, 보위부 군인들이 이들의 이름과 고향을 묻고 나서는, 옷을 뒤지고 벨트를 빼내면서 몸을 수색해 돈과 귀중품들을 빼앗았다.
수색이 끝나고 줄을 맞춰 앉아, 급이 높은 보위부 간부가 직접 내려와 이들을 시찰하면서 말했다. '어? 이게 그 하나님의 천사들이야?'
증오심 가득한 살벌한 고함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어조와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은, 형제들에게 두려움이 더욱 깊어지게 했다. '보위부는 이미 우리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구나!'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북한 형제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송곳처럼 박혔다.
그의 여유로운 어투의 말은, 형제들 마음속 깊은 곳에 은밀하게 감춰놓고 있던 희미한 희망의 불씨마저도 훅 불어버린 촛불처럼 꺼트려버렸다.
혹시 자신들의 신분을 모른다면, 그저 중국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혹은 농촌에서 일만 하다가 잡혀왔다고 우기려고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에 대한 증오로 충만한 잔인한 고문들과 조사들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알고 있으므로
보위부 간부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야 여기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일어나라!'
순간 북한 형제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전류처럼 흘러 지나갔다. 엄청난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머리를 땅에 떨어뜨리고 숨쉬기조차 힘들어 했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정용철 선생이 일어났다. 이어 조철석 선생과, 이길수, 조복화 선생이 일어났다. 보위부 간부 옆에, 정자세로 총을 들고 일렬로 늘어선 보위부 군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이어 또다시 누군가가 일어났다. 모두 7명의 선생들과 형제들이 일어났다. 군인들은 일어난 사람들을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모두 불안한 눈으로 태연히 끌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북한 땅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죽느냐?'는 것이다. 북한 형제들이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정치범수용소로 가는 것이었다.
그곳은 본인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그곳은 죽음이 축복이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맘대로 죽지도 못 한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굶주림과 고된 노역과 구타와 공포 그 속에서 수용자들은 서서히 짐승이 되어 간다.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기가 인간인지도 인지못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7명의 선생들이 사라지자 보위부 간부도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여태껏 말 없이 절도 있게 행동하던 보위부 군인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들은 북한 형제들을 감방 안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감옥 안에는 남자 감방 2개와, 여자 감방 하나가 있었다. (나중에 만기 출소, 재탈북한 사람들의 증언임)
감방 안은 몹시 작았다. 2.5 평 정도 되는 그 작은 방으로 40명을 밀어 넣었다.
송곳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곳에서 눕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잘 때도 앉아서 자야만 했다.
감방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북한 형제는 번호로 불렸다. 계호원 이라 불리는 20대 초반의 어린 군인들이 *교도관 이들을 장난삼아 때리고, 기합을 주며 괴롭혔다.
보위부원들은 북한 형제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서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저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이 민족의 배반자 새끼야, 죽어라 이 배반자 새끼야!' 그들은 마치 북한 형제들을,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처럼 미워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고문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감방까지 그대로 들렸다. 감옥 안은 매일매일 살이 찢어지는 비명과 증오에 찬 고함으로 충만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막을 찢는 이 소리들은 고문 못지않는 고통이었다.
끼니 때마다 두 세 숟가락 정도의 옥수수가루로 만든 죽이 나왔다. 석 달만 있으면 영양실조로 일어서지 못 하는 곳이, 보위부 감옥이다.
모든 사람의 고문이 끝나자, 조사가 시작되었다. 한 명씩 끌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비명과 고함소리가 조사실에서 터져 나왔다.
각 사역장의 팀장으로 세워진 북한 선생들에게 고문은 정말 잔인했다. 그들은 조사실로 나갔다 오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걷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서 들어왔다.
북한 형제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한 일을 최대한 말하지 않고 부인했다. 그러나 보위부는, 이미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마음에 아직 신앙이 생기지 못한 형제들은, 공포 속에서 미쳐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저주하면 죽는다며? 나 하나님을 저주한다. 제발 나를 죽여라! 백번이라도 저주할 테니 제발 나를 좀 죽여주세요! 하나님이 정말 있기는 있는 거야? 정말 이거 괜히 머저리같은 짓을 하고 억울하게 죽는 건 아니야?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이제는 살려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이제는 제발 좀 죽여주세요. 제발요!' 형제들은 울부짖었다.
북한 선생들은 그런 형제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고통 속에서도 시간은 하루 이틀 지나갔다.
군인들도 지쳤는지, 고문하는 일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북한 보위부는 꽤 구체적으로 최광 선교사의 중국 서안 사역에 대해 조사했다. 심지어 서안에서 선생들이 북한 선교사로 세워지면서 작성했던 북한선교(헌신, 서약)문 까지도 그대로 재생되었다.
처음에는 간절하게 죽고싶어 하던 형제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안정이 되자,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살려주십시오. 중국까지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세요. 우리를 정치범수용소에는 데려가지 마세요.'
구금기간이 길어지고 조사도 마무리되어 가자 보위부원들은 기독교에 대해 궁금했던지 야간 당직근무를 설 때, 성경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야 42번, 너 한번 예수 라는 사람이 누군지 설명해 봐!' 지목을 받은 사람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보위부원은, 선생으로 세워졌던 사람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기도를 시키고는, 신기한지 옆에서 구경했다.
그러고는 북한 선생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준 것이 싫지 않은지 감방으로 돌려보내면서 군인들에게 말했다. '야 그 사람은 더 이상 때리지 마라'
두 달이 지나자 가혹한 심문이 끝나고 북한 선교사로 세워졌던 이선장, 김기철, 김철수 선생들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
조복화, 강규홍, 신용재, 정용철 선생들에게는 5~15년 형이 선고되었다.
이것은 모두 사형선고나 다름 없다. 정치범 수용소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들어갈 때에는 형식적으로 몇 년씩 형을 정해서 들어가지만 형이 다 찬다고 해서 내보내지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는 사람이 없다. 설령 형기를 채우고 나온다는 소원을 품어도, 그곳에서 5년 이상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북한 선교사로 세워지지 않았던 나머지 형제들은 각자 자기 고향 보위부로 인계되어, 온성군 보위부를 떠나기 시작했다.
원래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탈북자는 중국에서 한국 선교사를 만나기만 해도 무조건 정치범수용소로 가야 했다.
그러나 2000년도, 남북정상회담이후부터는 *김대중-김정일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성경을 공부했다고 해도 '간첩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석방하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탈북자들의 영향으로 북한 사회에 외국 문화들이 유입되며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되기 시작하자 탈북자는 이유 불문하고, 정치범수용소나 감옥으로 보내져서 일반 사회와 접촉할 수 없도록 바뀌었다고 한다.
김정은 시대가 온 지금은, 북한이 다시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지만 북한의 탈북자 정책은, 시기에 따라 자주 변동이 있었다.
북한 형제들이 고향으로 간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 곳에서는 중국에서 지은 죄가 아니라 탈북하기 이전 고향에서 지은 정치적인 죄를 조사받기 시작한다.
징벌은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계산되지 않는다. 철저히 신분에 따라 계산된다. 신분이 좋은 사람들은, 웬만한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었지만 신분이 나쁜 사람들은 조그마한 죄가 있어도 가혹한 벌을 받았다.
몇몇 형제들은 고향에서 총살을 당했고, 어떤 형제들은 고향에서 다시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다.
고향 보위부(정보부)에서 조사가 끝나면, 인민보안서(경찰서)로 넘겨졌다. 이는, 정치범이 아닌 일반 잡범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형제가 탈북하기 전에, 굶주림을 해결하려고 농장이나 공장에서 이런저런 도둑질을 조금씩 한 적이 많았다.
지은 죄가 없다고 해도, 자기 동네에서 누군가가 중국으로 도망갔다고 하면 그 동네에 있었던 크고 작은 죄를, 전부 사라진 사람에게 몰아버렸다.
결국 보안서에 가서도, 다시 3달~ 6달 동안 강제노동단련대 나 감옥에 가야만 했다.
그곳에서의 생활 역시 너무 고통스러워 그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북송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3장.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
♣북한 형제의 깨달음
신소광 선생은 몇 달 전 2기생 최순교 선생 팀에서 연변으로 파송, *최원 목사 되었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2001년
그때는 다행히 먹을 것이 없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잡혀왔다고 우겨서 간신히 용서받았다. 생계형 탈북자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재탈북한 지 꼭 한 달 만에, 다시 잡혔다. 서안에서 다함께. 이제 북한으로 잡혀가면 무조건 죽을 것 같았다.
두번째 탈북인데다, 전에 안전부 구류기관에서 도주했던 죄까지 물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아예 기독교 집단의 선생으로 활동한 모든 것이 탄로난 상황에서 잡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결국 신소광 선생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할렐루야! 하나님, 제 최선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북한 철도기관은 반군사조직이라, 보위부 기관도 자체로 따로 가지고 있다. 신소광 선생은 과거에 북한 철도기관에 종사하던 사람이기에 민간 보위부는 그를 처리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 철도 보위부에서, 온성군 보위부에 수감되어 있는 신소광 선생을 인계 받으러 왔다.
그를 호송하러 온 철도 보위부 호송요원이 새파랗게 날이 선 칼과 같은 말을 던졌다. '야, 신소광 너는 끝장이다. 너는 더 이상 살 생각은 하지 마라!'
소광선생은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로 온성 기차역으로 끌려나갔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역전 안에 있던 군중들은 수갑이 채워져서 끌려가는 소광선생을 구경했다.
소광선생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고 태연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받아내며 서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 두렵지 않아 조금은 이상했다. 고향에 도착하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철도공장 신소광이 잡혀왔다. 기독교 사건으로 잡혀왔다!' 북한의 시민들은, 기독교인을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나쁜 사람들로 생각한다. 왜냐면 어려서부터 그렇게 반기독교 교육을 받아서 자랐고 북한에서는 사상범이나 악한 범죄자를 처형할 때면 종교인이라는 감투를 씌워서 처형하곤 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기와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들 앞에 죄인의 신분, 그것도 기독교인의 신분으로 나타나게 되자 소광선생은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여기서 끝날 거야. 내 인생은 여기까지 일거야! 이제 정치범 수용소로 가겠지? 괜찮아, 어떤 일에도 난 괜찮아. 마음은 든든해!'
철도 보위부에 넘겨진 첫날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소광선생은 그동안 중국에서 했던 모든 활동을 글로 써야 했다.
며칠이 지나자 청진 철도총국에서 전화가 왔다. '신소광이 그놈을 끌어올려라. 당장 여기로 데리고 와라!'
청진 철도 총국은, 북한의 국가철도총국 본부다. 그곳 보위부 역시, 북한의 여러 철도 부위부들의 최고 상급기관이다. 그곳으로 불려올라가는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다. 청진에 있는 정치범수용소가 아니면, 함흥에 있는 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된다.
북한 철도기관에서, 기독교 사건으로 잡혀온 것은 신소광선생이 처음이다. 이 때문에 특별히 엄중하게 수사하려고 했다.
소광선생은 일반 경제범도 아니고, 정치사상범이기 때문에 사회에 접촉시키면 안 될 사람이었다.
청진총국으로 가기 위해, 다시 기차역으로 나왔다. 수많은 사람이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소광선생을 구경하며 웅성거렸다. 신소광선생도 기차를 타러 나온 평범한 사람처럼, 그 사람들을 구경했다.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순간 그를 둘러싼 무리들 속에서, 동창생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는 10년 동안 군사복무 후에 제대하고, 얼마 전에 조선노동당에 입당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박OO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서로 친한 친구였고 그의 어머니와 소광선생의 어머니도 서로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처지는 이제 판이하게 달랐다. 박OO은 조선노동당원이란 출세 길에 올랐고, 소광선생은 손에 수갑이 채워져 기독교인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광선생을 알아본 박OO의 눈이 커졌다.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이 막혀 있었지만 우정은 이 벽을 허물었다. 박OO은 거리낌없이 소리쳤다.
'야 너 잡혀왔다며? 너 청진가니? 건강해라. 꼭 살아서 돌아와라!' 친구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이 한마디 말 때문에 박OO은, 당 생활 총화에서 비판대상이 되거나 출세의 길에 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OO은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소광 선생에게 우정과 격려를 표시했다.
소광선생은 그 친구가 고마웠다. 그를 위해서 많은 말을 하면 안 되기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너는 지금의 나를 모를 거야. 지금 내가 이렇게 초라하고 동정받는 것 같지만 너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면 지금의 내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는지를 알게 될거야.. 고맙다!'
열차에 오르자, 호송요원은 사람들의 시선이 귀찮은지 수갑을 찬 소광선생의 손에, 옷을 감아 보이지 않게 해주었다.
박OO은 열차까지 좇아왔다. 창문 밖에서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살아있는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기차는 5 시간을 달려서 (회령에서) 청진에 도착했다.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에, 검은색 리무진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스포츠 머리를 한 20대의 건강한 보위부 특전대원 두 명이 소광선생을 인계받아 리무진 안으로 밀어넣고 양옆으로 앉았다.
청진 철도보위부 구류장에 들어가니, 20~30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감방안에 있었다. 그들은 소광선생을, 무서운 전염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과 접촉시키지 않고 독방에 넣었다.
그들은 소광선생의 옷에 붙어 있는 단추, 벨트, 고무줄을 다 뽑고 옷 솔기까지 다 뜯어버렸다. 순식간에 멀쩡했던 옷이 너덜너덜해졌다.
상급 보위부 기관의 감옥이었지만, 죄수복은 따로 없었다. 입고 들어온 옷에 붙은 것들을 다 떼어버리면, 그것이 죄수복이 된다. 옷을 몸에 고정하는 아무런 장치도 없으니 헐렁해져 바지가 내려가지 않게 손으로 쥐고 다녀야 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감옥 안의 두려운 기운, 헐렁한 죄수복, 평소에 걸을 때에도 머리를 90 도로 숙이고 걸어야만 하는 그곳에서의 이 모든 상황은, 소광선생의 마음속에 분명하고도 두려운 음성을 들려주었다. '너는 이제 끝이야!'
조사실에 끌려가니, 보위부 지도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급이 꽤 높은 50 대의 노련한 간부였다.
정치 간첩으로 중국도 자주 다닌 사람이어서 중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보위부지도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심문을 시작했다. '너 주기도문 한번 외워봐라'
주기도문을 암송했더니 다시 다른 것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사도신경을 외워봐라!'
그의 책상 위에는 소광선생과 서안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을 조사했던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보위부 간부는 최광선교사의 서안사역에 대해서 이미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몇 명이었으며, 어떤 사람이 언제부터 선생으로 세워졌으며 어떤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소광선생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숨기는 것 없이 그대로 다 말했다.
고향 보위부에서부터 조사를 받을 때, 하나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다 썼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모든 활동에 대해서 보고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더 높은 곳으로 가서 조사를 받아도 앞뒤가 맞게 된다.
조금이라도 뭔가를 숨기는 냄새가 나면, 고통스러운 조사만 늘어날 뿐이다. 어차피 충분히 죽을 죄를 지은 마당에,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고 솔직하게 쓰는 것이 더 편했다.
'선생으로 세워졌나?' '세워졌다'
'통독은 어떻게 했나?' '테이프 돌렸다'
'테이프는 어떤 테이프야?' '한국에서 온 테이프다.'
'이 새끼야, 한국이 아니라 남조선이라고 말해라!'
심문은 고문도 없었고, 길지도 않았다. 두시간 만에 끝났다. 끝나면서 그 간부는 말했다. '내일은 네가 가르쳤던 학생들에 대해서 물어볼 거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대답할 준비를 해라'
다음 날 조사가 시작되니, 그 간부는 절대로 학생들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전혀 다른 영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역시 2시간가량 조사하고 끝내면서 다시 말했다. '내일은 학생 모집하러 나갔을 때 활동 상황 하고 남조선 사람하고 함께 활동했던 상황을 물어볼 거다. 대답을 준비해라'
다음 날 그는 역시 준비시켰던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도 질문하지 않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조사를 했다.
노련한 사람이었다. 대답을 미리 준비하게 해서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가 실제로는 다른 질문을 해서, 즉시 답하게 했다.
결국 그가 하는 조사는, 대부분 소광선생이 아무 준비가 안 된 영역에 대해서
물었고, 소광은 사실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대답을 짜맞추지 못하게 된다.
서안에서 공부했던 일에 대한 조사가 다 끝나자, 보위부 간부가 말했다. '좋다. 종교 믿는 것? 그거 좋다. 너 성경 공부한 것? 그까지 것 괜찮아. 공부 할 수도 있겠지.. 하나님? 믿어도 괜찮아. 이제 뭐 내가 믿지 말라고 해서 네가 안 믿고, 내가 믿으라고 해서 믿고 그럴 건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너 남조선 선교사한테서 어떤 임무 받았나? 어떤 지령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야!'
그 간부가 말하는 임무란, 북한의 국가시설을 파괴하고 간첩조직을 만들고 하는 간첩 임무였다.
소광선생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순수하게 복음을 배우고 복음을 전하기만 하는 기독교 모임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지령도, 임무도 없습니다. 오직 두 글자 '사랑'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여태까지 받지 못했던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형제들은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서로 간에 사랑으로 발까지 씻어주었습니다." 소광선생은 오히려 그에게 예수의 사랑과 복음이 무엇인지 자상하게 설명했다. 보위부 간부는 소광선생이 간첩활동과는 별로 연관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는지 이번에는 조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사역장의 범위와 활동방법, 활동규정과 서안에서 벌어진 우리 사역장의 모든 일과를 통해서 지금 한국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어떤 식으로 탈북자들을 교육해서 기독교를 전파하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소광선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말했지만 이용섭 선생의 학생 모집 시스템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용섭이 연변 근처에 상주하면서, 학생들을 수시로 모집해 서안으로 보냄)
지금 중국 연길에는, 도문 감옥에서 살아서 나간 이용섭, 김성근 선생들이 있고 그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다. (아는 라인 통해 76명 중 유기풍 포함 3명을 빼냄) 이것까지 말하게 되면, 그들은 다시 체포될 것이다.
△조사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고향에서 신소광선생 담당 보위부 지도원이 찾아왔다.
그가 감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불안함이 몰려왔다. '날 데려가는구나.. 이제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 하는구나!' 각오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날이 오자 마음이 떨렸다.
고향 보위부 지도원이 노끈을 던져주면서 말했다. '신소광, 옷을 다 입어라.' 그가 던져준 노끈으로 바지가 내려가지 않게 허리에 묶고 조사실로 들어갔다.
여태껏 소광선생을 심문하던 보위부 간부는 평소와 같이 책상 쪽에 앉아 있었고 고향에서 온 보위부 지도원은 소광선생 옆에 앉았다.
책상 쪽에 앉아 있던 보위부 간부가, 의자 옆에 있던 버튼을 누르자 옆에 있던 전기 문이 찡~ 하는 소리를 길게 내며 천천히 열렸다.
오랫동안 조사실에 들어와 보았지만, 그곳에 문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거기서 젊은 보위부대원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곧바로 소광선생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수갑의 자물쇠가 따르륵 하고 조여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장이구나!' 그들은 말없이 소광선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광선생은 떳떳하게 머리를 들고 서 있었다. 속으로는 두려웠지만 겉으로는 왜 이렇게 태연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보위부 간부가 말했다. '이놈 얼굴을 보니, 무서워 안 하네! 이 놈아, 족쇄채우고 가는데 무섭지 않은가 보지?'
보위부 간부가 젊은 보위부 대원에게 다시 말했다. '풀어라!'
이번에는 청진 철도 보위부 부장이 들어왔다. 모두 자리에서 경례를 하면서 일어났다.
보위부 부장은,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있는 곳으로 가서 곳곳하게 정자세로 섰다. 정중하고 엄숙한 선포를 하기 시작했다.
"조선노동당과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배려와 사랑으로 너는 이 시간 이후로 모든 죄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새 출발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너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소광선생의 마음속에서 큰 바위 덩어리 하나가 툭 떨어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열차에서, 고향 보위부 지도원이 소광선생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청진 총국에서, 고향 (회령) 보위부 지도원을 호출하면서 말했다. '야, 올라오라. 신소광이 문제 때문이다.'
고향 보위부 지도원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놈이 이제 정치범수용소로 가는구나.'
그래도 마지막 길을 가는 것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소광선생의 누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누나가 울면서 강냉이 떡을 빚고, 콩을 조금 삶아서 보위부 지도원에게 올려 보내주었다.
그곳에 가면 굶주림에 사람이 미쳐버리다가 말라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어보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고향 보위부 지도원이 청진 총국에 올라오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신소광을 석방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고향 보위부지도원도 믿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말했다. '야 이것 봐라, 너 누나가 이런 것까지 다 보냈어! 너는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 할 놈이야. 다행인줄 알아! 너는 정말 희한하다. 이런 놈은 처음 봤다. 처음 봤어 내 보위부 생활 30년을 하는데, 너처럼 풀려나오는 놈은 없었어! 너 어째서 풀려났는지 알아?'
소광 선생도 영문을 몰랐다. 모든 이가 다 죽는다고 생각했던 그가, 어떻게 살아나게 되었는지.. 담당 보위부지도원이 더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 덕인 줄 알아라. 임마!' 소광선생이 청진 철도 보위부 총국으로 호송된 후 그의 신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직계가족, 친척, 팔촌까지 조사가 진행되었고 외가 쪽 팔촌까지도 조사를 했다.
조사를 해 보았더니 출신 성분으로는 너무 깨끗한 사람이었다. 남조선에 친척도 없었고, 과거에 범죄 경력을 가진 친척도 없었고 김정일 정부의 나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도 없었다. 정말 깨끗했다.
신소광선생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스스로 자원입대해서 김일성 정부를 위해 싸우다 부상을 당했고 그의 일가친척 온 집안은 조선노동당에 충성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소광선생의 과거도 깨끗했다. 범죄 경력도 없었고 북한 청년단에서 간부로 일했기에 먹을 것이 없어서 헤매고 다닐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자 보위부 안에서 소광선생의 문제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이렇게 가계가 깨끗하고 조선노동당에 충실한 집안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우연히 중국으로 탈북을 했다가, 어쩔 수 없어서 이런 사건에 휘말려 들었을 것이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보자고 의견들이 모아졌다.
담당 보위부 지도원도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너 이제 다시 중국으로 달아나거나, 중국에서 살던 일들, 기독교에 대한 말을 한 마디라도 사람들에게 하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기회는 없다. 너는 이제부터 항상 어디 가도 말조심하고 여기 안에서 조사받았던 모든 일은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는 너는 정말 끝이다!' 기적 같은 기이한 용서였다.
문득 수갑이 채워지던 순간, 이해할 수 없던 평안한 마음이 떠올랐다. 그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이었다. (*그래서 이 쳅터 제목이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
하나님은 언제나 소광선생과 함께하고 계셨다. 소광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와서, 강제노동단련대로 보내졌다. 철길에 못을 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청년단 간부의 삶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만나기 꺼렸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감시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괜히 잘못 걸려 조사를 받게 되면, 무서운 일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고독했다. 이제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실수할 것 같은 기미라도 보이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야 한다.
다시 중국으로 가서 하나님께로 가야만, 살 길이 생긴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소광선생은 석방된 지 5일 만에, 다시 밤을 타서 중국으로 탈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