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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5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LNCK 2023. 1. 15. 17:38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1:1~5             2022.11.06.

성경에 우리가 가장 놀라운 선언, 가장 위대한 선언을 
흔히 창세기1:1절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선언 한 마디에,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생의 수많은 혼돈과 갈등과 질곡 속에 있다가 
이 모든 것들의 근원을 알게 됨으로써.. 그런 믿음의 결정이 생긴 것이죠. 

내가 이성으로 수 없는 많은 생각을 했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근원에 관한 문제, 시작과 출발에 관한 문제, 풀리지 않는 의문이 
그 한마디로 단번에 풀렸다는 거예요. 

우리는 창1:1절의 선언에 버금가는 
그런 놀라운 선언을 사도요한으로부터 전해 듣게 됩니다. 

▲사도요한은 다른 어떤 제자보다 오래 살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래 순교'한 사람입니다.   *삶의 순교

구십세가 넘도록 살았지만 
그건 어쩌면 일찍 순교한 그 많은 사도 들보다도 
오히려 아주 늦게까지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의 시간, 고난의 시간을 겪었고 

그리고 그 많은 고난을 통해서, 그는 더 깊이 예수임을 알아가고, 깨닫고 
이해했던 사람이고.. 그건 끝내 밧모 섬에서 정말 또다시 계시록을 쓸 만큼 
방대한 분량의 환상과 계시를 보았던 사람이죠. 

그래서 그는, 소위 공관복음과는 다른 복음서를 우리한테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공관복음이 이미 존재하는데도, 
왜 또 다른 복음을 써야 했는지, 그 이유를 한번 먼저 짚어보려고 합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왜 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느냐?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서를 따로 기록한 목적을 
그는 한마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 메시아다' ... 이걸 믿게 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이걸 누구나 다 믿으면, 이런 얘기를 할 필요 없죠. 
잘 믿지 않는 불신의 세계를 향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이 메시야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오고 대망해왔던 그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다'
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독교는 끈질기게 남에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믿으라고 그렇게 강요하다시피 하느냐는 거에요. 

왜 도대체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만듭니까?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죠. 

왜 당신 혼자 믿지,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하느냐? 
그래서 지금 유럽에서는, 노방전도 자체가 금지되었어요. 
자기의 신념, 자기의 생각, 믿음을.. 남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행위 자체를 
법으로 막고 있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슨 차별금지법이니, 하는 모든 것들이 뭐에요?
'당신들이 믿는 믿음을 왜 다른 사람에게 자꾸 일방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느냐? 
그 기준과 잣대를, 왜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과 잣대로 들이미느냐?'는 것이죠. 
여러분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사도요한은 그 점에 있어서, 분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곧 생명이고, 예수가 곧 생명이고 
예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길이 달리 없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그럼 너 혼자 그 생명을 누리고 살지, 
왜 다른 사람에게도 그 생명을 자꾸 얘기하느냐?' 

여러분 사랑하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에요.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사랑이 없었다면, 이 온 우주는 지금도 적막감, 온전한 침묵, 
그 속에 빠져 있겠죠.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잉태된 생명이 병들었을 때, 낫게 하고자 하셨고 

그걸 우리는 '구원사 적인 섭리'라고 표현하지만 
그 구원을 위하여, 그분은 또다시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 
말씀으로 지은바 된 이 생명이 
말씀의 기본 취지나 뜻을 벗어났을 때 
그걸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다시 말씀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이 땅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창세기는 선언하고 있지만 
그렇게 빚어진 이 피조세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도 
또한 말씀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 
오늘 이 요한복음.. 어쩌면 전체를 관통하는 이 주제는 

'왜 사도요한이 이 (말씀) 단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자 했나?'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을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고자 했나?' 
하는 것을 한번 더 분명히 우리가 짚어봐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창세기 때부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가 경험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했다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되었고 
그리고 그 믿음을, 오늘 사도요한은 보다 분명한 증거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어쩌면 창1:1절에 필적할 만한 이 놀라운 선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런 선언이 어떻게 가능하죠? 

저는 사도요한이 수없이 오랜 시간 동안 기도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헬라세계에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복음서가 왜 네 권입니까? 왜 4권씩이나 존재해야 합니까? 
독자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예수는 왕으로 오신 분이다. 다윗의 후손인 왕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우리가 복종해야할 왕이시다.' .. 이 관점으로 썼고,

또 마가복음은 '그분은 종으로 오셨다'
'우리를 섬기되, 자기 목숨을 우리의 몸값으로 드려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섬기러 오신 분이다' 

의사 출신인 누가는 '인간 예수'에 주목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본문의 사도요한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이다'라는 걸 
어떻게 하나님 개념이 다르고, 예수를 전혀 모르는 헬라세계에 전파할 것인가? 
어떻게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예수라고 하는 진리를, 그들이 추구하는 진리와 접목시킬 것인가? 

그런 의도와 취지에서라면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그 탄생 배경이 전도적이라는 것, 
전도의 목적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는 끝까지 불신의 세계를 향해서 이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그는 이 비진리의 세계에서, 진리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그 세상을 향해서 

그는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생명을 전하고자 할 때...  

▲그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단어, 
히브리 세계와 헬라 세계를 연결하는 어떤 접촉점을, 
그는 '말씀'으로 우리가 번역한 '로고스'에 둔 것이죠. 

왜냐면 '로고스'는 그 당시에 헬라세계에 보편적으로 쓰이던 단어에요. 
아주 광범위한 뜻으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물론 철학적/ 신학적으로도 '로고스'라는 말을 썼지만 
대부분 일반적으로 그냥 '말, 진술, 설명' 이런 것들에도 '로고스'라는 말을 썼고 
그리고 조금 더, 그 말에 대한 개념을 깊이 의미할 때 
'이성, 사고, 사상' 이런 뜻으로 '로고스'를 썼던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우리가 헬라세계에서 소피스트, 철학하던 사람들은 
이 '로고스'를 통해서, 어떤 궁극적인 목적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단어로, 이 말을 쓰기 시작 했었고 

심지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사물을 우리가 진술함으로써, 해석함으로써, 설명함으로써 이를 수 있는 
진리의 개념을, 그들은 로고스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이 진리의 개념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진리로 선포할 때 
이걸 적어도 연결할 수 있는.. 두 세계의 두 개념을 연결할 수 있는 것으로 
'로고스'라는 것을 택한 것이란 말이죠.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로고스'를 
사람의 신앙 근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구하는 미덕 등의 근원으로서의 
로고스를 생각했었고, 

또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필로는 
이 '로고스'라는 걸 가지고 
유대적 배경과 헬라 세계를 
그 당시에 그 나름대로 어떻게 보면 접점을 찾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필로는 로고스를,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다리다. 
혹은 인간에게 신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 로고스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사도요한은, 이 헬라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단어로 설명할 것인가? 
어떤 단어로 소개하는 것이 가장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인가를 
얼마나 고심했겠어요? 

그래서 그는 이런 위대한 선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주1)


▲따라서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 지구가 창조된 '태초'와는 또 달라요. 
창세기1:1절에서 태초라고 할 때 
하늘과 땅이 지어지던 때를 '태초'로 시간적 개념을 설정하고 있지만 

지금 사도요한은, 이 '태초'라고 하는 개념은 
시간 이전의 시간, 시간으로 규정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시간, 그 영원.. 

이렇게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태초'라는 말로 지금 규정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근원을 향해 따져 올라갈 때 
그 모든 근원의 첫 출발점이 있다면.. '무'가 아니라는 거예요. 

많은 종교 에서는 '무'라고 하는 개념도 가지고 오고, 
'공' 이라는 개념도 도입하지만    *空 : 빌 공

본문의 사도요한은 '로고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죠. 
모든 존재의 배후, 모든 존재의 이면, 
존재케 하는 것들에 그 배후에 로고스가 있다.. 는 것이고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다..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이 로고스에 대한 그의 설명과 선언은 
사실 오늘날 그가 21세기에 선포한다면 어떤 표현을 또 가지고 고심할까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가장 먼저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총칭할 것인가? 
보이는 것들의 배후에 있는, 

보이는 것들, 눈에 존재하는 것들을 전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뿌리, 그 근원.. 그걸 뭐라고 말할 것인가? 

어쩌면 뭐 유진 피터슨이 번역했던 "메시지" 라는 단어 같은 것들이 
떠올랐을지도 모르죠. 

'태초에 메시지가 계셨다. 이 메시지가 메신저가 되었다' 
이런 개념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개념으로 그는 '로고스'라는 말을 선택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죠.


◑요1:2~3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절에 '로고스'를, 2~3절에 부연 설명함으로써 
그는 또 그 로고스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죠.

따라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을 직접 쓰지 않았지만 
헬라세계에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선택한 '로고스'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바꿔서 읽으면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태초에 그리스도가 계시니라.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곧 하나님이다... 이 얘기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죠. 

2~3절이 1절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시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로고스)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리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창조주로 인해서 
따라서 그 창조주에 동의어, 동격어가 곧 예수님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이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질문을 할 때 
우리의 생각만으로 이 분을 우리는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분이 스스로 선포하는 말씀, 
요한복음을 통해서 계속 '나는 누구다' 라고 선포하는 
그 자기 정체성의 선언을 통해서, 우리는 접근해야 하는 것이고 

사도요한이 만났던 인격적인 예수님을 기술할 때 
그들이 만났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그분의 탐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예수, 인간 예수에 
우리의 생각이 갇히고 말겠죠. 

우리가 경험한 우리의 경험 속에 
우리가 스스로 자승자박 되는 형국이 되는 거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것 
'태초에 그가 계셨다'는 것, 
그 어떤 것보다 선재 한다, 먼저 존재했다... 
존재의 근원이요 뿌리다. 존재의 알파다... 

이런 것과 함께, 그가 창조주 하나님과 동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따라서 이런 선언은, 유일신론, 오직 하나님은 한 분 이라는 것과 
대단히 병행하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유대교의 핵심인 '유일신 사상'과도 부딪쳤던 것이고 

지금도 무슬림은 유일신을 믿고 있죠.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을 들고 나오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그들은 지금도 거부감을 극렬하게 표편하고 있죠.

어떻게 인간으로 오신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에 둘 수 있냐? 는 거지요. 

따라서 기독교 이단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인성만 강조하고, 그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인간 예수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그분이 태초부터 존재하는 분이며, 
어떻게 그 분이 창조의 동역자가 될 수 있냐는 것이죠.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은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돌로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이고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됨으로써 
바울 또한 사도요한이 주장한 이 선언에
담대하게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골1:16절 말씀이에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바울이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장 때문에 
그는 그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니고, 
박해하고 죽이고 하는 그 주범이었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다시 이런 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렇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풀렸고 

그는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 계시자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이것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다스림, 통치권, 권세,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골로새서가 요한복음보다 약 먼저  30년 먼저 저작되었지만,

요한의 이 로고스 신앙을 사도바울이 그의 설교로 들어서 알고, 배웠을 것임

   
따라서 여러분, 이 모든 권위 체계의 뿌리가 되는 예수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뭘 부인하면 되겠습니까? 

성경을 부인하면 되는 것이죠. 말씀을 못 읽게 하면 되는 것이죠.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죠. 
자기 경험과, 자기 이성과, 자기 생각으로 신앙을 추구하게 하면 되는 것이죠.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을 빼앗는 건 간단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새로운 창조적 사건' 
첫 번째 창조의 사건에 비견하는 <거듭남의 재창조의 사건>으로 규정할 때 

히브리서 기자 또한 
다시 이 마지막 시대에, 
이 상속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모든 세계를 새롭게 지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죠. 히1:2

따라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 모든 흑암이 사라지고 
혼돈이 사라지고, 무질서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공허함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동일한 재창조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분을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겪는 사건은 

새로운 재창조의 사건이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건으로 경험했고  고후5:7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런 재창조,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그는 더 이상 흑암의 어둠에 머물지 않고, 
더 이상 공허의 세계에서 방황하지 않고 
혼돈의 세계에서 그는 무질서하게 살아가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왜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까? 
왜 예수를 그렇게 소개하려고 애를 씁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생명이 오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생명 결핍현상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이 세상의 지금 안타까운 현상들은 
생명의 부족, 생명의 결핍, 생명의 부재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목마른 것이죠. 

▲오늘날 젊은이들은 특히 얼마나 목마릅니까? 
이 땅에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권능이 우리에게 오지 않아서, 
그 분의 생명력이 부재 함으로 생기는 현상들입니다. 

왜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합니까? 
다음 세대가 말씀으로 양육 되기를 그토록 우리가 갈망하는 이유는, 

이 땅의 어떤 지식으로도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생명 현상이 아니라, 죽음의 현상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좋고 협착한 길일지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유하는 것이고 
그 길로 인도하기 원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이토록 목이 터지라고 우리가 외치는 까닭은 
그 청년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부터 비롯되는 하나님 당신 자신이고 

그 당신 자신의 형상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계시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으로 베푸신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만이, 

날마다 그 말씀을 먹을 때만이,
일용할 양식을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생명이 될 때까지 
우리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세상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 세상이 잘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닙니다. 착각이에요. 큰 착각입니다. 

생명의 부재하는 곳에는, 어떤 다양성이 발현되더라도 
그건 죽음의 다양성일 뿐이에요. 

그렇습니다. '그가 없이는 단 하나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1:3

그러나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뭐라 그래요? 

그 아들 Jesus 은 죽이면 되고, 하나님은 (존재를) 부인하면 되고..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신적 위치에 오르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를 죽였고 
마지막에 아들을 보냈지만, 아들까지 죽였다 하지 않습니까?    주2)
    
따라서 우리 사도요한이 계속해서 쓰고 있는 이 '생명'이라고 하는 단어, 
또한 그가 말하는 '말씀', 그가 말하는 '빛' .. 이런 단어들은 
어쩌면 다 연결되어 있는 단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말씀이 곧 생명이요, 그 말씀이 곧 빛이요.. 
그리고 그 생명과 빛을 이 땅 가운데 풍성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 그분의 헷세드죠.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래서 본문은 '생명'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요한이 말하는 '생명'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이 
그가 말하는 생명은 헬라어로 '조애'인데, 
'죽지 않는 생명, 영원한 생명' 이에요. 

그래서 '조애'에다 '영원한' 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영원한 생명'이라 말하지만
굳이 '영원한'이란 형용사가 없어도, 
'조애 - 생명' 이라는 단어 하나 만으로도 
영생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육신의 생명은 
우리가 '비오스' 라고 하는데, 영어 biology의 어원이죠.
그 당시에는 '생활, 생애' 이런 뜻으로 썼던 단어죠. 

우리의 생애, 생활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비오스는 언제나 한시적,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조애 라는 이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영원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영원한 생명이요, 
이 생명이 우리한테 오는 것이 목적이란 말이에요. 

이 생명을 주시는 것이,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고 
그 생명을 받은 자마다.. 믿는 자마다..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생명이 오면, 죽지 않을 것이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죽음'과 반대말이에요. 
조애는 사나토스(죽음)과는 정반대 개념이죠.

생명의 무한성을.. 조애 라고 한다면 
생명의 결핍, 생명이 결국 끝이 나는 것을.. 우리는 사나토스 (죽음)이라고 하죠.

따라서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왜 우리를 그토록 생명으로 초청하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다른 것을 주시기 위해서 그 분은 오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신자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을 받으려 하지 않고, 
엉뚱한 것들을 요구하다가... 

기독교 전체가 길을 잃고 헤매는.. 그런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이죠. 
주겠다는 것은 안 받고, 주시겠다는 거는 관심이 없고, 

세상적 관심, 세상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갖는 그걸 
우리는 관심 삼아..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고, 끝까지 매달리고... 
그거 가져도 죽어요.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말씀안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1:4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성령도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영이 곧 말씀'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진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고 
진리 안에 있는 것이 곧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지를 자주 닦아내야 생명이 싱싱하다 (펀 글)

고무나무를 한 그루 샀는데, 이 나무가 우리 집에 삶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그 나뭇잎들이 마치 낙담하기라도 한 듯 
축 처져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궁금했다. 

그 날 점심때쯤 식사를 하기 위해 집 에 와보니 
그 나무는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가게에서 사온 바로 그날처럼 싱싱해 보였다. 
나뭇잎이 다시 바깥쪽으로 쭉 뻗어있었다. 

아내는 집안 화초를 신선하게 보이게 하는 법에 대한 살림정보를 읽었다. 
문제는 고무나무 잎에 누적된 먼지였다. 
그 먼지들이 빛이 식물에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먼지를 규칙적으로 닦아주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죄의 작은 "미립자들"이 쉽게 우리 삶에 쌓일 수 있다. 
분노, 날카로운 말, 불순한 생각, 또는 이기적인 태도들은 
모두 우리의 영적 생명력에 타격을 준다. 
죄를 바로 자복하지 않으면 죄는 "먼지"로 겹겹이 쌓이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우리 마음속에서 체험치 못하게 한다. 

정기적으로 우리 삶의 "먼지"를 닦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영화로운 햇빛을 다시 한번 즐기시라. 


▲그리고 이 생명, 이 생명은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

이건 여러분, 무슨 횃불, 촛불을 말하는 게 아니죠.
빛이란, 쓰러지지 않는 빛, 근원적인 빛,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다고 말하는 그 빛, 
그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은 
생명과 분리되지 않는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생명=말씀!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시고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 
생명이 곧 빛이라는 것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죠. 

:1절에 나온 '로고스' 라는 말씀
:4에 '조애' 라고 하는 생명,
:5에     *'포스'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사랑,  '아가페'

 

이 4 단어를 잘 기억하십시오.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이 4단어를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면서 
이 주제들, 이 키워드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발현하고, 드러내는 것인지... 
그걸 우리에게 깨닫게 할 것입니다. 

그 생명은 빛이라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 그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생명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곳에는 어둠이, 죽음현상이 함께 하지 못합니다.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 하더라'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둠을 본질로 살아가는 이 세상, 
짙은 암흑과 흑암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은 빛으로 들어오신 것이죠. 빛을 비추신 것이죠.

그러나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죠. 빛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빛만 발한다면, 버려져도 괜찮다! (펀 글)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스웨덴 출신 선교사 사모님이 심한 향수병에 걸렸다.
문화 충격도 심했고, 터놓고 말할 대상도 없어서 향수병은 점점 더 커졌다.

어느 날, 그 사모님의 눈에 스웨덴 제 성냥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분은 성냥갑에게 혼잣말로 물었다.

“성냥갑아! 너는 고국을 떠나 여기까지 뭐하러 왔니?”

그때 성냥갑이 마치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선교사님! 저는 이곳에 불을 켜주러 왔어요.
그 임무를 마치면 버려질 거예요!”

그 내적인 음성을 듣고 사모님은 즉시 무릎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곳에 저를 오게 하셨군요.
이제 버려져도 괜찮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하나님의 빛을 발하게 하소서!”

그 뒤 사모님을 향수병을 극복하고 자바 섬 원주민을 위해 헌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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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계시니라' 미완료 시제인데,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세 가지 시제가 한 시제로 통합돼 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따라서 말씀은 영원히 존재하셨고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거라고 하는.. 
우리의 구분된 시간관이 아니라 

하나의 통시적 개념에서의 영원을 지칭하는 개념속으로 
이 말씀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시제입니다.

 

주2)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세를 주고, 모든 것을 맡겨 놓고 
하인을 세를 받으러 보냈더니, 때리고 내쫓았다가

주인이 마지막에 자기 아들을 보냈더니
'아들이 왔다. 저 아들만 죽이면 모든 게 우리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그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신이 없으면 우리는 자유다. 신을 죽이면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아니 신이 없으면 인간이 신이다!' 
그게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막12: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이게 심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