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죠. *레9장
그렇지만 레10장에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 친구가 아니다. 나는 그러한 허접한 신이 아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만, 여전히 나는 거룩한 자다..' 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런 재앙을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 스스로 '내가 너희 친구가 되어주겠다'라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저 분은 내 친구야!' 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우리가 마치 속된 우리처럼, 세상에 속한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처럼.. 하나님을 너무 쉽게 대하는 태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 재고되어져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그러다가 죽었죠!
새벽에 기도할 때에도 전혀 씻지 않고 그냥 '주여!' 하고 곧바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나...
예배를 드릴 때에도, 자신을 전혀 한번 점검해 보지도 않은 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리지 않나...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자기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무조건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떼를 쓰질 않나...
마치 하나님을 '내가 정말 하지 않게 여기는 그러한 존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많단 말입니다.
'너희가 나와 동행할 때에, 나를 예배할 때에 너희는 거룩해야 돼!' 라는 것을 본문 레10장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 두 가지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2. 교회의 기초를 '거룩함 위에' 세우시다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제사장 둘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명확하게 우리는 알 수 없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거죠. 분향했다.. 라는 거예요.
향로.. 이것은 성소 안에 설치된 분향단에 아침과 저녁마다 새로이 향을 사를 때 사용되는 불씨를 번제단에서 분향단까지 옮기는데 쓰이던 금제 그릇을 가리키죠.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불똥 그릇'(출 25:38), '통'(출27:3, 38:3)으로도 번역됨.
다른 불.. 직역하면 '이상한 불'(stange fire)인데 이 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불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죠. 아마 이것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 즉 번제단의 제물이 타는 불이 아닌 '일반 불'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성소 안에서 분향할 때 (향을 피워 올릴 때), 오직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어긴 것은, 여호와의 규례를 멸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임에 분명합니다.
한편 나답과 아비후가 이러한 죄를 범하게된 이유 중 하나는 그 날 독주를 마신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왜냐면 이 사건 이후에 곧바로 '독주 금지 규례'(9절)가 주어졌기 때문이죠.
△또한 이와 똑같은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신약성경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힌트로 '이런 것이었겠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5장에 이 본문과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영적으로는 거의 본질이 같은 상황이죠.
레9장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고,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이 '불'의 형제로 나타나셨죠. 9:23~24 그러다가 10장에서 두 제사장이 심판을 받았듯이
신약의 교회가 생기고,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셨어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니, 그들 속에는 변화와 기쁨이 일어났죠.
그런데 행5장에, 갑자기 오늘 이 본문처럼, 그 축제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 그 거룩한 현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
-레10장과 똑같이 행5장도 '두 사람'이 심판 받았죠. -레10장도 제사(분향)드리다가, 행5장도 예배드리다가.. 상황이 똑같죠. -두 경우 다, 성령이 임하시는 축제의 현장에서 벌어진 참극이었습니다. -레10장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두려워했을 것이고, 행5:5에도 두려워했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회복하고 마땅히 두려워할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게 되었습니다. 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레10장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방자한 행위(술 먹고 다른 불을 드림)에서 경외심으로의 회복!
아나니아 부부는, 꼭 헌금하지도 않아도 되는데, 여호와의 명령도 없었는데 바나바가 하나님께 재산을 바치면서 존경과 칭송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도 그런 존경과 칭송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본문 레10:1절을 보면, 지금 제사장 임직식 후에 첫 예배고, 처음으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어요.
행5장도, 행2장의 오순절 체험 이후 교회가 생성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였죠.
이렇게 하나님이 '무자비하게' 여겨지실 정도로, 엄하게 심판하신 것은.. (우리는 '그게 무슨 죽을 죄냐?'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시작 때" 엄하게 군기를 잡아두는 거죠.
△과거에 군대생활 할 때, 신병이 들어오면 심하게 기합을 줍니다. 회사에도 신입사원 연수회 때는,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시킨다고 합니다.
처음에 첫 인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처음에 힘든 일을 겪으면.. 그 다음은 모든 일을 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나, 본문의 이스라엘 광야교회나, 처음에 바짝 군기를 잡으시고, 처음에 분명히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셨죠.
처음에 일어난 사건은.. 모두에게 깊이 각인되는 사건이고, 그래서 본문의 나답과 아비후 사건도.. 그들에게 자손 대대로 전해졌을 것이고, 성경에도 여러 번 반복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민3:4, 26:61, 대상24:2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께 복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함, 또한 경외심은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적용/ 하나님을 섬긴다.. 라고 하는 수많은 이방 종교를 믿는 자들이 있죠. 그러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열심과, 그들의 불을 보면 기독교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슬람이나, 힌두나, 불교... 그들이 예배할 때에 우리보다 훨씬 더 뜨거운 불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돈을 섬기는 사람들, 돈을 예배하는 사람들도 보면, 그 사람들도 밤낮 없이 예배합니다. 잠도 자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섬깁니다.
그들이 예배하는 불은, 기독교로 섬기고 있는 우리의 불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예배와 경배가.. 진정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가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이 뜨겁지 않기 때문에?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기독교의 몇 배가 될 정도로 더 뜨겁습니다.
그들의 예배가, 참 예배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 외에도, 그 불이 자기를 위해 타오르기 때문이에요.
추운 겨울 새벽에 일어나 법당에 가서 새벽예불을 드리는 사람들이 내 자식, 내 기업, 내 명예, 내 건강, 나 나 나를 위해서 예배하기 때문이에요.
돈을 신으로 섬기며, 돈을 열심히 숭배하는 사람들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근데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면, 요즘 교인들이 '자기를 위해서' 예배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의 기도제목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를 예배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드러나요.
요즘 교회들을 보면, 자기를 위해서 예배하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들을 보면요. 전부 자기 몸집 불리기, 자기 크기 키우기, 자기 명예 키우기, 자기 재정키우기...
그래서 결국 -우리가 얼마나 큰지 -우리가 얼마나 높은지 이걸 위해서 계속해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에이 그래도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 보다는 낫다. 왜냐면 즉사하지는 않으니까!'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근데 우리는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걸 아십니까? 더 큰 심판은..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진노와 심판의 에너지가 점점점 축적되어 가는 거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건드리시는 (징계하시는) 것은 은혜예요. 정신 차리라고!
그 구약 교회를, 나답과 아비후의 심판을 통해 건드리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죠!
교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맘몬을 예배하고 있어요. 교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그모스를 예배하고 있어요. *잔인, 파괴자
교회들이 목회자를 예배하고 있고 목회자는 자신의 명예를 예배하고 있고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의 크기를 예배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요? 더 큰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손대지 않는다는 건,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3번 나오죠. 내버려두셨다고. 하나님이 가장 큰 심판은 '유기'입니다. *내버려두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지금 내가 무엇을 향해 타오르는 불인가?' '내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며 특별새벽기도.. 그렇게 열심을 내는 이유들이 나를 높이고, 나를 드러내고,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의 동기, 우리의 목적,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숨은 그것을 주의해야 됩니다.
▲3.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라
:9~10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분별력이 상실되어서 결국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거죠. 성도가 술에 취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속된 것' - '속되다'(profan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홀'은 '꿰뚫다', '상처내다', '파괴하다'는 뜻의 '할랄'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더럽히는 것, 곧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거나 신적 권위에 상처를 주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의 반대 개념으로 그러한 속된 것들로부터 <구별>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성에 합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여러분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해서 예배해야 된다'는 거에요.
근데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딱 정해 놓고 거룩한 건 좋은 것, 속된 건 나쁜 것! ...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니에요. 여기서는 하나님 정확하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속된 것'이라고 하면 버려야 되는 것, 나쁜 것, 더러운 것 ...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거룩한 것'이라는 건, 하늘에 속한 것이고요. '속된 것'이란 건 땅에 속한 것이란 말입니다.
'거룩한 것'이라는 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거고 '속된 것'은 우리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분별을 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하나님께 거룩한 것인지 속된 것인지를 분별해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속된 것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분별해서, 거룩한 것을 일단 내가 취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잘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제사를 드릴 때에도,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있고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게 있고, 하나님께만 드리는 게 있단 말입니다. 기름과 피는 우리가 취하면 안되는 거죠.
그러니 이게 거룩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서 '거룩한 것'이라면 이건 내가 절대 어떤 한 부분도 취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헤롯이 죽임당했던 이유는, 그가 그때 말했을 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예배를 드리는데, 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있겠죠. 그런데 내가 취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될게 있단 말입니다.
근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될 "영광"을 내가 차지하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몫을 내가 지금 어느 정도 같이 취하는 것,
그리고 거룩한 자리, 거기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또한 '속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큰일 날 일이란 말입니다. 속된 것은.. 나쁜 게 아니고, 땅에 속한 거고, 우리에게 속한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자꾸 하나님께 예배라고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문화와 예배를 구별하셔야 돼요.
뽕짝을 가지고 막 기뻐하면서 '할렐루야!' 소리지른다고 그게 예배입니까? 차라리 그러려면, 그걸 그냥 이웃을 위한, 성도의 기쁨을 위한 "콘서트" 이렇게 말하면 괜찮아요.
자기들끼리 뽕짝 틀어놓고, 찬양을 뽕짝처럼 만들어놓고 가사 바꿔 가면서, 그냥 우리끼리 막 춤추면서... 기뻐서 그럴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도 육을 입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우리도 문화를 좋아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거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건 예배는 아니에요. 영원 전부터 거룩하셨던 하나님이, 거룩한 찬양만 받으셨던 그분이 갑자기 21세기에 들어오셔서, 뽕짝을 좋아하시게 되셨습니까?
그럼 우리가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들이 좋아하고 그러면 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그냥 "인간적 축제"라고 이야기하면 괜찮아요.
근데 그걸 "찬양예배"라고 하면서 뽕짝에다가 '할렐루야!' 막 소리지른다고, 그게 예배가 됩니까?
그거는 하나님께 드리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그냥 이웃을 위한 콘서트, 문화축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돼요.
또한 교회에서 간증집회 할 때도, 회심했는지/ 안했는지도 정확히 분별되지 않는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간증시키고.. 그걸 예배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끼리는 사용할 수 있겠죠. 우리도 콘서트에 가서 감동받을 수 있고요. 화려한 조명이나 좋은 세션들에서 우리 감동을 받고 눈물도 흘릴 수도 있고 기뻐하면서 춤출 수도 있어요. 하나님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셨으니까요.
근데 그거는 속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누리는 겁니다. 그건 하나님께 드리면 안 돼요.
그런데 교회가, '세상에서 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네..' '세상 콘서트에서 막 뛰고, 막 난리를 치네..'
그래서 그걸 고스란히 가지고 와서 찬양예배, 열린 예외... 그건 예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된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된다, 분별해야 된다.. 라는 것이죠.
△그리고 또 10절을 보니까, 또 뭘 분별하라고 말합니까?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에는 부정한 것도 있고, 정한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모든 것이 가(능)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음식이나, 세상에 있는 그 무엇들 중에 우리에게 유익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단 말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그건 우리에게 부정한 것이라면 우리가 (가하더라도) 멀리 할 수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본 단락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통해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함부로 하나님을 대하지 말라, 예배하지 말라'가 되겠습니다.
옛날에 왕한테 함부로 말했다가 어떻게 됩니까? 삼족이 멸했습니다. 거기다가 반역성이 들어가면, 구족을 멸합니다.
그랬는데 이제는 우리가 뭐 세상 권위자를 대하듯이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막 대하는 이러한 태도... 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사장이 취임하고, 처음 드리는 제사에서 하나님은 (시범케이스로) 심판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겔22:26 '또 그 땅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고 나의 거룩한 것을 더럽혔으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고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의 차이점을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내 안식일을 중시하지도 않았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책망, 심판을 받은 이유입니다. 거룩한 것은 '구별된 것'입니다. 일례로, 안식일(주일)은, 일곱 날 중에 '구별'된, '거룩한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득의 1/10은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구약의 이런 규례들이, 신약에 모두 폐하여졌다 할지라도, 그 정신, 그 취지, 그 의미는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내린 불 레10:11~20
1~10절에서, 거룩함을 잃어버렸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우를 향해서 쏟아진 불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서 죽었죠. :2
11~20절은, 아론의 나머지 두 아들, 엘르아살 과 이다말을 향해서 쏟아진 또 다른 불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그 불은 어떤 분입니까? 바로 모세에서부터 나온 분노의 불이었습니다.
16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지금 모세는, 앞서 나답과 아비후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제사, 그리고 그들의 죽음 때문에 중단된 제사를.. 완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사장들을 향해서 명령합니다. 12 '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이 중단된 제사를 하나님께 완성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제사의 완성은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제사를 드린 제사장들이 그 제물을 먹음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제물을 먹는 것은, 제사장들에게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그들이 먹음으로써 그 제물과 하나 됨으로써 이 제사가 완성되었다.. 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제사장들의 식사였고, 그래서 이것은 특권이기도 하고,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를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 제물들을 거룩한 곳에서 먹어서, 이 제사를 완성해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중요한 제사가 무엇이냐면, 속죄제사였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속죄제사였고, 이 속죄제사의 완성, 그래서 이들이 죄가 사해졌다 라는 것은
속죄제물로 드린 양이나 염소를, 제사장들이 먹음으로써 그것으로서 이들이 제사를 완성했고, 백성들의 죄와 그리고 제사장들의 죄가 사해졌다.. 라는 것이 선포되었죠.
특별히 속죄제 제물의 피를, 만약에 성소에 들어가서 드렸다면 그건 전부 태워드려야 돼요.
근데 성소에 피를 드리지 않은 제물, 오늘 이 제물과 같이, 번제단의 그냥 피를 쏟은 제물은 어떻게 해야 되냐면 제사장들이 다 먹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부분 말고, 속죄제 제사의 제물은 제사장들이 다 먹었어야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먹음으로써, 그들을 위한 속죄가 완성이 되고 백성들의 죄가 사해졌다.. 라는 것이 선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들이 먹지 않고, 그냥 다 불태워버린 거에요. :16 그렇기 때문에 지금 모세가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16
우리는 앞서 여호와로부터 나온 진노의 불을 통해서 *10:1~10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았죠.
이어지는 본문 10:11~10 속에서 여전히 <예배>와 관련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예배와 관련해 중요한 것 하나는 <열린 마음>입니다. 나와 다른 스타일의 예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17절에서, 모세는, 제사장이 제물을 먹음으로써 그 속죄 제사를 완결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화를 냈었고,
18절에 보면, '그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그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
속죄제물 중에는 성소에 들어가서, 휘장 등에 피를 바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속죄제물은 전부 태워야 했어요.
그런데 성소로 그 피를 가져가지 않은 제물들은 반드시 제사장들이 그 속죄제물을 먹었야 했단 말입니다. :18
그래서 모세는 '너희 때문에 백성들이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아니냐?' 라고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16~18
△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 아론이 여기에 대하여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20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지금 똑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모세와 아론의 이 제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모세가 지금 화를 내는 이유는 하나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리고 백성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지금 제사가 완성되지 못하게 했다.. 라는 것과 백성들의 죄가 그대로 남아있게 만들었다.. 라는 관점으로 이 제사를 '불순종'으로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아론은 뭐라고 변론을 하는 가 하면, '나는 불순종한 게 아니고...'
자 만약에 지금 나답과 아비후가 어느 시점에 죽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지금 아론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오늘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속죄가 안 됐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죄를 범하니까 속죄제를 드렸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쳤기 때문에 이미 지금 드리는 속죄제물이, 아론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더럽혀졌다' ...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제물을 안 먹은 게 다행이라는 거죠.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속죄제물을 받으셨다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속죄제를 드리고 난 이후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 속죄제는 무효가 됐다.. 라고 아론은 보았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제물이 무효가 되었고 거룩하지 않은데 이 거룩하지 않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자체가, '하나님께 옳지 않다' 라고 나(아론)는 여겼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닥달하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화낼 이유도 없다는 거죠.
더 확장해서 해석하면, 지금 아론의 논지는,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를 드리다가 침을 받아 죽었기 때문에,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게 합당치 않다고.. 나는 여겼고,
그리고 이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너희 죄가 사해졌다' 라는 말도 유효하지 않다.. 라는 거죠.
그래서 제물을 먹지 않은 두 제사장을 타박할 게 아니라, '대제사장인 내가, 차라리 그 제물을 먹지 않은 게 다행이다' 라고 말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먼저 제사는 캔슬시키고, 제사를 처음부터 다시 드리자는 논지죠.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의 관점이 다른 거죠. 똑같이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 이 시점에
모세의 관점은, 너희가 제사를 완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 때문에 백성들에게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라고 보았고
아론은 '이 제사는 이미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가 아니되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릴 수 없고,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속죄를 선포할 수 없으며 이 슬픔가운데 우리가 이걸 먹는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겠냐?' 관점이 다른 것이죠.
△막14장에 보면,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를 모두가 다 똑같은 평가를 하는 건 아니에요.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은...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냈어요. 본문의 모세처럼 분노했단 말입니다. 이 제사를 보면서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그들이 나쁜 의도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룟유다만 빼고. 제자들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화를 냈던 것은 일리가 있죠.
그들이 보기엔, 이건 허비라고 생각이 들었던 거고, 이 관점도 틀린 게 아니죠. 그래서 분노했고..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도 좋은 의견이죠. 그래서 그들은 이 여자를 책망했어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주님께 좋은 일을 했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이 만약에 '그거 내가 받았다'라고 말씀한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제사(예배)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모세는 그렇게 본문 레10장을 마무리하고 있어요. 20절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지금 남아있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분노에 불을 확 쏟아냈지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아론의 말도 맞습니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열린 마음으로, 아론의 의견을 수용한 것입니다.
예배에 대해서, 제사에 대해서... 이렇게 관점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위하고, 제사를 잘 드려 보겠다는 마음에서 가진 입장입니다.
그때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자기 입장이 맞다고 고집 피우지 않았죠. '감히 내 의견에 말대꾸 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아론의 입장에 대해, 좋게 여기며 그의 제사를 합당히 여겨 줬단 말입니다. :20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교훈 한 가지는, 교회에서도 보면요. 너무 다른 성도의 예배와 제사를 함부로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그 헌금을 그렇게 쓸 수 있습니까?' '왜 그거 그렇게 합니까?' 라고 할 수 있어요.
내 기준에 봤을 때는, 그게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 제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양쪽 다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졌다면, 받아드려졌다면 모세처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예배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