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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P3

LNCK 2023. 1. 26. 15:14


◈도서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P3                     <지난 회 보기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6장. 남겨진 권능선생과 용섭 선생 
   
나는 이용섭 선생에게 전화했다. 
'김성근 선생 팀이 성공했어요. 무사히 몽골로 들어가 군인들을 만났고 
울란바토르 한국대사관으로 인계되었어요!' 

이용섭 선생은 전화기에 대고, 고함 고함을 질러대면서 말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됐습니다! 
선생님, 이제 우리에게도 한국으로 가는 길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많은 돈이 없어도, 한국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이 길로 다 함께 한국으로 가는 겁니다. 만세!' 

가이드, 브로커 비용이 필요없으니 
이제는 사람을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데, 목돈이 들지 않아도 되었다. 

용섭선생은, 내가 몽골까지 가는 차비 할 수 있는 돈만 보내주면 
곧바로 팀을 묶어서 서둘러 북한 형제들을 출발시키기 시작했다. 

한 번에 두세 명, 많을 때는 10명씩, 차비가 준비되는대로 출발시켰다. 

권능선생도 남쪽으로 내려가 북경을 경유해서 몽골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 
권능선생이 개척한 길로도, 많은 북한 형제가 몽골로 탈출해 나왔다. 

선생들과 학생들이 속속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가는 길은, 
많은 돈을 주고 가이드와 브로커들을 동행해도 
도중에 공안에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서안에서 공부했던 우리 선생들과 학생들은 
단 한 팀도 도중에 체포되지 않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권능선생과 용섭선생은, 서안에서 공부했던 선생들과 학생들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 50명의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이 슬픈 일이 생겼다. 
제일 마지막 형제들까지 한국으로 무사히 보낸 권능선생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에,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얼마 후 용섭선생도 체포되었다. 

두 선생은, 많은 사람을 죽음의 땅에서 구출해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내가 가장 살리고 싶었던 두 선생들이 체포되었다. 
한국에 온 선생들과 형제들이, 두 선생을 빼내기 위해 모금을 했고 
아는 분들을 총동원해서 해법을 모색했지만, 두 선생을 구출할 방법이 없었다. 

중국 공안은, 두 선생이 수많은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낸 사실을 알고 
일반 탈북자들이 아니라, 중국의 중죄인들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두 선생은 북송이 보류되었고, 중국인민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용섭선생은 4년형 판결을 받았고, 권능선생은 12년형을 받았다. 

재판을 마치고, 중국 검찰은 권능선생에게 말했다. 
'너는 영웅이다. 지금은 중국의 법을 어겼으니 판결을 받아야 하지만 
역사는 너를 인정해 줄 거다. 너를 누가 가르쳤느냐?' 

권능선생과 용섭선생은 2002년 7월부터 중국 길림성 장춘시 철북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두 선생의 상황은 위험했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범죄활동을 하다가 판결을 받고 형을 마친 탈북자들을 
바로 북송시키면서, 형을 받은 이유와, 판결서까지 북한 정부에 넘겨준다. 
외교법에 의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탈북자를 남한으로 보냈고 
본인들도 남한으로 가다가 체포된 두 선생들에 대해서 
북한 정부는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두 선생은 불안해했다. 

 

△나는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들의 상황을 국제사회와 유엔에 알려서 
어떤 형태의 도움이든 받아서, 저들이 북한으로 북송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이때부터 나는 두 선생과 편지로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길림감옥에서 권능이가 편지를 보냅니다. 
제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올립니다. 

지나온 사역의 전 과정을 돌이켜 보니 
제가 특별히 선생님의 사랑과 신임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역을 하면서 선생님은 열등감과 야심으로 뭉쳐져 있던 저에게 
긍지와 책임감과 사명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허리 쭉 펴세요.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힘들 때에는 선생님이 했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힘을 냅니다. 

처음 2년 동안, 남의 빨래도 해주고, 밥그릇도 씻으면서 살았어요. 
여기 감옥 안에서는, 한 달에 1천 위안씩 쓰는 사람들은 
편하게 다른 죄수들을 종처럼 부리면서 살아요. 

한 달에 5백 위안 쓰는 사람들은 
1천 위안 쓰는 사람들의 옷도 빨고, 그릇도 씻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보다 돈이 더 없는 사람들은, 감방 안을 청소하고 
잠자리도 구석에서 쪼그리고 자면서, 아무런 자유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저도 얼마 전부터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보내주신 돈으로 
한 달에 1천 위안씩 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간수들이 대접을 받으면서 살라고 하지만 
저는 거절하고 그냥 스스로 사발 씻고 제 옷 빨면서 살고 있어요. 

대접만 받고 군림하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함께 사는 탈북자들에게도 계속 말해주니 
그들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앞으로 돈으로 저를 돕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선생님의 가정형편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권사님(최광 목사 모친)이 입원했을 때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제가 너무 비참해 보입니다. 

선생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다가, 물론 욕을 먹을 줄은 알고 있지만 
정말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권사님 건강과,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서 많이 신경써 주시고요,
네 자녀의 공부에 사용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 꼭 부탁합니다.」

권능선생과 용섭선생은 편지와 함께 
정치 난민 청원서도 함께 보내왔다. 

나는 두 선생의 정치 난민청원서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은 다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이 두 선생을 살려주십시오 이들은 하나님 일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선생들이 북한으로 북송되면, 저들은 사형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선교담당자를 통하여 유엔 사무실에도, 
미국 대사관에도, 한국 외교부에도, 
두 선생의 정치 난민 청원서를 내고, 몇 년을 열심히 여기저기를 뛰어다녔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권능선생과 용섭선생은 감옥 안에서 최고의 모범수들이 되었다. 
3천명 이상의 범죄자들이 살고 있는 장춘 철북 감옥 안에서 
모든 수인과 간수까지 다 아는 모범수들이 되었다. 

이 때문에 권능선생은 2년을 감형받았다. 
유엔과 미국과 한국에 보낸 난민청원서는, 아직 어떤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기다리려면, 감형이 아니라, 감옥에서 시간을 더 벌어야 했다. 
권능선생은 오히려 2년이 더 줄어, 북한으로 북송될 시간만 앞당겨진 것이다. 
권능선생보다 짧은 형 4년을 받은 용섭선생은 더 많이 불안해했다. 

권능선생은 감옥 안에서도 사역을 했다. 
내가 돈을 보내면, 그 돈을 감옥에 다른 이들과도 나누었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이 열리면,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른 북한 형제들은 대부분 사소한 죄를 지은 잡범들이라 
몇 달 정도씩 구류되어 있다가 북한으로 보내졌다. 

권능선생이 편지를 또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곳 생활은 군대생활 같기도 하고, 수도원 생활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말 감옥 같기도 하답니다. 

이런 생활은 이미 선생님과 함께 학습하면서 훈련받아서 
적응하기가 좀 쉬워졌어요. 
이따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주에서 학습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정말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감옥이 인간 생활의 가장 밑바닥이고, 인간 지옥이라고 하지만 
제가 이곳에서 느낀 것은, 사랑이 있는 곳에는 지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옥은 저에게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합니다. 
나도 그렇고, 많은 이가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정말 많이 배우고 느낀답니다. 

이곳 생활은 나에게, 인생에 대해서 치욕과 영광에 대해서 알게 하고 
사명을 더욱 굳게 하는 좋은 시간 들입니다. 

이곳에 있는 많은 탈북자들은 '이곳에 들어오길 잘했다'고 한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이 일을 하다가 체포되었을 때는 힘들었습니다. 
더욱 많은 일을 못하고, 도리어 잃는 것은 너무 많은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욱 많아요. 
앞으로 얻은 것이 너무 많아 건사하기 바쁘게 되면 
하나님이 저를 내보내주실 것 같아요. 

앞으로 5년이라는 시간을, 이 안에서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지금까지 어려운 중에도 항상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용섭 선생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몇 달 내에 북한으로 호송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급한 것 같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결국 얼마 후 이용섭 선생이 북송되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두 선생을 제3국이나 남한으로 가게 하려고 시도했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송되었다. 

북한 정부는 용섭선생은 물론이고 
북한에서 살고 있는 그의 아내와 딸까지 함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탈북자들이 공개처형보다 더 두려워하는 결과를 만난 것이다. 

△용섭 선생이 북송되고나서 권능선생에게서 다시 편지가 왔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돈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그 돈은 이곳의 탈북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선생님께 감사편지를 쓰라고 했더니 
쓰다가 간수들에게 들켰나봐요. 

간수가 나를 찾아와서 '이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더라고요. 
이곳에서 나를 많이 경계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와 같은 감방에 있는 사람 한 명만 대표로 감사 편지를 쓰게 했고 
그 편지를 함께 보냈어요. 

여기 철북 감옥에는, 저까지 6명의 탈북자들이 있어요. 
선생님이 보내주신 돈으로 맛있는 건 많이 사먹었어요. 

그래봐야 돼지머리고기 같은 거예요. 
감옥에 들어와서부터는 머리를 빡빡깎고 계속 씻어도 
비듬이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샴푸도 사고, 얼굴에 바르는 것도 좀 사고, 몸도 가꾸고요. 
거울을 들여다보니 주름이 많이 생겼네요. 

돈은 이렇게 너무 많이 보내지 않으셔도 돼요. 
지나치게 가난해도 힘들지만, 지나치게 부유해도 안 되거든요. 
필요한 만큼, 이 생활이 유익이 될 만큼이면 된답니다. 

(한국으로 먼저 간 저희) 부모님께로부터, 
목사님가정도 참 힘드시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자녀들과 권사님이 우리 때문에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그러니 돈은 더 이상 보내지 말아 주세요. 

이 곳 감옥은 자유는 없지만, 북한에서 전문대 다닐 때 기숙사 생활보다 
훨씬 좋답니다. 또 보위부 감옥이나 정치범들이 사는 곳에 비하면 
호텔 생활이랍니다. 

저는 이용섭 선생님의 북송이 너무 뜻밖이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마음에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잘 지냅니다. 

힘든 곳에서 서로 힘을 주며, 많은 의지가 됐었는데 
이용섭선생은 떠나기 전까지도, 
자기가 나가면 '혼자 이곳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오히려 저를 
근심해주었습니다. 

이용섭 선생이 형기가 다 되어가면서 근심할 때 
저는 '만일 하나님께서 이용섭 선생이 북으로 호송되게 하셔서 
순교하시게 한다면, 저도 그렇게 되도록 해주시길 원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한 후에 저 스스로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않았나.. 
좀 근심도 했었고요. 그러나 믿음에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편지를 합니다. 
제가 유엔이나 한국 정부에 제출했던 난민청원을 취소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에 의지하지 않았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제가 죽을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조금만이라도 가치 있게 하나님께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살 기회를 주셨고요. 
그러니 이제는 만족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큰일을 하고 가려면 
천 년이 걸려도 다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더군다나 얼마 전 꿈속에서 '이만하면 됐다!' 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선생님께서 저희들을 가르치실 때 
'북한을 위하여 순교하자!'는 것을 저희들의 가장 큰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 이름도 '권능'이라고, 최권능 목사님의 이름을 따 와서 지어주셨고요. 
1기 사역으로부터 7 년이라는 짧지 않은 지나온 시간 속에서 
이제야 좀 깨닫는 것 같습니다. 

1기 사역을 마친 후 어느 날인가 제가 선생님께 
'사역 전에 저와 사역후에 저를 비교해 보니 
마치 성인이 되어서 유치원 대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을 겁니다. 
또 지금이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는 저의 모든 생각과 각오를 
선생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실 줄 믿습니다. 

모든 것 성경에서 말씀하신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끊어버리니' 
마음이 평안해서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탈북자들을 돕지 않으시면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라도 일하겠다고... 
앞으로는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겠다'고 몸부림도 처 봤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니 마음이 평안하고.. 
그러다가도 탈북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또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할 수 없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6개월간 이용섭 선생의 소식을 기다려 본 후에 
그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이선생이 순교하신 줄 알겠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감형 회의가 끝나면 
이곳에서 탈북자 몇 명이 또 북으로 호송됩니다. 

그들에게 이용섭 선생에 대하여 잘 알아보고 
빨리 들어와 연락해달라고 부탁해 두었습니다...」 

△이용섭 선생이 북송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자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권능선생의 구출을 더 이상 국제 정치권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권능선생의 편지에 의하면, 중국 감옥에서는 
탈북자들이 형기를 다 채우지 않아도,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갑자기 북한으로 북송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계속 시간을 끌다보면, 권능선생도 어느 날 갑자기 북송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향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권능선생의 부모님과 동생 등 가족들은 전부 한국에 들어와 있다. 
이제 권능선생은 북한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다. 

권능선생이 반드시 북한으로 북송 되어야만 한다는 법도 없었다. 
나는 중국의 합법적인 재판 절차를 통해 
그를 북한이 아닌, 제3국으로 추방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추방된 지 6년이 지난 후에야 
중국 대사관은 나에게 비자를 내주기 시작했다.  *2008년

내 비자가 회복되자, 나는 철북 감옥으로 가서 권능선생을 면회하고 싶었다. 
권능선생의 부모들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면회를 반대했다. 

권능선생을 가르쳤고 그가 하던 일에 주모자가 왔기에 
반드시 체포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감옥의 면회소로 들어가는 것은 
제 발로 걸어서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나는 어떤 방법을 만들어서라도, 권능선생을 만나고 싶었다. 
두려운 마음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 갈등하면서 힘들었다. 

나는 이 문제를 앞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중국 장춘에 있는 '24시 기도의 집' 팀장인 소망선생님과 
그곳 식구들에게도 권능선생 면회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오랫동안 기도하다. 중국 장춘으로 갔지만 
'기도의 집' 식구들은, 여전히 권능선생 면회는 안된다고 극구 반대했다. 

나는 권능선생이 갇혀 있는 장춘 철북감옥을 
멀리서 눈으로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기도의 집' 식구들은 나를 철북 감옥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기도의 집' 식구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담벼락을 손으로 더듬으며 
감옥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새파란 칼날같은 겨울바람이 불었다. 발이 시리고 손이 시렸다. 
음울한 회색빛 콘크리트 담벼락은 높았고, 
그 위에는 전기 철조망이 날카로운 이빨들을 온몸에 세우고 
담벼락을 물어뜯을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안에 권능이가 있구나.. 권능이는 젊은 시절을 저 안에서 보내야 하는구나..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약 28~38세까지 10년 복역)
   
나는 권능선생의 형이 감면되어 조기 석방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아직 한국으로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빨리 조기석방이 되면, 바로 그날에 북한으로 강제 북송 된다. 

'하나님, 권능선생을 지켜주세요.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는 길이 열릴 때까지는 
제발 조기 석방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권능선생이 감옥 안에서 건강을 잃지 않게 지켜주시고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직접 열어 주시옵소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나의 절절한 마음을 함께 느껴졌는지 '기도의 집' 식구들도 울고 있었다. 

철북 감옥의 둘레는 10리가 좀 더 되어 보였지만,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기도의 집 식구들은, 권능선생이 석방되어 북송되지 않고 
한국으로 올 때까지 24시간 기도하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약속이 고마웠다. 
그 후 권능선생 부모님과 식구들이, 권능선생을 면회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무작정 그들과 함께 따라나섰다. 

사방에서 말렸지만,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하나님 만약 면회소로 들어갈 때, 여권을 보여 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면회를 하고.. 
보여달라고 하면, 면회하지 않겠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입구에서 문을 지키는 공안이, 권능선생의 가족들의 여권까지 조사하고 
나에게는 여권을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섞여서 면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면회장으로 나온 권능선생은 나를 보는 순간 
갑자기 '나무 사람'이 된 것 처럼, 굳어져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도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면회장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나와 권능선생은 울기 시작했다. 그저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랴?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많았지만, 정작 만나니 할 말이 없었다. 

유리벽 너머 권능선생의 입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 (소리 없이 입술로만 말함)
'그래!' 

스피커에서 갑자기 공안에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마이크가 고장난 것 같으니, 다른 쪽 마이크를 사용하세요. 

도청하고 있던 공안이, 우리 둘 사이에 아무 말 소리도 들리지 않자 
마이크가 고장난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공안을 의식한 권능선생이 먼저 말했다. 
'많이 늙었습니다, 선생님!' 
'건강하니? 기도 많이 해라. 우리도 기도 많이 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보자. 건강하게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야지!' 

갑자기 뒤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공안이 서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들켰나?' 내 온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공안에게 끌려 들어간 방은 도청실이었다. 

면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큰 소리로 들리고 있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툭탁 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순간 마음에서 '면회하면 안 된다'고 만류하던 수많은 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권능선생의 옆방에서 살아야 하는 구나!' 나는 두려워 떨었다. 

나와 권능 선생의 대화 내용을 들은 공안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공안이 눈에 독을 품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어디 가서, 여기서 절대로 면회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누구한테도 면회했다는 소리를 하게 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이어서 그 공안은, 권능선생의 아버님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왜 목사를 데리고 왔어? 여기가 어딘지 알지나 해?
내가 어디까지 당신들을 봐 줘야 해?' 

'살았다!' 
온몸이 쪼그라들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서러웠다.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 하나 그 이유 때문에 
다른 나라 같으면, 죄도 아닌 죄를 가지고 12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니... 

뱃속 깊은 곳이 아프기 시작했고, 서러움이 올라왔다. 
'하나님 왜입니까? 이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픔으로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7장. 소리도 빛도 없이 

중국에서 함께 성경공부했던 350명의 형제자매들 중에서 
한국에 온 사람들은 50명 이었다. 

서안에서 함께 체포되었던 74명 중에서도 
20여명의 선생들과 학생들이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 한국으로 왔다. 

나는 중국에 있는 수 십 만 명의 탈북자 중에서 
특히 성경을 많이 읽고 다듬어진 우리 형제들이 
한국에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정란 권사님의 후원으로, 이들 중 일부 탈북자들과 함께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열방의빛교회> 를 개척했다. 

처음에는 30명의 북한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중국에서처럼 힘차게 말씀을 선포했고, 주중에는 통독사역도 병행했다. 
이렇게 하면 주의 일꾼들이 모여들어 
금방 새로운 사역을 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중국의 선교현장 과 국내사역은 완전히 달랐다. 
국내사역 현장은, 선교 현장과 같은 긴박한.. 
현장에서 전하는 공격적인 메시지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성도들은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처음 모였던 성도들이, 한 명 두 명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사역은 계속해서 시들어 갔다. 

선교 현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중국에서는 위험속에서 사람들이 내게 순종했지만 
국내에서는 돈 없는 선교사에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없었다. 

탈북자들도 나를 따르지 않았다. 
가난한 선교사에게 의지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사역할 때는, 중국선교현장의 지하사역이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위험부담이 많은 선교현장이든 
신변 안전이 보장된 국내 사역이든
다 같은 영적인 전쟁이며, 똑같이 힘들다는 것을 배웠다. 

국내에서 나는 그저 가난한 선교사 일뿐이었다. 
금요일에는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단전되어 
촛불을 켜 놓고 기도모임을 했다. 
은혜가 넘쳤지만, 눈물도 설움도 넘쳤다. 

우리 집 아이들이 힘들어했다. 답을 먹던 막내 딸이 말했다. 
'아빠, 내일 학교에 500원을 가져가야 해요.; 

초등학생 딸에게 500원이 없다는 말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밥을 먹다 말고 뛰어 나갔다. 나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이제는 (물질을) 풀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중국에서는 그렇게도 잘 풀어 주시더니, 
여기서는 왜 이렇게 (물질을) 풀어 주지 않습니까?'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절규했다. 힘들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곳이나 다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뚜렷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중국에서 수백명의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보장해 주었던 것은 
너의 힘과 능력이 아니었다.' 순간 번쩍하고 눈이 열렸다. 

'아~ 이것이구나, 이것 때문이었구나!' 

중국에서 내가 있던 그 모든 일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이 곳에서도, 그렇게 많은 돈을 쉽게 얻게 되면 
탈북자들에게 나는 능력자가 된다. 

탈북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게 된다. 
슬픔이 그대로 뒤집어지면서 기쁨으로 바뀌었다. 

'주님, 이제 알겠습니다. 평생 안 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길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주워 보니 2만원이었다. 

'됐네 뭐 이거면 막내가 내일 학교에 갈 수 있겠다.' 
나는 어린아이가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집으로 달려왔다. 

그 후부터 마음이 편안했다. 하나님은 부와 가난을 적절하게 사용하시면서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중국에서 많이 경험해 보았다. 

나는 가정도, 환경도, 집도, 경제도 다 엉망이 되었지만 
주님은 나의 삶과 생활을 통해서, 탈북자들의 마음에 무엇인가 설명해주셨다. 
그 후부터 하나님은, 서서히 경제적인 문제들도 해결해 주시기 시작했다. 
여러 지인이 물질적으로 후원해 주기 시작했다. 

회복의 과정은 더디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은 나의 아이들에게 
바르고 경건하게 살 수 있는 힘을 키워주었다. 

나는 한국에 온 탈북자들에게 정규적인 대학 공부를 하게 해서 
더욱더 준비되고 능력 있는 주님의 일꾼들로 키우기로 마음 먹었다. 

서안에서 팀장으로 활동했던 선생들과, 비교적 성경을 많이 사람들에게 
신학대학에 갈 것을 권고했다. 

이들은 북한도 잘 알고 있고, 성경도 잘 알고 있는데다 
한국에서도 대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되면 
앞으로 통일시대의 민족을 이끌어갈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5명의 북한 형제가, 나의 권면을 듣고 대학에 입학했다.
정부에서도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 
정책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김성근 선생은 연세대학교,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북한 선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태진, 최순교, 1기생 최바울, 이빌립 선생들은 총신대학교에 입학했다. 
빌립 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총신대학원 까지 졸업하고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기생 바울선생은 우리 사역장을 떠난 후 
하나님으로부터 난치병 들을 기도로 치유할 수 있는 귀한 은사를 받고 
하얼빈 길림 등 동북지역에서 
중풍, 심장병, 말기암 환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진행하다가 한국으로 왔다. 

지금은 총신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치유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김태진 선생은 중국에서 북한선교사로 활동 중이다. 

민선주 선생도 한국에 와서,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선주선생은 한국에 정규 신학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 
중국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 줄로 잔뜩 기대하고 
공부를 시작했으나, 현실에는 그렇지 않았다. 

순수하게 성경만 읽고, 성경적인 시각에서만 신앙이 형성된 선주선생에게는 
인본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이 고통스럽지만 했다. 

갈등하던 선주선생은 나를 찾아 봐서 고성을 질렀다. 
'선생님, 이런 쓸데없는 말 장난이 하나님 공부입니까? 
이런 공부로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겠습니까? 
나는 세월을 허송하며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북한으로 가고 싶습니다. 
신학을 꼭 해야 합니까? 북한으로 들어가서 
중국에서 했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신학은 해야 한다고 내가 아무리 설득하고 말려도.. 통하지 않았다. 
선주선생은 신학교를 팽개치고 중국으로 가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 
막무가내였다. 

그의 심장에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끓고 있었다. 
선주선생은 고향으로 찾아갔다. 그의 고향은 평양과 조금 떨어진 평성 쉬었다. 
선주선생은 가지고 간 중국 돈으로 식량을 사서, 
집집마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여기 쌀이 있어요. 쌀로 밥 해서 드시고 힘을 내세요.' 

북한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와서 공짜로 쌀을 주자 
꿈을 꾼 것처럼 믿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머니, 하나님이 살아 계세요. 힘내세요. 하나님을 찾으세요. 
그러면 살길이 생깁니다.' 
선주선생은 올 때 처럼 다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 한국으로 왔다. 

선주 선생은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님과 여러 지인으로부터 자금을 공급
받으면서 이 사역을 지속했다. 너무 무모했고 또 위험했다. 
한두 번은 성공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니었다. 

나는 화를 내면서 말렸다. 
'지금 선주선생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하는 거예요.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세요.' 

선주 선생은 듣지 않았다. 
이미 신학에는 마음을 돌렸다.

다행히 선주선생은 몇 년간은 잡히지 않고, 무사히 사역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끝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북한에서 은밀히 중국으로 나오다가, 중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다. 
북한 땅을 벗어났기에.. 안전하다고 방심했던 것이다. 

선주선생의 여권은, 중국 지인의 집에 맡겨 두고 있었다. 
북한 땅이 가지고 갈 만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주선생은, 중국 공안들에게 자기 여권 있는 곳을 말하고 
여권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주선생은 침묵했다. 
여권만 제시하면 남한으로 추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묵묵히 탈북자의 신분을 지켰다. 

그렇게 선주선생은 북한으로 호송되어 같다. 
그 후 선주선생은, 더 이상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다. 

북한에 가서도, 일반 생계형 탈북자로 밝혀지면, 다시 풀려날 수 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묵묵히 몸으로 주님의 복음을 보여주는 길을 택한 것이다. 

선주선생은 북한을 위해, 자기 생명을 그렇게 소리도 빛도 없이 던졌다. 


◑8장. 변화된 중국 

가난과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정말로 두려운 분을 만나지 못 했다는 증거이다. 

이전에는 공안과 보위부가 두려웠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가장 두렵다...  

나는 중국 가고 싶었다. 자나 깨나 가고 싶은 나라는 중국이었다. 
그곳으로 가야 탈북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나는 다시 하고 싶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북한 선생들의 학업 후원과 
한국 교회들에 북한선교의 실상을 알리고 북한선교의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정처없이 방황하는 탈북자들에게 가 있었다.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중국 대사관으로 비자 신청을 했다. 
번번히 비자가 승인되지 않자, 나는 캄보디아로 갔다. 

한국으로 오는 탈북자들이, 캄보디아로 많이 빠져나오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가서 사역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탈북자 선교를 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들의 영역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러시아로 갔다. 
러시아로 벌목을 나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탈북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5명의 탈북자를 만나, 며칠 동안 함께 지냈다. 
그 중 한 탈북자는, 한국 길이 열렸지만, 가지 않았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강제노동으로 고생을 할 것을 염려해서 라고 했다.

그는 7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벌목 공으로 일을 했다. 
그동안 월급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북한정부는, 그의 월급을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낸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그는 혹독한 추위에서 속에서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일했다. 
자신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지만 
그 대가로, 고향에 있는 가족들은 잘 먹고 잘 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7년 만에 고향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가서 만난 것은 깡패들의 나라였다. 
그의 가족도, 월급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은 오히려 그가 러시아에서 월급을 받아모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큰 돈을 모아서 돌아온다고 믿고 기다리면서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분노한 그는 러시아로 나온 후 탈북 했다.(종적을 감추었다) 
모스크바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이런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싶어,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많았다. 

우선 러시아는 비자를 3개월 밖에 주지 않고 
비자 만기 후 3개월이 지나야 다시 비자를 준다. 

그리고 중국에 비해 물가가 많이 비쌌다. 
또한 중국인들과 북한 사람들은, 나와 같은 동양인들이라서 
외모로만 봐서 구별이 되지 않아 비교적 안전 했지만 
모스크바는 유럽계 사람들이라, 외모에서부터 너무 차이가 많이 나 
내 신분이 노출되기 쉬워, 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행기가 북경을 경유 했다. 
추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환승이 안 될 줄 알았는데, 환승이 되었다. 놀라웠다. 

나는 한국에 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중국에 비자 신청을 했더니 
비자가 나왔다. 추방이 된지 꼭 6년 10개월 만인 2008년 
나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주님께 감사드렸다. 

중국에서 북한 선교사역을 다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날아갈듯 기뻤다. 
무작정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당시 중국은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는 기간이었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티베트 독립운동이 일어나 외국인들의 대한 단속이 심했다. 
공항에는 평소와는 달리 군인들이 철모를 쓰고 총을 메고 경계했고, 신발까지 
검사대를 통과시켰고, 철도역 마다 입구에서 검문검색을 철저하게 했다. 

옛날 서안 사역 때 도와주셨던 지인들을 다시 만나, 
북한선교를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하자, 
만나는 사람들마다 손을 흔들면서 비웃기까지 했다. 

'이제는 불가능해요. 연길에서는 아무 이유도 없이 72명의 한국인들을 체포
해서 조사했어요. 그리고 이젠 겨울이 되어도 탈북자들이 넘어오지 않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지금 중국이 올림픽을 하는데다가 
티베트 사건이 터져서 단속이 얼마나 심한지 몰라요. 
안 돼요. 옛날과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포기하세요!' 

조선족 사역자들도 똑같은 말을 했다. 
'이제 탈북자 사역은 불가능합니다. 옛날엔 탈북자들을 도와주다 발각되어도 
1천 위안 정도 벌금을 내면 석방 됐지만 
지금은 중국 한족이나 조선족이라 해도 2~3년씩 감옥에 가야 합니다. 
중국의 사회환경이 많이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한국으로 추방된 이후, 중국의 북한 선교 현장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아무 연고도 없이 무턱대고 중국으로 탈북해 오던 
1990년대 중반에 탈북자들의 생존 환경은 비참했다. 

그들은 아는 사람도 없었고, 중국어도 몰랐다. 
생존에 필요한 직업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남자들은 도적질, 강도, 여성들은 성매매와 인신매매 결혼 같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한국 선교사들을 만나면, 그들이 제공하는 생존 시설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만 했다. 

결국 대부분의 탈북자는, 원해서가 아니라, 현실 상황 때문에 
강제적으로 선교 활동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수의 탈북자가 남한으로 입국했다. 

내가 남한으로 추방되어 들어와 있는 동안 
남한으로 입국한 탈북자들의 숫자는 1만 명을 넘어섰고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많은 탈북자들은 남한 내 친척, 가족, 친구 등등의 인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 인맥은 곧바로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들에게도 
경제 능력을 가지게 만들었다. 

인맥의 도움으로, 탈북자들은, 한국으로 입국하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다 유럽과 미국, 영국,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탈북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입국을 환영하고 
자국내 유입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며, 탈북자들을 받아주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다년간 체류하던 탈북자들도 
빠르게 중국 사회에,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적응해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생존이 가능한 일자리를 얻었고 
여성들도 결혼을 통해서, 혹은 직업 활동을 통해서 
중국 사회에 정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탈북자들도, 중국인들과 얼핏봐서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내 북한 선교 현장에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탈북자들은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미션 홈에서 어쩔 수 없이 장기적으로 
머물러야 하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한국과 유럽,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길 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상황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탈북자는 무조건 중국에서 벗어나 
한국이나 외국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아무도 지하 사역장에 숨어서, 기약없는 나날들을 보내면서 
성경공부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에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고 
같은 시기에 일어난 티베트 독립운동으로 
중국 정부는 사회적, 정치적 안정에 대해 극도로 예민해 있었다. 

중국 전역에서 초 강도의 검문검색이 진행되자 
공포에 질린 탈북자들은 철저히 지하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중국의 전 지역을 돌아다녀도, 탈북자는 얼굴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캄캄하기만 했다. 

나는 기도했다. 
'주님, 북한 출신 북한 선교사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옛날처럼 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진행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러던 중 조선족 이육선생을 만났다. 이육선생은 김성근 선생의 제자였다. 
2001년 6월 11일에 서안에서, 공안과 군인들이 8개의 우리 사역장을 체포할때 
이육 선생도 북한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중국 공안들은 70명이 넘는 우리 훈련생들을 차고 안에 밀어놓고 
밤새 신문하고 고문하고 구타 했다. 

그러다 지쳐버린 군인들은, 새벽이 되자, 문 입구만 지키고 서 있었다. 
새벽 6시는 모든 사역장에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6시가 되자 차고 안에 잡혀 있던 모든 북한 형제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주여 삼창을 목청껏 외치면서 
기도하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얻어맞고 터지다가 늘어졌다고 생각했던 탈북자들이 
갑자기 봉기하듯 일어나 기도하고 찬양하자 
당황한 군인들은 곤봉으로 사정없이 탈북자들을 내리쳤다. 

곤봉에 얻어맞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피가 터지고 살이 터졌다. 
탈북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했다. 
'감사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부르짖으면서 
이육선생은 하늘을 향해 두 손 높이 쳐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였다. 
그 앞에 서 있던 한 군인이, 그를 내리치려고 곤봉에 힘을 주었다. 

이육선생은 그 곤봉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무섭지도 않았고 겁나지도 않았다. 
이상한 평안을 느끼면서 군인의 눈을 바라보면서 찬양했다. 

군인은 갑자기 전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멈칫하더니 
곤봉을 거두고 다른 형제에게로 가 버렸다. 

기도회가 끝나자 그 군인이 다시 이육형제를 찾아왔다.
'너는 몽둥이가 무섭지 않니?' 

이육선생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력해서 그저 평안했다.
당신도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함께 할 때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육선생의 말을 들은 그 군인은, 신기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연변 도문 감옥으로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호송되어 간 이육선생은 
그 곳에서 22일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조선족이라서

이육선생은 서안사역을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석방된 후 이육선생은 연길 실로암 교회에서 생활했다. 
실로암 교회는 개척교회이다보니 자금 사정이 열악했다. 

이육형제는 굶기를 밥먹듯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이육선생이 견디지 못하고 기도했다. 
'하나님 배고파요.' 

얼마의 시간이 지나니, 한 탈북자가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쌀 한 포대를 메고 있었다. 
그 탈북자는 왕천연 에서부터 연길까지 80리 되는 길을 걸어서 왔다고 했다. 

또 어떤 날은 영어선생을 하고 있는 선배 한 사람이 
예고도 없이 교회로 찾아왔다.

'이육아,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네가 굶어서 배고파 할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왔다. 같이 가서 밥 먹자!' 

이육선생은 걸음마다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하심을 경험하면서 
여태까지 살아왔다고 했다. 

이육선생은 그 후 청도로 와서, 한족 신학교에서 
3년째 통역 사역을 하고 있었다.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를, 중국어로 통역했다. 
이육선생은,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는 북한선생들과 똑같은 고통을 호소했다. 

'선생님, 처음에는 성령충만 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신학교에 들어갔던 이들이 
성경은 배우지 못하고, 신학만 배우며 결국엔 열정이 식어져 
냉랭한 마음만 안고 돌아가는 것을 보기가 너무 힘듭니다. 
말씀충만한 신학생들을 양육하는 신학교를 세워 운영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나는 감동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육선생은 오랫동안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육선생,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합시다. 한 번 기도해 보세요!' 
내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이육선생은 
며칠 동안 기도하며 생각해 보더니 
나와 함께 다시 탈북자 사역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준비된 동역자를 만났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육선생은 지금까지 나와 동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