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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 대신 조금씩만 더 받기

LNCK 2023. 2. 1. 21:17

성령! 충만 대신 조금씩만 더 받기 - YouTube

 

◈성령! 충만 대신, 조금씩만 더 받기     왕하4:1~7     2016.09.20.녹취

※본문에 대한 새로운 성경해석이요, 새 관점인데, 
한 번 깊이 생각하며 분별해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도입            

열왕기하 4:1~7절 까지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선지자 생도의 아내에게 가서, 
기름 그릇을 빌리라고 해서, 그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워주는 본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충만 - 이게 왜 그렇게 안 될까요?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제 웬만한 분이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으면서 믿는 분이라면 
성령 충만을 구해 보지 않은 분은 없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근데 제 자신도, 정말 성령충만을, 너무 너무 강렬하게 
열심히 오랫동안 반복해서 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그냥 요모양입니다. 
그렇게 성령충만한 모습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제 쯤이면.. 너무너무 오랜 기간을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를 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에서 보여지는 대로 스데반의 순교 현장이라든지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장에서와 같은 성령충만이 도무지 경험이 안 되니까 
이제 좀 한번 질문을 좀 해 봐도 될 것 같아요. 

왜 성령충만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나 자신이 부족한 것이 이유일까?'

나 자신이 부족한 것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앞에서 진심으로 말씀드려서 
제 자신이 스스로 깨닫는 거예요. 말로 다 할 수가 없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각자 자신이 부족해서..

과거와 같은 그런 성령충만을 못 받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충만 받은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그 성령충만을 받을 당시에, 
오늘날 우리들보다, 더 월등하고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받았고, 우리는 못 받고 있는 것일까요?

2천년 전에 그들은 10일간이나 간절히 성령충만을 간절히 원해서.. 받았고,
오늘은 목사님들이나 교인들이 그들처럼 간절히 구하지 않아서.. 못 받는가요?

베드로의 사도된 모습을 보면, 
베드로가 훌륭해서 성령충만을 받은 게 아니라 

성령충만 받고 나서.. 비로소 사도다운 모습이 나타난 겁니다. 
그 전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3년 공생애 동안 사도 베드로는, 
우리처럼 신학교에서 배운 게 아니라, 예수님께 직접 3년을 배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적인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야심이 가득찬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니까, 도망가고 배신하고 저주까지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그를 먼저 찾아 오셔서 
그를 다시 부르시고, 그들이 한 것은 단지 예수님의 승천을 보았을 뿐입니다. 

근데 오늘날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한 기간과 열심에 비하면, 
이들에게 성령충만은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상대적으로 볼 때 너무 쉽게 성령충만이 일어나고만 거예요

우리는 성령충만이 오래 걸리고 
그나마 오래 걸렸는데 그(행2장) 정도의 성령충만이 나타나지도 않는 겁니다. 

(오늘날 사도행전 같은 성령충만이 나타나도 그렇게 길게 지속되지는 않죠.

2~3년 지나면 다 서서히 소멸되고 맙니다. 혹시 나타나더라도 말이죠.)

 

현재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얘기 하지만 
어차피 오순절 이전에 베드로처럼, 다 모자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칩시다. 

근데 오순절 이전에 모자라는 베드로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여 있었던 것처럼 

지금 21세기에 문제가 많은 교회에도 성령충만을 허락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신다고.. 그게 큰 하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것 같아요)

뭐 교회의 문제 때문에 세미나 하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누구 때문이다' 이럴 거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예수님이, 행2장에 부어주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강도로, 성령충만을 주시면 
솔직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지 않겠습니까?

(가끔 보면, 정말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20일~40일 금식기도 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런데도 쉽게 못 받는 것 같아요.
받기는 받아도.. 행2장의 사도들처럼은 못 받는 것 같아요..)

성령 충만 받게 되면, 나만 좋습니까? 
내 이웃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성령 충만 받으면, 그럼 하나님은 안 좋으십니까? 
이렇게 모두가 다 윈윈하고, 모두에게 좋은데 

하나님이 성령충만을 주시기를, 이렇게까지 인색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오순절에서와 같은 성령충만의 재현 횟수는 
다다익선,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런 말씀을 전하고/ 듣고 할 수도 없으니까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충만하지는 않은 거예요. 
충만하게 해 주시면 좋을 텐데... 그럼 그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뒤에 나오지만,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보기 원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십자가 지고 견디며 살기를 원하세요.

이게 성령충만의 또 다른 측면이죠.

사도행전의 성령충만과 바울서신서의 성령충만이 이렇게 약간 다르죠.

바울서신, 요한서신서의 성령충만은, 능력충만이 아니라, 인격충만이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호와 경외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들에게 성령충만이 
스데반 집사님이나 베드로 사도에게 임한 것 같이 
그렇게 화끈하게 임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여호와 경외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본문이에요. 

엘리사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의 선지생도가 일찍 죽었습니다. 
그에게 가정이 있었는데, 아내는 과부가 되었고 
그 과부는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너무 가난한 거예요. 

거기에다 빚이 있었는데, 요즘 식으로 말하면 생계형 부채겠지요. 
먹고 살자니 빚을 낸 거예요. 

옛날에 과부는 직업을 갖고 경제활동을 할 사회적 장치가 없었어요.
그러니 뭐 생계절벽 이죠. 이렇게 가난했는데 

과부가 나선 걸 보면, 아마 두 아들도 아직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자기 직업을 가질 만한 처지가 못 되었나 봅니다.

과부는 엘리사에게 와서, 자기 형편을 얘기하면서 
'빚을 갚지 못 해서 두 아들이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남편이 여호와를 경외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대책을 좀 세워 주소서!' 

▲그러자 엘리사는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왕하4:3~4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을 좀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설교집들을 보면, 

'엘리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보이기에 앞서서 
여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그의 믿음의 분량을 시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이 그릇을 많이 빌려 오면.. 믿음이 큰 것이고 
그릇을 적게 빌려 오면.. 믿음이 작은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 왔지요.

그러면 이게 여인의 믿음을 시험 하는 거라는 
엘리사가 그저 '그릇을 준비 해라, 그리고 기름을 부어라' 
이렇게 하면 얘기하면 되지, 왜 굳이 정답까지 줍니까? 

정답이 뭐에요? 
엘리사는 '이웃들에게 까지 가서' 그릇을 빌려 오라고 했어요. :3

이게 만약 시험이라면, 엘리사가 정답까지 가르쳐 줄 필요가 없었지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생각해 보면, 엘리사가 '그 남은 기름 한 병을 갖고 부으면 
기름이 계속 찰 것이다..' 라는 말을 했을 때 

보통 아낙네의 심정으로, 집에 있는 그릇을 다 모아오는 게 정상이지요. 
이게 믿음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리고 엘리사가 말 안 했는데, 여인이 기름을 많이 받을 목적으로 
이웃에게 달려가서 그릇을 많이 빌려갖고 오는 것 - 이게 큰 믿음입니까?

혹시 욕심 아닌가요? (엘리사가 '이웃에게 가라'고 말했으니, 욕심은 아니죠)
만약 엘리사가 그런 말도 안 했는데, 여인이 그랬다면
그건 욕심이 머리꼭대기까지 차오른 것이지, 이게 믿음이 아니에요. 

그냥 자기 집에 있는 그릇들에만 기름이 가득 차는게.. 믿음이고
그때 '감사합니다!' 하는게 믿음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핵심은 뭐냐면 '여호와의 경외' 입니다.

본문이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이 과부가 엘리사를 만난 이후에 
그릇을 빌려오는 과정에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엘리사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의 과부의 삶의 여정이 
이미 믿음의 여정이었다는 겁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정이었다는 거죠.

'여호와 경외'가 뭐죠?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마음이죠. 
'하나님이 나를 때리실까봐 두려워합니까?' 

'경외' 라는 건 뭐냐? 
내게 없으면 제일 절망스럽고, 제일 무서운 것, 제일 두려운 것, 
내게 없으면 제일 부담스럽고 두려울 것 ... 이게 바로 경외 입니다.

다른 것 다 없어도, 그것 하나만 있으면 숨통이 열리고 살 수 있을 만한 것, 
그게 바로 '경외'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얘기 합니까? 
신명기 6장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게 경외하는 겁니다. 

여호와께 마음드리고, 뜻 드리고, 힘 드리고 나니까 
그 외 다른 것들에는 줄 마음이 없이, 뜻을 발휘할래도 뜻을 발휘할 수 없고 
힘을 내려고 해도, 힘을 낼 수가 없는 상태가 '경외' 라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박국 선지자가 뭐라고 얘기 합니까?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다 없네요. 너무 많이 없네요.

근데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에게는 여호와 한 분만 계십니다. 
근데 그게 다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 삶이.

근데 하박국은, 그게 다 없는데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 없을까 봐 (하나님의 임재가 거두어질까봐) 두려워해요
이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어떤 의미를 뜻하냐면 
'남편 선지자 생도가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아내가 얘기하는 겁니다.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1

일찍 죽은 자기 남편이 .. 돈도 제대로 못 벌었나봐요. 
돈이나 잘 벌면, 좀 남편이 우러러 보이기도 하지만 
돈도 못 벌다가 빚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니 과부의 힘으로 빚을 갚을 수 없으니까 
두 아들도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잖아요. :1

근데 이 과부는, 일찍 죽은 남편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것은 
그 당시에 북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편만해 있었어요.

바알숭배는 '돈을 경외하는 거에요. 돈 없으면 죽는 줄 아는 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돈돈 노래를 부르고 살 때 

일찍 죽은 남편 선지자는, 하박국처럼 여호와를 노래 부르고 살다가 죽었어요. 

아마 이렇게 얘기했을 거예요,

'여보, 돈 없어서 미안하오. 하지만 우리에겐 하나님이 있잖아?

(이 믿음이 성령충만, 성령충만의 측면이 다른 거죠. 이때 임재와 권세가 있죠!)
다른 사람들이 고기 먹을 때, 우리는 죽 먹더라도 
고기 없는 것 때문에 두려워 하면 되겠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없는 게 더 두려운 일이야!' 

그 말을 아내가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맞아요, 여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자! 
인생은 어차피 여호와 하나님으로 사는 거지, 돈으로 사는 게 아니지!'

그렇게 살다가, 두 아들이 종으로 끌려가는 극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이것도 대단한 일이에요. 왜 대단하냐? 

이 정도 상황이 됐으면, 자기 두 아들이 종으로 끌려가는 상황이 되면,
엄마 마음에 '아, 정말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나 한 걸까?
아니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고 살았으면 
이제는 두 아들과 함께 사는 생활비 정도 만큼이라도 
허락을 해 주셔야 되지 않겠느냐? 
여호와 신앙은 다 거짓말이 아닐까?' (잘 믿다가 중병에 걸려도 비슷한 상황이죠)

'모든 사람들이 바알을 찾으면서 돈 돈 하고 있는데 
저들의 삶의 방식이 맞았던 게지... 내가 이거 완전 실패한 게 아닐까?
지금 내가 쪽박 차게 되었고, 아들도 종으로 뺏기게 될 상황이 됐으니
이게 뭐 여호와 신앙이 밥 먹여 주나?'

어쩌면 이런 길로 빠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근데 여인은, 여호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온 거죠.
이게 대단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찾아와 봤자지, 엘리사도 완전히 거지 비슷한데요...
이게 여호와 경외 신앙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 경외 신앙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하나는 '생각적 믿음'이고, 또 하나는 '체감적 믿음' 입니다. 

여호와 경외 신앙이란.. '하나님이 유일한 내 기쁨의 근원이시다. 
나는 하나님이 제일 좋다. 
하나님이 없으면, 내게 다른 것이 다 있어도 아무 소용 없다' 하는 믿음이죠.

'여호와가 내 목자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신앙입니다. 시23장

근데 이렇게 믿는다고 해서, 즉 '생각적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그 하나님이 진짜로 내게 그렇게 좋게 느껴지고 체감이 되어서 
그렇게 진짜 체감이 된다면... 

내가 찬 물에 손을 집어넣으면, 손이 찬 기를 느끼는 것처럼 
내 생각과 믿음대로 '하나님이 진짜 그렇게 좋은 분으로', 

그대로 체감이 되고 느껴진다면... 즉 '체감적 믿음'을 가진다면

문제가 될게 없지요. 
만약 돈이 없어도.. 돈 그까짓 거 뭐 걱정 안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진짜 믿음의 이론으로 볼 때 
주님보다 더 좋은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을 보고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로 좋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 깜빡하고 까마득하게 망각해 버리잖아요. 

하나님이 진짜 그렇게 좋은 분인데 
그 좋은 분이 (변화산처럼) 내게 체감만 된다 그러면 
내가 못 이길 게 뭐 있겠어요? 없죠. 

하나님 경외 신앙은 이렇게 
'나는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 그분이 안 계시면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라고 하는 <생각적 믿음>이 있고, 

그 생각적 믿음이 <체감적 믿음>까지 가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 경외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의 말대로 
'무화과 나무에서 소출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다!'
<체감 신앙>이면, 이게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런데 문제는, 이 체감의 정도가 가지각색 이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현장에서 
이건 뭐 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돌에 맞아 죽는데 억울한 게 맞거든요. 

그런데도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을 체감하고 주님을 체감 합니다. 
하늘을 체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오순절 성령충만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다
부자로 산 사람이 없어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식으로 형통한 삶을 산 사람이 없다는 얘기예요. 

근데 그들이 '다 기뻐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 경외 신앙이라는 거죠.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해 봅니다. 
'성령충만이 가져다주는 <하나님 체감> 
이것은 내가 무슨 갈등을 겪거나, 
내가 분투를 하거나 
'내 생각과 믿음속에 하나님이 최고다' 라고 하는 믿음,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걸 믿고 
내게 하나님 한 분만 계시면, 나는 완전히 만족할 수 있다는 걸 믿어요. 

근데 그게 <생각적 믿음> 차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죠.  *성령충만 아님
<체감적 믿음>이 안 되는 게.. 우리 현실이에요.   *체감적 믿음이 성령충만

근데 내가 성령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갈등을 겪을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성령충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아내/남편보다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거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병들어도 웃고 살 수 있어요. 

사자 밥이 될 수도 있고, 순교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을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이 성령충만에는 어떤 점이 있을까요? 
하나님 경외에 있어서, 마음에 갈등이 거의 다 상실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경외함에 있어서! 

그러니까 성령충만이 오면!
저절로 자동적으로 다 되는 거예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화로운 모습을 볼 때 
그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걸 다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주님을 두려워했다 그랬어요. 이게 경외 입니다.

지금 이 예수님의 영화로운 모습을, 내가 잃어버리면 난 죽는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모습을 직접 보니까요! 

여기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무슨 갈등이 있지 않고, 
그 갈등을 넘어서려는 분투나 마음의 갈등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계시록 3장에서 빌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계3:8

베드로 사도가 성령충만을 받고 두려워 떨다가 문을 박차고 나갔을 때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행2장 상황
성령에 의해서 장악된 것이죠.

빌라델피아 교회에는 작은 능력을 갖고 있었어요. 
오순절 성령충만 같이 큰 능력을 받지는 못 했어요.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로마의 핍박에 의해서 
교회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성령충만이 안 되니까.. 
생각은 하나님이 제일 좋다는 '생각의 믿음'이 있지만 
자기 마음은 벌벌 떨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그렇게 노래 부르기 전에 뭐라 그랬어요? 
'내가 뼈가 떨린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합3:16

그러다가 갑자기 전환해서, '무화과 열매가 없어도' 노래가 나오거든요. 3:17~

그런 것처럼 빌라델피아 교회가 무서워 죽을 정도가 되었어요. 
근데 분명히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최고예요. '생각의 믿음'이죠.
'믿음의 생각' 과 '믿음의 체감'은.. 많이 다릅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매웁니까? 
'그래, 무서워 죽겠지만 죽으면 죽자!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로마군인들에게 잡혀서 죽게 하신다면 

최고로 좋으시고, 내가 최고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니까 
죽는 게 최고가 아니겠느냐?' 

그래서 무섭고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현실 상황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에 당신의 크신 능력을 주시지 않았던 것처럼 보여요. 
행2장의 사도들에게 처럼,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성령충만을 주시지 않았죠.
(사도행전의 성령충만은 표적 능력차원의 충만,

이후 성령충만은 믿음, 인격차원의 충만으로 '주로' 그렇게 나타났죠)

   

그들은 '하나님은 내 인생에 최고시다'라는 생각만 갖고요.
그렇지만 현실은 여전히 암울한 상태라서 두려워 떨고 있었어요.

근데 그 '생각의 믿음'을 갖고, 죽음으로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주님이 보시는 거예요. 
아버지의 기쁨을 만들어 드릴 기회를, 우리들에게 제공하시기 위해서! 

어차피 우리가 천국에 가면 영원토록 성령충만 안에서 살게 돼요. 
성령충만이 뭡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가지고 
주님이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계시고 
내가 완전히 하나님 아버지안에 들어가 있고!

그런데 이 교통이 성령충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성령충만을, 이 땅에서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유보시키고 계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경외의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정말 한 인격적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최고로 좋다'는 믿음 조차도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저는 실제로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성령님에 더해서, 충만까지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성령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왜냐?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몸이 아플 때,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아내에게 문제가 생기고, 집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약하고, 악해서.. '하나님 한 분만 내게 계시면 기쁘다'는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보다는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간구쪽으로 내 마음이 흘러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충만해서 저절로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것처럼 딛고 올라서는 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말살될 수 있기 때문에..' 

근데 성령충만을 사도들에게 왜 주셨나요?
그분들은 기독교 초창기에, 기능적으로 온 천지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게 다 암흑 세상인데 

그 암흑의 세상을 밖으로 뚫고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 
기능적, 사명적 필요에 의해서 
성경이 그렇게 빨리 충만하게 임했지만 

지금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죽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더욱더 인격적인 여호와 경외가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이 있는 거예요. 

돈은 없지만, 내가 예수 믿는다고 나를 죽이는 사람은 없잖아요. *중동 제외
그렇게 여호와 경외를 인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도 있는데,
 주님이 유보시키는 거예요. 아까워서가 아니라! 

성령충만을 주시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예요. 
이미 또 주셨고요! 

그 주신 (성령충만의) 기본 위에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 드리면 좋겠다' 
라는 주님의 바램을 받아들여서 

그러나 내가 너무 약하니까, 이대로 놔두시면 시험에 들지도 모르니까 
이 시험을 이겨서, 인격적인 분투를 통하여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만이라도 

'기본적으로 주신 성령의 내주하심 위에 
성령을 조금만 더 주시옵소서!' 

이게 하나님 경외 신앙입니다. 

이게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겁니다.

성령충만을 이렇게까지 안 주시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잊어버리시고 
'어떻게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주님은 빌라델피아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충만, 인격충만 차원의 성령충만

즉 '하늘에 내 아버지가 계시고, 내 주님이 계시니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내게 이러 이러한 어려움들이 있어도 
하박국선지자처럼, 주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는 신앙을 체감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호와 경외'의 삶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최고다' 라는, 성령님 때문에 가능한 여러분의 그 믿음 위에 

주님이 믿음을 조금 더 주셔서 
삶 속에 닥치는 어려움을 감내하고 이겨 나가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삶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주어지는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할 수 있을 만큼만, 성령충만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런 우리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에 
항상 기쁨이 넘쳐 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