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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턱뼈의 노래

LNCK 2023. 1. 27. 06:29


◈나귀 턱뼈의 노래                삿15:14~20 

오늘 크리스천들이 꽉 붙잡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예 손을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삼손은 블레셋 군사 1천 명을 간단히 처리했던 
그래서 어쩌면 ‘도깨비 방망이’와 같았던 나귀턱뼈를 과감하게 내던졌습니다. 
이런 삼손의 ‘포기’는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신앙인은 손을 펴는 사람입니다. 
살다가 보면 우리에겐 나귀 턱뼈를 던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승리에 안주하지 말고, 늘 새로운 도전과 승리를 향해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삼손의 시 
본문에 보면 삼손의 시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삿15:16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삼손의 시를 지나쳐 버리거나 평가절하 합니다. 

최근 ‘삼손신드롬’(마크 애트베리, M. Atteberry)이란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왜 강한 남자들이 실패 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특히 남성들에게 유익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저자는 강한 남자들이 왜 실패하는지, 그 이유를 삼손을 빗대어서 
열두 가지로 발췌하여 깨우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는 이 ‘삼손의 시’를 혹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은 단가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감사의 말 한마디도 없다. 
그 대신, 모든 영광을 자신이 취한다. 역겹지 않은가?”라고 말입니다. 

언뜻 보면 삼손의 시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지극히 정당한 듯 해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선 이 삼손의 시는 아주 짧습니다. 
그러면서도 명료합니다. 
이 시를 대하는 순간,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어휘의 선택입니다. 
여기 ‘나귀’라는 단어와 
한 더미, 두 더미의 ‘더미’는 같은 낱말로 언어의 강조, 
더 나아가 운율까지 염두에 둔, 기가 막힌 선택입니다. 

나귀, 더미라는 히브리어는 ‘하몰’(Hamol)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하하몰 하몰 하몰’이라고 읽어지는 것입니다. 

‘하하’할 때 무엇이 연상됩니까? 웃음이요 만족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단순히 단어가 가진 뜻을 뛰어넘어 
만면에 웃음을 띤 승리자의 기쁨, 통쾌함 등이 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내용에는 문제가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의 시’와 비슷한 노래를 사라가 불렀습니다.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창21:7). 

그녀가 아흔 살에 아이를 낳고 감격에 겨워 부른 노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사라가 자신을 과시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습니다”(18절). 

여기 ‘이 큰 구원’은 두말할 필요 없이 블레셋 일 천명과의 싸움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으며, 나는 단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삼손은 혈혈단신으로 혼신을 다했습니다. 
‘일당 천’, 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전투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승리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나는 단지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나귀 턱뼈를 던진 삼손 

삼손을 통해 도전받아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단지 입술만의 고백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삼손의 액션 하나를 놓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삿15:17)는 말씀입니다. 

삼손이 이 노래를 부른 후, ‘나귀턱뼈’를 던져 버립니다. 
그 나귀턱뼈는 어떤 것입니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생명을 지켜준 그 무엇입니다. 
혼자서 일천 명을 쓰러뜨리게 했던 그 무엇입니다. 

그렇다면 나귀턱뼈는 지금 삼손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자랑스러운 
기념비적인 그 무엇입니다. 이를테면 면류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 나귀턱뼈를 어떻게 할까요? 두고두고 승리의 기념으로, 
혹은 앞으로 유사한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소중하게 보관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삼손은 그것을 던져버립니다. 미련 없이 멀리 던져 버립니다. 
이 액션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습니까? 

‘내가 비록 이 나귀턱뼈를 사용하여 천명을 쳐 죽였으나, 
승리의 궁극적인 원인은 이 나귀턱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었다.’ 
는 것을 나귀턱뼈를 던지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보좌 앞에서 면류관을 벗어 던지는 이십사 장로를 연상케 합니다. (계4:10). 

▶여러분들의 오늘이 있게 한 나귀턱뼈는 무엇입니까? 
지금 손에 꽉 쥐고 자랑스럽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귀턱뼈는 어떤 것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내 노후, 내 자녀, 내 남은 생애를 위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하며 꽉 붙잡고 있는 나귀턱뼈, 그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귀턱뼈는 나귀턱뼈일 뿐입니다. 
그것이 나의 오늘이 있게 한 것도, 또한 내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뼈다귀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의 오늘이 있게 하셨으며, 그 자리에 오르게 하셨고, 
그것을 누리게 하셨고, 그 면류관을 쓰게 하셨습니다. 
나귀턱뼈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던지지 않고  꽉 붙잡고 있으면 
그것이 나를 물어버릴 뱀이 될 수도 있습니다(출4:2~3). 
때문에 성경은 자주자주 꽉 쥐고 있는 것들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를 던지라”(출7:9).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전11:1). 

나귀턱뼈를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찬25장),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찬36장)의 고백은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절대 던질 수 없어!’하며 
꽉 붙잡고 있는 ‘나귀턱뼈’는 없습니까?  

▶‘승리의 심벌’이었던 나귀턱뼈를 던졌던 삼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삼손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부르짖을 때마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목말라할 때 ‘엔학고레의 샘’을 통해 
갈증을 면하게 하셨습니다(삿15:19). 

실수하여 넘어졌을 때에도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삿16:22). 
아니,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삿16:28). 
마지막에는 ‘믿음의 반열’에 까지 그를 당당히 세워놓으셨습니다(히11:32).  

믿음의 사람들은 손을 펴는 사람입니다. 나귀턱뼈를 던지는 사람입니다.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던지십시오. 
과거의 승리에 안주하지 말고, 늘 새로운 도전과 승리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출처 :  http://blog.naver.com/kaikk/70024076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