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표현하면 구약은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으로 복음을 설명한 것이고, 신약은 논문의 형식으로 복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우리를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레위기 12장에 기록된 <산모의 정결규례>에 대한 말씀은 이미 폐지된 의식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원의 복음을 놀랍게 제시하고 있는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이죠.
본문 레12장은 세 가지 규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산모의 정결케 되는 기한에 관한 규례
이스라엘의 산모가 남자아이를 낳으면 7일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경도할 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레15:19절에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7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여인이 생리를 하는 것과 같이, 해산을 하면 7일간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7일은 부정한 기간이고, 33일은 정결케 되는 기간입니다. 둘은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결케 되는 기간에는 단지 성물을 만지지 못하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며, 부정한 기간에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남아를 낳은 경우 산모는 7일과 33일을 합쳐 도합 40일 동안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아를 낳으면 그 기간은 두 배가 됩니다.
부정기간이 14일이 되고, 산혈이 깨끗해지는 정결기간도 66일 소요됩니다. 그러니까 딸을 낳은 산모는 도합 80일 동안 성소나 성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여인이 자녀를 많이 낳아서 대가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겨지는데, “왜 이 복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기간을 거쳐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원죄 때문이라는 거죠. 아래에 나옴)
복된 기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부정한 기간이라고 해야 했을까요?
다산이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큰 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장례식장을 가보면 자녀가 많은 분은 화환도 많고 손님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녀가 한 명 밖에 없는 분의 장례식장에는 손님도 많지 않고 한산하고 쓸쓸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망하게 되면 북한의 김정은 때문이 아니라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아서 망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이대로 계속 줄어들게 되면 2050년 기준으로 필리핀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으셔야 합니다. 젊은 가정들은 자녀 많이 낳기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별로 억울할 것이 없지만, 우리 후손들과 이 나라가 잘 되려면 우선 인구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큰 복입니다. 물론 자녀를 양육하고 기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훗날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시127:3~5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레26:9절에도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
그러니까 자녀를 많이 낳아서 집안이 번성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신28:11절에도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몸의 소생이 많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아들을 낳으면 40일, 딸을 해산하면 80일의 정결케 되는 기간이 필요했을까요?
왜 부정한 기간이라는 용어로 어감도 좋지 않은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우선 이 질문에 대해서 생물학적인 답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해산한 산모는 온 몸의 뼈마디가 풀어지고 연약해졌기 때문에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과 딸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고 난 이후 제대로 회복하지 않으면, 평생 고생을 합니다.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한국 여자들은 산후조리를 보통 따뜻한 곳에서 하는데, 미국 여자들은 산후에 찬 물로 샤워를 한다고 합니다.
산후조리 방법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은 후에 회복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입니다.
2) 둘째, 자녀를 낳은 후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감염을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설명도 그럴 듯합니다.
3) 셋째, 해산 후 요리나 빨래, 청소와 같은 가사 활동을 쉬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으면 남편이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도맡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병이 들기 쉽습니다.
산후 조리하는 아내에게 가사 활동을 요구한 사람은 반성과 회개가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도 미역국을 제 손으로 직접 끓여 먹었는데, 도저히 맛이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장모님이 오셔서 끓여주는 미역국을 한 달 동안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4) 넷째, 태아에게 신선한 초유를 공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소젖을 먹이게 되면 소처럼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아이 머리가 소처럼 커지는 기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우유를 잘못 먹여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유를 잘 먹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격리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물학적인 설명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타당합니다. 그러면 회복기간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부정한 기간이라고 명명했을까요? 생물학적인 답변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모가 정결케 되는 기간 40일과 80일은 단순히 가사 활동을 쉬고, 몸을 회복시키기 위한 기간만은 아닙니다.
이는 부정한 기간이고, 정결케 되는 기간으로 성소와 성물로부터도 분리되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격리 되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부정”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남자나 여자나 태어날 때에 부정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기간은 모든 인간이 출생할 때 원죄를 지닌 부정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원죄’(Original Sin)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원죄사상이 희미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51: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같이 훌륭한 사람도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욥14:4절에도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25:4절에도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출생은 원죄를 지닌 남자와 원죄를 지닌 여자가 결혼을 해서 원죄를 지닌 자녀들을 출산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범죄를 짓기 이전에도 이미 원죄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원리가 구약성경에 산발적으로 계시되어 있다가 신약성경에 와서 명확하게 선포되었습니다.
롬5: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12장은 이 복음을 그림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죄 사상”을 하나의 논문 형태로 명확하게 선포했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잘 정립한 사람이 5세기에 활동했던 신학자이자 히포(도시)의 감독 어거스틴입니다.
산모에게 정결케 되는 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원죄를 지닌 존재이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범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범죄를 짓기 때문에 비로소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아들을 낳으면 40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하고, 딸을 낳으면 80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할까요?
학자마다 견해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들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기간을 반으로 줄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합당한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딸을 낳은 경우,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순서를 잘 보면 원래 80일이었던 정결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 아니라, 40일이었던 정결기간이 80일로 늘어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40일이란 기간은 시험의 기간 또는 준비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40주 40야 동안 비가 내려 산까지 덮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시내 산에서 40주야를 거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밑에서 차라리 죽여 주시도록 기도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어 그것을 먹고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가는데도 40주야(40일)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40일간 부활의 몸을 보이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40일 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해산한 후에도, 정결기간의 기준은 40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아의 경우는 80일로 늘어났을까요? 여기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이 대답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딤전2:11~14절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성경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않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를 열등하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기능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남자는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의 특권이자 여자만 갖는 기능입니다.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봐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두 100% 하나님이시고,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단지 인간구원을 위한 경세를 이루시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순종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집행하셔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시는 것뿐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순종하신다고 해서 성부 아버지보다 본질상 열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씀을 증거해야 하고, 남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듯 여자도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아담아, 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어”라고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아담의 말을 대충 듣고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범죄하였죠.
인간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무 죄가 없다고 말을 하지만,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죽지 않아야 합니다.
사망이 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죽는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원죄를 초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하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 아이를 낳을 때 정결케 되는 기간을 두 배로 하신 것입니다.
원죄를 초래하는데 여자의 책임이 작지 않다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대부분 원죄를 초래한 여성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유념하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주제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고다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사람이 이 문제로 씨름하며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로병사가 그 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은 돌아가셨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도 다 죽었습니다. 석가모니를 통해 극복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하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언약으로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2. 남아가 팔 일 만에 받아야 하는 할례의 규례
남아의 경우 난지 7일이 지나고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숫자 ‘7’은 완전수를 의미하고, ‘8’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7일인 안식일이 지나고 제8일째 되던 날 부활하셨습니다. 숫자 ‘8’은 부활의 숫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람이 새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할례는 영어로 ‘Circumcision’이라고 합니다. ‘표피를 잘라낸다’는 의미죠.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브리트 밀라’라고 합니다. ‘언약의 할례’란 뜻이죠.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두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너희와 언약을 맺었다”는 증거로 받은 것입니다.
창17:10~11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양피를 베고 할례를 받으라는 것은 너희가 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할례는 단순히 예표일 뿐입니다. 그 실체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신10: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렘4:4절에도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롬2:29절에도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했죠.
골2:11절에도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할례는 그림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의 할례, 마음의 할례 곧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중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하나님의 택하신 아브라함 후손들과 맺은 언약의 표증이듯 신약에 마음의 할례는 곧 거듭남이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원죄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은 원죄에 대해 관심도 없습니다.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언약 속에 있는 사람들만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죄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상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원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언약으로 택하신 백성들에게 마음의 할례, 즉 중생의 은혜를 주실 때에만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 정결기한 후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규례
정결케 되는 기한이 끝나면 산모는 제사장에게로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40일 또는 80일이 지난 경우 일 년 된 어린양을 제사장에게 번제물로 가져다가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속죄제로 드려야 합니다.
번제와 속죄제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번제는 전부를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순종하셔서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아니하고 다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사신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을 가리킵니다.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을 가리키죠. 죄인을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치를 수 없는 죗값을 대신 치르시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공로로 죄인들은 원죄와 자범죄를 사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둘째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큼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공로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의를 옷처럼 입혀주실 것입니다.
또 가난해서 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죠. 이는 은혜의 대상이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레위기 12장은 인간이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고, 원죄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서 영생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습게 여길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언약적인 선물입니다.
엡2: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시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갖도록 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